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는 마음으로 말씀하세요언제쯤 그날이 올 것인지를문밖에는 늘 서너 개의 바람이 휘날리고그대 가슴 속에는새로 자란 바다가 출렁이고 있어요하얗게 바래져요, 우리밤새도록 바스라져요부러져 있는 그림자들일랑스무 개 손가락으로 고치고빈들로 나가 비맞아요끓은 피 속을참하고 신선한 강물이 흐를 때까지빛과 빛의 작은 구멍으로 다녀요그들이 세워놓은 낡고 묵은 집들을 허물고아름답고 깨끗한 세상을 우리 세워요보이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서잠은 오리라는 것을 그대는미리 알지 마세요그대 가슴의 바다 속에서방금 깨어난 한 마리 새우가온갖 것들을 바라보는 눈으로말씀하세요, 말하세요언제쯤 그날이 올 것인지를시인은 고백을 통해 아름답고 깨끗한 세계를 희원하고 있다. 우리는 비록 부러져 있는 그림자로서 고립이 깊어가는 존재들이지만 저마다의 끓는 피 속으로 참하고 신선한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규정하며 아름답고 깨끗한 희망세상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4-06
누가 이런 길 내었나가던 길 끊겼네무슨 사태 일었나 가파른벼랑에 목이 잘린 길 하나 걸렸네옛길 버리고 왔건만새 길 끊겼네(….)아, 나 이제 경계에 서려네칼날 같은 경계에 서려네나아가지 못하나 머물지도 못하는 곳아스라히 허공에 손을 뻗네나 이제 모든 경계에 서네모든 경계는 아슬아슬하고 어떤 예감으로 긴장돼 있고 때로는 위험이 수반되는 불안정한 부분이 아닐까. 그런데 시인은 그런 경계에 서겠다고 말하고 있다. 소극적이고, 외면하고 물러섰던 지난 시간을 한탄하며 비록 외롭고 힘들고 고난이 따르는 길이지만 더욱 치열하게 부조리하고 부조화한 현실, 공정과 정의가 무너진 현실에 맞서겠다는 칼날 같은 대응의지를 펴보이고 있는 것이다.시인
2021-04-05
물 위로 꽃 한 송이 피어난다나 오래 물의 자리에 내려앉고 싶었다더 깊이 가라앉아꽃의 뿌리에 닿도록아픈 몸이여, 흘러라나 있던 본디 자리로오래 전 신병으로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의 생에 대한 맑고 깨끗한 희망과 신념에 찬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이 희망하는 곳은 물처럼 투명하고 깊은, 아픈 몸으로도 가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절망과 외로움과 고통의 몸으로 더러움과 어두움을 몰아내려는 생에 대한 강한 애착과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
2021-04-04
(….)우리들도 처음에는 모두 새로웠다그 놀라운 처음의 새로움을 기억하느냐끊어질 듯 가늘고 가쁜 숨소리 따라피 흘리던 만조의 바다가 신선해졌다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몰랐다저기 누군가 귀를 세우고 듣는다멀리까지 마중 나온 바다의 문 열리고이승을 건너서, 집 없는 추위를 지나서같은 길 걸어가는 사람아들리냐인생을 표랑하는 삶의 연속으로 보는 시인의 인식에 깊이 동의한다. 험난하고 위험한, 그러면서도 망망하고 신선한 바다의 길과 우리 한 생의 길이 꼭 닮아 있다. 순간순간마다 피 흘리는 만조의 바다 같은 인생길이지만 그래도 꿋꿋이 생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우리는 뚜벅뚜벅 길을 가는 것이리라. 시인
2021-04-01
옹벽 심벽나무벽 돌벽 콘크리트벽세상에 벽의 종족은 참 많지그러나 그중에서도가장 깊고 두꺼운 것은사람인 거라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도생겨난 거라그것도 모른 채 오늘도수많은 벽들이 벽을 만나더욱 깊고도 두꺼운 마음의 벽을쌓고 있는 거라벽이 벽을만들고 있는 거라TV다큐멘터리에서 삽날에 찍힌 뱀을 보고 쓴 이 시는 상처를 잊기 위해 떨어진 머리통을 버리고 훌훌히 떠나며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살다 보면 이런 망각과 회피가 새로운 자유로움과 반전을 가져다주는 때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시인
2021-03-31
수많은 꽃들의 헌신 속에하나의 꽃방울은 벙근다그리하여 바람 불고 땅 우는어느 가을날 저녁뜨락에 가득한 분분한 것들의 낙화 속에서문득 멈추었다한 송이 고난의 꽃은 타오른다시인의 꽃이 피고 지는 자연현상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 수많은 요소의 헌신 끝에 하나의 꽃망울이 벙글고 수많이 많은 분분한 낙화 끝에 한 송이 고난의 꽃이 타오른다는 표현 속에는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고난의 꽃으로 피었다가 떨어져 간 꽃다운 젊은이들의 희생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시인
2021-03-30
입시울에 핀 꽃이 하늘가를 하늘거린다잔털이 보슬보슬 저기 저 보랏빛 숨결해걷이 바람꽃이 한 뼘 빛을 달래는꽃잎 지는 해름길은 오싹하다웬 재채기꽃노을이 시들부들 적막한적막은속을비운다엄동을 견딘 대지에 차오르는 생명감을 예찬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맑고 밝기 그지없다. 봄까치꽃의 개화는 새 하늘을 활짝 열고 있는 것이다. 남몰래 꽃잎을 떨구는 낙화, 그 환희와 정갈함이 묻어나는 낙화의 순간들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탐미적 언어감각을 얹어 이루어낸 짧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시인
2021-03-29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그루 서 있었지봄이었어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그루 서 있었지여름이었어나, 그 나무 아래 누워 강물 소리를 멀리 들었지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그루 서 있었지가을이었지나, 그나무에 기대서서 멀리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그루 서 있었지강물에 눈이 오고 있었어강물은 깊어졌어한없이 깊어졌어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그루 서 있었지 다시 봄이었어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있었지그냥있었어사계가 흐르는 강가 미루나무 아래에서 느끼는 시인의 감정은 고독감과 슬픔이다. 강가에서 물을 응시하는 사람은 복잡한 현실을 벗어나 흐르는 강물에 동화돼 한없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리라. 시인
2021-03-28
천 년을 불렀던 이름이여천 년이 흘러도 침묵하는 이름이여세상은 늘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지만변하지 않는 것은 가장 높고가장 지엄한 이름이다화려했던 옛 영화에 발이 묶인 지금만일 내가 가장 갖고 싶은 것을 꿈꾼다면세월이 흐를수록 빛나는 이름이다비 그친 오후누렇게 물든 숲길을 걸으면잘 다듬어진 가을초상처럼길은 정갈하게 살아나고빨갛게 물드는 화려한 침묵잎 진 가지에 매달린근육질의 서사시를 본다천 년의 시간을 읽는 시인을 본다. 화려했던 왕국의 부귀영화가 이제는 쓸쓸한 계절의 빛 속에서 낡아가지만, 신라 천 년의 아득한 시간들, 빛나는 영웅들, 지고지순했던 민초들의 이름들을, 파란만장했던 서사시를 뜨겁게 호명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3-25
아빠 제가 기타를 쳐요파도 자락을 손가락으로 튕겨요햇살로 연주할 때도 있어요물고기들이 제 연주에 맞춰서춤을 추고 있어요물고기 친구들이 꼬리지느러미로손뼉을 쳐요물방울이 사방으로 튀고번져나가요물안개가 피고물미역이 일렁이며물바람으로 환호해줘요아빠 힘내세요저는 언제나 아빠편이에요아빠 사랑해요몇 해 전 수많은 어린 생명이 죽어간 세월호의 아픔을 편지 형식을 빌려 쓴 작품이다. 수장된 아이가 환생해 기타를 치는 모습은 더 깊은 비극의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아빠의 슬픔과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못한 데 대한 분노가 시의 안팎에 시린 물결처럼 밀려옴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21-03-24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어딨어그건 버리면 안 돼 이것도 안 돼애초부터 저장유전자가 있는 것처럼저장 저장해터질 것 같은 신발장삐져나오는 장롱구석구석 쌓아둔 그에 대한 기억과 고통별별 것 다 담고 버리지 못하는 저 병중오늘 버릴 것과 놔둘 것들정리 좀마음에 켜켜이 담아둔 미움도추악한 추억도제발 버려사는데 문제없어저장강박증이라고도 불리는 호더스 증후군은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일종의 정신적 질환이다. 한번 물건을 가지게 되면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을 일컫는 말이다. 거칠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시인의 자성과 함께 야유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끊임없이 집착하며 모으고 채우고는 버리고 베푸는데는 인색한 인간의 속물적 근성에 대한 질타의 시심이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
2021-03-23
아침해바라기 탱탱한 얼굴 위로부전나비 한 마리 앉았습니다잎사귀들은 침도 못 삼키고바람은 숨도 멈췄습니다엿보려고, 금빛살 촘촘한 창호지에 침구멍을 만들었습니다어머니는 귓속말로 이쁘쟈 참 이쁘쟈 하십니다세상이 다 고요합니다시인의 시선이 가 닿은 곳에는 아름다운 생명의 조화가 이뤄지고 있음을 본다. 절대 평화의 풍경이 고요 속에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꽃에 앉은 나비도 잎사귀도 바람도 숨죽이며 그 장면을 몰래 훔쳐보며 서로를 지지해주고 함께하는 아름다운 연대를 이뤄가는 것이다. 절대 평화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시인
2021-03-22
활이 구부러져 있다어머니 등이구부러졌다구부러져야 멀리날아가는 활(活)구부러진 활도부러질 때가 있으니마지막어머니 등이 그러하였다시인은 어머니를 활에 비유하고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한 생을 자식들에게 쏘아 보내고 죽는 활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깊고 절절하다. 시인
2021-03-21
아랑은 죽어서 빚으로 남았다그때부터 영남루 아랑각에는채권추심무늬나비가 나타나 떠나지 않는다빛으로 가득한 밀양의 거리를소녀들이 애벌레처럼 지나간다자라서 빚의 명함을 주고받으며집단강간의 기억을 변제할 것이다밀양에는 나비가 가득하다채권추심무늬나비는 발명된 종(種)이다앞으로 또 어떤 종이 나타나빚의 역사를 빛낼 것인가교회 첨탑에 대부업의 종소리가시엠송처럼 울려 퍼진다빚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한 여자가 신체 포기각서에 날인하며인생을 연체시킨다또 한 마리 채권추심무늬나비를 띄워 보낸신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하다시인은 아랑과 한 때 세상을 분노케 했던 집단강간의 아픈 기억이 서린 밀양을 얘기하지만, 밀양이라는 한 도시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욕망으로 점철되는 우리의 삶이 다 밀양이 아닐까. 끈질기게 얽어매는 빚이라는 것을 들어 인간의 더러운 욕망과 속성을 경계하고 야유하고 있는 것이리라. 신은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알록달록한 나비를 준 것은 아닐까. 시인
2021-03-18
눈 맞으며 서서 죽는 나무들을 보았네한겨울 가리왕산 얼음폭포 근처어떤 나무들은무릎 꿇고얼어붙은 땅에 더운 숨을 불어넣듯맨얼굴 부비고 있었네얼마나 더 싸우고얼마나 더 가난해져야지복(至福)의 저 풍경 속에 가 닿을 수 있을지나는 신발끈을 묶는 척 돌아서서눈물 훔치고는이빨을 꽉 물고 내려왔네빈방에 속옷 빨래들이 널려 있는사람들의 세상으로시인은 왜 얼음폭포 부근 눈 맞으며 죽는 나무들이며 맨얼굴을 땅에 비비는 나무들을 지복(至福)이라 했을까. 한 생을 세파에 흔들리고 견디며 이겨내고 후회 없이 죽은 나무들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조그마한 시련에도 주저앉아버리는 인간세상을 향해 던지는 시인의 매서운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3-17
동쪽으로 걷는데산 위에서 환히 웃으며 솟는 얼굴내 어린 날 벼 베고 돌아오는 어머니의 얼굴머릿수건을 벗어 치마의 먼지를 털며골목으로 들어서는 환한 얼굴온 들의 벼가 넘실대는 얼굴한 해의 노동이 익어서 돌아오는 얼굴시인은 둥그렇게 떠오르는 보름달과 힘겨운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진 평화롭고 안온한 풍경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산 위에서 환히 웃으며 솟는 보름달과 벼를 베고 돌아오는 어머니의 환한 얼굴은 똑 닮아있는 것이다. 평온과 풍요로운 분위기가 가득하게 스며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순정하고 천진무구한 심성을 읽을 수 있는 시다. 시인
2021-03-16
(….)내 입에는 날이 선 이빨이 가득 고여입을 벌리면 한 마리 삵이 되어눈 내린 험한 산을 떠돈다고 썼다기차는 발해만을 떠나 극락강을 지나는 중이다광포한 노래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고 썼다너는 읽었는가모든 근육이 일제히 발이 되어 걸어가는한 마리 삵,꽃무늬 발자국이 그네 젖은 분화구를어지럽게 흩뜨려놓았을 것이다이 시는 시인의 많은 시에서 발견되는 방랑 지향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삵은 끝없이 떠돌며 생을 이어가는 스산한 그림자처럼 서늘하고 사납고 날카로운 성질을 가진 맹수다. 시인은 이러한 삵을 자신의 분신처럼 시에 적용하고 있다. 시인의 영혼이란 얽매이지 않는 낭만주의적 성향을 운명적으로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
2021-03-15
비 갠 날 지렁이 두 마리가 장다리 밑둥에서몸통 한쪽을 서로 잇대고근육운동을 한다엉긴 데가붉다집게를 가진 검은 갑각류 두 마리가이쪽 고추밭머리에서지렁이 한 마리의 양끝을 물고줄다리기를 한다가운데가 뚝 끊긴다키 큰 장다리꽃 무리가 노랗다비가 갠 날 시인이 포착한 섬세한 장면 하나가 무척 이채롭다. 장다리꽃 밑동에서 벌어지는 지렁이와 갑각류의 필사의 싸움을 그리고 있는데, 생존을 위해 온몸으로 세상에 맞서는 질긴 생명력의 민초들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시인
2021-03-14
돌담 위를 수놓던 능소화가뻐꾸기 소리에 바람나따라 나선지 오래굵은 빗줄기참나리꽃 꺾어 놓더니개울 물소리 앉아서도 들리고우물가 감나무 가지에초사흘 초승달이풋감 되어 달렸다벼 익고 감 익고달까지 익어큰달 보름달 되면그날이 바로팔월 한가위 날이겠네시인이 그려내는 따스하고 정겨운 풍경 속에는 아득한 고향의 정취가 소복 담겨 있다. 꽃 피고 지고 나면 푸른 열매가 열리고 그것이 햇살에 익어가는 과정에서 시인은 끝없는 기다림을 발견하고 있다. 자연의 순환에 얽혀 있는 기다림을 읽어내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결국은 기다림의 연속 속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닐까. 시인
2021-03-11
벙어리가 어린 딸에게종달새를 먹인다어린 딸이 마루 끝에 앉아종달새를 먹는다조잘조잘 먹는다까딱까딱 먹는다벙어리의 어린 딸이 살구나무 위에 올라앉아지저귀고 있다 조잘거리고 있다벙어리가 다시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어린 딸이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시 종달새를 먹는다보리밭 위로 날아가는 어린 딸은밀짚모자 쓴 벙어리가 고개 한껏 쳐들어바라보고 있다시인은 특유의 상상력으로 시를 끌어가고 있다. 벙어리 엄마가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여 진정한 소통의 순간을 맛본다는 것이다. 언어를 잃어버린 벙어리가 재잘재잘 울어대는 종달새를 매체로 현실적 한계 혹은 문명적 제한을 초월하려는 시인정신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
2021-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