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보면푸른 것들이발 걸 때 있다제 삶의밑바닥을 딛고환하게 솟은 것들이나보다도내 절망을 향해발을 걸어 와오히려 하루 종일넘어지고 싶은그런 날이 있다우연한 일이라고 넘겨버리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일이 있을 때가 있다. 풀숲 길을 가다보면 푸른 넝쿨들이 발에 걸릴 때가 있다. 이것을 시인은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에 뭔가를 타이르는 것으로 비유하면서 자연에서 삶의 한 이치를 터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존적인 나보다도 휘청거리고 절망하는 나의 삶의 자세에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루 종일 넘어지고 싶다는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시인
2013-05-13
조금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어디로 갔나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코를 맵싸하게 하는데어디로 갔나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되돌아 온다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나는 풀이 죽는다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아내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는 노시인의 애잔한 마음이 그려진 감동적인 작품이다. 수십 년간 들었던 목소리, 수십 년간 맡았던 살 냄새, 너무도 깊이 각인된 부부의 사랑을 확인하며 시인은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시인
2013-05-10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학창 시절 곱게 머리카락을 땋은 그 많던 여학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보통사람이 되어 부엌과 안방에 갇혀 개밥의 도토리처럼 타자로 소외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진 시인의 인식에는 여성들이 사회적 위치나 역할에 여전히 불이익을 당하거나 소외되어 있다 라는 생각이 박혀있다. 이러한 불균형의 사회현상에 대한 불만이 바탕에 깔린 작품이다.시인
2013-05-09
버드나무 냇가에 앉아물결 하나 접어그대에게 편지를 쓰네냇물 속에는글자처럼 몰려다니는은빛 송사리 떼머릿속에는송사리 떼처럼 몰려다니는그대 생각물결 하나 접어그대에게짧은 편지를 쓰네흐르는 물결 위에 편지를 쓰는 시인의 마음이 참 곱고 정겹다. 눈빛으로 마음으로 써서 띄워 보내는 편지라 할지라도 연필로, 잉크로, 혹은 먹으로 쓴 편지 못지않게 절절하고 진실된 마음이 담긴 것은 아닐까. 곱고 아름다운 시심이 은물결처럼 반짝이는 작품이다.시인
2013-05-08
(전략)잘 가라그 어느 연대, 땅에선들청춘의 날들은 억지로라도괴롭고 힘들어하지 않았으랴잘 가라 청춘다가오는 날들이 결례 같은 죽음뿐일지라도무작정 떠밀려온 채 살아 애쓰는 여기가 나의 거점그때 그 패배와 나락의 순간들이 없다면이토록 깊고 서늘한 사랑의 완성을 꿈꿀 수 있으리`매장시편`으로 잘 알려진 시인 임동확은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에 관심을 가지고 쓴 시가 많다. 시인은 한 편의 고별사를 쓰고 있다. 살면서 덮쳐온 치욕과 어둠, 죄의식과 굴종에 대한 결별을 선언하는 고별사이다. 청춘을 사로잡았던 기억들이 비록 패배와 나락의 순간들이었을지라도,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일지라도 시인은 거기에서 깊고 서늘한 사랑의 완성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3-05-07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붐비는 국숫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세월 넘어온 친정 오빠들 서로 만난 것 같다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쯧쯧쯧쯧 쯧쯧쯧쯧손이 손을 잡는 말눈이 눈을 쓸어 주는 말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식당 일을 손 놓고 온 사람도 있다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쯧쯧쯧쯧 쯧쯧쯧쯧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평상이 있는 국숫집은 화려하게 꾸며진 번듯한 음식점이 아니다. 평상이 가게 앞에 놓인 수수한 국숫집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즐겨찾는 허름한 맛집일 것이다. 거기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어딘지 많이 본듯한 친정 오빠 같은, 동생 같은 정이 묻어나는 그런 정겨운 사람들이리라. 그런 사람들을 이어주는 곳이 바로 이웃집 같은 국숫집인 것이다.시인
2013-05-06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오랜 날이 지나서야 알았네갈대가 눕고 다시 일어나는 세월가을빛에 떠밀려 헤매기만 했네한철 깃든 새들이 떠나고 나면지는 해에도 쓸쓸해지기만 하고얕은 물에도 휩싸이고 말아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이 시에서의 강의 의미는 우리의 인생, 삶을 지칭하고 있다.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만큼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시적화자는 어느 쓸쓸한 저녁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 강변에 가 닿는다. 이제껏 살아온 자기의 한 생을 뒤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바람이 불면 갈대가 누웠다가 일어나듯 부딪쳐 넘어지면서 다시 일어나곤 했던 생의 지난 시간들을 성찰하고 있다.시인
2013-05-03
숲속, 더 높이 산정 어디에도바람에 쓸린 뼈 한 조각 찾을 수 없다세 들어 살던 하늘 한 조각 비워 두었을 뿐이 지상에서 꿈꾸지 않았으므로아프지 않은 죽음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바람보다 몸이 가벼워질 때깊은 침묵으로 서서히지워질 뿐쓸쓸한 추락으로 땅 위에 몸을박지는 않는다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와화전(火田)으로 땅을 갈며 또 다시 그 위에무덤을 만들지만새들의 무덤은 없다새는 초월을 꿈꾸며 더 넓고 높은 천상의 공간에 대한 꿈과 이상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단호한 어조로 지상적 삶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지상의 삶이 시련과 고통의 과정이어서 이런 아픔 때문에 하늘에 세들어 살며 하늘을 꿈꾼다면 그의 삶은 한없이 가벼워지고 잊혀질 존재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아무리 지상의 삶이 힘들고 아픔 투성이라할지라도 지상의 삶을 지지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리라.시인
2013-05-02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 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게 손을 잡고 올라간다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담쟁이는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푸르게 그들의 생명을 이어가는 식물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삶일지라도 견디고 극복하기 위해 애쓴다면 절망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담쟁이를 통해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위로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건내는 작품이다.시인
2013-05-01
창문 밖, 사막, 바라보고 있다내세의 모래 언덕을, 전생처럼 불어가는 모래의 바람창가에서 이십 년 전쯤 처음 만났던 노래를 들으며찻잔을 훌쩍이다가, 나는 결정한다이제껏 내가 먹여 키워왔던 슬픔들을이제 결정적으로 밟아버리겠다고한때는 그들이 날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했지만내 자신이 그것들을 얼마나 정성스레 먹여 키웠는지 이제 안다그 슬픔들은 사실이었고, 진실이었지만그러나 대책 없는 픽션이었고, 연결되지 않는 숏 스토리들이었다하지만 이젠 저 창 밖 충경, 저 불모를 지탱해주는눈먼 하늘의 흰자위저 무한으로 번져가는 무색 투명에 기대고 싶다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시인은 무한의 시간과 마주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만든 역사의 시간표를 넘어서 우주가 그려내는 무한의 길을 바라보고 있다. 캔자스의 `더스터 인 더 윈드`를 들으며 그 무한의 시간을 절감하고 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 시는 슬퍼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아직도 순수한 소망과 꿈, 그리고 아픔을 느낄 만한 감정의 세포가 살아있다는 것을 뜻하기에 매우 의미있는 것이라는 것을 건내고 있다.시인
2013-04-30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않는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그러나 너의 얼굴은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번개처럼번개처럼금이 간 너의 얼굴은1960년 4·19 혁명 직후에 씌여진 이 시에 나오는 연인은 의미가 확장된 너가 아닐 수 없다. 너로 하여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사랑의 양면성을 깊이 꿰뚫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했다하더라도 그것은 어느 순간에 변질되거나 깨져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일이기에 그것마져 얼마나 부잘 없는 것이냐를 깨닫고 있다. 사랑의 속성을 빌어 민주화에 대한 열망, 신뢰 의지가 강하게 피력된 시이다.시인
2013-04-29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될 수 있을까외로워 쳐다보면눈 마주쳐 마음 비쳐 주는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가슴에 화안히 안기어눈물짓듯 웃어 주는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별 하나를 갖고 싶다마음 어둔 밤 깊을수록우러러 쳐다보면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길을 비추어 주는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외롭거나 세상일이 괴로울 때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고백하는 따스한 사랑의 시이다. 그런 사람은 별과 같은 사람이고 꽃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시인은 아무리 괴롭고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다 해도 따스하게 감싸안아 치유해줄 수 있는 사람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자기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따스한 사랑의 노래가 아닐 수 없다.시인
2013-04-26
강 건너 어둔 숲에 버려진 기와집들오랜 세월에 바래진 빛깔로 겨우 어른댄다갓 피어나 버들강아지나 물푸레나무, 하류를거슬러 올라온 무나무들이 물줄기 휘감고일어나다 쓰러지길 되풀이하는 동안내 모습은 홀로 물빛에 잠겨 반짝이고다 저녁, 가벼운 바람에 휩쓸려 같이 흐르는데강둑에선 자잘한 풀꽃무더기들연방 꽃망울 톡 ,톡 터뜨리며 강물을 시샘한다갈수록 강은 얕아지고 강둑은 높아져도내 모습은 아래로, 아래로, 검게, 흘러만 간다아직은 시린 봄 강가에서 되살아나는 생명의 불꽃들을 바라보는 시인은 그 경이로움에 놀라고 그들에게 마음과 눈길을 주기에 바쁘다. 봄이 스미는 강가에서 차오르는 생명의 기운들을 바라보는 시인은 또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 자신의 의식이나 마음은 아직 어둡고 차갑다. 그래서 검게 흘러간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리라.시인
2013-04-25
앞 뜨락 꽃사과 곁에 한 무더기, 뒷 뜨락 장독대 앞에 한 무더기 수염도 실하게 꽃잎 도톰하게 튼실한 할미꽃들 어머니 무덤가에 두 가닥 겨우 솟은 할미꽃이 애처로워 장독대 할미꽃 세 가닥 덜어내 보태드렸는데 양달도 소용없어라 오늘 올라가 보니 역시나 애처로운 편으로 고개 떨구고 있었다 모두 제자리가 다 따로 있는 법, 옮겨가면 몸살을 앓는 법 오늘도 눈으로 깨달았다 연전 내게 옮겨와 얼마나 응달로 숨어 몸살 앓았을까 이젠 내 곁을 떠나 튼실해졌을 터, 한 무더기 이별을 내가 몸살하고 있노니 연전의 내 할미꽃이여아무리 미미한 생명체일지라도 생존하는데는 일정한 방식과 여건이 있어야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해 어머니 무덤가에서 옮겨다 심은 할미꽃들이 고개를 떨구고 시들한 상태에서 죽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며 우주의 모든 것들은 모두 제자리가 따로 있다 라는 진리를 툭 던져주고 있다. 아무리 햇볕이 잘드는 양달이라 할지라도 소용없는 할미꽃들. 응달, 그늘에 숨어 고개숙이고 사는 것이 그들 생존의 방식임을 통해 이런 삶의 양식을 우리게 건내고 있다.시인
2013-04-24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아주 잠깐이더군그대가 처음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멀리서 웃는 그대여산 넘어 가는 그대여꽃이지는 건 쉬워도잊는 건 한참이더군영영 한참이더군꽃이 피고 지는 과정에 빚대어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잊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결별한 사람을 잊기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시이기도 하다.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은 우리네 생의 한 과정과 같은 것이리라. 선운사에서 활짝 핀 동백꽃을 바라보며 이별한 임을, 그리고 그 임을 잊지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고 있다.시인
2013-04-23
복사꽃밭에는빗속에 꽃을 끄르는 복사나무가 있다빗속에 꽃에 드나드는 호박벌이 있다감나무에는질긴 살갗을 찢고 나오는 잎사귀가 있다비속에 몸통을 밀고 나오는 날개가 있다봄산에는가질 수 없는 연두가 있다유채밭을 데리고 유채를 품은 둠벙을 데리고 날아오르는 연두의 능선이 있다봄산에는빗물을 머금은 참꽃처럼 목청이 젖은 산비둘기가 있다봄이 밀려드는 모습을 역동적인 풍경으로 제시하고 있는 시이다. 봄비 속에 돋는 새 순이나 봄꽃들에 찾아드는 벌. 봄산에 퍼지기 시작하는 연두의 환한 빛들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봄 풍경 속에는 빗물을 머금은 참꽃처럼 목청이 젖은 산비둘기의 비행이 있어 더욱 깨끗한 생명체들의 향연을 그려내고 있다.시인
2013-04-22
꽃씨를 떨구듯적요한 시간의 마당에백지 한 장이 떨어져 있다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이지만비어 있는 그것은신이 놓고 간 물음시인은 그것을 10월의 포켓트에하루 종일 넣고 다니다가밤의 한 기슭에등불을 밝히고 읽는다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이지만비어 있는 그것은 신의 뜻공손하게 달라 하면조용히 대답을 내려 주신다적요의 시간 마당에 떨어진 백지 한 장의 의미는 무얼까. 시인은 신이 놓고 간 물음이라고 말하고, 또 신의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가득 비어 있어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많고 비어 있음에 대해 아무에게도 탓하지 않는 백지의 속성을 통해 우리 인생이 견지해가야할 삶의 태도를 은근히 말하고 있다. 소유에 집착하는 우리 시대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가 깊고 크다.시인
2013-04-19
작고 까무잡잡한 것들만 보면누이야, 나도 모르게 널 생각하며온종일 마포 강변에서 서성이고 싶었다육삼빌딩 아래 마포 선착장 강변길저러이 말갛게 떠가는 몇 생의 흔적들이오늘따라 왜 그리 서운한지스무 살 적 오월에 병풍 쳤을 목숨이었다마흔하고도 몇 살까지 뒤뚱대며 달려와이제 어느 길모퉁이로 들어서고자핏발 서린 눈으로 쓸쓸히 미소 짓는가돌아보면 사납고 모질었던 옛 그림자였다아무렴, 나도 이만큼 살았으니그래도 한세상 잘 놀다 가는 거다저무는 마포 강변에서 시인은 자신이 건너온 사납고 모질었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고 있다. 1980년 광주를 떠올리며, 그 격랑의 세월을 뜨겁게 살아온, 함께한 사람들을 돌아보고 있다. 핏발서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온 시간들과 쓸쓸히 미소 짓는 마음이 이제는 그래도 한 세상 잘 놀다가는 것이라고 토로하는 시인의 마음이 착잡하고 쓸쓸함에 젖어있음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시인
2013-04-18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우리의 삶이 본디 깊은 슬픔에 젖어있는 것이라는 존재론적 인식이 깊이 뿌리내려진 작품이다. 갈대는 바람 때문에 흔들린다고 보지 않고 근원적인 슬픔을 안고 가만히 흔들리며 울고 있다고 보고 있다. 우리네 한 생도 슬픔과 눈물의 시간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 속에 진정한 행복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시인
2013-04-17
저 뒤안길 대숲에는우리가 돌아보지 않고 잊어버린그림자가 바람과 함께 쓸쓸히 살고 있다달빛이 새어드는 대숲에는스산한 댓잎 바람에 옷깃을 펄럭이는우리의 그림자들이 기다리고 있다언젠가는 꼭 한번 만나야 할그림자들이 댓잎 바람에 부서지며기억 속에 서성이고 있다뒤안길 대숲 속에 청청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그림자. 우리가 버린 그림자지만 그것은 무엇일까. 살면서 우리가 가졌던 희노애락, 삶의 모양들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 그림자이리라. 영원히 기억 속에 서성이고 있는 그 그림자를 언젠가 꼭 한 번은 만나야한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럴지 모른다. 우리가 지나온 삶의 기쁨과 환희 행복 혹은 삶의 좌절, 슬픔, 한스러움, 후회, 아픔, 증오 같은 감정이 얽혀있는 지난날에 대한 성찰은 꼭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잊어버려야할 것들이 아니라 새로움을 뚫고 나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라 해야할 것이다.시인
2013-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