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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태극기 달기를 통해 다시금 나라사랑의 마음을

▲ 허윤수포항시 자치행정과장 10월은 일 년 중에 국가경축일이나 기념일이 가장 많은 달이다. 우선 오는 10월1일은 우리 군의 위용과 전투력을 나라 안팎으로 과시하고 군 장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지정된 `국군의 날`이 66번째를 맞게 된다. 여기에 반만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생일인 개천절이 10월3일이고, 우리 글자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한글날이 10월9일이다. 그래서 10월은 그 어떤 달보다 태극기가 많이 게양되는 달이다.세계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국가경축일 등이면 으레 국기를 게양하고 온 국민이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기념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기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 4괘로 이뤄져 있어서 태극기(太極旗)로 불린다.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있는 태극기의 주된 의미는 평화, 단일, 창조 광명, 무궁, 조화, 평등이라고 한다.사전적 의미로 국기(國旗)는 일정한 형식을 통해 한 나라의 역사와 국민성, 이상 따위를 상징하도록 정한 깃발을 말한다. 그래서 국기는 그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고 그 나라 국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그런 이유로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태극기를 몰래 숨기고 항일독립만세운동을 펼쳤고, 광복의 그날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에는 온 나라를 뒤덮었던 태극기의 물결과 붉은 함성을 통해 전 세계에 우리의 하나 된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금 이 시각,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서는 태극기를 흔들며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새삼 태극기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딸 때마다 경기장에는 태극기가 드높이 거양되고 애국가가 울려퍼진다. 메달을 딴 선수는 눈물을 흘리며 가슴에 새겨진 태극기 위에 손을 올려 감격해 한다. 경기장에 온 관중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한다.그렇듯 태극기는 우리들 가슴에 애국심의 본능을 우러나오게 하는 힘이 있고, 우리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태극기를 곱게 접어 국기함에 넣어 보관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얼굴은 물론 온몸에 태극기를 그리고, 태극기로 만들거나 태극기가 그려진 옷과 모자로 치장할 정도로 태극기에 대한 사랑의 행태는 많이도 변했다.그럼에도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국경일임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에 드문드문 걸려 있는 태극기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것은 필자만의 심경은 아닐 것이다. 국경일이 되면 반상회와 언론을 통해 태극기 달기를 홍보하고 있지만 행인의 눈에 잘 띄는 도로변을 제외하면 태극기를 달지 않은 집이 허다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우리는 그동안의 역사를 통해 태극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됐고, 우리가 하나의 민족임을 확인했다. 그런 태극기에 대한 사랑은 특정행사에 맞춘 단발성으로 끝나서는 안 될 일이다. 태극기의 소중함과 그 의미를 통해 역사적 사실에서 배우고 지켜내는 일이야 말로 나라사랑의 시작이 아닐까?나라사랑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찾아야 한다. 태극기 사랑은 바로 나라사랑의 길이다. 모두가 어렵다고들 한다. 이럴 때일수록 국경일 단 하루만이라도 “나부터”, “내 집부터”라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다는 것은 어떨까? 다가오는 국경일에는 집집마다 거리마다 나부끼는 태극기의 물결을 통해 우리가 다시금 하나 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4-09-25

화랑과 예니체리

▲ 김기조경주문화원장 단풍이 물들기는 아직 이른 가을이지만, 신라의 달밤은 이미 `이스탄불`로 물들고 있다. `형제의 나라` 터키가 자국을 대표하는 문화를 가지고 1만 2천km나 멀리 떨어진 신라 천년고도 경주에 온 것이다. 그렇기에 `이스탄불 in 경주 2014`는 매우 특별한 행사다. 하지만 이 특별한 행사에서 주목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마스코트 화랑과 예니체리다.신라시대 화랑이 있었다면 터키 오스만 제국에는 예니체리가 있다. 이 둘은 다른 점도 있지만 공통점이 참 많다. 당시 이들은 국가의 동량이었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상징이었다.창설 시기는 다르지만 상황은 닮았다. 화랑도는 신라 영토 확장으로 통일의 기반이 된 진흥왕(534~576)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예니체리는 1360~86년까지 27년 간 재위하면서 넓은 영토를 확장한 무라드 1세에 의해 탄생했다.구성원 모두는 매우 뛰어난 학식과 함께 용맹함을 가지고 있었다. 예니체리는 14세기 무렵 창설된 오스만 제국의 국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군 체계 중 하나다.`새로운 병사`라는 뜻을 지닌 오스만 술탄의 친위 보병으로 최정예 부대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아가`라고 불렸다.화랑도는 5세기 경 신라 진흥왕 때 인재 양성 기관이며, 군사체계의 하나로 우두머리를 화랑 또는 풍월주라고 불렸다. 통일 신라의 기반이 된 김유신, 김춘추, 용춘, 사다함 등이 화랑 출신이다.수백에서 많게는 1천여명에 이른 화랑도와 제국의 전성기 때 1만5천명에 달했던 예니체리. 이들은 평소에는 학문에 정진하고 산하를 누비며 무예를 연마했다. 물론 사회 지도층으로서 절제된 생활과 모범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 전시에는 전쟁터로 나아가 물러섬이 없이 국가를 위해 싸우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쳤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의로운 일에 앞장선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었다.이들은 사회 융합과 소통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예니체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정복지의 유대인 자녀로 많이 채워졌다. 배움의 열의가 높고, 지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인간 신체 능력을 초월한 전사 집단으로 키워졌다. 하지만 이슬람교인 오스만 제국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유태교의 정체성을 인정했다.화랑도 또한 평민부터 귀족까지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가야 출신이지만 풍월주에 오르고, 통일 대업의 후광이 된 명장 김유신도 있다.아이러니하게도 세월이 흘러 이 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모습도 닮았다. 예니체리는 훗날 술탄조차 바꿀 정도로 막강해지고, 반란을 도모한 끝에 1828년 해체된다. 화랑도 역시 신문왕 때 김흠돌의 난으로 일정 기간 폐지됐다 다시 부활하지만, 병부에 예속된 형태의 기관으로 막강하던 힘도 없어져 버렸다.경북도와 경주시 그리고 이스탄불시가 `이스탄불 in 경주 2014`의 마스코트를 화랑과 예니체리로 정한 것에는 깊은 뜻이 있다. 화랑과 예니체리는 지난해 터키 이스탄불을 한국의 문화로 물들인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마스코트였다. 대개 행사가 다르면 마스코트 또한 다르다. 하지만 두 행사의 마스코트를 동일하게 사용한 것은 이번 행사가 지난 해의 연속행사로 양국이 `형제애`와 `미래를 향한 동반자 관계`를 지속해 이어 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특히 이번 행사가 열리고 있는 황성공원은 신라시대 화랑들의 수련장이었던 곳이어서 의미를 더한다.지금 경주는 감동과 아름다움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이번 행사의 의미를 상징하는 화랑과 예니체리의 근본정신을 더한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2014-09-19

직장신공

▲ 권오신 로타리코리아 상임고문인생의 멋진 부분은 대부분 후반부에서 일어난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문신 유만주(문신 1755~1788)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 한마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함정에 빠트려 죽었던고….” 재능도 별로고 끈질긴 노력도 않으면서 평생을 입신의 허망한 꿈에 매달리는 조선의 선비들을 두고 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해도 안 될 일에 헛된 희망을 거는 것은 무모하기까지 하며 봄날처럼 지나쳐 버리거나 끝내 오지 않을 날을 기다리게 만드는 대기만성은 그래서 슬펐다”라고 했다.공동체(共同體)나 회사 내에서 인기 있는 사람들은 역시 부드럽고 호불호다. 애매한 태도로 아래 위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게 덧칠을 하는데 능한 사람이다.이런 사람의 큰 특징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법이 없고 자신의 판단이 반드시 정확하다는 말을 어디서도 하지 않는다. 조직 내에서 자신의 인기는 누리겠지만 회사의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형이다.사실 그런 처세(處世)로는 정상에는 갈 수가 없다. 요즘 같은 인터넷 세상에서는 더 걷잡을 수 없다. 아첨을 잘하면 누가 뭐래도 승승장구하고 올곧은 사람의 말은 종종 내침을 받으니 입이 근질근질해도 끝까지 다 말하는 것은 금물이다. 제 패를 함부로 까 버리면 100% 실패하니 목표가 보일 때까지 꾹 누르고 억지로 참는 것.요즘 SNS상에 나도는 일 못하는 직장인의 11가지도 같은 흐름이다. 대표이사의 눈에 쏙 들어오는 사원은 지각을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남보다 먼저 출근해서 신문 읽고 자기자리를 줄곧 지키는 근면성에다 여러 가지 업무를 잘 소화하는 멀티 테스킹이면 승승장구한다. 필수품 프리젠테이션은 첫 1분을 무조건 성공하기 위해서 사나흘을 파고드는 형이다.최근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상사가 늘어나니 성향파악을 하는 것도 출세에 보탬이 된다. 휴가를 100% 소화하지 않는 사람, 회사 동료와 잘 어울리는 마당발하며 하루 일과 정리를 습관적으로 하는 직원은 쉽게 승진 반열에 오른다. 출근하자마자 메일을 잡고 아침시간을 허비하는 직장인은 그 반대다.무엇보다도 취미활동을 통해 체력도 기르고 머리를 비우고 출근하는 것이 산뜻한 출발로 보인다. 회사도 좋고 100세 시대를 살아야 할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며 창의성을 키워 주기 때문이다. 신간(新刊)을 정독하는 습관은 자신을 신지식(新知識)인으로 보이게 하고 미래를 키우는 중요한 습관이다.(출처:SNS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난폭하게 보이는 행동은 절대 금물이다. 아직까지 직장의 주류는 남성인데 그런 처신으로 낙인이 찍히면 곤란하다. 난폭(暴)운전의 성향이 남성들에게서 잘 나타나는 반면 여성들에게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두고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제프리 베티 교수는 “남성 운전자가 여성보다 공격적으로 운전하는 이유는 석기시대의 습관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베티 교수는 남성들이 운전할 때 표출(表出)하는 공격적인 모습은 살아남기 위해 먹을 것을 사냥하던 신· 구석기 시대에 지녔던 난폭한 상황에서 비롯된다는 해석을 달았다. 이처럼 고정관념(固定觀念)이 박혀 있는데다 여성들이 속속 주류사회로 등장하는 우리 사회의 실상에서 보면 당연하다.특히 직장 내에서 공채 합격증(合格證)을 목에 걸고 다니는 천재들과는 정면 승부를 걸지 마라. 단거리(短距離)는 절대 피하는 것이 좋다. 고전의 단골로 등장되는 줄거리 즉 인생의 멋진 부분은 대부분 후반부에서 일어나니 원칙(原則)을 줄곧 지키면서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직장 신공이 두려울 것이 없다.삼국지의 사마의는 병법의 대가이자 천문 기문술에 달통했고 잔인함까지 뒷받침된 당대의 인물이었으나 조조와 그 아들 대까지 엎드려 참는 인내심(忍耐心)으로 서진(西晉) 건국의 기초를 세웠다.

2014-09-19

전국 최대 가마니·새끼 생산지로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6·25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는 모든 것이 여의치 못했던 우리 형편에 가뭄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까지도 이러한 형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의식주의 기본이 되는 식량이 크게 부족했다. 그래서 지방행정의 중심은 단연코 농정 관련 업무들이 차지했다. 필자가 1965년 당시 영일군청에서 근무했던 양정(糧政)계도 농정 중요부서 중 하나였다. 식량의 수급과 유통, 가격 등 식량정책을 관리했는 데, 당시 구호물자였던 외국원조미(미국잉여농산물)가 동빈부두(포항항)에 하역되면 도정 업무를 도맡아 했다.동빈부두는 동해안 수산업 전진기지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6·25전쟁 기간과 직후에는 군수물자와 인력을 수송하는 군사항으로, 1962년 6월에는 국제항으로 개항하면서 외국선박과 외국원조미를 운반하는 대형선박이 입항하는 등 당시에는 우리나라 식량공급의 창구역할을 담당했다.외국원조미는 보통 한 번에 2만여 t이 들어왔는 데, 지역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외국 원조미 중 6할은 입항지인 포항지역에서 도정하고, 나머지 40%는 인근 경주와 영천, 영덕 등으로 분산하여 도정하였다. 당시 산업이 워낙 빈약했었기에 도정업자들은 지역경제를 쥐락펴락했다. 당연히 돈도 많이 벌었다. 포항 부자를 대표한 이들은 지역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냈고, 은행에도 큰 손이었다. 포항의 김유, 최귀돌, 홍봉춘, 정명바우(삼화압맥 사장)씨를 비롯해 영일 흥해의 이장우·배수성·김석암 씨, 연일 박병일, 대송 이영준, 기계 박용수, 청하 정기수씨 등이 그 대표적 인사였다.특히 지금의 중앙상가 영남병원 옆에 자리했던 삼화압맥공장은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할만큼 명성을 날렸다. 압맥(壓麥)은 기계로 납작하게 누른 납작보리를 말하는데, 보리에 적당한 수분과 열을 가해 눌러주었기 때문에 통보리보다 밥을 지을 때 연료가 적게 들고 소화율도 좋았다. 연료부족이 심각했던 당시 군대에 공급되었던 압맥의 대부분은 삼화압맥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온 겨는 경주를 전국 최고의 축산지로 만드는데도 일조했다.외국원조미가 지역경제에 끼친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포항을 전국 최대의 가마니와 새끼 생산지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당시 흥해를 비롯한 포항지역은 일찍부터 가마니와 새끼 생산지로 유명했다. 어장을 막고 그물을 내리는 데 전적으로 이들을 사용하였기에 기술이 앞서 있었던 것. 원조미를 싣고 온 선박의 창고에서 벼를 하역하려면 1t에 보통 14장의 가마니가 필요했는 데, 외국원조미 2만 t이 하역될 때마다 가마니 28만장과 상당한 양의 새끼가 필요했다. 이를 포항지역에서 전량 조달했다. 당시 흥해에서만 일주일에 평균 5천여 장의 가마니를 생산했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고, 부업농가들은 알게 모르게 주머니를 짭짤하게 채웠다. 또한 하역 때마다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보통 20~30명의 인부들이 하역작업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큰 장화를 신고 보관창고에 들어가 나올 때는 장화에 벼를 가득 채워 나오곤 했다. 이를 모으면 하루 평균 1인당 30㎏은 족히 되었는데, 모두 인근식당 등으로 비공식 운반되었다.이처럼 밀반출된 양도 많았지만 하역 기술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작업과정에서 낙곡이 많이 발생했다. 하역장 모래자갈밭에는 이 낙곡을 주워 끼니에 보태는 사람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외국원조미는 당시 하역 인부들과 인근 주민들에게 소소한 소득이 되기도 했다.외국원조미가 동빈부두에 하역된 것은 동해안 지역의 미곡생산이 평야가 많은 호남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 포항과 경주 등에 원조해 줄 수요자가 많았기도 하지만 항구가 있어 군량미 공급이 용이하였던 점도 한 몫했다. 또 당시 포장에 필요한 가마니와 새끼가 전국 주요 생산지라는 부분도 하역기지로 선정되게 하는데 한 요인이 됐다. 외국원조미는 우리의 식량사정을 완화시켜 국내의 곡물가격을 안정시켰는데 포항이 그 중심에 있었다.

2014-09-18

쌀 관세화, 왜 실시하는가

▲ 이종부포항시 농업기술센터 소장 내년 1월부터 우리나라 쌀 시장이 완전히 개방된다. 2014년 말로 20년간 유지해 온 쌀 관세화 유예가 종료되기 때문이다. `쌀 관세화`는 말 그대로 쌀을 수입할 때 관세를 내는 것이다. 2차 대전이 종료되자 세계 각국은 자유무역을 촉진해 경제번영을 꾀하고자, 교역규모가 크지 않은 농산물과 서비스 부문을 제외한 공산품의 관세율 인하에 초점을 맞춘 7차례의 다국간협상(GATT)을 벌여왔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공산품 외 분야의 교역비중이 크게 높아지자 농산물,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을 포괄하는 다자간 협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1994년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 설립과 함께 모든 농산물에 관세를 매겨 교역을 투명하게 하자는 원칙이 마련되었다.당시, 수출주도의 급속한 공업발전을 추진해온 우리나라는 농산물시장의 국제경쟁력이 지극히 낙후되어 쌀 시장 개방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했기에, 우리 민족의 피요 살이요 혼이며 문화인 쌀만큼은 결코 개방할 수없다고 버티었으며 결국 개발도상국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아 10년간(1995~2004년) 쌀 의무수입량(MMA)을 수용하고 나머지 농산물의 예외 없는 관세를 받아들였으며 2004년에는 다시 10년간(2005~2014년) 관세화 유예를 연장하였던 것이다. WTO회원국 중 아직까지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필리핀 뿐이다.20년간 쌀 관세화 유예를 택한 일종의 패널티로 외국쌀 의무수입량은 매년 2만t씩 늘어났으며, 올해는 경기도 전체 쌀 생산량과 맞먹는 40만 9천t이나 된다. 우리나라가 2015년 이후 관세화 유예를 또 하게 되면 가뜩이나 쌀 소비가 줄고 있는 상황에서 쌀 의무수입 물량을 더 늘려야 하기 때문에, 국내 쌀 UR협상에서 정한 국내 쌀과 수입쌀 가격의 차이를 기준으로 높은 관세율을 유지하여 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의무수입량을 늘리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인 것이다.우리나라보다 먼저 쌀을 관세화한 일본은 800%라는 고율관세로 수입쌀은 거의 없고 오히려 일본쌀이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되는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쌀 관세화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 지금, 정부는 쌀 재배 농업인의 소득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쌀 고정직불(쌀 재배농가에게 쌀값 등락과 관계없이 12월 1헥타르(3천25평)당 90만원의 고정직불금 지급), 쌀 변동직불(정부가 고시하는 목표가격과 수확기 산지 쌀값 차이의 85퍼센트에서 고정직불금을 차감한 금액, 익년 3월 지급), 재해보험 등 소득 안정장치를 보완해 나가며 또 쌀 생산기반 정비, 기계화 등 쌀 전업농 육성, 수입쌀 혼합판매금지로 부정 유통을 방지할 계획이다.포항시에서도 지역 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친환경재배단지 확대, 들판공동체 육성, 경영비 절감을 위한 직파재배 확대보급, 농기계 및 농자재 지원 확대, `영일만 친구`로 브랜드화와 직거래장터 개장, 친환경 학교급식 등의 사업을 추진하여 쌀관세화 전환에 만반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쌀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식량이 아니라 우리 농촌의 근간이며 우리 농부들 나아가 우리 민족의 뿌리깊은 정체성이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어려운 난국들을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 밥심으로 극복해 왔다.쌀을 뜻하는 한자 미(米)는 쌀 한 톨을 얻기까지 농부의 손길이 무려 88(八+十+八)번의 손길이 필요함을 표현한 회의문자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 안부를 물을 때 “식사 하셨어요?” 라고 물을 정도로 한국인에게 밥은 먹고사는 문제, 생명, 인생의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인고의 시간을 거쳐서 밥상으로 올라 온 한 톨의 쌀의 소중함과 사시사철 수고로운 농부들의 신성한 노동에 찬사를 보내자.쌀 관세화라는 또 다른 파고 앞에 국익에 도움이 되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4-09-17

국회는 국민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 김영문 한동대 교수공전에 공전을 거듭하며 마비상태에 이른 국회가 제 식구 감싸기만 하는 것을 보며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지난 5개월 동안 단 한 건의 경제·민생 법안도 처리하지 못한 국회다. 이런 와중에도 야당은 국회를 떠나 장외집회를 계속하며 강경 일변도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시가 급한 법안들을 외면하고 국회 밖으로 뛰쳐나가 국정을 마비시키는 행태를 국민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국회가 일도 하지 않으며 세월호를 악용하는 세력의 총공세에 사실상 동조하고 있다는 우려와 함께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물론 중요하지만 국회가 하루 빨리 정상화되어 민생·생활정치에 매진해 달라는 국민들의 염원을 이제는 잘 들어야 한다. 여야 원내대표는 지난달 7일과 19일 두 차례에 걸쳐 세월호 특별법에 합의한 바 있다. 합의한 특별법 골격에는 그동안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던 주요 민생 법안들을 함께 처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여야 지도부는 이미 세월호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직접 부여하는 일은 법체계를 뒤흔드는 것이어서 수용할 수 없다는 결론이 포함된 합의이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의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의 `양보`가 법체계를 유지하며 수용한 특별법이 그 골격이다. 그러나 새정연은 여야가 두 차례나 합의한 세월호특별법을 백지화하며 유족대표가 마주 앉아야 한다는 `3자 협의체` 재협상 안을 내 놓았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정치의 기본을 무시하고 줄곧 유족과 당내 강경파들의 목소리에 끌려 다니는 태도는 거대 야당이 보여줄 모습이 아니다.세월호 특별법 2차 협상을 인준해야 하는 야당의 의원총회 자리에서 새정연은 총력 투쟁에 나설 것을 결의하며 또다시 장외투쟁으로 선회하였다. 세월호 특별법 합의안을 두 번씩이나 뒤집은 야당이 장외투쟁 운운하는 일은 그 명분이 약하기도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정부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것이 야당의 본질기능이라면 야당은 그렇게 싸우도록 제도적으로 마련된 국회 안에서 싸워야 한다. 그 본래의 무대를 뒤로 하고 거리로 나가는 행태에 이제 국민들은 지쳐있다. 야당의 7·30 재·보선 참패와 현재 여론 지지율이 바닥을 치는 까닭이기도 하겠다.세월호 특별법이 제1야당이 국회를 보이콧할 정도의 대단한 법안인가. 세월호 참사가 심각한 사건임은 사실이다. 그리고 유가족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 때문에 정치권이 특별법을 제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은 법치의 상식과 합리에 따라 제정되어야 한다. 관련 법안과 정책은 유가족의 `동의`를 모두 받아야 한다며 국회의 고유 입법권을 저해하는 법안이 되거나 유가족들에게 무한 특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보다는 사고발생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서 근본적인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는 `안전한 대한민국`과 `국가혁신의 계기`가 되는 합리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제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논란이 진행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시급한 경제·민생 법안들은 마땅히 논의되고 통과시켜야 한다는 것이 민심이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60~70%의 국민이 이에 동의하고 있으며 반대는 20% 내외로 보인다.여야가 빠른 시간 내에 절충점을 찾지 못할 경우 지난해처럼 국회 파행이 장기화돼 국정이 고사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15일 국회 본회의가 예정돼 있다. 여기서 경제·민생 법안이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 경제회생을 앞당겨야 한다는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양당 원내대표는 지금이라도 당장 협상에 나서야 한다. 강경대치만이 능사가 아니며, 정치는 대화와 타협의 장이 아닌가. 국민이 만들어 준 과반 의석을 가지고도 국회선진화법에 발목이 잡혀 사태 수습을 위한 법 하나 만들지 못하는 여권의 무능도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야당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타협이 어렵다면 여당이라도 중심을 잡고 입법부가 최소한의 역할이라도 할 수 있도록 주도해야 한다. 대한민국에는 세월호 유족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사태이후 침체의 바닥을 헤매는 경제 탓에 가슴앓이를 하는 국민들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014-09-15

원자력, 제2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 황병선경주시 성건동 지금 대한민국은 `세월호 참사` 여파로 안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큰 타격을 입었던 원자력산업계 또한 `안전`에 대한 우려와 관심을 더 크게 받게 됐다. 원전 안전, 방사능 피폭, 설계수명을 다한 원전의 계속 운전, 폐로, 신규 원전 건설, 사용 후 연료의 재처리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부상하면서 사회적·경제적 이해관계들의 대립이 심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원자력의 딜레마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원전 제로를 외쳤던 일본 원전정책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것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제1차 국가에너지 기본계획에 따라 원전의 비중을 2030년까지 설비용량 기준 41%까지 늘리고, UAE 원전 수출을 이뤄낸 당시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원자력산업은 `원전 르네상스`라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 이후 결정된 제2차 국가에너지 기본계획에서 원전 비중을 20%로 대폭 낮추게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전 비리사건 등이 불거지면서 불과 5년 사이에 원자력의 위상은 정점에서 바닥으로 내려앉고 말았다.최근 독일·벨기에·스위스 등의 탈원전 정책을 지켜보며 우리나라 역시 원전을 폐쇄해야 된다는 환경단체들의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탈원전 정책은 에너지 자급률이 3%에 불과하고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구조를 가진 대한민국 에너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신재생에너지가 경제성이 떨어지는 작금의 현실에서 탈원전 정책을 시행하게 되면 화력발전을 늘릴 수밖에 없는데, 이는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시행을 목전에 앞둔 대한민국 현실과 상반되는 정책이다.환경운동가로 변신한 엘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그린피스 창시자로 원자력을 반대해왔던 패트릭 무어 박사도 원자력 예찬자로 돌아섰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현재 원자력이 경제성과 환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재생에너지가 기술혁신으로 경제성을 충분히 갖추기 전까지, 화석에너지의 비중을 점차 줄여나가며 징검다리 역할로 원자력을 활용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리므로 우리는 원자력 찬반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는 소모적 논쟁을 잠시 접어두고, 지금보다 더 안전하고 투명하게 원자력에너지를 이용하고 관리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원자력은 발전지향주의와 생태지향주의 가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분야이다. 그래서 명확한 답이 없고, 최고의 선택이 아닌 최선의 선택이라는 단어가 붙여지는 분야이다. 따라서 국민의 신뢰를 무시하는 국가는 멸망한다는 `무신불립`이라는 고사성어처럼 원전 정책은 국가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져 가야한다.그러기 위해서 먼저 국가와 원자력계는 대한민국 원전의 전문성과 안전성, 기술력 등을 국민이 이해하기 쉽게 홍보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야 하는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며, 투명경영과 소통을 통해 실추된 명예와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그리고 국민들은 부정적 시각으로 원자력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에너지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요즘 원자력 일선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근로자들의 사기가 많이 저하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히 소수의 잘못으로 벌어진 사건들로 인하여 사회에서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는 상황 때문이라고 한다. 안정적인 전력생산을 위해 명절 및 공휴일에도 교대로 출근하고, 자신이 맡은 기기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새벽에도 회사로 뛰쳐들어오는 직원들의 노고도 국민들이 알아줘야 할 것이다.우리나라는 후쿠시마 후속대책으로 지난 3년간 방호벽 증축, 이동형 발전차 설치, 수소제거설비 설치 등 사고 예방과 완화 대책을 마련하고 안전성을 강화하고 있다.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원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국민들의 신뢰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지속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노력이 선행되어 국가와 국민 모두가 상생하고 소통하며, 공감할 때 대한민국은 제2의 원자력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2014-09-12

보릿고개 넘긴 식량증산 계획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나는 1963년 4월 15일 공무원으로 영일군 오천면 지방농업기원보(현9급)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해 3월에 있었던 지방공무원채용시험에서 행정직 일등으로 합격했지만 농업직으로 전직이 되었다. 요즘 세대는 상상조차 어렵겠지만 당시는 국민들의 먹거리 해결이 가장 큰 국정과제였다. 5·16군사정부는 `보릿고개`를 넘어 국민생활의 기본이 되는 먹거리 자급자족을 위해 식량증산에 팔을 걷어야했다. 이런 연유로 식량증산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이 계획은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함께 우리나라의 빈곤 퇴치와 극복을 위한 양대 산맥과 같은 계획이었다.식량증산에 대한 군사정부의 의지가 워낙 강하다보니 관련부처 장관부터 도지사, 시장과 군수, 읍면동장은 물론 농업관련 기관과 부서에서는 전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오천면은 영일군청으로부터 각종 식량작물의 생산목표를 부여받았고, 이를 다시 리동별 목표로 하달하였다.하지만 각종 수치에 오류가 많았다. 또 당시 농촌지도소 밑에 3~4개 읍·면 단위로 농촌지도소 지소가 막 생겨났는데, 생산증대를 위한답시고 미숙한 영농기술을 마구잡이로 보급하다보니 막상 생산현장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 비일비재로 일어났다. 이는 당시의 행정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나는 오천면에서 식량증산계획을 담당했는데, 상업계 학교를 졸업한 탓에 주산과 부기, 타자에서 모두 4급 수준이어서 각종 수치의 오류들을 수정하며 시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내가 혼신을 다해 마련했던 오천면 식량증산계획은 영일군 12개 읍면동에서 1위를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나는 이 일로 영일군청 식량증산계획 실무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영일군에서 세운 식량증산계획이 경북도에서 다시 1등을 차지하게 되어 나는 경북도청 농정과로 차출됐다. 근무처는 영일군이었으나 일은 경상북도에서 식량증산계획을 담당했다.나는 공무원 초임시절의 대부분을 식량증산 업무에 매달렸다. 다시 말해 내 젊음을 국민의 먹거리 해결을 위해 최대 국정과제였던 식량증산에 고스란히 투자했던 것이다. 내가 맡은 경북도 식량증산계획은 전국에서 또 다시 2등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도청 차출 1년 만에 이룬 결과였다. 이후 나는 본래 근무지였던 영일군청 산업과 농산계로 다시 돌아와 `경지정리사업` 업무를 맡았다. 일제가 수탈의 목적으로 추진하던 농지구획정리사업이 해방 이후 20여 년간은 농업용수 확보에 밀려 침체되었다가 1963년 10월에 와서 다시 추진된 업무였다.오천면이 당시 농지개량사업 시범지구로 지정되었는데, 현재의 용덕네거리에서 냉천 쪽에 위치한 3천여 평이 그 대상지였다. 시범지구에서는 주로 용수로와 환지, 농로 조성방법 등 경지정리사업의 기법을 가르쳤고, 그 결과가 경북도 농지개량사업의 기본이 됐다. 이 일로 농지수리조합이 농지개량조합으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포항에서는 이전에도 농지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된 적이 있었다. 1920년대 일제가 농지개혁의 미명하에 경북에서 이 사업을 최초로 벌였는데, 연일들, 즉 `어미들`에서 그 작업이 벌어졌다. 사업이 마무리되자 어미들은 용수확보가 쉬워져 농사가 잘됐다.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 이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일제의 수탈은 어미들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첫 시작은 누구에게나 혹독한 법, 당시 포항 농민들이 겪었을 아픔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포항이 일제의 농지구획정리나 1960년대 경지정리사업의 최초가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포항은 수도작(水稻作)에 필요한 강우량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저 수준으로 연간 평균 강우량이 1천여㎜에 불과해 타 지역의 1천200여㎜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경지정리사업 등에서 늘 시범, 아니면 최초 지역으로 이름을 올렸다.포항에 산림녹화사업인 사방시업이 시행되고 사방공원이 생긴 이유도 강우량과 무관하지 않다. 수자원 관계자들은 나무를 `워터 바킷`(Water Bucket : 물 양동이)으로 부른다. 물을 많이 저장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는 논리다. 강우량이 부족한 포항은 사방사업의 대표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가뭄 등 기후환경 탓에 포항은 조선시대부터 기우제가 가장 많았던 지역으로 꼽힌다. 기우제는 반드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3대 명산에서만 지냈는데, 비학산, 형산, 운제산이 그곳이었다. 당시 포항에는 `명산에 묘지를 쓰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속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실제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명산에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명산에 묘가 있으면 이를 파헤치기 일쑤였다. 또 묘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집단적인 체형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195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어 왔으나, 식량증산계획이 시작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포항은 2000년대 들어 형산강 정비 사업이 이루어지고, 임하댐 물이 공급되면서 그제야 물 걱정에서 벗어났다.1960년대 영일군에서 추진했던 경지정리사업은 이후 여러 변화를 몰고 왔다. 원래 풍부한 일조량에다 편리해진 작업, 그리고 물 관리 향상에 따른 풍부해진 용수, 여기에 통풍까지 향상되어 그 전에는 포기당 벼 알이 평균 60여개 달렸으나 이후에는 많게는 100개까지 달리는 등 평균 30%정도의 식량증산을 이룰 수 있었다.밤낮을 가리지 않고 젊음과 열정을 온전히 던졌던 식량증산계획의 결실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실제로 나는 이후 공직생활에서 일궈 낸 그 어떤 성과보다도 보릿고개를 넘어 우리나라의 식량자급자족에 조그마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14-09-11

2013년 vs 2014년 여름

▲ 허재열한수원 월성교육훈련센터 교수 우리는 지난해 여름을 잊지 않고 있다. 전력수급이 원활치 않아 절전 생활화를 외치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었다. 공공기관 냉방온도 제한 뿐 아니라 엘리베이터 격층 운행, 전기사용 집중 시간대 전기사용 자제 등 수요관리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에는 6월부터 일찍이 `준비`나 `관심` 등 전력수급경보가 종종 발령됐었다. 한반도 기후변화와 더불어 대용량 발전소 정지가 주된 원인이었다.올해는 아직 성급한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예년에 비해 시원한 여름을 나고 있다. 한여름에도 전력예비율이 10%를 웃돌며 여유를 보였다. 지난해와 같은 절전운동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올 여름 기온이 유난히 높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전력 공급능력이 높았던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그 덕분에 지난해 보다 약 400만㎾ 정도 높은 공급능력이 확보됐다. 예비율로는 약 5% 정도 상승효과를 보였다.각종 지표에서 우리나라는 선진국 수준을 확보했거나, 상회한다.하지만, 유독 전력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국가들의 평균 전력예비율은 20~30%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겨우 10% 내외에서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각 국가별로 나름의 전력 환경이 있다.그 중 우리나라는 전력 `고립국`에 속한다. 주변 나라와 전기 수·출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북이 통일되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현재로서는 자급자족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세계적으로 몇 안되는 대표적인 탈원전 국가인 독일은 2010년 기준으로 예비율이 무려 96.4%에 달한다. 원자력발전을 제외하더라도 30% 중반의 예비율을 유지할 수 있다.원전을 대신해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추구하고 있으나, 변동성이 극심해서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태양광 발전의 경우 수십억 유로의 보조금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2년간 독일 전체 발전량의 0.084%(2013년 현재) 밖에 공급하지 못해 아주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어 딜레마에 빠져있다. 전기요금은 우리나라의 4배에 달한다.프랑스에서는 원전을 반대하는 경우를 보기 힘들다고 한다. 오히려 프랑스인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보유하고 있는 원전기술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캐나다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캐나다형 원전기술을 소개한다고 한다.우리나라도 한국형 원전기술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적대시하고 터부시하는 것이 현실이다.우리는 이미 원전개발 뿐 아니라 계속운전에 대한 기술력까지 보유하고 있다. 단지 그러한 고급기술이 평가절하되는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일부의 문제로 인해 전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않다.새삼 전기의 소중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우리의 기술을 스스로 무시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는가. 원전의 계속운전이나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결정의 문제는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판단돼야 한다.무작정 반대만 하다가는 자칫 소중한 시기를 놓칠 수 있다. 부족한 부분은 보완하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여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야 하겠다.시원한 여름, 따뜻한 겨울은 계속돼야 한다.

2014-09-11

추석 무렵

▲ 권오신 로타리코리아 상임고문시간 보따리를 풀어두고 고향 길을 가장 걷고 싶은 시기가 추석 무렵이다. 어머니와 마실 나갔던 뒷산은 새소리 곱고 녹음은 여전히 아름다운데 세상살이는 세월호와 같은 참척의 고통이 닥치는 등 늘 평화롭지 못하다. 38년 만에 일찍 닥친 추석이다. 명절 선물은 휴가지에서도 모바일로 구매하면 택배회사가 가져다준다. 차례 상에 올릴 제수꺼리도 마찬가지. 지금은 송편 빚는 집도 많지 않고 따로 명절빔을 사 입히는 집 역시 드물다. 고향집 가족과 이웃집이 줄어들어 차례자리에 서 있어야할 부모, 형제, 자식의 그림자가 그립기만하다. 큰 집에 가족들이 모이고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는 일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세월인가.원룸, 아파트로 대체된 거리는 가을햇살의 파리함에 곧 묻힌다.나이가 들어 그런 것이려니 생각해도 허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올해는 대체휴일까지 낀 추석연휴여서 여행을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이들이 늘어났다. 올 추석연휴는 잘만 활용하면 일주일은 놀 수 있어서인지 유난히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조상님 여행 잘 다녀오겠습니다”이다.한 두세대전의 일이지만 어머니는 볕 좋은 날을 잡아 집안의 문짝은 죄다 떼어내 물로 씻고 햇볕에 바짝 말린 뒤 새 문종이를 바르셨다. 떼어낸 문짝들이 담벼락에 기대져 해바라기를 하면 추석이 오는구나고 여겼다.어머니는 지난 가을 책갈피에 끼워두었던 고운 단풍잎 두 장을 딸아이 방 문짝 고리 옆에 반듯하게 창호지로 덧발라 주시는 멋스러움도 늘 간직하셨는데 세월이 흘러 그 집들은 다 허물어지고 문종이를 발라야하는 문짝대신 유리창이 달린 시멘트집들 뿐이다.문짝을 떼어내 일 년 내내 쌓인 먼지를 물로 씻고 창호에 찹쌀 풀을 입히던 일, 풀비가 유리 닦기로 바뀌었을 뿐 집나간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은 오늘도 그대로이다.바깥세상에서만 돌다보니 설탕 맛, 조미료 맛에 길들여진 자녀들은 어머니의 손맛이 추석 무렵이면 유독 그립다. 가마솥 뚜껑을 열고 잡곡밥위에 얹어 속살까지 구수하고 얼큰하게 만들어진 장떡하며 가지, 밀가루를 살짝 입힌 애동 고추를 꺼내며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가야 이것들도 다 제 간을 가졌다. 양념을 너무 치면 제 간을 잃는다”라고.제 간을 잃는 처사가 세상살이에 어디 한두 가지만 될까.어머니의 마음은 하나라도 자신의 것을 물려주고 싶어 하셨고 다듬지 않은 말이라도 생활의 지혜고 길잡이다.백석은 `고야(古夜)`에서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째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 집 할머니가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 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백석은 정겹고 푸근했던 어릴 적 명절맞이를 다채로운 시각·후각으로 넉넉하게 살려 냈다.“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 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 자연의 풍요로운 생명력은 한가위에 한껏 치오른다.” 김남주(1946~1994, 전남 해남)의 시(詩) `추석 무렵`이다.시인이 본 추석 무렵은 그 관능적 생산력을 귀향길 고추밭에서 마주친 여인네들의 엉덩이로 표현, 익살맞게 노래했다. “고향이 아무리 객지처럼 썰렁하다 해도 자식 보고픈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다. “막내딸이 추석이라고 송이를 보내왔다./ 바빠서 못 온다고/ 아 내겐 송이 냄새보다는/ 사람의 냄새가 그리운 것을” (조병화의 시 `송이`)고향 명절의 추억은 어느 사이 흑백 사진처럼 빛 바래간다.

2014-09-05

윈스턴 처칠을 생각하는 한가위

한국에는 고속도로도 없고 종합제철도 없던 1965년 1월, 조강능력과 제철기술로만 따져도 `세계 3대 최강국`이었던 영국에서 한 저명한 인물이 숨을 멈추었다. 향년 91세.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몽고메리 장군이 “저는 술과 담배를 일절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항상 건강을 100퍼센트 유지하는 비결입니다”라고 은근히 뻐기자, 곧바로 “나는 술을 무척 즐기고 담배도 아주 좋아해서 항상 200퍼센트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라고 맞받았던 인물. 그는 윈스턴 처칠이다.한국인은 흔히 문장 하나로 처칠을 기억한다.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즈음, 처칠은 재야에 있었다. 세계정세를 통찰하는 인물이 가만있진 않았다. 영국의 재무장을 주장했다. 외면당했다. 그때는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피로감이 영국사회를 지배했던 것이다.영국은 히틀러의 전쟁에 휘말렸다. 영국을 구해내고 승리를 거둬야하는 리더십이 요구되었다. 1940년 영국의 여론이 처칠을 총리 관저로 불러들였다. 독립심과 자존심이 세서 정당이나 의회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었던 처칠이 막중한 시대적 사명을 짊어진 총리로서 의회에 가서 연설을 했다.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는 여러분께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밖에는 달리 드릴 것이 없습니다.”한국에도 처칠의 저 말을 대통령 취임사에 빌려 쓴 대통령이 있었다. 19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이다. `박정희의 사람인 김종필과 박태준`의 손을 잡고 50년 만에, 한국 헌정사상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하며 대통령에 취임한 그가 왜 처칠의 저 말을 인용했을까? 그때는 한국이 `6·25전쟁 후 최대 국란`이라 불린, 국민이 `아이엠에프(IMF)사태`라고 기억하는, 국가부도로 내몰리는 외환위기사태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그날 김대중은 조금 울먹이며 `피와 땀과 눈물`을 말했다. 사회적 반향이 있었다. 주당 10만 원씩 나가던 주식들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돌변한 시절, 그 말은 국민의 가슴을 건드렸다. `금 모으기 운동`도 범국민적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의 말들은 국민의 가슴에서 멀어져갔다. 대통령으로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그의 경사를 가슴으로는 받지 못했다.1953년 처칠은 6년 집필의 대작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뜻밖의 일로 보일 테지만, 처칠은 저술가요 화가였다. 처칠을 연구한 어느 학자는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노벨문학상이 처칠을 영예롭게 만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처칠이 그 상의 가치를 높였다고 하는 것이 더 공정할 것”이라 했다. 총리가 되기도 전에 처칠은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무릇 전쟁을 수행하는 최고 사령관에게는 두 가지 사항이 필수적이다. 훌륭한 전략을 수립하는 일과 충분한 비축을 유지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현재 한국은 분단 상태고 휴전선에는 언제나 긴장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침략전쟁이 아니라 방어전쟁을 전제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나라다. 그런데 한국 정치판은 어떠한가? 날마다 총칼 없는 전쟁이다.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총칼 없는 정쟁(政爭), 이것이 이 나라의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이번 한가위에 국민에게 안기는 선물이다.박근혜 정부 19개월, 지금쯤 국민이 받아야하는 한가위 선물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실현가능의 훌륭한 전략과 충분한 비축 유지의 비전`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적 전쟁이 한국의 `정치력`을 파괴해버린 상태다. 처칠의 그 `전쟁`을 `평화체제`로 바꾼다면, 이 나라의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안착시키기 위한 훌륭한 전략과 충분한 비축 유지의 비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대통령은 한가위를 맞아 대(對)국민 메시지를 내놓을 것이다. 처칠의 그 한마디처럼 국민의 가슴을 움직일 수는 없을까? 국회의원들은 정쟁을 그만두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지역구에 내려오지 말고 여의도나 지키며 계속 싸우는 것이 더 낫겠다. 건강에 해롭지 않을 만큼 알맞게 단식을 하는 것은 자유선택이다.이대환 작가, 계간 문학지 ASIA 발행인

2014-09-05

지속가능한 창조도시 포항, 지금부터 시작이다

▲ 이강덕포항시장 최근 우리 사회 최고의 화두는 `경제 살리기`다. 정부도 `기초가 튼튼한 경제`, `역동적인 혁신경제`, `내수·수출 균형경제`를 중심으로 경제 살리기를 강조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핵심은 `창조경제를 통한 역동적인 혁신경제`라고 할 수 있다.우리 포항도 민선6기 출범과 함께 철강산업 일변도의 산업구조로 날로 침체해 가는 지역경제를 살리고 도시의 재생을 위해 `창조도시` 건설을 목표로 행정을 집중하고 있다.`창조도시`란 도시의 성장과 쇠퇴과정의 패러다임에서 나타난 개념으로 창조성이 도시에 반영되어 지속적인 경제발전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춘 도시라고 할 수 있다.지금까지 포항은 철강산업으로 우리나라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끌어 왔지만,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신생국의 추격으로 철강산업 침체와 함께 지역경제도 장기 침체됨에 따라 지역산업 다변화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돼 왔다. 이에 따라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창조도시`건설을 목표로 했다.우선 철강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다변화하기 위해 포스텍과 한동대 등 대학을 포함한 방사광가속기 등 지역의 우수한 첨단과학 인프라를 활용하여 작지만 강한 `강소기업`을 육성할 방침이다. 신소재와 부품, 에너지, 환경, 로봇, 바이오 등 첨단 분야의 기술주도형 중소기업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대기업은 물론 1인 창조기업과 벤처기업, 중소기업 등을 아우르는 기업 육성과 기업유치 활동을 펼칠 생각이다.물론 `창조도시` 만들기는 사회 각 부분의 협력과 조정을 필요로 하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힘든 이유로 인해 꾸준한 추진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나의 유행으로서 창조도시를 이야기해서는 안되며, 사업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3일에 `창조도시` 건설이라는 목표 실현을 위한 추진협의체로 `창조도시추진위원회`를 출범하고, 강소기업 육성과 물류산업 육성, 해양관광산업 육성, 행복기반 조성 등의 4대 전략을 마련했다.독일의 경우, 1990년대 중반까지 `유럽의 병자`로 불릴 만큼 경제적으로 취약했지만, 2000년대 들면서 `40-80클럽(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인구 8천만 명 이상인 국가)`에 가입할 만큼 글로벌 리딩국가로 발돋움 했다.그 이면에는 1천500개가 넘는 강소기업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강소기업들 덕분에 독일은 2004년부터 8년 연속 1천억 달러 이상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는 유일한 선진국이며, 선진 G7 국가 중 1인당 GDP 성장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됐다.우리 포항이 `창조도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민·관·학이 합심하여 창조경제가 싹트고 지식근로자들이 몰려올 수 있는 문화적 토양과 실천적 정책처방을 마련하고 정착시켜야 한다. 창조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도시토양을 갖추기 위해 체계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모두가 상품수출과 기업 유치에 치중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와 함께 세계 유수의 창조적 인재를 유치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이들이 머무르면 관련 기업과 연구소가 올 수밖에 없고 궁극적으로 관련 핵심 산업은 우리 포항의 중심산업으로 정착하게 될수밖에 없다.이제는 보다 큰 장사를 위해 종자돈을 풀 때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 투자의 효과를 사람들이 단번에 느끼지 못하더라도 인내하고 남보다 먼저 씨앗을 뿌리고 키워나갈 생각이다.

2014-09-04

오천비행장 그리고 포도밭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포항은 울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주도한 대표적인 도시다. 국가기간산업인 철강을 생산하며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성장을 견인했고, 근면·자조·자립정신의 새마을운동을 일으켜 근대화의 정신적 토대까지 마련한 도시다. 지역사회 원로이면서 현재는 해맞이회장으로 활동하는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로부터 포항의 현대화 과정에서 있었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시리즈로 싣는다. 편집자 주외지인들은 포항하면 가장 먼저 포항제철소를 떠올린다. 실제로도 포항제철소가 포항 근대화의 주연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포항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하는데 단초와 기반이 된 조연들도 여러 있다. 그 중 하나가 오천비행장이다.현 포항공항의 전신인 오천비행장은 1943년 9월 영일군 오천면 일월동에 건설됐다. 당시 일월동을 비롯해 비행장 인근의 도구와 청림동 등이 모두 행정구역상 오천면에 속했기 때문에 아마 오천비행장으로 명명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용도는 일제의 군용비행장이었다. 누가 만들었던 간에 이로써 포항은 땅과 바다와 하늘 길을 모두 가지게 됐다.일제의 징용에 의해 끌려와 비행장 건설에 투입된 인력은 현장을 관리·감독했던 일본군들로부터 혹독한 노동을 독려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치 노예처럼…. 타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 해외 전쟁터 등으로 징용돼 많은 희생을 치렀던 반면에 포항사람들은 대부분 비행장 건설에 징용되어 상대적으로 희생이 적었던 것은 이런 배경이 자리한다. 오천비행장이 건설된 지역은 원래 동양 최대의 포도밭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현재의 해병사단 내에 있는 일월지와 골프장 일대, 청림동 해병숙소 일대, 그리고 동해 도구에 이르기까지 `삼륜(三輪)포도원`이 광활하게 자리했다. 이 포도원은 우리나라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된, 이른바 식민지 착취기관인 일제의 동양척식회사가 1914년 5만여 평의 국유지를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분양하면서 만들어졌다. 이 포도원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영일군사(史)는 1934년 당시 이 포도원의 면적이 자그마치 60여만 평에 달해 동양 최대 규모의 포도농장이었으며, 한국인 인부도 연간 3만2천여 명이 동원되어 포도농사를 지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 포도원에서 생산된 포도주는 동양 최고의 포도주로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또 이 포도원은 포항지역 농업이 그전까지는 대부분 품앗이, 두레 등 전통방식과 영세규모로 이루어졌던 것과 달리 비교적 큰 규모의 공동작업장을 갖추는 등 농장 형태의 첫 사례로 꼽힌다. 특히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탄생시킨 곳으로도 더욱 유명하다.이 포도원이 비행장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부터다. 일제가 이 포도밭에 군용비행장인 오천비행장을 건설하면서 포도밭은 점차 잠식되기 시작했다. 그 후 6.25전쟁을 거치고, 우리나라 해병대 기지와 골프장 등이 들어서면서 포도밭은 거의 사라졌다. 필자가 1963년 오천면사무소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오천비행장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전하면서 일본과의 인연을 마감한다. 포도밭과 비행장, 이 둘은 지역에서 일제의 수탈과 만행을 보여주는 아픈 역사를 가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오천비행장은 군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이다. 만약에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오천비행장을 점령하게 되었다면 미군의 전투기가 뜨지 못하고, 군수품이 제대로 보급되지 못하여, 특히 동해안 지역의 작전수행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세기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도 오천비행장과 인연이 깊다. 그녀는 휴전 이후인 1954년 2월 인덕산 중턱에서 1만여 명이 넘는 미 해병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오천비행장에 내렸다. 오천비행장은 오늘의 포항공항으로까지 발전하기에는 숱한 영욕을 함께 했다.오천비행장이란 존재로 인해 해방 이후 미군이 포항에 용이하게 주둔할 수 있었고, 6.25전쟁 때는 미 해병1사단이, 그 이후에는 우리의 해병대가 터전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군과 해병대의 주둔이 지역경제에 큰 도움을 주게 된 것도 결국은 오천비행장의 덕이라 볼 수 있다.어쩌면 포항지도를 확 바꾼 포스코가 포항에 둥지를 틀 수 있었던 이면에는 포항공항의 존재 사실도 한 몫 했다 할 수 있다. 오천비행장이 포항공항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돌아보면 군사시설을 넘어 지역경제의 디딤돌 역할을 했음을 회고케 한다.

2014-09-04

건강보험료 형평성, 동일한 부과기준으로 해결해야

▲ 임성옥위덕대 교수·사회복지학과 세계 각국의 대부분 제도가 그러하듯, 서로의 것을 배우고 개선하는 과정에서 자국의 실정에 맞는 제도로 정립되기 마련이다. 사회보장제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는 비록 도입 초기에는 일본 것을 참고 했으나 요즘은 미국의 오바마대통령이 부러워할 정도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많은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를 배우기 위해 오고 있으며 특히, 베트남에는 우리 건강보험제도 자체를 수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건강보험 발전과정과 관련해 여전히 개선점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1977년 직장의료보험으로 출발해 1988년 농어촌에 지역의료보험을 도입하면서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에 대해 이원화된 부과체계를 운영해 왔다. 그러다가 2000년에 건강보험이 통합되고, 2003년 건강보험 재정까지 통합되었지만 여전히 부과체계는 과거의 이원화 방식이 유지돼 오고 있다.직장과 지역의료보험을 통합해 단일 재정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험료 부과체계는 여전히 통합되지 못했는데, 이로 인해 형평성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건강보험의 부과체계는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직장가입자는 다시 보수를 기준으로 보험료를 내는 부류와 보수 이외에 연간종합소득 7천200만원 초과분에도 보험료를 납부하는 부류로 구분이 된다.또 지역가입의 경우는 종합소득이 500만원 초과하는 부류와 초과하지 않는 부류를 구분해 부과방식을 달리한다. 또 여기에서 미성년자·주부·노인 등에 대해서는, 직장 피부양자와 같이 보험료를 전혀 부담하지 않는 계층과 지역세대원처럼 성·연령에 따라 보험료를 납부하는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이처럼 다른 사회보험의 부과체계보다 복잡하게 설계된 건강보험의 부과체계는,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 모두에게 불만의 요소가 되고 있다.직장가입자는 직장가입자대로 소득이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자영자들에 비해 높은 보험료 부담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반면, 지역가입자들은 소득 이외에 재산, 자동차 등 소득 이외의 여러 대리변수로 보험료를 산정하는 방식 때문에 불만을 토로한다.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이로 인한 보험료 관련 민원만 5천만건 이상 발생하고 공단 전체 민원의 80%를 차지하는 등 제도에 대한 불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또한 가입자의 부담능력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해 생계형 체납자가 양산되고 6회 이상 보험료를 체납한 급여제한자의 진료비로 건강보험 재정이 누수 되며, 경제적 부담능력이 있음에도 직장피부양자로 등재되거나 고소득 자영업자의 지역보험료 부담 회피를 위한 직장가입자 허위취득 사례 발생 등은 역설적으로 건강보험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보험료 부과체계 개선의 본질은 직역에 상관없이 합리적이고 동일한 기준 아래에서, 부담능력에 비례하여 보험료 납부가 이루어짐으로써 사회연대성 원리가 회복되는 것이다.한국처럼 사회보험 방식의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는 독일, 프랑스, 벨기에, 대만 등 OECD주요국들은 우리와 달리 동일기준하에 소득을 기준으로 한 보험료를 부과하고 있는 것은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부담능력이 현저히 줄어 들었음에도 오히려 부담료가 증가하는 이런 기형적인 상황은 건강보험 부과체계를 신뢰하지 않는 상황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이는 결국 형평성의 문제로, 건강보험제도의 발전을 위해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제도 도입 이후 37년 동안 건강보험은 우리 국민의 건강을 증진시키는데 많은 이바지를 해왔음을 모두 잘 알고 있다. 이제 형평성을 확보하면서 동일한 보험료 부과체계로 개선하여 보장성을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할 때이다.

2014-09-03

공공하수처리시설 운영관리 실태평가를 하며

▲ 이용태구미시설공단 대리 `공공하수처리장`에서 시설 관리를 맡고 있다. 일반인들이 듣기에 다소 생소한 분야의 일일지도 모르겠다. 용어 그대로, 정해진 지역 내 각 가정이나 공장 등에서 발생하는 생활하수를 공동으로 처리하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 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렇게 10여 년 동안 하수처리 과정의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하던 중 대구지방환경청의 `공공하수도 운영관리 실태평가` 위원으로 참여를 하게 됐다. 평가를 받던 입장에서, 다른 하수처리장의 공정운영 관리 시스템 전반에 대해 관심과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한편 `정부3.0`의 핵심가치인 투명성 확보와 시민참여 활성화를 직접 느껴보는 좋은 경험이 아닌가 생각되어, 기대감 또한 컸다.공공하수도 운영관리 실태평가는 환경부 주관 아래 공공하수처리시설 운영관리의 효율성 제고와 경쟁력 있는 하수도 시스템 구축을 위해 지방 환경관서에서 관할구역 내 자치단체별 규모별로 그룹을 구분해 매년 실시하고 있다. 관계 공무원과 외부 전문가, 민간단체 등이 평가단으로 구성이 되어 제출한 자료를 기본으로 운영관리 실태를 평가하게 된다.올해는 현장관리에 큰 비중을 두는 것 같았다. 평가위원들은 하수처리 공정을 일일이 둘러보며 예상 밖의 질문을 하는 등 한낮의 불볕더위에 버금가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막상 평가를 하는 입장이었지만,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설명하는 담당자들의 모습에 새삼 동료애를 느끼며 묘한 감정이 일기도 했다.우리나라는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산업단지가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공공하수처리시설과 폐수종말처리시설이 속속 건설·운영되고, 하천수질이 크게 개선됐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후로도 다양한 수질개선 대책의 도입과 지속적인 예산투자 등으로 하천과 강의 수질이 점차 좋아지고 있다.현재 우리나라에서 운영되고 있는 일반적인 하수처리 공정은 대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먼저 유입된 하수를 침사지에서 스크린 설비로 이물질을 걸러주고, 1차 침전지를 거쳐 생물학적 처리를 한다. 그 다음 다시 2차 침전지를 거쳐 여과기 및 소독조를 통해 최종적으로 방류를 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발생된 슬러지(찌꺼기)만을 모아 농축과 소화, 탈수 과정을 거쳐 매립하거나 퇴비화 또는 소각처리를 하는 등 마지막 부산물까지 안정적으로 처리하고 있다.아울러, 2012년 1월부터 방류수 수질기준이 강화됨에 따라 대부분의 처리시설에서 생물학적 처리공정 중 고도처리 공법을 추가로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이 공정에서 하천의 부영양화와 녹조를 유발할 수 있는 질소(N)와 인(P)을 제거할 수 있으므로 더욱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하수처리시설에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당부하고 싶은 말도 있다. 무엇보다도 국민의 세금으로 이뤄지는 하수처리에 대한 막대한 예산을 줄이기 위해서는, 환경에 대한 시민의식을 높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각 가정에서 발생하는 생활하수를 줄이는 일이다. 또한 공장에서 처리되지 않은 폐수를 몰래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물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일, 나아가 환경을 살리는 일은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어렵다. 물을 사용하고, 처리하고, 생산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돼야 한다. 즉,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물을 아끼고 물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끝으로, 우리 지역의 맑은 물과 아름다운 자연을 보전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수많은 관계 전문가와 민간단체의 끊임없는 관심과 협조에 감사드린다. 더불어, 전국의 수자원보호와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공공하수처리시설 종사자들의 노고에도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돌고 도는 것이 물이다. 무심코 버린 생활하수가 먹는 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14-09-01

음식물쓰레기 줄이기에 함께 나섭시다

▲ 이강덕포항시장 어느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95%가 음식물쓰레기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고 한다. 절대 다수의 국민들 사이에는 어떻게든 음식물쓰레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음식물쓰레기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음식물쓰레기를 줄이는데 있다.나라 전체로 볼 때, 음식물쓰레기로 버려지는 손실 비용만도 한 해 20조원을 훌쩍 넘는다고 한다. 우리 포항만 해도 하루에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가 약 150t에 이르고, 한해 처리비용만 약 70억원에 달한다.곧 다가올 추석과 같은 명절이나 집안의 대·소사를 앞뒤로 해서는 집집마다 음식을 넘치게 장만하는 식문화로 인해서 발생하는 음식물쓰레기 양은 어마어마하다. 언제부터였는지 같은 음식을 두 끼 이상 먹으면 이상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땐 상다리가 휘어져야 보기 좋고, 남은 음식물이 버려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느끼는 풍조가 생긴 것 같다.잠시 미국에 머문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나라답게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 역시 넉넉했다. 아무리 덩치가 큰 미국사람들이라도 어떻게 이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의아해 했다. 미국사람들은 오랫동안 앉아서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즐겼다. 어쩌다 음식이 남으면 꼭 싸가지고 갔다. 이에 비해 우리는 어떤가? 포장해 가면 구차한 촌스러움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주저를 하지는 않았던가?음식물쓰레기 줄이기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우선 많은 식재료를 사다가 만드는 음식의 양을 필요한 만큼 줄인다면 식재료비용과 시간 낭비, 노동력과 열에너지 및 쓰레기의 최소화 등 일석오조(一石五鳥)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음식문화에 대한 의식만 바꿔도 시간과 비용, 노동력의 낭비를 상당부분 줄일 수 있게 된다.음식물쓰레기가 늘어난다면 환경오염은 물론 막대한 처리비용은 결국 우리의 몫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음식물쓰레기를 절반으로 줄이는 절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꼭 필요한 식품만 구입해서 적당량만 요리하고, 먹을 만큼만 덜어서 남기지 않고 먹는 것도 음식물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식당에서는 먹지 않을 음식과 자신의 식사량을 미리 알려줘서 먹을 만큼만 주문하고 여럿이 먹는 음식은 개인 접시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먹고 남은 음식이 담긴 그릇에 이물질을 버리지 않고, 남은 음식은 포장해서 가져가는 생활습관이 필요하다. 식당에서는 남은 음식을 푸드뱅크와 같은 시설을 통해서 이웃과 나누는 것도 생활의 지혜가 될 수 있다.조상들은 벌써부터 “먹는 음식을 그냥 버리면 후손들이 굶주리는 가난을 겪는다”는 말로 음식물쓰레기가 생기는 것을 나쁘게 생각했다. 이번 추석 연휴만큼은 각 가정에서는 준비한 음식을 다 먹지 못해 일부를 버릴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음식물쓰레기를 줄이는 일은 궁극적으로 환경운동이요, 나아가 국토를 사랑하는 애국운동이라고 생각한다.개인의 작은 실천이 우리 포항을 쾌적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변화시킬 수 있다. 포항에서만 연간 처리비용이 70억원에 달한다는 음식물쓰레기를 30%만 줄여도 약 20억원을 아낄 수 있다. 그 돈을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복지 등의 비용으로 사용한다면 포항은 더욱 행복한 도시가 될 것이다. 음식물쓰레기 줄이기 모두가 함께 나서야 한다.

2014-08-29

다양한 사회와 접촉점 넓혀야

▲ 박기환 민선1기 포항시장시장 재임시절에 과거부터 잘 알던 모 국회의원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나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재선 국회의원이었다. 그가 한 말을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형님, 국회의원 두 번 하니까 내가 참 무식해 진 것 같습니다. 도대체 책을 볼 시간이 없더군요” 그렇다. 나도 그 말에는 완전히 공감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책 볼 시간이 많은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정치인들은 시간이 더 없을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지방자치단체장은 특별히 더하다. 직업 중에서도 책(문서)를 가장 많이 보아야 할 직업은 판사인 걸로 알았다. 소송관련 문서를 보지 않고는 재판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시장을 해 보니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매일 그 많은 결재서류를 보지 아니하고는 결재를 할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선시장은 책 읽는 시간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강권하고 싶다.인간은 `사회적 소산`, 즉 `사회적 결과물`이다. 살아 온 사회의 역사적 배경과 경험, 조건에 따라 그 사회 구성원들이 갖는 표상체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 양식 또한 그 표상체계에 대체로 의존한다. 따라서 역사적 배경이나 삶의 형태가 비슷한 사람들은 그 사고와 행동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출신지가 같은 사람들, 출신 학교가 같은 사람들, 종사하는 직업이나 처해 있는 조건이 같은 사람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따라서 표상체계가 비슷한 한 집단의 여론을 그 지역사회 전체의 여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대 정신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역사성을 띤 표상체계에만 의거해 앞서가는 시대정신을 비판한다면, 우리는 시대정신에 뒤떨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지역의 여론주도층이 가지고 있는 표상체계가 시대정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이다. 시대정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지역사회를 나는 `고인 사회`라고 본다. `고인 사회`에서는 결코 새로운 창의력이 발휘될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역동성마저 상실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지역에서도 지역경제활성화 문제를 염려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중앙정부는 `창조경제`를 화두로 던져 놓은 상태지만 아직도 그 개념조차 불분명하다. 창조경제를 지금까지 없던 사업활동이나 사업형태로 보고 우리지역 산업의 다각화를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창조경제의 개별적 효과가 어떻게 드러나더라도 창의력이 요구된다는 사실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표상체계`를 뛰어 넘는 노력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민선시장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세대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교체된 앞선 세대와 뒤 이은 세대의 `표상체계`가 같다면 어떤 혁신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한마디로 `다양한 사회의 접촉점`을 넓혀야 한다. 접촉점의 확대를 위해 첫째는 `다르다`는 이유로 여론형성층에서 배제된 사람들도 차별없이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우리 지역에는 산업화과정에서 다양한 출신지, 다양한 성장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 이들 또한 지역사회의 여론주도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야 한다. 분야별로 뛰어난 인재들을 확보할 수 있는 점이 우리 지역의 강점이다. 지역대학과 산업체로부터 충분히 수혈받을 수 있다. 셋째, 책 읽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사실 자체가 `다양한 사회의 접촉점`을 넓혀 나가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우리 지역의 시장은 물론 시 공무원들 모두가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더 많은 책을 보기를 바란다. 지성이 없는 삶은 맹목이다. 삶(실천)이 없는 지성은 공허하다. 이강덕 시장이 우리 지역을 삶(실천)과 지성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로 변화시키기 위해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끝

2014-08-28

포항-포스코, 상생(相生)의 이름으로

▲ 이정식포항제철소장 “기업과 지역사회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처럼 서로가 소중한 매우 가까운 관계다. 기업은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기업활동을 하고 있으며, 소속된 공동체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면 기업 역시 성장할 수 없다. 따라서 기업은 자체 성장과 발전을 위해 사회를 한단계 더 발전시켜야 한다”세계 최대 자선단체로 41개국 1천800여곳에 지사를 두고 활동하고 있는 유나이티드 웨이 월드와이드(United Way Worldwide)의 브라이언 갤리거(Brian A. Gallagher) 회장. 그가 지난 4월 한국을 찾아 전경련 초청 강연에서 강조한 `공동의 효과`야말로 포항제철소가 포항시를 위해 해야할 역할을 잘 정의해 주고 있다.이런 의미에서 며칠전 이강덕 포항시장이 `포항 그리고 포스코`라는 타이틀의 신문 기고문을 통해 포스코를 두팔 벌려 껴안아 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함께 하겠다는 의지 등 기업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진정성 있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 포항제철소 전임직원이 고마움을 느꼈다. 이처럼 단체장이 취임 일성으로 지역과 기업간의 유대강화와 동반성장을 강조하신 데 대해 잔잔한 감동의 울림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기업이 지역사회를 위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포스코를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도록 응원해 준 포항시민과 지역사회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보답은 포항제철소의 지속적인 성장을 기반으로 지역의 발전을 이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익성 창출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이 포스코가 지역을 위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보답과 혜택이라 생각하며, 이 같은 수익성 창출은 신규투자의 확대로 이어져 지역주민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지역인재를 기업에 알맞게 육성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상생의 밑거름을 만들어 줄 것이다. 또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철강관련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기업활동의 `생태계`조성에 기여해, 포항시가 글로벌 철강도시로 한번 더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것이며, 지역의 중소기업을 강소기업으로 발전·육성시킬 수 있는 기회들도 제공할 것이다. 더불어 글로벌 철강도시에 걸맞는 진정성 있는 환경관리 체제를 구축하고, 기술개발에 매진해 포항을 세계최고의 환경과 기술 허브 도시로 만드는 일도 포스코가 추구하는 상생의 모습이다.이외에도 포항제철소를 포함한 출자회사, 외주파트너사 임직원들이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통해 소비를 촉진하는 것과 자발적인 봉사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곳곳의 어려운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제반 활동들이 결국 포스코와 지역과의 미래성장의 디딤돌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지난 7일 포항시와 체결한 포항제철소 투자확대 양해각서 역시 포스코의 확고한 지역과의 상생마인드를 담아 포항시에 전달했다고 생각한다. 이날 포스코는 글로벌 최고 수준의 철강 본원경쟁력과 안전 확보에 노력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구체적으로 포항제철소는 노후설비 성능복원 및 안전시설물 확충을 위해 2016년까지 지속적인 설비투자와 정비비 예산 등을 확대하기로 했으며, 이는 올해 제철소내 설비유지 및 보수에 투입되는 1조원의 예산과는 별도의 투자규모이다. 그래서 이러한 투자가 궁극적으로는 포항시민들의 피부에 와닿는 체감적 파급효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 물론 철강업의 국내외 기업환경이 순탄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역민들의 지속적인 지원과 응원이 없으면 포스코의 일류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위치를 수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권오준 회장은 포항이 시민과 기업간 상생도시의 세계적 표본이 되도록 상호간 협력증대에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포스코 전 임직원 역시 지역이 없으면 기업도 없다는 결단이 있어 지속적인 투자를 약속한 것이다.포항제철소에 뜨거운 성원을 아끼지 않는 포항시와 시민들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항상 고민하며 최선을 다해서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포스코와 포항시민이 굳게 맞잡은 상생의 손은 도시 성장 동력의 불씨를 계속 지펴가는 아름다운 손이 될 것이다. 포스코를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53만 포항시민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민선 6기 이강덕 시장이 이끄는 포항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2014-08-25

제대로 된 통일논의를 기대해 본다

▲ 김영문 한동대 교수·전 민주평통 부의장박근혜 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통일준비위)가 지난 7일 첫 회의를 가지며 공식 활동을 시작하는 것을 보며 통일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가져본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염원이요 반드시 이뤄야 할 국가최대의 숙원사업이므로 역대정권 마다 나름대로의 통일정책과 통일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쟁만 없었을 뿐 분단 상태의 현상유지에만 그친 소극적인 통일정책이나 대다수 국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지 못해 오해와 저항을 받았던 통일정책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통일대상인 북한의 마음을 얻지 못한 통일정책들로 인해 분단 60여년이 지난 이 시간까지도 통일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통일준비위가 기존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의 기능과 다소 중복된다는 논란은 양 기관이 각각 장점을 살려 상호보완적 역할을 한다면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논의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전망도 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부정적인 면들만 바라본다면, 한반도통일은 과연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더욱이 국내외 정황과 국가안보를 고려할 때, 우리나라가 선진일류국가를 향한 새로운 도약을 하기위해서는 통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아무튼 정부의 통일정책을 믿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한번 기대를 걸어 봤으면 한다.통일을 향한 통일정책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강력한 통일의지는 물론 남한 국민들 그리고 북한정권과 주민들의 마음을 얻을 모든 요소를 갖춰야 한다. 통일준비위는 박근혜 대통령의 연초 `통일대박론`과 3월의 `드레스덴 선언`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대통령 직속기구로 출범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최고지도자의 의지가 강력하게 담긴 정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통일준비위의 인적구성으로 보아 정부 측 위원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외교안보 분야 및 시민단체 등 다양한 계층을 총 망라하고 있다. 이런 조직 구성이라면 열린 공감대 형성은 물론 온 국민들의 통일의지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우리 정부와 온 국민들의 통일을 향한 열망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우리와 통일을 함께 이뤄가야 할 북한을 끌어 낼 수 없다면 또다시 공수표로 돌아갈 것이다. 북한 정권은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나 `드레스덴 구상`을 `체제통일`을 향한 흡수 통일 망상이라 일축하며 줄곧 비난해 오고 있다. 그리고 북한이탈주민의 말을 빌린다면 북한주민들 간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통일준비위가 첫 회의에서 그 동안 연구한 과제들을 대통령께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제안된 남북한이 공동이익을 얻기 위한 다양한 의견들은 북한으로 하여금 충분히 구미를 당기게 할 만한 새로운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번 통일준비위에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통일준비위의 보다 구체적인 활동을 기대한다면, 통일의 이점이나 편익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대국민 설득력을 보강하고 통일비용에 대한 국민의 경제적, 심적 부담을 줄여갈 정책을 개발하여 국민들의 통일 열망을 제고시켜야 한다. 특히, 통일 무관심 세대라 불리 우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통일의식개발은 필수적이다. 더불어 희망적이고도 긍정적인 다양한 종류의 통일담론을 조성하여 지속적으로 확산해 갈 때 온 국민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다.그리고 북한을 좀 더 빠른 시일 안에 남북한 간 교류협력의 장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가장 우선돼야 하는 것은 서로 간의 신뢰회복이다.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야 말로 신실한 대화를 위해 “남북이 먼저 신뢰를 쌓자는 것이다”는 인식에 근거하여 보다 인내를 가지고 북한을 설득시켜야 한다. 이러한 신뢰의 바탕에서 인도적 문제 해결과 함께 공동으로 번영할 수 있는 민생인프라 구축을 위한 다양한 분야를 발굴하여 구체적으로 실행해 간다면 북한도 흔쾌히 교류 협력에 응 할 것이다.통일은 더 지체할 일이 아니다. 멀리 오래 갈 거 어디 있겠는가. 급한 대로 문화예술과 스포츠 분야의 교류부터 시작해 보자. 당장 눈앞에 닥친 인천 아시안 게임 참가나 추석을 전후한 이산가족 상봉부터 성사되길 기대해 본다. 이렇게 하나하나 화해협력을 위한 서로의 신뢰를 쌓아 갈 때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 줄 번영된 조국통일의 길이 앞당겨 질 것이다.

2014-08-22

치바이스와 한국화 체계 세운 위대한 화가, 김영기

▲ 권오신 로타리코리아 상임고문홍콩 등 국제경매시장에서 가장 고가(高價)로 잘 팔리는 세계 5대 화가 가운데 3명(제백석, 이가염, 장대천·齊白石, 李可染, 張大千)이 중국출신 작가이다. 미술 쪽에 깊이 발을 딛지 않은 사람도 세 사람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을 것. 물론 지금의 중국이 G2에 이르는 막강한 부를 업은 신 부호들의 영향이 크기도 하지만 이들 3명이 동양미술을 이끌었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반론이 없다. 후난성 상담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치바이스(齊白石·1863~1957))는 소목장(小木匠)을 만들어 입에 풀칠이나 했다. 가구에 간단하게 입힌 초충(草蟲)류 그림솜씨가 시장 일대에 화제를 뿌렸던 시기, 제백석의 그림에 놀란 북경대학 백발의 교수가 직접 찾아와서는 치바이스에게 체계 있는 화업(畵業) 공부를 제안한다.거듭된 간청에 굴복한 치바이스는 나이 마흔이 넘어 북경대학에서 문인화 공부에 몰두, 중국 근세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으며 이가염, 장대천을 걸출한 화가로 키웠다.그가 버린 화선지는 누각을 덮었다.거리의 화가를 서울대에 입학시켰다면 나라가 들썩일 데모가 일어나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시킨 중국의 문화적 융숭함은 배울만하다. 문화 대국이란 말이 실감나는 치바이스의 성장 일화이다.간결하고 도끼로 나무를 내려찍듯이 힘차게 붓을 휘둘러 초화(草花), 새우, 벌레 등을 삶의 정취, 유머가 넘치는 화풍으로 숱한 작품을 남긴 그의 미술세계는 명·청 시대를 살았던 팔대산인(八大山人), 오창석의 화풍을 많이 따랐다. 선이 굵은 전통적 수묵 바탕에서 청신한 현대적 감각을 드러내는 독특한 화풍을 창조했었다.치바이스는 북경 미술학원 교수로, 혁명이후 말년엔 중국미술가협회 주석에 올랐다. 치바이스 밑에서 먹을 갈고 화업을 전수받은 인재가 일제 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난 청강 김영기(晴江 金永基·1911~2003)이다.한말의 저명한 서화가 이신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의 맏이로 태어난 청강은 1932년, 당시로서는 일본을 택했던 조선의 젊은이와는 달리 북경 유학길에 올랐다. 보인대학에 입학하는 한편으로는 바로 제백석의 문하에 들어가 동양화의 전통적 기법과 정신을 익혔다. 청강은 당시 우리 화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당(以堂)이나 청전(靑田) 등 6대가의 화풍에 물들지 않고 문인화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 독창적인 한국화를 완성시켰다.청강 김영기는 중국 일본 화풍이 섞여 혼란스러웠던 1950년대에 한국화라는 예술체계를 완성시킨 위대한 화가이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그림 실력을 인정받고 귀국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에서 그림이 팔릴 수도 없었지만 먹고 살기조차 빠듯한 시대여서 치바이스의 작품처럼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청강은 한국전쟁 때 피난지였던 경주에서 3년간 교편(경주고등학교)을 잡았다. 그 시절 `남산과 월성`, `계림의 가을`과 같은 경주에 대한 그림을 많이 남겼으며 포항에도 자주 들러 겸제가 그렸던 `내연산 폭포`, `동빈 내항(개인소장)`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1980년대 말에도 흥해 출신 정치지망생이었던 권동수(權東守·74)씨를 따라 산장에서 묵으면서 내연산 하경을 주로 그렸다. 1957년 뉴욕에서 열린 `현대 한국회화전`때 작품 선정을 위해 서울에 온 큐레이터 프사티(Psaty)는 “당신의 새우는 스승만은 못하지만 스승 치바이스가 그리지 못한 달을 그렸다. 특히 달빛을 품고 새우가 유영하는 물결은 매혹적이었다”고 평론, 국내외 미술계에 화제를 뿌렸다.일제강점기는 물론 건국 이래 미국인 평론가로부터의 극찬은 청강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말년에 빠진 `월출산 하경`, `남해 비경`, `추당유정(秋塘有情)`과 같은 군청색 그림이나 중년의 `자화미술(字畵美術)`, `수세미(국립박물관 소장)`는 백미 중에 백미다.청강의 그림은 국제 미술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세 명의 작가가 된 제백석, 이가염, 장대천의 그림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나라의 경제력만큼 예술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문화적 텃밭의 차이일 뿐이다.

2014-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