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일찍이 황금빛 가을을 꿈꾸었으니느닷없이 다가올 저녁은 준비하지 못했다그 오랜 망설임, 글썽임 끝에나의 여름은 새들의 날개짓처럼 희미해지고사는 일 어김없이가 가을은 와지금은 지상의 단 한 번뿐인 여름을세끼니 밥과 바꾼등 굽은 사내들 어디론가 떠나는 때나는 거기 어디쯤 뒤돌아 서서 강의 등에또박또박 새겨 넣는 침묵의 말잘 있거라, 내 여름의 강내게 허락된 여름은 그토록 긴 아픔이었구나아니, 가슴 뛰는 은밀한 기쁨이었구나시인이 말하는 여름의 강은 끝없이 출렁이며 탕탕히 흘렀던 청춘의 시간들을 의미한다. 그 흐름 속에는 가슴 뛰는 은밀한 기쁨도 있었고 쓰라린 아픔도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기쁨이나 아픔 혹은 부푼 꿈과 좌절의 씁쓸한 패배감마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며 가만히 반추하고 있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21-06-03
마흔을 겨우 넘자 글자들이 흔들리더니자꾸 눈을 닦아도 달아나는 낱자들생각은 산 너머 하늘노을처럼 번진다다시 고개를 돌려 돋보기로 낱자를 잡다눈 감고 그저 감감히 눈 감고 볼 수밖에달아나 벽면에 박힌그 낱자를 찾는다눈에 안 뵈던 것들 감으니 더 잘 보인다낱낱이 가슴에 쏠려 이슬 빛을 단것들그 모두 용서도 하고실타래를 풀어 준다중견 시조시인의 생을 관조하는 깊은 목소리를 듣는다. 젊은 날 그리 잘 보이던 글자들이 마흔 넘기며 조금씩 흐리게 혹은 흔들리며 보이기 시작한 것인데 눈을 감으니 오히려 잘 보인다고 고백하고 있다. 마음의 눈으로 읽기 때문이리라. 마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가팔랐던 마음이 평평해지고 꼬였던 관계들이 풀어지고 용서하게 된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시인의 심안을 본다. 시인
2021-06-02
갈매기 날개짓 따라파랑(波浪)으로 손짓하는짙푸른 함성인 듯근육이 이는 물살벅차게용솟음치는 꿈깨어있는 자의 삶자정(自淨)의 먹(墨)을 갈아물의 배설물을 삭히며트인 가슴으로넘실대는 사유의 자락수평선가뭇한 언저리에각인되는 올곧음늘 푸르게 눈 뜨고 깨어 있어 어떤 예감으로 우리 곁에 일렁이는 바다, 시인은 밤낮 강한 생명력으로 출렁이는 물결에서 용솟음치는 꿈을 발견한다, 그리고 트인 가슴으로 넘실대는 사유의 너울을 물결의 푸른 자락에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변두리에서 왜곡되고 기울어진 불구의 세상을 향해 준엄하게 푸른 죽비를 드는 깨어있는 바다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21-06-01
전원을 끄고코드란 코드를 벽에서 뽑는다내 속의 이명을 키운다은폐된 소리를 도굴한다 부장품처럼 견딘 소리뼈, 내 몸을 찌르는 귀무덤 도굴한다 무심한 역사의 등뒤에서 자란 이명들 세월을 물레질하는 달팽이관 없는 귀, 임란 중에 끌려간 도공들 한숨을 판다 연처럼 날아오르는 염불, 삼중 스님 독경이 하늘을 판다 발굴된 소리는 연줄에 먹인 사금파리가 된다 시간의 작두날을 타고 춤추는 살풀이 굿판에서 천지신명 귀 잘린 원혼들, 소리가 세상을 쓰윽 벤다 닳지 못한 생살의 울음잡기를 한다한 동맥 줄기로 흐르기 위한 끝없는 망치질 소리, 움츠려드는 나를 두드린다(….)자기 내면에 쌓인 억눌림, 혹은 남을 억누른 정황을 하나씩 풀어헤쳐내어 그 어떤 억눌림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서기를 염원하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통해 내적 치유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아슬한 경계에서 타인에게 해를 받거나 타인을 힘들게 하는 경직되고 유폐된 자아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으려는 시인의 몸짓을 본다. 시인
2021-05-31
아현시장에 오면 즐겁다가게와 가게 사이 둘러처진 비닐에이따금 머리카락이 스치는 기분도 기분이지만싸구려로 쌓아놓은 스타킹 내복 양말어물전 앞에서 세상을 향해 배꼽 내놓은고등어 꽁치 생태그 옆의 도미 조기 맛 농어 임연수어계통없는 집합이 즐겁고평생 고추 빻는 일만 할 것 같은 방앗간기계 사이 낀 고춧가루 털어내는막대기 소리도 즐겁다시인은 서울의 작은 재래시장인 아현시장의 활기찬 풍경을 펼쳐보이고 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여느 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시인의 시선은 이러한 평범한 시장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물건과 일들에서 묻어나는 푸근한 인간미와 사람사는 세상의 넉넉함, 흥겨움에 가 닿아있는 것이다. 시인
2021-05-30
울어도제 눈물을 보지 못하는사람의 어두운 몸을 본다나는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햇빛 받으며 피어나는 나팔꽃햇빛 가득한 그 꽃잎한 조각이 되어서라도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바람 속의 별빛혹은 달빛이 되어서라도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아니, 그도 저도 안 되면햇빛 벌레가 되어서라도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울어도제 눈물을 보지 못하는사람의 어두운 몸에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내 몸을 구부려 따뜻하게 감싸면서천년을 더 그렇게어쩌면 우리는 시인의 말처럼 울어도 제 눈물을 보지 못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우는 나를 볼 수 있는 것은 타인이다. 시인은 타인을 위해, 타인의 삶에 환하게 불을 켜주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다. 남을 위해 끝없이 베풀며 살겠다는 인생관이 묻어난다. 시인의 이타적 생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시다. 시인
2021-05-27
저 한없는 거부의 유연함갇혀 있기 싫다고 끊임없이유리벽을 들이받으니워낙 부드러워서 자해하지도 못하는 저물렁물렁한 것이 어찌 정력제가 된단 말이오의문을 품으면서도나는 추어탕을 시켰다온 마을 미꾸라지가 집단으로잡혀왔을까서로 몸을 비비기를한시도 쉬지 않는 모습들여다보고 있으니 자꾸 눈물이 난다우리도 언젠가 저렇게 집단으로 발가벗긴 채어항 속에 갇힌 적 있었던가가루가 되어서도매콤한 국물이 되어서도비폭력의 저항을 굳게 믿은 적 있었던가무저항의 저항이야말로진짜 힘이라고 목청껏 외친 적 있었던가한 그릇 추어탕을 먹으며 시인은 수조 속에서 몸을 비비며 꿈틀거리는 미꾸라지를 보고 있다. 시인은 미꾸라지들이 서로 엉키며 움직이는 것이 쉼 없는 교감과 연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 속에 실재하는 갇힘과 비폭력 저항의 시간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리라. 미꾸라지처럼 현실에 순응해가는 자신을 씁쓸하게 들여다보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21-05-26
내가 손 놓고 있는 동안저 들에 낟알 여무는 소리 들리고내 입엔 밥이 들어오고하루해는 산마루를 넘는다내가 넋 놓고 앉은 동안에도누구는 나를 선생이라 불러주고가난한 식솔들은 저마다 불을 밝혀서로의 체온을 나눠 갖는다사람아가을비에 젖는작고 여린 것들아나 그냥 이렇게 앉아 있는데이 시처럼 시인 고증식은 착하고 선한 사람이다. 주변의 자연도 사람도 그의 겸허한 삶의 모습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모두가 항상 고마운 것으로 다가온다고 고백하는 것은 시인의 심성이 한없이 착하고 너그러운 것이기 때문이리라. 가을비에 젖는 작고 여린 것들에 다가가는 따스하고 애정 어린 시인의 눈빛을 본다. 시인
2021-05-25
웃음기 없는 눈빛을 맞추며속내를 찾아들면, 반갑쑤다는 네 생각이내 마음 읽어내리는 동안잠시 부끄러움이 솟구쳐올라담벼락에 박혀 빛나는 사금파리로 옮긴다몸속 꼼지락거리는 작은 벌레코딱지만한 경계 안으로 유리조각 소꿉들을 주워노는 나를 바라본다여자아이 등에 업힌 베개가 낮잠을 자고야초들은 뜯기어 반찬이 되고 밥이 되고나는 땔감을 쌓으며 여린 아내를 윽박지르고장인은 검은 썬글라스에 팔뚝 굵은 운전수새댁 어미는 초록 치마에 늘 꽃이 핀 저고리다알고 보면 소는 말없는 이야기꾼내 몸 전체를 둘러보곤염불을 하다가도 가끔 하늘 쳐다보며혼자서 씩 웃곤하는어린 시절 봄날의 평화로운 풍경을 펼치고 있다. 온통 빠져들었던 소꿉놀이, 그 재미난 유년의 시간을 가만히 건너다보던 누렁소의 눈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현실의 가파르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시인은 이런 평화경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느리지만 정겹고 따스한 유년의 시간들을 옹호하고 그리워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5-24
옷을 잔뜩 껴입고 사는 여자가모임에 나오곤 했었지어찌나 많은 옷을 껴입고 사는지비단을 걸치고도 추워하는 조그마한 중국여자 같았지옷을 잔뜩 껴입고 사는 그 여자의 남편도모임에 가끔 나오곤 했었지남자도 어찌나 많은 옷을 껴입고 사는지나온 배가 더 튀어나온 뚱뚱한 중국남자 같았지그 두 사람 물에서 건지던 날옷 벗기느라 한참 걸렸다네이 시는 여러 껍질을 벗겨내는 양파를 들어 인생의 삶과 죽음을 읽어내고 있다. 삶이란 수많은 옷을 껴입는 것이며, 죽음이란 양파를 벗기듯 그 껴입은 옷을 하나씩 벗어버리는 것이다. 소유의 욕망으로 켜켜이 껴입어 무거운 우리네 한 생도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 거추장스러움을 벗고 빈 손 빈 몸으로 떠나는 것은 아닐까. 생을 관조하는 시인의 깊은 눈을 본다. 시인
2021-05-23
내 어릴 때엄마는머리에 광주리를 이고이집 저집 다니며도붓장수로 생선을 팔았다집을 보고 있다가해가 다 져도돌아오지 않을 때는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중략)이제는 그런 엄마가땅 속에 묻혀영영 돌아오지 않는가망 없는 이 허무여동요 ‘섬집 아이’를 연상케 하는 시다. 시인은 생선을 팔러 행상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어린 시절의 시간을 꺼내보며 그리움에 젖어있다. 지금은 돌아가셔서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5-20
나는 이곳에서이제 영웅들의 광기를 찾지 않으련다그리고 다시 빵에 피가 묻은 것도 원치 않으련다다만 늙어 버린 유태 청년처럼 탄식하며그 중심에 떨고 있는 순수한 기쁨의 형질잃어버린 청춘의 신비를 되찾으련다결국 하나이니까나의 안에서도 온 백성에게 자유를행여 나의 밖에서도 모든 이에게 축복을….그러나 난 공개적으로 평화를 옹호하지 못했다그래서 때때로 이 거리에 와난 눈물이나 흘리는 것일까그대여여기서 영원함을 얻으려면 부활을끝까지 꿈꾸지 말고 지나가라여기서 초월을 찾으려면그 주검들을 묻고도 태연한 무등을 보라그러면 쉽게 반격할 수 없는 구호(….)1980년 5월 광주 금남로는 엄청난 참극이 벌어진 현장이다. 시인은 그 도륙의 현장에서 받은 충격과 분노를 안고 늙은 유태 청년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무참히 짓밟힌 청춘의 시간들이 잊혀지거나 지워지는 게 아니라 의식 속에서 끝없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5-19
제 살 버리고 산란 끝낸 갈대들지느러미 털고 일어서는 새순에껍데기마저 내어주고 함초롬히 웃고 있다꿈을 버리지 않는 강물한 뿌리가 썩어 다른 뿌리 살 되는갯벌 속으로, 속으로 흐르다보면제 뿌리에 가 닿으리라산 것과 죽은 것 하나 되어합삭(合朔)의 시간썩은 살을 버리고투명한 날개 파닥이는 강물이 빛난다순천에서 생명운동을 하는 시인이 순천만 갈대밭에서 한 뿌리가 썩어 다른 뿌리의 싹으로 태어난다는 삶과 죽음이 하나 되는 합삭(合朔)의 시간을 염원하고 있음을 본다. 삶과 죽음을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소멸은 소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멸의 끝을 물고 새로운 생성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5-17
오랜 기억이 묻힌 거리로 돌아왔을 때대지를 뒤엎던 싱싱한 청춘은 흘러가고자갈치 바람이남포동 사람의 물결이온종일 쟁기질을 하던당당한 우리의 발소리는 어디로 갔나지난 시간이 불쑥불쑥 밀고 들어와나의 궤적을 쫓고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들은 방황하며추억을 전송하고 삭제한다떠나지 않은 채 그리운 것들이새에 편입되어 하늘을 날고 있는저물지 못하는 추억의 거리에서기억이 기억을 키운다싱싱한 청춘의 푸른 시간들은 흘러가버리고 낡고 저물어가는 시간에 얹혀가며 쓴 노 시인의 회고의 시다. 아름다운 시간들을 떠나보내고 상실감과 허무감에 젖어 있지만 ‘저물지 못하는 추억의 거리에서’처럼 그냥 쓸쓸한 노년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게 아니라 지난 추억의 시간들을 하나씩 뜨겁게 불러내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5-16
똑바로 간다는 것이자꾸 옆으로만 간다먼바다 개펄진창에 대가리를 부비며땀 철철 흘리며 가는게를 본다- 아아,게 같은 나의 삶 -똑바로 산다는 게그만자꾸 옆으로 옆으로만 간다그래그래아아, 게여!나의 배후(背後)여뻘밭에서 옆으로만 기어가는 게를 바라보며 시인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회한에 잠겨 있음을 본다. 똑바로 걸으며 바르게 살아온 것 같지만 돌아보면 뻘밭의 게처럼 옆으로만 살아온 것이라고 고백하는 시인의 겸허한 반성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5-13
유리벽에 갇힌 세월하나 둘 벗겨 가면차가운 가슴을 쓸며 홀로 몸을 떨고 서서사라진 꿈을 펼치는 천 년 밖의 영혼들낡은 빛 푸른 미소정성껏 단장하고끊어질 듯 이어지는 한스런 춤사위는적막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외침소리슬픈 전설로 묻힌 애절한 임의 노래앙상하게 시린 곡조 더듬어 짚어 내면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임의 모습 피어난다박물관 유리벽에 갇힌 채 박제되어 있는 시간을 바라보며 시인은 죽은 시간을 되살려내며 흘러가버린 천 년의 시간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음을 본다. 사라진 꿈을 펼치는 천 년 밖의 영혼들에 말을 걸며 그들에게 푸른 미소를 건네고 있음을 본다. 애달픈 전설 속 멈춰버린 그들의 사랑을 다시 뜨겁게 일렁이게 하는 시인의 눈빛을 본다. 시인
2021-05-12
귀가 순한 양떼들한가로이 풀을 뜯는 오후목장에는 평화가 가득하다청명을 풀어헤친 바람은바다로 흐르고만추의 백사장엔물새 떼 콕콕젖은 햇살을 쪼고 있다그리운 것들은발자국으로 따라오고조개껍질에 갇힌 시간은묵상에 잠겨 고요하다만추의 모래밭에서 만난 물새 떼를 응시하며 시인은 그 평화경 속에서 깊은 묵상에 빠져들고, 그리운 것들을 뜨겁게 호명하고 있음을 본다. 개신교 목회자이기도 한 시인이 열망하는 절대자의 평화가 조개껍데기 같은 갑갑한 현실에 갇히고 봉쇄되어버렸다고 말하며 진정한 해방과 자유와 행복은 욕망으로 일렁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묵상에 드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시인
2021-05-11
등잔 앞에서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누가 하늘까지아픈 지상의 일을 시로 옮겨새벽 눈동자를 젖게 하는가너무나 무거운 허공산과 산이 눈 뜨는 밤핏물처럼 젖물처럼내 육신을 적시며 뿌려지는별의 무리죽음의 눈동자보다 꼴짜기 깊나한 강물이 내려눕고흔들리는 등잔 뒤에빈 산이 젖고 있다아픈 지상의 일들을 베껴 쓰는 것이 시인의 타고난 운명이 아닐까. 평생 그가 직관해온 이러한 왜곡된 현실의 고통과 상처를 껴안고 살았는지 모른다. 꽃과 숲과 산, 별과 같은 순수한 자연과 우주의 세계를 통해 치유하고자 하는 시인의 시적 애씀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시인
2021-05-10
강 언덕 위에는 맑은 영혼물안개가 피어오르고아버지와 아들이 손잡고 가는역사처럼 강물이 흐른다흐르는 시간 속으로우리네 웃음과 눈물도녹아 흘러 내일을 잇는다어제와 오늘을 씻어 가는 저 결무심한 듯 담담한 듯 한결같이 넘실댄다누가 세월을흘러가는 강물이라 했던가세월은 늘 거기에 있는데흘러가는 것은 우리네 삶의 흔적욕망과 쾌락의 껍질들그러나 강은 늘 새롭게 몸을 씻고언제나 기다리고 그곳에 있느니이 시를 쓴 경주의 중견시인인 김종섭은 안타깝게도 얼마 전 쓸쓸한 가을바람에 실려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네 웃음과 눈물이 녹아 흐르는 강물처럼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우리네 삶의 흔적, 욕망과 쾌락의 껍질을 품고 강물은 무심한 세월 속으로 흐르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말한 맑은 영혼처럼 물안개 피어오르는 피안의 강 언덕에 한 송이 들꽃으로 피어났는지 모른다. 시인
2021-05-09
봄이라고모든 나무가 꽃피우는 건 아니다나무의 나이테엔그 나무의 전생또 그 전생의 전생이 기록되어 있다아니, 그 후생까지아름다운 타원형 속에 비밀스레 내장되어 있다따라서 우연한 봄날 우연히꽃피우는 나무란 없다거역할 수 없는 윤회의 법칙처럼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순환그래서 저 벚꽃일생 중오로지 4월의 미풍에만 황홀하게 전율한다내 몸속수천억 개의 세포는내 전생의 잎, 잎들그래서 당신, 그 봄날 같은 입김에그토록 뜨겁게 반응했던…4월의 미풍에 황홀하게 전율하며 꽃을 피우는 벚꽃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거역할 수 없는 인연의 고리 때문이라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은 사랑도 시공을 초월해서 인연과 순환이라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는 확신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