그 깊고 어두운오랜 시간 동안거듭거듭 자기정체의허물을 벗고대지가 가장 뜨거운 때지상에 나와목마른 한철을이렇게 울고 있다태어나면서부터울어야 하는 숙명이라면무슨 섭생조차 즐길까누군가의 복받친 가슴에맺힌 이슬몇 방울이면 그만매미는 태어나기 전 3년 내지 7년을 땅 속에서 유충으로 살다가 지상에 나와서 한 달 가량 살다가 죽는다. 짧게 살다가지만 그들은 밤낮 최선을 다해 울다 가는 것이다. 몸 속에 울음판이 있어서 사는 시간동안 울다가 매미는 죽는다. 시인은 매미에게 굴레 씌워진 숙명같은 것을 읽어내고 있다. 우리네 한 생이 각자에게 얽혀진 어떤 숙명의 굴레에 매여 살아가고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시인
2021-07-29
신중 누이 보아지장지장 비로자나 죄 몰라도내 몸 한 법당 되어절집 되어품어 재우리니업어 재우리니팔공산 백홍암다듬돌 안고 조는 괭이와옴실봉실봄맞이꽃봄이 가만히 번져오는 산중 암자의 풍경이 맑고 환하다. 이승의 삶이 이별과 떠돎과 대립과 상처, 죽음의 연속이라는 시인 내면의 전제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그런 불화와 부조화의 삶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산사에 찾아오는 봄처럼 자연의 맑은 소리와 깨끗한 햇살이라는 신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7-28
내가 자는 작은방 머리맡에는 오동나무 장롱이 하나 있다. 장롱을 만든 나무는 할머니의 태를 묻은 나무로 할머니의 할머니가 뒤뜰에 심은 나무였다. 베어져서 오랫동안 그늘에 마른 뒤 대패에 몸을 맡겨 뒤틀리고 마른 자리 다 깎여나간 채, 결 고운 오동나무 장롱이 되어 할머니가 시집올 때 우리 집에 실려왔다. 이불장과 큰 서랍 두 개 작은 서랍이 세 개인, 아버지보다도 나이를 더 먹은 장롱은 아직도 내 머리맡에 서 있는 것이다.언젠가 내가 아무도 몰래 장롱 속으로 기어들어가 긴 꿈을 꾸며 잠이 들어버리는 통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기도 했다. 다음날 꿈 이야기를 하자 할머니는 말없이 웃으셨다.혼자 있을 때 장롱을 뒤지며 노는 내게 장롱은 오래된 향기와 빛으로,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늙은 여자들이 이야기를 해준다.자기 집 오래된 오동나무 장롱에 담겨져 있는 얘기를 요곤조곤 들려주는 정겨운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출산과 안방 살림살이에 대한 사연 등 집안 여인네들의 내력이 꼴싹하게 담겨져 있고 훈훈한 가족사에 담겨 흐르는 진한 모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네 인생살이 속에도 누구나 저런 오동나무 장롱 하나쯤은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
2021-07-27
내 감성의 여울목에 푸른 불길로 타는아직 마르지 않은 영혼의 탯줄 같은아득한 경상도 길섶의능금 꽃을 따 문다보현산 산그늘 따라 대추나무 뿌리로 늙은큰댁 골기와 쪽에 그리움만 파랗게 돋고추억은 낙엽을 흩으며빈 가지를 흔든다칼 끝 같은 슬픔이 박혀 더욱 푸른 그 하늘빛금호강 강물로 울던 내 젊은 날 상흔은 지고휘어간 산굽이 아득히 한 생애가 저문다금간 항아리처럼 등이 굽은 내 노모는모진 세월로 퇴행성관절을 앓고바람은 눈발을 날리며갈대처럼 흔들린다시인은 모진 세월을 온몸으로 살아온 어머니가 계신 고향집을 찾아가며 감성의 여울목을 스치는 푸른 시간을 읽고 있음을 본다. 푸른 불길이 타오르던 청춘의 시간들 속, 상흔들을 안고 허망한 세월의 강은 유유히 흐르고 이제는 저물며 오래된 대추나무 뿌리처럼 늙어간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가슴이 아득히 젖어있다. 생을 깊이 성찰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7-26
아침마다 나무숲을세숫물로 떠다 놓고씻어도 씻어봐도씻기지 않는나의 울음잎새에 숨겨둔 가슴햇살들이 보고 있네먼 하늘 날아오르다스치면출렁이는 물결눈매에 담아도 보고날개깃에 담아도 보고이대로 까만 점이나 될 걸돌아와서 또 울고 있네아침마다 숲에 와서 우는 새를 보며 시인은 그 새가 자기와 꼭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의 서러움 혹은 북받치는 울음을 토해내고 싶은 시인과 닮아있는 것이리라. 인생의 힘겨운 길을 걸어가는, 그래서 애환과 서러움이 꽉 찬 시인의 가슴 속을 알아주는 듯이 아침 숲에 새가 우는 것이다. 시인
2021-07-25
바람 자고 간 곳에 하늘 이불 깔려 있다풀들 늦잠을 자고귀먹은 문고리 구부린 채 묵상에 들고쇠스랑은 옛 주인 손길 잊지 못하고호미, 삽. 괭이, 한 촉의 꿈 버리지 못하고 있다여기 건네기 어려운 말이 있고건너기 어려운 강이 흐르고 있다 심심찮게뒷마당 장독대에 옛 주인 체온 스며들고튓마루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씰린다담배 부스러기처럼 옛이야기가 날리고제 그림자에 놀라 달을 보고 짖어대던개의 밥그릇에는 얼지 않은 눈물 고여 있다눈부신 것들은 잠들고빛을 잃은 것들만 남아 빈집을 지킨다새들 그리움의 날개 짓하며 울다 떠나고풀벌레 빈집 막장 그늘에 남아서러움을 뜸질하면내 마음 밑뿌리부터 아파 온다빈 집은 오래된 시간을 붙들고 서 있다, 어쩌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차 있는 것인지 모른다. 살다가 떠난 식솔들의 흔적들, 그들이 체온이며 그들이 말소리며 그림자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조금씩 낡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 빈집에 가득 고여 있는 허허로운 시간들을 읽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
2021-07-22
학습진도 절반도 못 나간 느림보 국어 선생처럼큰일났다 시간 없어서, 시간 없어서이제 그냥 막 읽어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따라 읽거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러는 것처럼넘어가자, 내년에 또 배운다 하는 것처럼늦도록 놀던 바람은 “어서 가세, 심 소저” 그러는 것처럼남은 잎새들 “아이고 아버지” “아이고 청아”그러는 것처럼늦가을의 시간은 매우 황급히 지나간다. 황량함이 깊어지며 찬바람 앞에 선 식물들에게는 다급하기 그지없는 시간이다. 시인은 아버지 심봉사와 화급하게 이별하고 뱃사람들과 떠나가는 심청을 보여주고 있는데, 심청전의 한 대목을 끌어들여 낙엽과 바람이 자아내는 황량한 가을의 시간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7-21
거 왜 있잖아, 앵두의 입술에 닿을 때, 앵두알을 깨물어서 입안에서 환하게 토도독 터져서는 물기 번질 때하루 내내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때,장차 내 인생이나 네 인생에 쉽사리 잘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때앵두를 먹을 때툇마루 끝에 앉아앵두를 먹었지앵두씨를 툿, 툿, 툿, 뱉어가며 먹었지그런데 있잖아, 앵두씨에도 혀가 있다는 말 들어봤나?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혀끝으로 발라 우리가 마당에다 내뱉은 만큼앵두씨가 자기를 밀어올리는 것 봤나?지금 앵두의 혀가날름날름 연초록 바람을 골라 먹고 있다니까!작고 붉은 앵두 알갱이를 입에 넣고 그 달콤하고 새콤한 감미로움을 표현하며 시인은 감미로운 입맞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앵두같은 입술’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하는 이 시에서 시인은 우리네 일생이 아무리 힘들고 맛과 감동이 없는 생일지라도 앵두 한 움큼을 입안에서 녹혀낼 때의 감미로운 순간, 행복한 순간은 반드시 온다는 신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7-20
키 작은 놈들이라 깔보지 마라하늘을 향한 끝도 없는 허영보다흙이 좋아 흙바닥에 주저앉은 모습그러나 겨울을 밀치고 맨 먼저 솟아나는 힘그 힘으로 우리들은 일어서기로 했다버려진 땅 척박한 땅 먼저 골라‘접근하면 쏜다’ 팻말 붙은 철조망아래가마귀떼 몰려드는 쓰레기장 주변에애초부터 이름도 없는 잡풀들 흔들어 깨워온몸 부둥킨 그 힘으로 피어나기로 했다키 작은 놈들끼리 모여흙이 좋아 흙바닥에 사는 놈들낄 모여봄의 꽃밭을 만들기로 했다엄동을 견딘 대지에 나지막하고 납작한 노란 꽃등을 켜는 민들레를 예찬하고 있다. 버려진 땅, 척박한 땅, 철조망 아래 금단의 땅에서도 민들레는 서로의 뿌리를 엉키며 꿋꿋이 잎을 내고 노랗게 꽃을 피워올리는 것이다. 가난과 궁핍의 대물림 아래서도 억척같이 생을 일으켜 세우며 생의 꽃을 피우는 이 땅 민초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예찬하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7-19
트림하는 물줄기 움켜잡은 손아귀들목이 긴 장화가 끌고 가는 궤짝마다첫 새벽 그물에 걸려 온바다가 출렁인다난타의 좌판 위엔 사투리가 퍼덕이고비린 날숨 토해내는 쩍 벌린 아가미들수조 밖 못다 한 흥정은갈매기가 낚아챈다셈법보다 인심이 덤으로 얹히는 곳동여맨 생의 결 퍼렇게 들썩이고한 트럭 파도가 쏟아낸소금기가 눈부시다출렁이는 생의 물결을 바라보는 시인을 본다. 어판장의 새벽은 그야말로 삶의 활력이 넘쳐흐르는 역동의 시간이다. 잡혀온 고기들의 몸부림을 동여맨 생의 결을 퍼렇게 들썩인다고 표현한 시인의 깊은 눈과, 덤으로 나누며 소통하는 따스하고 다감한 손과 마음들을 엿보는 넉넉한 시인의 가슴을, 해를 밀어 올리며 따라온 새벽 바다 푸른 물결을 직시하는 시인의 따스하고 밝은 시선을 본다.시인
2021-07-18
깡통들 빈속에 고함 숨긴다, 반짝이는쇳조각에 부딪히며, 흐린 하늘 빈속에 차고넘치며, 아랫도리 벗겨져 붉게 푸르게 흩어지며불에 그슬려 푸른 여인의입술 타버렸고, 고운 눈 땅속에 처박힌다여인의 눈 밑 상표들도 노랗게 땅에 묻히고그 위 어둠과 비와 햇빛과비닐의 찍긴 팔이 와서 감는다반짝이는 유리 조각들 얼었다가 흐려지는하늘, 치약 껍질이 긋는 허공 가득히빈속 잠재우는 눈도 내리고, 이윽고 오는봄, 풀씨 하나 떠돌다가, 철조망 안쓰레기 하치장에 떨어져 싹을 틔운다허물어진 연탄재 구멍 속으로 하늘 치어다보며그 싹 풀들로 자라나 쇠와 유리 조각과빈 깡통 덮어, 사월이면 풀의 상공에꽃도 피워낸다, 스스로 이룬 풀씨다시 사방에 날리며깡통, 쇳조각, 비닐, 유리조각, 치약껍질 같은 살벌하고 비정한 현대문명의 찌꺼기들의 틈새를 비집고 연약한 풀씨 하나가 떠돌다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내는 것을 포착한 시인은 떠도는 연약한 풀씨를 말하면서 사람을 보고 있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도시 빈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을 위한 극한의 상황들에게 애정어린 시인의 눈길이 가 닿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21-07-15
반 조금 넘게 물을 채운 투명한 컵에한 송이 장미가 꽂혀 있다그 장밋빛 꽃잎은 넉장의 크고 작은 잎과아홉 개의 독오른 가시를 거느리고오디오 세트 위에서 혼자서 붉다저의 목이 길고 가늘다어떤 구도 속에 놓일 때장미는 뿌리가 없어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느낀다내 눈이 그리로 가서 머문다나는 뜯어본다어느 부분이 가장 아름다운가컵인가, 줄기인가, 가시인가,짙은 녹색의 잎인가겹겹이 싸인 붉은 꽃잎인가그 판단은 늘 시간이 하고 있었던 것 같다붉은 빛이 엷게 도는벽지의 연속무늬가 따뜻하게 뻗어나가는 배경으로장미는 홀로 허리의 상처를 견디고 있다시인은 실내의 어떤 구도 몇을 보여주고 있다. 장미가 있는 장면 몇과 함께 놓인 사물과 거기에 가 닿은 시선 혹은 관심을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겹쳐지며 몇 컷의 그림이 생성되는데 거기서 시인은 정물로 남겨놓지 않고 미적 관심과 어울려 장미가 곱게 피어있는 아름다운 실내의 살아있는 그림 하나로 일으켜 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7-14
버릇 없는 봄이 왔다그 봄, 어머니가 죽고 목련이 피었다나는 자꾸 소주병 속을 걸어뿌리 없는 그리움에 닿았다손 내밀면 무수한 빈 손이 잡혔다있지도 않은 애인이 그리웠고깜짝깜짝 비가 내렸다훌훌 담배연기 털어버리며내 쥐빛깔 일기를 펼치면깨알 같은 슬픔이 돌아앉았다내 혼자 걷는 손금을 따라오르지도 못한 지붕엔 무성한 잡풀이 돋고창 밖에 너무 빠른 일몰이 닥쳤다문 닫아걸면 외로운 시간을어느덧 어둠이 먼저 와 잠겼다나는 촛불도 없이 꺼지는 의식을 붙잡고찢어낸 노트 한 귀퉁이편부슬하의 시를 적어보았다어머니는 돌아가시고 고향집은 잡풀만 무성한 폐가가 되어있는 상황 앞에서 시인의 암울한 심사가 그려져 있음을 본다. 상실은 또 다른 상실로 이어지고 그리움은 또 다른 그리움에 가 닿아 있어 이러한 우울한 시를 쓰게 했는지 모른다.시인
2021-07-13
두엄 구뎅이 뚫고 호박넝쿨 몇 수 담벼락 타고 오른다 가쁜 줄타기한다 오뉴월 마른 가뭄 뚫고 따가운 햇볕 뚫고소낙비에 흠씬 몸 적시며 마침내 담벼락 꼭대기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내려다보는 호박넝쿨들 장하구나 노랗게 피워 올리는 호박꽃들 뽀얗게 드러내놓는 젖통들 장하구나젖은 몸 털며 발 아래 시원히 굽어보면 호박넝쿨들 시원하구나 와락, 현기증 밀려오기도 하는구나하지만 여기 담벼락 아래 두엄더미 아래 땅으로만 손 뻗으며 납작 몸 젖히는 놈들도 있구나 아프게 몸 비트는 놈들도 있구나놈들이 피워 올리는 꽃들 참하게 꺼내어놓는 젖통들, 이라고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환하게 빛나지 않으랴시인은 시골 토담집 풍경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오뉴월 가뭄과 땡볕을 뚫고 싱싱하고 생명력 넘치는 호박넝쿨을 예찬하고 있는 것이다. 별로 고운 자태도 아니고 향기도 없는 호박꽃에 관능적 표현으로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7-12
베개를 버릴 수 없는 한잠을 팽개칠 수 없는 한은물결 달빛을 타고흔들리며 오는귀뚜라미 소리에서 떠날 수 없고나풀잎은 말라서 야위어가고나뭇잎 또한 놀빛을 넘어가고땅에 비치는 것이 너무 많아세상은 슬픔만으로 기울어질 때하늘이 안 자는 잠을 훔쳐 간내 머리카락을한 올 두 올 세게 하고나시인은 모든 인생이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슬픔에 대해 토로하고 있음을 본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같은 시에서처럼 남도의 눈물어린 정서를 소박하고 정겨운 필치로 서정시를 써온 시인은 풀잎은 마르고 나무 이파리들이 물들어가는 밤 잠 못 들고 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7-11
손님이 없는 겨울 민박집밤새 화투를 치는 일행의 방을 빠져 나와소피보러 가서 문득 다시 만나는 운문사엎드린젊은 여승의 굽은 등에흐르지 못하고 맺힌 적막 같이재래식 변소 삼십 촉 전등불빛이 어둠 속에 고이는데홀로 남은 주인 할머니 기침 소리를 듣는다달빛이 허물어진 기와를 타고 내려와감나무 완강한 자세 속에서판독되지 않는 몇 개의 낡은 욕망을 어루만지고 나면다른 세계로 풍경 소리 자꾸만 불리어 가는빈 마당술이 취해필름이 끊겼다 이어졌다 하면서 남포동 골목길가로등에 등 기대고 만나던 적막이여그대 이 빈 마당에 새로 낯선 겨울로 섰다가어느 인적이 끊긴 골목길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또 오래도록 적막하기를겨울밤 비구니들의 수도 도량인 운문사의 적막함을 표현하고 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남포동 골목길의 가로등에 등대고 만나던 적막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토로하며 운문사의 절대 적막의 경지에 깊이 빠져든 시인을 본다. 시인
2021-07-08
이 칠흑의 밤빛나는 것이 별뿐이랴폭풍우 휩쓸고 간 과수밭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우리 걸어가야 할 이 땅이 서러워서살아남은 열매들은더 시퍼렇게 눈뜨는 것이다나무는 우지끈 언덕은 큰물 져서엉망진창 막막 가슴콸콸콸 흙탕물 계류로 흘러서어쩔 것이냐 또 어쩔 것이냐고울컥울컥 치밀던 설움마저 거덜나차마 잠 못 들어 서성대는이 폐허 나무 아래풀여치도 예전 마음 넘쳐서는쯧쯧쯔쯔 밤새도록 자지러지는 것이다비바람 쥐고 나서야 더 굵어진다고시퍼렇게 눈뜨는저 순명의 기운이차랑차랑 뿜어 내는 여명 속으로숩자지처럼 얇은 하늘사방 정정(淨淨) 열리고 있었다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후 엉망진창이 된 과수원의 모습을 세밀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잔혹하다고 할만큼 쑥대밭을 만들고 지나간 폭풍우 속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망연자실한 심정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자연의 폭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자연이며 그런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서 스스로 복원되어가는 것 또한 자연의 힘인 것이다. 시인의 이런 자연의 운행원리를 순명(順命)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7-07
산은 아무에게나문을 열지 않나 보네열기는커녕쓱 한 번 쳐다보고코를 쥐고 돌아서는 걸 보니나나 내가 데리고 간 세상에서도야지똥 냄새라도맡는 모양이네수도는 고사하고입산부터 이 꼴이어서야어쩌나 산 안창으로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하고산문 밖에 주저앉아지저분한 것들을 닦아 내자니도로 내려가서너덜거리는 것들끼리그냥 살까 하는 생각도 나고꼭 산에 들어야 맛인가하는 생각도 나면서저무는 날에 가뭇없이가려지고 있는데내 짧은 두 다리나오를수록 멀어지는 산길이무슨 상관이냐는 듯산새 몇 마리산문을 훌쩍 뛰어달빛 쪽으로 날아가네수월하게 자기를 열어 세상의 때 묻은 인생들을 받아주지 않는 산, 시인은 산에 들지(入山) 못하니 어찌 수도(修道)를 하겠는가라 말하며 세속적인 여항(閭巷)에 파묻혀 살아갈까라는 생각도 하며 하산하고 만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변함없는 대자연 앞에서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7-06
구부린 등은 종이었다 해질녘,구겨진 빛을 펼치는종소리를 듣는다, 한 가닥햇빛이 소중해지는 진펄밭 썰물 때면패인 상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호밋날로 캐내는, 한 생애 쪼그린 아낙의 등 뒤로끄덕이며 끄덕이며 나귀처럼고개 숙이는 햇살어둠이 찾아오면, 소리없이 밀물에 잠기는 종소리썰물 따라 나가 개펄을 뒤적여 조개를 캐는 아낙네는 시인의 말처럼 호미로 자신의 생을 캐고 있는 것이리라. 왜 시인은 그녀의 굽은 등을 종이라 표현하고 있을까. 고단하고 힘겨운 어촌의 삶이지만 담담하고 묵묵히 구겨진 빛이지만 빛을 캐고 있는 여인, 그 빛이 작은 희망의 종소리로 개펄 위로 밀물 위로 번져간다는 시인의 발상이 이채롭기 그지없다. 시인
2021-07-05
모든 아름다움 속에 숨어 있는 슬픔슬픔 깃들지 않은 아름다움의 공허함그걸 깨우친 건 그의 노래들결코 내 것이고 싶지 않았던 스무 살숨죽여 부르는 노래마다 묻어나는칼날 같은 적의를 허공에 휘두를 때서투른 분노로 베어지는 건 없다고말없이 고개를 짚어오던 것도-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가만이 눈감고 귀 기울이면까마득히 먼 데서 눈 쌓이는 소리(….)독풀처럼 자라는 어둠 한가운데서꿈꾸었네 세상 모든 눈물과 선혈온전하게 노래할 수 있게 되기를접고 접어 아주 작아져버린 슬픔을보일 듯 안 보이게 영혼에 숨기고시냇물보다 낮게미풍보다 여리게슬픔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다스려 가만가만 눈뜨게 하는노래의 힘을 가지리라고그의 노래는 분노와 적의를 허공에 쏟아내며 자기치유에 이르는 도구일지 모른다. 뿐만아니라 격렬한 분노와 적의를 아름다움과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내재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노래는 세상에서 상하고 상처받은 자아를 치유해주고 다시 일어서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