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는 교직원 식당에서암 투병하는 이선생 근황을 전해 들었다온 힘을 다해 어둠 너머로 그가 흔들어 보냈을플라스크 속 섬광의 파란 봉화들!오후에는 몇 학기 째 논문을 미룬 제자가 찾아왔다논리의 무위도식에게 이끌려 다니는 삼십대 중반에게견디라고 얼어 죽지 말라고끝내는 텅 빈 메아리 같아서 건넬 수밖에 없던 침묵그에게 거름이 되었을까 절망으로 닿았을까꽃대 세우지 못하는 시업(詩業)이 탕진해 보내는눅눅한 내 무정란의 시간들암으로 투병하는 동료 교수의 힘겨운 시간과 논문을 미룬 나이든 제자의 무위도식의 시간을 들여다보고 무슨 뾰족한 해법을 건내주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과 수월하게 잘 진척되지 않는 자신의 시 쓰기의 답답함을 토로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7-01
햇빛 쟁쟁한 한낮에 해 조각을 베어 물고둘레 공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밀알들이 잘 익었다 그리고그 황금빛 생애는 사라졌다땅을 떠난 밀알들이 줄을 서서 방앗간으로들어갔기 때문이다 방앗간에 내걸린부서진 살 거울에 ‘너’는 보이지 않고‘나’는 없어졌다(….)애찬의 식탁에서밀알들이 삼킨 해 조각들 둥글게 모였다밀떡에서 뜨는 해 한 덩이! 눈부시다햇살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그 처연한 슬픔까지도시인은 해 조각을 베어물고 자라나 방앗간에서 한 톨 밀알로 생을 마치는 밀의 생태를 모티브로 삼아 시를 얽어내고 있다. 푸른 밀밭을 떠올리고 황금빛 생애를 마감하는 밀의 생태에서 허무를 발견한 시인은 한 덩이 밀떡이 되어 식탁에 오른 밀알에서 헌신과 보람을 느끼고 있음을 본다. 0시에서 0시로 순환하는 우주, 자연의 순리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
2021-06-30
호박잎 콩잎검은콩과 찰보리쌀잘 익은 잡곡밥에빡빡된장 쌈밥은끝 맛이 달았지울엄마 손맛은 달았어봉화 청량산 자락 해와 달 농장빨강 노랑 파프리카싱싱하다 못해 까끄리한꼬부라진 오이맵사한 고추에 햇마늘 다져넣고깨소금 뿌린울엄마 오이냉국뒷맛이 쌉쌀하며 달았지세월이 88년 지났지만아직 그 맛은글로 표현 못하는울엄마 오이냉국입 안에 남은 맛은그저 단맛뿐생전의 어머니를 호명하고 평생 이어온 어머니의 손맛, 사랑과 정성의 모성애를 그린듯이 묘사하는 시인의 사모곡을 듣는다. 자식을 위한 애절한 바람과 희생은 거룩한 본능이다. 그런 어머니 특유의 양념과 손맛으로 만들어주던 시원한 오이냉국 한 그릇에는 자식을 위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이 오롯이 녹아있는 것이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서 어머니의 시원한 오이냉국 한 그릇을, 간절히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6-29
시푸 시푸시 - 씨 - 씨팔팔푸 - 우 - 피 - 이 - 익돌다 금세 멎어버린경운기가 그렇고분수처럼 자꾸만자꾸만 하늘로 치솟는약대가 그렇고아무리 곧게 펴도활처럼 휜 칠순의 허리가그렇다, 이제는힘에 부치는 줄바람에 팔락이는 잎새가먼저 알고꿩 - 꿩 - 꿩경운기 소리에 놀란산꿩이 먼저 안다시인은 소담스런 결실을 위해 평생을 과수원에 매달려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아버지의 시간을 읽고 있다. 활처럼 휜 칠순의 허리, 깊게 패인 주름, 자식 키우며 가족을 위해 힘겨운 농투산이로 살아온 아버지, 이 땅의 아버지들이 아닐까.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인의 가슴도 눈시울도 뜨겁게 젖어있음을 본다.시인
2021-06-28
내 오른발 복사뼈 아래아버지가 남몰래 숨겨놓은 붉은 점 하나나를 끌고 다니지오른발은 왼발보다 항상 무거워내 걸음은 자주 비틀거리지햇빛 부신 대낮에도 길을 걸으면그 발은 취한 듯 점점 붉어져마음도 함께 흔들거리지먼 길 가지 않는 밤에도발바닥은 무시로 뜨거워져나는 그만 꿈 밖에 쪼그려 앉지환절기마다 신열이 나는 내 붉은 몸열꽃 같은 글자들이 몸 밖으로 툭툭 불거지는아직 퇴고 안 된 시 한 편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붉은 점 하나에서 생의 고통은 시작되었다는 운명적 인식이 시 전체에 깔려있다. 온 몸에 돋아나서 툭툭 불거지는 열꽃은 시인이 혼신을 기울이는 시 창작과정에서 부닥치는 힘겨움을 표현한 것으로,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그 어떤 숙명적인 조건들이 있을지라도 기어이 초월하고 극복해 나가겠다는 시인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시인
2021-06-27
조금엔 나간다고 하고그믐엔 들어온다고 했지애비야상수리나무 숲 위만월이 뜰 때소소한 바람은 이파리 흔들고기다린눈 허옇게 기다린올 줄 모르는 긴긴 새벽초사흘 열여드렛날이라 했나동지나해 그 갈맷빛 파도칼날 치듯칼날 치듯한데애비야그믐엔 들어오고조금엔 나간다고 했지상수리나무 숲 위만월은 뜨고동지나해 사나운 파도와 싸우며 원양조업에 나선 아들을 염려하고 무사귀환을 기다리며 가슴 조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만월, 새벽, 상수리나무 숲 반월 같은 풍경에서 그런 애끓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세상 아버지들의 마음이 아닐까. 시인
2021-06-24
언젠가 구겨진 선처럼 내몸에도 깊은 주름이 패이면,돌아갈 수 있을까 저 생생한 한 그루 아래로, 돌아가신 당신을 쏙 빼닮았다는 등허리를 아름드리 둥치에 지긋이 기대어볼 수가 있을까(중략)한줌의 뼈를 뿌려주기 위해, 좀더 멀리 보내주기 위해, 제 몸에 돋은 이파리를 쳐서 바람을 불러일으켜주는 한 그루, 바람을 몰고 잠든 가지들을 깨우며 생살 돋 듯 살아나는 노래의 그늘 아래서발치에 고단한 생을 마감하고 한 줌 가루로 다가온 영혼을 따스하게 품어주며 풍성한 안식의 그늘을 펴주는 느티나무처럼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겸허한 삶의 자세를 읽는다. 고독한 타인을 위해, 지치고 상처받은 자들을 위해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 몸에 돋은 이파리를 쳐서 바람을 불러일으켜주는 느티나무처럼 시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시인
2021-06-23
밤 깊은데 천 리 밖에서철총마 울음소리검푸른 갈기치며 솔빈 평원질러온다. 찬 별빛 어둠 뚫고칠흑 벌판 달려온다산 밑동 뒤흔드는육중한 쇠박차 지축뜨겁게 땅을 차며 신생의 네가 온다적막 하늘 소스라치고수분하 강물도 솟구쳐 튀는데애마여 날렵한 발목으로저 멧부리 대궁 줄기 맨자갈 큰 계곡들모두 불러 깨우는구나우렁우렁 산판들힘줄 곧게 일어서고끝없어라 발굽 소리가슴 뛰는 첫새벽을천리준총 야생의 네가푸른빛으로 여는구나7세기 경 동만주의 광활한 지역을 장악하고 당나라와 맞서며 세운 발해에 대한 그리움이 깔려있는 시다. 찬 별빛을 뚫고 칠흑의 벌판, 솔빈 평원을 달리던 말을 떠올리며 민족의 기상과 패기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6-22
종아리를 걷으라 한다혹시 너에게또는 누군가에게 누를 범한 일은 없었다그 잘못들 죄가 돼버린 건 아닌가 하여불혹의 종아리 걷어 올렸더니차알싹!차알싹!수평선이 핏빛이다노을 지는 바닷가에서 끝없이 몰려와 찰싹이는 물결을 응시하는 시인을 본다. 어린 시절 하루를 반성하며 어머니가 들었던 회초리를 추억하는 시인을 본다. 바닷가에 서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자신을 살피며 성찰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시인
2021-06-21
사람들에겐 어제 하루도 인생이었다플잎들아, 너희의 하루도 생이었느냐너희들 순결 앞에서는순결이라 부르는 것조차 불결이다노래가 되려고 결심한 냇물이 아침을 씻는다너희가 기울이는 외로움만한 희망이슬을 풀의 눈물이라고 말하는 것은불경(不敬)이다저 자디잔 화필의 수채화가 끝나면계절은 환성된다온통 초록의 질문으로 돋는 움들햇빛의 어느 마음이 푸름이 되느냐마침내 흙의 귀가 된 풀잎들빨강 파랑으로 말 걸어오는 햇빛이온종일 풀잎들과 속삭인다동풍이 딛고 간 풀잎들아어떻게 물어야 너희의 생을초록으로 대답하겠느냐풀잎들이 기울이는 외로운 희망이라 말하며 이슬을 풀잎의 눈물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불경(不敬)이라 말할 정도로 시인의 순결한 정신과 자연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읽는다. 빨강 파랑 햇빛의 마음이 오롯이 풀잎에 스며 빛나는 초록의 정령으로 승화되느냐고 묻는 시인의 섬세하고 순정한 세계관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
2021-06-20
진달래 올해도 피고종부길 들꽃도 숨을 쉰다정겨운 당신 봄으로 맞고서방처럼 색시처럼산길, 꽃길로 걷고소나무 솔잎 아래도봄으로 설렌다이리도 큰 치마 두른 산맑은물 가뭄 속 흘리고물길 따라씨앗 품는다넌 날 보고넌 내 발길을 올려주니난 이 봄에 너의 발꿈치 따르며그리움을 쫓는다흐르는 물소리 잦고내 사랑도 이젠 세월로잔잔해 지는구나봄, 삼방산삼방산에 도래한 봄 천지에서 시인은 그리운 이를 정겹게 호명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희망과 사랑의 계절을 설레임과 환희로 맞이했지만 이제는 나이 들어 그 때의 열정을 뒤돌아보며 그리움과 아쉬움에 젖어 있는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우리도 한 때는 시인에게처럼 환희로 찾아왔던 봄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 시처럼 잔잔히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봄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
2021-06-17
뒷밭을 볼 때마다명아주대가 더 늘었다목을 뽑아올리던 상추는그새 꽃을 피웠다아침이면 멧비둘기 내려오고찌르레기 짝지어 논다삽자루 그러쥐고 밭둑에서 졸던할아버지 자전거만통 소식이 없다뒷밭에 온갖 생명체들을 일으켜 세우고 불러오던 할아버지의 죽음은 생명의 순환으로 읽는 시심이 깊고 그윽하다. 뒷밭에 무성하게 일렁이던 생명체들처럼 할아버지에게도 그런 푸르른 청춘의 시간도 있었고 듬직한 중·장년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우주적 순환의 논리인 탄생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질서에 순응해야만 하는 쓸쓸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주는 시다. 시인
2021-06-16
뒤뜰 매화나무에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짓하며잘 놀다 간 며칠 뒤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꽃이 피어서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길 위로 날아가는흰빛들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제자리를 지키는저 흰빛의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죄 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디찬 바람과지금 막 사랑을 배우는 여자의덧니 반짝이는 웃음소리한밤중에는 읽은 책들의고요한 메아리가여울물 줄기처럼 찰랑대며 흘러와흘러와새끼를 낳듯 몇 알풋열매들을드넓은 공중의 빈가지에 걸어두는 것을점자처럼 더듬어읽는다엄동을 견딘 대지에 제일 먼저 피어나는 봄의 전령사는 매화다. 시인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순간을 생명감 넘치는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매화꽃의 흰빛은 설레임으로 가만히 빛을 내며 소박한 아름다움과 희망의 빛을 띠고 있다고 예찬하고 있다. 매화꽃의 그윽한 향기는 앞으로 펼쳐질 희로애락을 담담하게 예견해주는 전령이라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6-15
등잔 앞에서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누가 하늘까지아픈 지상의 일을 시로 옮겨새벽 눈동자를 젖게 하는가너무 무거운 허공산과 산이 눈 뜨는 밤핏물처럼 젖물처럼내 육신을 적시며 뿌려지는별의 무리죽음의 눈동자보다 골짜기 깊나한 강물이 내려눕고흔들리는 등잔 뒤에빈 산이 젖고 있다시인이 아픈 지상의 일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현실의 일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것이다. 별의 무리들 마저 핏물처럼 뿌려진다고 말할 정도로 현실의 여러 부조화와 불균형으로 상처투성이고 고통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시인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빈 산이 젖고 있다고 토로하며 그런 질곡의 삶을 구원하지 못하는 절망을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6-14
오대산 전나무 숲의 겨울가없이 깊은 설경에 발이 빠져오래 쫓기어온 짐승처럼일어나지 못합니다어디 가면 이렇게 충만한 슬픔과단숨에 닿는 절정이 있겠습니까붉어진 손을 털며젖은 얼굴을 드는데툭,저만큼 서있던 전나무 가지 하나쌓인 눈을 못 이겨꺾이고 맙니다오대산 눈 덮인 겨울 숲을 바라보며 시인은 그를 누르는 삶의 무게를 생각하고 있다. 살아오면서 짊어진 욕망과 꿈의 무게가 그를 억누르고 있었음을 겨울 눈 덮인 산을 바라보며 느낀 것이다. 눈의 무게로 꺾이고 마는 전나무가지처럼 자신도 언젠가 저렇게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6-13
허구헌날 허락된 굴레 안에서만매해, 매해, 매해앰 돌다제 모가지 칭칭 옭아매는 염소의줄행랑을 꿈꾸는 아침외딴 저수지에서젊은 부부의 버거운 생이 사뿐 인양되었다아이 하나씩 꼭 껴안은 채굴레를 벗어난, 말뚝 뽑힌 염소부부함께 건져 올려진 소지품으로 보아그들에겐 한 사나흘짧은 방목의 날이 있었다고마지막 비망록을 훔쳐본잠 덜 깬 텔레비전이 웅얼거린다말뚝 뽑힌 염소가 줄행랑을 놓다문득 뒤돌아보고는아무도 저를 붙잡는 이 없어맥없이 매해, 매해해해해 갈 곳을 모르다가길고, 깊은 울음 울었겠다뽑힌 말뚝을 울었겠다 그때그들이 타전했을 붉은 메시지 하나가아침을 두드린다염소를 키우며 힘겨운 삶을 살다간 젊은 부부의 죽음이라는 가슴 아픈 서사를 모티브로 쓴 시다. 이 시는 자신의 삶이 굴레에 묶인 염소와 다를 바 없다는 존재론적 쓸쓸한 인식이 묻어나고 있다. 굴레에 메인 것과 같은 현대인들의 무미하고 단순한 반복적 일상,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시인의 몸짓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인
2021-06-10
추령 너머 가을은 이미 깊을 대로깊었습니다내려가는 길은 벌써 하얗게바랬습니다새들은 숨을 곳을 찾고 땀이 마른 생명들은 모두누웠습니다떨리는 음정으로 노래하던 억새도 목이쉬었습니다가을걷이도 끝난 뒤에 낫을 갈아서해가 지는 허공에 걸어두었습니다내 안에 서늘한 어둠이 들고빛나는 낫 한 자루 보입니다깊이 우러나는 서정시를 쓰다 오래 전 우리 곁을 떠난 김정구 시인의 그윽한 눈빛을 본다. 가을을 맞아 결실에 이르는 자연을 바라보며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며 쓴 이 시는 애잔함이 가득 묻어난다. 가을걷이 후 낫을 갈아 해가 지는 허공에 걸어두듯이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서늘한 어둠이 찾아든다는 시인의 쓸쓸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6-09
최신 전자제품장수와 싸구려 기성복장수가 다투어 목청을 높인다.어떤 장꾼은 아침부터 시비만 하고, 어떤 장꾼은 종일 커피전문점만 들락인다전대를 가득 돈으로 채우고도 소주릅은 볼이 부었고시금치 바구니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등 굽은 할머니는 천하태평이다생김새도 사는 것도 각양각색이라, 언청이와혹부리가 길이 다르고 꿈이 다르듯, 그러다가도문득 국밥집에 들어와 석유난로에 얹는 손들을 보면 닮았다쭈그러진 손등의 주름이 같고, 손바닥에 박힌 못이 같다주름과 못 속으로 팬 깊고 푸른 상처가 서로 닮았다시인은 장터에서 만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펼쳐보이고 있다. 그들이 외양도 살아온 내력도 욕망도 각기 다르지만 국밥집 석유난로에 얹는 손들은 하나같이 다 닮아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험난한 세월을 헤치며 살아온 삶의 흔적이 손등에 주름져 있기 때문이리라. 시인
2021-06-08
그는 안에서 긁혀 있었다그 상처 때문이었지들여다보는 사람 얼굴도 긁혀 있었다깨뜨리고 들어갈 수 없는 벽깨뜨려도 소용없는 벽그는 긁힌 속을 들여다보았다들어가 숨기 불가능한 공간들어가 숨기 쫍쫍한 공간들어가 살기 위하여그는 앞으로 당겨 앉았다그는 거울 속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는 과거에 살았던 사람순간의 냉기가 그에게로거울에게로 전해졌다그는 번번이거울에게 등을 보여줬다시인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와 꼭 닮은 시다. 거울 속의 자아와 거울 밖의 자아가 분열되어 일치되지 않음을 털어놓고 있다. 번민과 상처가 깊이 새겨진 거울 속의 자아를 인식하며 견딤과 기다림을 통해 이러한 분열된 자아를 치유하려는 시인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시인
2021-06-07
내 처의 고향은 가지 못하는 땅함흥하고도 성천강 물맞이 계곡낙향하여 몇 해라도 살아보제도내 처의 고향은 닿지 못하는 땅그곳은 청진으로 해삼위로 갈 수가 있어싸구려 소주를 마시는 주막이 거기 있었다솔개가 치운 허공에 얼어붙은 채북으로 더 북으로 뻗치는 산맥을 염원하던 땅단고기를 듬성 썰던 통나무 도마가 거기 있었다등짝짐에 철모르는 아이를 묶고우쑤리로 니꼴스끄로 떠나갈 때바람도 서러운 방향으로 휘돌아치고젊은 장인 불알 두쪽에맨주먹을 흔들며 내려오던 땅울타리 콩이 새끼를 치고홀로 국경을 지키는 오랑캐꽃이 거기 있었다그의 처가 있는 곳은 금단의 땅인 북한이다.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잃어버린 곳이며 민족사의 단절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그를 홀로 국경을 지키며 피어있는 오랑캐 꽃으로 표현하면서 시인은 이러한 민족적 비극을 비통해 하고 있다. 분단극복, 민족 동질성 회복,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