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땅으로 흐르고 흘러서낮은 몸짓으로 섞이고 섞여서더 깊은 삶을 향해 흘러가야 한다피땀으로 혼곤한 낮은 골짜기갈망으로 올려보는 하늘은 어둠침침하고해와 달도 쉽게 접근할 수 없으므로낮은 땅으로 흐르고 흘러서증발한 넋들을 하나씩 불러모으고낮은 몸으로 간절히 부둥키어더 넓은 삶을 향해 흘러가야 한다그리하여 한없이 낮은 우리는이 땅은 결코 절망이 아니라고패랭이꽃 하얗게 피우며우리의 기억 속에 애틋한 누이의복사꽃 한 아름 담아내야 한다그리고도 기꺼이 낮은 몸부림으로 어우러지는우리는부르튼 들녘마다 촉촉한 입술을 주고여전히 불안한 나무들에게도 손을 내밀어오, 속 깊고 따스한 낮은 힘이여침몰하지 않는 눈빛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이 시는 여울목이라는 제목이 주는 정겹고 포근한 느낌과는 사뭇 다른 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시인은 여울목은 낮게 흘러서 깊이 스며드는 속성에 주목하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처럼 세상의 낮은 곳에서 간절히 흐르면서 역사의 주역이 되는 것이고, 그들이 흘린 피땀이 깊이 흐르는 여울목이 된다는 시인의 인식이 깊이 스며있음을 본다. 시인
2021-05-05
뒷산에서 내려온 커다란 땅거미가조금씩조금씩 잡아먹던 마당에서장에 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울던 집할아버지가 장죽을 두드릴 때마다아직 식민지의 먼지로 가득하던 집그 반짝이던 155밀리 박격포 놋쇠 재떨이전쟁이 뒷산 넘어간 뒤에도형님은 빤스 고무줄에 돈을 꿰매 입고논산훈련소로 가고그래도 어머니는 땅을 장만해야 한다며비 오는 날 죽을 쒀 먹으며장독대나 자리 밑 어딘가에 돈을 감추었다조선의 경제여장으로 나가는 소를 보며마주 보고 울던 성가족(聖家族)들세월이 많은 나라를 허물고또 새집을 짓는 동안다시는 불 켜지지 않는 집 마당에서긴 울음소리 하나무너지는 집 한 채 오래 떠받치고 있다시인은 집에 얽힌 서럽고 가슴 아픈 가족사 속에 따스하게 흐르는 사람의 정과 사랑을 들려주고 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기구한 생의 질곡이 담겨 있는 집, 지금은 낡아서 허물어지고 있는 집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무너지지 않고 오롯이 서 있는 집, 사람의 정이 따스하게 스민 집 한 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5-03
뽀송하게 올라오는 콩 싹이 다칠세라무릎을 꿇고 낫질을 할 때느닷없이 소란스런 웃음소리곤색 치마에 눈이 부신 하얀 블라우스교복을 입은 한동네 한반 친구 두 명이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언제나 그랬듯가슴파도가 또 뒤노인다그대로 엎어져 보릿대 사이로(중략)작대기보다 큰 거무스레한 구렁이발틀에 떠발이 치고내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흔들림돌아누운 나도 고개를 불끈 쳐들고 있었다도도하게 혀만 낼름거리며내 가슴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끓고 있었다나를 물으라!씨빠지게 일만 하다서럽게 그므는 밭이랑 나비나를 죽이라!매일을 밭이랑 나비 속에서성성하게 죽어가는 가림자어느덧 소르르 물지 않고 사라지는 구렁이열 서너 살 때 콩밭에서 징그러운 구렁이를 만났던 일화를 소개하며 시인은 자신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생의 길을 떠올리고 있다. 구렁이를 보며 ‘나를 죽이라’고 소리친 것은 어쩌면 모양 없고 힘겨웠던 지난 시간들을 붙들고 있었던 운명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는지 모른다. 시인
2021-05-02
눈 감기듯눈 감기듯겹겹이는 누워서먼 산이야부르면 연이어돌아눕는 산밤늦도록 바라보는나 혼자먼 산이야언제든 눈 감으면눈 감기듯 넘어가는먼 산이야시의 제목은 수많은 산이 이어지고 겹쳐지는 듯한 느낌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음미해보면 이 시에서는 눈에 보이는 실제의 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의 세계를 넘어선 시인 내면의 세계에 존재하는 산에 시인의 마음이 쏠려 있다. 현상의 세계는 유한하며 점점 소멸에 이르는 것이기에 눈 감아도 사라지지 않고 가슴 속에 떠오르는 존재에 대한 희구가 짧은 시에 잘 드러난 작품이다. 시인
2021-04-29
마을 앞 느티나무, 큰 집 한 채 지었다제 몸 열어 공중에 지은 넓고 둥근 집안팎에 도배를 했다 지웠다방안에 햇빛을 못 들어오게 했다 들어오게 했다수십 년 걸려지어도 미완성이다넓이는 알아볼 필요가 없다앞으로 얼마나 더 넓히고 손을 볼 것인가는그 집에 자주 가는 사람도 모른다좋은 집 한 채 지어 바치기 이다지도 어려운가기초공사도 집을 다 지어야 끝이 난다종이에 한 설계로는 답이 안 나온다느티나무, 오늘은 쉼표로 찍어져 있다그늘에서 세상을 읽는데도쉼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마을 앞 오래된 느티나무가 봄이 되어 연두 새 잎을 낸다. 그리고 짙은 녹음으로 풍성해졌다가 가을이면 잎을 떨구는 일들이 오랜 세월 계속 순환되는 것을 바라보며 시인은 느티나무에서 지워지지 않는 세월의 무늬를 읽고 있다. 수십 년이 걸려도 완성되지 않는 느티나무가 공중에 짓는 넓고 둥근 집은 세월을 몸에 새기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
2021-04-28
너희들 속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구나저 산에 들에 저절로 돋아나 한 세상을 이룬유월 푸른 새 잎들처럼, 싱싱한한 잎 한 잎의 무게로 햇살을 퉁기며건강한 잎맥으로 돋아나는 길이 여기 있구나때로는 명분뿐인 이 땅의 민주주의가,때로는 내 혁명의 빛바랜 꿈이,칠판에 이마를 기대고 흐느끼는무명 교사의 삶과 사랑과 노래가긴 회한의 그림자로 누우며 흔들릴 때마다너희들은 나를 환히 비추는 거울나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 창가에 서서너희들 착한 눈망울 속을 조용히 들여다보노라면저마다 고운 빛깔과 향기의 이름으로거듭나는 별, 별들저 신생의 별들이 살아 비출 우리나라가 보인다내 아이들아, 너희들 모두의 이름을 불러 손잡으며걷고 싶어라 첫새벽 맨발로 걷고 싶어라너희들 속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고내가 걷고 걸어 가 닿아야 할 그 나라가 있구나한 때 교사로 교육현장에서 참교육 실현을 위해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 시인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는다. 허울뿐인 민주주의의 미명 아래 무명교사의 삶과 사랑과 노래가 무너져 내리는 모순의 교육현장에서 희망을 가꾸어 가는 착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그들의 이름을 뜨겁게 호명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4-27
내가 이 물가에서 그대 만났으니축생을 쌓던 모래 다 허물어 이 시계 밖으로이제 그대 돌려보낸다바닷가 황혼녘에 지펴지는 다비식의장엄함이란, 수평을 둥글게 껴안고 넘어가는꽃수레에서 수만 꽃송이들이 한번 활짝 피었다 진다몰래 몰래 스며와 하루치의 햇빛으로 가득 차던경계 이쪽이 수평 저편으로 갑자기 무너져내릴 때채색 세상 이미 뿌옇게 지워져 있거나끝없는 영원 열려다 다시 주저앉는다내 사랑, 그때 그대도 한 줌 재로 사함받고나지막한 연기 높이로만 흩어지는 것이라면이제, 사라짐의 모든 형용으로 헛된불멸 가르리라그대가 나였던가, 바닷가에서는비로소 노을이 밝혀드는 황홀한 축제 한창이다시인은 바닷가 모래와 석양과 재가 이어내는 황홀한 시간들에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화두를 꺼내고 있음을 본다. 죽음과 삶이 하나로 합쳐지고 순간과 영원이 공존하는 세계를 시인은 노을 지는 바닷가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울진의 바닷가에서 보낸 시인의 깊은 시심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21-04-26
이마 흰 사내가 신발을 털고 들어서듯눈발이 마루까지 들이치는어슴푸른 저녁이었습니다어머니와 나는 마루에 나앉아밤 깊도록 막걸리를 마셨습니다설탕을 타 마신 막걸리는 달콤 씁쓰레한 것이아주 깊은 슬픔의 맛이었습니다자꾸자꾸 손목에 내려앉아마음을 어지럽히는 흰 눈막걸리에 취해이제사 찾아온 이제껏 기다려 온먼 옛날의 연인을 바라보듯이어머니는 젖은 눈으로흰 눈, 흰 눈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초저녁 아버지의 제사상을 물린 끝에맞이한 열다섯 겨울첫눈 내리는 날이었습니다어머니는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며나는 다가올 첫사랑을 기다리며첫눈 내리는 날이면댓잎처럼 푸들거리는 눈발 속에서늘 눈막걸리 냄새가 납니다남편을 여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딸, 남자가 없는 모녀가 마주앉아 첫눈을 바라보며 느끼는 마음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시인의 눈가도 가슴 속도 젖어 있음을 느낀다. 퍼붓는 눈발 속에서 모녀가 마주앉아 마시는 설탕을 탄 막걸리는 슬프면서도 달짝지근한, 운명적 슬픔이 녹아난 비애의 맛이 아닐까. 시인
2021-04-25
그동안 잘 지냈구나 그동안 배불렀구나 계약기간이 끝나고 빛바랜 그물을 거둔다 외로움의 못으로 걸었던 초생달이며 거기 구름액자를 내리며, 그동안 즐거웠구나 내 공기밥이었던 날개야, 하루살이야 여전히 유리창에 미라를 기댄 여뀌야 그런데 내 신발 못 보았니나무색 줄무늬, 그동안 까마득히 잊었던 서른살 신발이제 보니 저기 창밑에 끈 떨어지고 찢어진나도 몰래 세월이 얼마나 신고 다녔는지밑창이 너덜너덜 구멍 뚫린 날들,잔뜩 많아진 나를 꾸려놓았는데밖은 온통 허공에바늘바람 압정을 뿌려놓은 듯 낯선 별밭날개와 하루살이가 천사거미의 공기밥이었다는 표현이 재밌다. 시인은 초생달과 구름액자와 여뀌를 친구삼아 살아온 천사거미에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 내밀한 통로를 걸으며 자기에게 빠져있던 자아를 차가움과 시련과 유혹이 많은 낯선 별밭으로 읽혀지는 세상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며 쓴 작품이라 여겨진다. 시인
2021-04-22
유리 구름들이 신경질적으로 구겨지고 있었다(….)까맣고 부드러운 백사장에 누워 수평선을 본다눈부신 죄수들은 일렬로 빛의 레일을 깔고 있다세상의 중심에 묶여 뱅뱅 돌아 미쳐가는 암캐풀을 당기면 지하의 손들이 뿌리를 꽉 쥐고 버틴다(오, 오후는 사악하다)햇빛을 부러뜨려 그 미지근한 수액을 핥는데잘린 손가락은 가만히 초인종을 누르고눈을 감으면 딩동!교활한 머리통이 녹아내리네(고막을 찢고 끝없이 기어나오는 저 개미떼)유리 구름에서 예리한 우박들이 떨어져 내릴 때미장원 간판, 여자의 전기 머리칼이 노랗게 탔다(….)시의 전개가 난해하기 짝이 없는 부분도 있지만 시인이 묘사하는 강과 나무는 피와 죽음을 비유하며 견디기 힘든 오후의 분열하는 자신의 영혼에 빗대고 있음을 본다. 성숙을 위해서 힘겨운 고통과 상처를 감내해가야 한다는 시인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시인
2021-04-21
새벽길 달려 그대에게로 간다시리던 별빛 이미 여위고눈썹달 빠진 호미곶에 몸 부푼 파도도 붉어져 온다밤안개 속 길을 열던 등불이 심지를 낮추고따사로운 햇살 모으는 동해의 봄날가슴 먼저 달려가는 그대의 길은이미 밤을 새운 기다림으로 투명해지고 있는 것을내 가는 길이 나에게 이르기 전에그대 가는 길이 그대에게 이르기도 전에이미 홀로 빛나고 있는 것을그대에게 말하려그대 나에게 말하려 발소리 죽이며서로에게 다가가는 오늘우리 함께 가는 참 따뜻한 이 길시린 별빛들이 이은 새벽길 달려 시인이 달려가는 그대는 어디이며 누굴까. 시인이 평생 혼신을 다해 달려갔을 그대는 도대체 누굴까. 내가 닿기 전에 이미 홀로 빛나는 그대, 아니 그대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나처럼, 나를 향해 발소리 죽이며 달려온 그대는 누굴까. 어쩌면 볼 수도 없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무엇은 아닐까. 행복이라고 해도 좋고 사랑이라고 해도 좋고 운명이라고 해도 좋고, 절대자라고 해도 좋을 그대가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 아닐까, 영원히 없을 수도 있는. 시인
2021-04-20
바다는 딴 색으로 잔잔해져 있었습니다마을은 바다 건너에서 잔광을 받고야생화들이 흙길 끝까지 가서진흙수렁마저 향기였습니다나는 자전거 위에서 길을 돌아보았습니다꽃대가 떨리고 있는 꽃들의 목 근처를하루살이가 비행하고 있었지요아주 입술이 마른 생명이여러 바다를 건너와 있었습니다구름이 몸통을 흙에 묻힌 석상처럼바다 끝에 쓰러져 있을 때그리고바다 옆에 연못이 있었습니다갈대를 전문으로 키우고 있었지요갈대밭에 연못이 들어간 것같이하루살이 안에 갈대가들어찬 것같이나 몹시도 괴로웠습니다내 눈에 젖은 것이 혹,당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시인은 여러 바다를 건너와 닿은 이국 땅의 평화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는 시선 끝에 이뤄진 장면들에는 쓸쓸한 아름다움이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낯선 이국의 경치들에서 느끼는 신산한 생명의 여정들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비유하는 인상주의적 시가 아닐 수 없다. 시인
2021-04-19
칠흙 같은 고요길을 지우고 있다어둠을 둘러 안은희미한 불빛 점 하나에온 몸을 맡긴다잠을 밀어내며 길을 만드는 사람들헥헥거리며 한발한발 좁혀가는 등짝어둠 속 푸르다무엇이 이토록 애타는 사랑을 하게 하는가먼동 트는 새벽 핏줄이 꿈툴거릴 때꾸물꾸물 소리가 눈을 부빈다향기는 밀물처럼 심해로 몰려들어잔잔한 파도로 스멀거린다몸을 휘감는 아스라한 내음검푸른 나무 물결 속청아한 새들의 노래또르를 은방울 사랑 소리뻐꾸기의 애절한 울음 눈물종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소리모든 생은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다열렬한 산악인이기도 한 시인이 한남 금북정맥을 무박으로 산행하며 쓴 체험 시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등정하는 등 그의 산에 대한 열정은 놀라울 정도인데 시인의 말처럼 무엇이 이토록 애타는 사랑을 하게 하는 것일까. 시인
2021-04-18
흠칫 놀라 그새 잠잠해지는밑둥만 남은 무논을 그저 바라보는 일이다잘린 벼 밑둥 사이로 숨어버리는번득한 못물의 흔들림을 가슴에 그대로 안는 일이다한때는 빼곡하게 채워져 넘쳤을황금빛 출렁임 스러져 다음 생을 기다리는무논을 그저 안고 가는 일이다벼를 다 수확하고 난 뒤의 허허로운 무논 벌판을 바라보는 시인은 사랑에 대해, 생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본다. 황금벌판의 충만함이 저렇듯 쓸쓸한 빈 들판으로 바뀌듯이 우리네 아름다운 사랑도, 젊고 풍족하고 당당하고 의욕적인 성취의 시간이 지나면 낡아가고 비워지고 떠나버리는 허허로운 시간이 찾아오고, 다음 생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시인의 관조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4-15
붓꽃, 마거리트, 난초, 능소화, 작약,하늘나리꽃, 백합, 빈카마이너, 장미…꽃가마 타고 유월이 왔다감, 호두, 은행나무들 아기 열매를 품고소나무 새순들 하늘 향해 키를 키운다논에는 어린 모들이 연둣빛 물결인 양 넘실대고밭에는 당근, 가지, 풋고추, 상추, 취, 쑥갓얼갈이, 케일, 아욱, 호박잎, 고구마순…쑥쑥 자라 흙을 빈틈없이 덮어버린다콩밭엔 서리태 모종들이 세상을 기웃거리고팥, 녹두는 떡잎을 내민다모든 풀과 나무들이태양의 달 칠팔월을 꿈꾸며설레는 유월산자락 무덤도 새 잔디에 둘러싸여쓰레기 더미조차 새 풀잎에 덮여빛나는 아름다운 유월어느 사람인들초록빛으로 물들어 반짝이며저 들녘에희망 하나쯤 심지 않았으리제 가슴에희망 하나쯤 품지 않으리빛나는 연두 물결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어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이 펼쳐놓은 갖가지 고운 꽃들이며 나무들의 초록 새 잎들이며, 온갖 채소들이며 곡식의 새순들이 자아내는 빛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깨끗한 희망의 노래를 듣는다. 시인
2021-04-14
여기서 만났을 거다 우리미끄럼틀과 시소, 혼자 흔들리던 그네,생울타리에 기댄 작은 청소 수레가 속한모래의 세계이쪽 기울 때 너는 떠올랐니우리는 평균대가 아니어서균형점을 앞에 두고 나뉘어 앉는 세계시소는 약속이 아니어서잽싸게 무게를 버리며 달아날 수 있다떠 있는 빈자리와 쏟아지는 이의 우스꽝스러운 엉덩방아이것은 갑에게서 가볍게 을이 생략되는저울 놀이(….)시인은 놀이터에 있는 시소를 모티브로 인간들의 잔혹함이 넘쳐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 시에서의 놀이터는 동심의 아이들이 뛰노는 유희의 공간이 아니라 어른들의 갑과 을이라는 잔혹한 생존 논리가 지배하는 시간 공간이다. 일상의 관계들이나 공동체의 연합과 연대가 무너지고 생존투쟁이 심화되어가는 현실을 야유하고 비판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4-13
코딱지만 한 단칸방 가득 피어나던따습던 저녁이 없다오랜만에 걸어보는 길희미한 외등만이 비추는 철거지는여남은 집 어깨 나란히 하고 오순도순 살던 곳쌀 한 됫박 연탄 한 장 빌리러 갚으러 가서절절 끓는 아랫목에 발 집어넣던 곳한글 막 깨친 아이 하나밥상 위에 턱 괴고 앉아 소리 높여 글 읽던 곳희미한 외등 따라 내 그림자 길게 늘어져고단한 생의 흔적이 말끔하게 지워진 길한 발 두 발 내 구두 소리만 흥얼댄다(….)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면서 칼잠을 자던 단칸방, 비록 비좁고 누추하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사람과 행복이 피어나던 집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분출되는 자본주의의 욕망으로 새로운 아파트 건립을 위해 철거돼야 하고 쫓겨나야 하는 도시빈민들의 애환이 깊이 스며 있는 작품이다. 시인
2021-04-12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저리도 눈부신가요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향기 같은 것인가요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시인은 비 내린 다음 날의 풍경 속에서 세상의 부조화, 부조리에 어떻게 대응할까를 생각하고 있다. 조화롭지 못하고 기울어지고 잘못되어가는 세상은 그 무게를 더해 가는 데 대해 나약하게 회피하거나 물러서지 말고 정면으로 대응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4-11
우리의 산하는 말 그대로 높고 낮음, 솟아오름과 파임의 더할 나위 없는 조화구도를 이룹니다. 산을 넘으면 내가 있고 내를 건너면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들판 지나면 언덕과 재가 있고 재를 넘으면 또다시 산이 다가옵니다. 높고 낮은 산을 내려온 물은 좁고 너른 개울과 강을 지나 바다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바다는 끝이 아닙니다. 신천지의 시작입니다. 배를 저어 동쪽으로 가면 서쪽이 나오듯이 말입니다. 물살도 구름도 햇살도 쉬어 갑니다. 밤새 맺혔던 풀잎의 이슬방울도 아침 햇살 받고는 몸을 숨깁니다. 내일 아침을 예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룻밤 푹 쉬고 나온 아침 해는 참으로 눈 부십니다. 온 세상 향기 다 채워주고 해는 다시 집니다.새벽산길을 걸으며 시인은 자연스레 진행되는 자연의 순리를 새삼 깨닫게 되고 그 순행에서 희망의 빛을 보고 있다. 산과 들, 냇물과 바다, 일출의 아침볕과 일몰의 노을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며 굴러가는 희망차고 눈 부신 빛이 흐르고 있음을 예찬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4-08
주어에도 있지 않고목적어에도 없다행간에 떨어진 이삭 같은 낟알 같은, 떨군 채 흘린 줄도 모르는, 알면서도 주워 담고 싶지 않은, 그런 홀대를 누리는 자유로움으로, 어떤 틀에도 어떤 어휘에도 담기지 못하고, 어떤 문맥 어떤 꾸러미에도 꿰어지지 않는, 무존재로 존재하는시간 안에 갇혀서도시간 밖을 꿈꾸느라바람이 현주소다허공이 본적이다존재의 근원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허망함과 허무에 가 닿아있음을 본다. 어떤 묶임이나 속박에도 자유로운, 무존재로 존재하는, 시간에 구속돼 있으면서도 시간 밖을 꿈꾸는 모든 존재들은 허공이 본적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인식에 그것이 여실히 드러나 있음을 느낀다. 시인
2021-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