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세계 이 세계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짬이 나면 다시 가 보는 세계먼 세계 이 세계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먼 세계 이 세계(저기 기독교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도가가 지나간다)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머나멀어서 쓸쓸한게 아니라 쓸쓸해서 머나멀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 시를 접해야할 것이다. 주체가 쓸쓸하니 멀게 느껴진다는 말, 주체가 멀게만 느껴진다는 것은 주체가 있는 듯 없는 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의 기운이 어디서부터 나오고 어디로 빠져나가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깊은 존재론적 회의에 빠지게 하는 시이다.시인
2013-11-14
내 생가(生家)의 겨울 뜨락내리던 달빛수척한내 비애의 장신(長身)처럼한 그루 감나무도 아직 그렇게 있을까지금은여기 와 있네수유리 종점 화계사 입구십년을 견딘 변두리내 주거(住居)의 이 좁은 뜨락을싸늘한 달빛 내리고 있네한밤에 혼자 일어나그대를 다시 만나고 있네불꽃같이 타올랐던 청춘의 시간들 위로도, 이제는 한 생을 관조하는 노년의 시간들 위에도 달빛은 비치고 있다. 사랑과 문학과 혹은 사상과 그 어떤 소중한 생의 덕목 위에도 달빛은 비춰졌고 비록 번성하고 뜨겁게 달아올랐던 어떤 것들이 시들고 소멸되어가는 과정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 달빛은 변함없이 그것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시인은 깊은 마음의 눈으로 그 달빛을 바라보고 있다.시인
2013-11-13
어둠에 손을 씻던 맑은 날들을 길어내 언제 저렇도록맹목을 위하여만저무는 너의 유리창에 부서질 수 있을까무섭지도 않느냐 어리고 가벼운 것이내 정녕 어둠 속에깨끗한 한 줄 시로만즐겁게 뛰어내리며 무너질 수 있을까온 하늘을 뒤덮으며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한 생을 살아온 자신을 들여다보며 회한에 젖어있다. 맹목으로 표현한 저 흰 눈들의 거침없는 투신을 바라보면서 한 생을 살아오면서 그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쏟아 부은 적이 있었던가. 나를 던져 즐겁게 무너져내릴 수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의 시간들을 한번은 돌아보게 만드는 시가 아닐 수 없다.시인
2013-11-12
늙으면 악기가 되지어머니는 타악기가 되어움직일 때마다 캐스터네츠 소리를 내지아버지가 한 때 함부로 두드렸지잠시 쉴 때마다자식들이 신나게 두드렸지석탄먼지 속에서도쿨럭, 거리며 두드렸지뼈마디마다두드득, 캐스터네츠는 낡아갔지이제 스스로연주하는 악기가 되어안방에서 찔끔베란다에서 찔끔, 박자를 흘리고 다니지평생 동안 남편과 자식들을 챙기고 키우느라 어머니는 헌신한다. 온 몸을 다 써버리는 것이다. 이제 연세가 높으신 어머니의 몸에서는 각종 신체의 부분들이 마모되고 기능이 저하되어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면서 소리가 난다. 시인은 그 소리를 캐스터네츠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땅 어머니들의 몸 어딘들 그런 소리가 나지 않겠는가. 오롯이 자기를 다 헌신해버린 빈 껍질 같은 통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그런 소리통인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거수경례를 바치고 싶은 아침이다.시인
2013-11-11
율하리로 가는 비탈길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오고 있다. 남자는 한 손에 붉은 플라스틱 의자를 한 손에는 여자의 반신불수를 움켜쥐고 있다. 여자는 왼쪽이 무너지고 남자는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기우뚱 기우뚱 이쪽과 저쪽으로 무너진다. 남자는 기울어진 언덕을 그들은 이미 기울어진 기둥을 두 손으로 꽉! 버티고 있다. 그는 쉼없이 의자를 놓았다 들었다 하고 여자는 쉼없이 앉았다 걷다 한다. 그 때마다 무너진 몸이 흔들리고 붉은 플라스틱 의자도 함께 삐걱거린다.아름다운 동행을 본다. 불구의 반려자를 위해 붉은 플라스틱 의자를 가지고 언덕을 오르는 한 남자의 절절한 사랑을 본다. 이쪽 저쪽으로 무너지며 여자를 부축해서 가고 있는 남자도 어쩌면 신체적 불구를 가진 사람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쉼 없이 의자를 놓았다 들었다 하면서 여자를 도와주고 지지해주는 남자의 헌신과 사랑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시인
2013-11-08
오늘 내 밥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끝날지 모르지만아니 내 인생이 후반전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나 또한 매서운 겨울 맨몸으로 당당히 서 있는이 배롱나무의 의연함과 아름다움을 배우고결국 인간도 오뉴월 붉은 배롱나무 꽃이나무성했던 푸른 나뭇잎처럼때가 되면 순순히 떨어지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다시 한번 깊이 머리 숙이고말없이 콘크리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내 연구실로 걸어가곤 한다맞다. 인생이란 곱고 아름답게 꽃피우는 시절이 지나면 꽃은 지고 잎들은 시들어 떨어져 볼품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연구실 앞 화단에서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새봄을 기다리고 있는 배롱나무를 바라보면서 겸허한 생의 진리를 얻는다. 고개숙일 줄 아는 겸손하고 겸허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시인
2013-11-07
멀리 푸른 상처를 앓는흰 선을 따라바다가 하얀 이야기를 한다하늘과 바다 사이에백사가 사는 푸른 거울 속은반지 낀 여인이 먼 길을 가는저 너머에는눈 멀고 귀 먹은 짐승들이 사는섬이 있어그곳에 가야 하는데가면 갈수록, 멀어지는눈 언저리에 눈물 아롱이는 하얀 섬이방울 방울 떠 온다나는, 아무 말도 적히지 않은하얀 백지 한 장 둘둘 말아 허공에 건낸다시인이 꿈 꾸고 있는 푸른 바다 밖의, 수평선 너머의 백사가 사는 세계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너머에는 눈 멀고 귀 먹은 짐승들이 사는 섬이 있다고 하는 거기는 어딜까. 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그래서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거기는 어딜까. 거기는 실재하는 곳이 아니라 시인의,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욕망의 세계 혹은 이상의 공간이 아닐까. 끝내 거기에 닿지 못하는 시인은 하얀 백지를 허공에 건내면서 포기하고 항복해버리고 있다. 사람들 중에는 그걸 알면서도 쉬 포기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목마르게 갈구하고 갈망하기도 한다. 그것이 사람이다.시인
2013-11-06
기층을 뚫고 푸석푸석 일기 시작한 흙바람을만 리 길 저 묵음의 피리 하나로 마중 나온푸른 순 여리디 여린 사월의 뿔들 봐라긴 병고 급경사 진 내 스물의 해안에도우우우 투우로 우는 비린 사월 한 자락그렇게 돋았다 꺾인 뿔의 그루터기 봐라저기 외뿔 축축한 낮달로 숨은 꿈들하늘소가 연한 뿔로 서로 눈짓하는 것을오늘은 그리움으로 사월 언덕 가 봐라꽃다운 청춘의 봄날 갑작스런 병고로 시작된 가혹한 추락의 날들에 만난 것이 시조였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이 시조에서 사월의 뿔, 그 여리디 여린 새 생명의 초록 불꽃을 본다. 숨은 꿈들을 품고 건너가는 하늘소의 연한 뿔에 감기는 사월의 바람과 그 생명 촉진의 기운은 시인을 소생시키고 다시 사월의 언덕을 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시인
2013-11-05
사람이 살면서세 번의 고비가 온다고 했는데한번은 은행 신축 공사장에서철근 더미에 깔렸다가 용케도 일어 선 것이고또 한 번은 트럭 뒤 돌을 싣고 언덕 내려오다가절벽 아래로 굴렀다간신히 소나무에 걸려지금까지도 이렇게숨 할딱거리며 살고 있다가만히 생각해 보니두 번째 고비까지 넘겼다고 생각되는데늦도록 술 마시다문득 불안한 세 번째 고비를 생각하며어두운 골목 걸어오면서아무도 없는 뒤를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자꾸 돌아본다비틀거리다가도 얼른 길을 바로 잡는다인생을 누군가가 고해(苦海)라고 했던가. 한 생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다. 아프고 아슬아슬하게 걸어온 지난날들을 돌아보는 시인의 눈이 아직도 불안하다. 그 어떤 예감으로 우리는 늘 희망적이거나 혹은 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비틀거리다가도 얼른 길을 바로 잡는`시인의 태도는 본받을 만 하지 않을까.시인
2013-11-04
단발머리에 머리띠 꽂고어머니, 지팡이에 업혀재 넘어 절에 가신다혼자서는 쓸쓸하다고,혼자서는 눈물겹다고,초승달도 함께 가신다연로하신 어머니, 하얀 머리카락 단촐하게 자르고 딸들이 꽃아 준 머리띠 하고 지팡이 짚고 절집 오르신다 어머니. 남편 일찍 여의고 아이들 다 떠나가버린 쓸쓸한 한 생을 마감해 가는 이런 어머니들이 이 땅에는 많다. 쓸쓸하고 눈물겨운 노년의 삶이 참으로 힘겨운 고갯길을 오르는 것 같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 외로운 길을 초승달도 함께 가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시인
2013-11-01
오늘은 3살짜리 암소가 석문이 등록금으로 팔려가는 날외양간을 나서며 왕방울만한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할머니는 자식 같은 소 잔등을 쓰다듬어준다에미, 애비 없는 손자석문이의 앞날을 등에 짊어지고뚜벅뚜벅 앞마당을 걸어 나가는 3살짜리 암소할머니는 소 울음소리를 받아 삼키며어여, 어여 가자고 손짓 눈짓으로 배웅을 했다시를 읽다가 가슴 한 쪽이 콱 막혀오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하는 쓰라린 서사가 바탕에 깔린 시이다. 부모를 다 잃은 손자 석문이의 등록금을 위해 애지중지 키워오던 암소를 팔러가는 날, 소도 울고 할머니도 울고 하늘도 울어주는 슬픈 그림 한 장을 보면서 이런 기막힌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흔하게 놓여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눈길도 조금만 주위를 살펴보면 가슴 뭉클한 감동에 들게 될 것이다.시인
2013-10-31
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되는데사람의 마음은 부서져 무엇이 되나?밤새워 우는 새아침 이슬기와집 처마 끝에 걸린 초승달더러는 풍경소리바다는 변하여 뭍이 되는데우리의 사랑은 변하여 무엇이 되나?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되고 바다가 변하여 뭍이 되는데 우리의 사랑은 변하여 무엇이 되는걸까 라고 자신에게 묻고 있는 시인은 오랜 사랑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듯하다. 애절하게 우는 새처럼 처마 끝에 걸린 초승달처럼 사랑의 애닯음과 깨끗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뿐아니라 비록 죽음으로 헤어진다해도 그 사랑은 영원히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시인
2013-10-29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빗나간 힘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이성(理性)의 차가운눈을 뜨게 한다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사금파리여,지금 나는 맨발이다베어지기를 기다리는살이다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무엇이나 깨진 것은칼이 된다우리네 삶이 상당히 기울어져 있다.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시인은 구체적 사물인 그릇을 통해 편협하지 않은 합리적 삶과 중요의 미덕을 추구하고 있다. 이를테면 단선적이고 편향적인 규범 가치관 같은 왜곡된 세계에 대해 경계하고 대결하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강단지게 드러난 시이다.시인
2013-10-28
저 먼동의 눈부심,열 서너 살 이제 밥을 생각으로 바꾸기 시작하는 눈부심,꽃의 눈부심, 살(肉)의 눈부심, 살의 입구의 눈부심에눈 감네골짜기를 내보내는 산처럼모로 누워 절망을 다스리던 날들 눈부시네만개(滿開)한 거짓의 눈부심에눈 감네부는 바람을불어오는 바람을 동여매는가?뜰의 풀은 마르고입술 새파라니 하고는눈부심들을 동여매네저 석양의 눈부심수수하게 차려 입고 가리려 하네살의 눈부심 가리려 하네푸르게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눈부신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꽃의 눈부심, 살(肉)의 눈부심 살의 입구의 눈부심 등을 예찬하고 있다. 언젠가는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그것마저 눈부심이 아닐까. 저 석양의 눈부심이라고 말한 시인의 인식에는 착하게 나이 들고 늙어가는 우리네 한 생의 후반부도 청춘시절의 푸르름 만큼이나 아름답고 고운 것이며 눈부신 것이 아닐까.시인
2013-10-25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숨 막힐 듯한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새에서 나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에 귀 기울이다보면 지하도에 웅크리고 있는 우리 시대의 아픔인 노숙자들을 떠올린다.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떠나 웅크린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불쌍한 노숙자들은 언젠가 어린 풀숲과 꽃들이 피어나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염원하며 밤새워 피 끓는 울음소리를 토해내고 있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진한 사랑으로 피어오를 노래를 부르는 것이리라.시인
2013-10-24
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있지만후회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어차피 마지막은 너무 빨리 다가오고아직은 뒤돌아보며 살 때가 아닌데그리움의 땅으로 자꾸만 이끌리는내 영혼을 잡으며아직은 살아보자고 다짐을 한다어느 젊은 수도자의 고뇌에 찬 표정머릿속에 닮으며나의 길을 지키고 섰다우리네 인생을 길에 비유하는 경우 많다. 시인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대한 일종의 미련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더 좋은 길 더 나은 길에 대한 미련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더 나은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더 행복해지지 않았을까하는. 그러나 시인은 미련과 후회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남은 삶의 길을 당당히 충실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시인
2013-10-23
적자로 끝내 비(非)공무원 출입을 막았지만 북구청 구내식당은 푸짐한 점심이 금이천원, 노인과 아픈 이, 가난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뭉게뭉게 구름 피어오르고 큰 뚜껑 여닫는 소리, 여인네들 주고받는 목청이 꼭 옛날 옛적 잔치 마당 같은 거기서 여든 언저리 노인을 만났다 먼저 더듬더듬 밥, 반찬을 비닐봉지에 담아 손가방에 넣고 나서야 주름 환해지며 나머지를 먹기 시작했다 몇 차례 못 본 척, 묻지도 않았는데 그날은 등 뒤쪽으로 소리 안내고 지나가는 발자국처럼 들릴락 말락 이랬다.집에 아픈 사람이 혼자 있어요참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이다. 어느 구청의 구내식당에서 시인이 본 참으로 감동적인 그림 한 장이 아닐 수 없다. 여든 언저리의 노인이 집에 혼자서 끼를 기다리는 아픈 배우자를 위해 밥과 반찬을 손가방에 몰래몰래 넣은 이후에야 몇 숟가락 자신의 밥을 먹는 모습이야말로 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시인
2013-10-22
아버지를 만나러 우포에 갔습니다수천 페이지 모래바람 속을 뒤졌습니다아버지의 발자국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사시사철 늪 속에 잠겨 있는 우포를 찾았을 때아버지의 발자국을 집어삼킨 사구 하나고향 뒷산에 솟아 있었습니다낙타처럼 등에 혹을 달고말없이 누워 있었습니다밤마다 혹에서 나와 마을로 내려온답니다타박타박 낙타처럼 내려온답니다바람뿐인 아버지 바람을 주머니처럼 차고어머니 머리 풀고 있는 늪으로 내려온답니다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 바람주머니를 버리러 몰래 내려온답니다바람 도서관에서 가시연꽃 하나 찾았습니다어둠 속에 피어 있는 가시연꽃밤이슬 맞으며 머리를 풀고 있었습니다원시의 생명체들이 살아숨쉬는 우포늪에서 시인은 그 생명의 꼭지들에 이는 바람과 그들의 언어를 느끼고 있다. 어둠 속에 피어 있는 가시연꽃에도 잴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에 타래로 엮여 아름다운 목숨을 이어가는 수많은 생명체들에서도 발견되는 그들의 언어와 문장들을 시인은 그 우포늪이라는 바람 도서관에서 찾아 읽고 감동받고 있는 것이리라.시인
2013-10-21
강풍에 나부끼는 활엽수들산발한 채 달려드는 빗줄기불빛의 혀로 감싸 안는 기둥들불어난 물살에떠밀려가는 냇가의 돌들갑작스런 방문에 부산스러운 것들깜깜한 황홀의 소용돌이가라앉은 뒤낱알 뱉어낸 푹 꺼진 자루로 남아오래 허전하고 아픈 영혼들태풍의 거센 바람과 세찬 빗줄기를 견디는 나무들과 거친 물줄기에 단단히 자기를 옮아매고 견디는 냇가의 돌들을 본다. 태풍 지난 뒤의 여러 생채기를 보면 그래도 꿈쩍하지 않고 그 어려운 상황을 견디고 버틴 강단진 그들의 생명력을 본다. 깜깜한 황홀이 지난 뒤의 자연처럼 의연하게 우리에게 닥쳐오는 인생의 강력한 태풍을 맞을 수는 없는 걸까.시인
2013-10-18
- 얘야, 꽃은 보여주는 것만 아니다, 라며 무화과 꽃, 저 혼자 꽃받침 속에서 필 때 쯤 독장골 나락 논에 엎드려 두벌, 세벌 김매다 휘어진 등짝으로 팔 남매 꽃피워낸 당신- 무화과는 속에서부터 익는 열매란다.당신의 아이, 그 아이의 아이그 아이의 육 개월 된 딸 민채를 품에 안고줄장미 담장 곁,당신이 깔아놓은 30년생 짙은 그늘 아래서이 땅의 아버지들은 어쩌면 꽃 피우지 않아도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입안에서 구르는 열매를 내놓는 무화과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평생을 꽃피워보지 못하고 자식을 위해 희생과 정성과 사랑을 다 바친 그들이다. 등짝이 휘고 몸이 쪼그라든 어르신네들을 보면, 그 깊은 눈빛을 마주치다보면 가만히 거수경례를 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식들을 위해 한 평생 자기를 다 쏟아 부은 그 거룩한 본능에 감사와 외경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시인
2013-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