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과 지금 여기의 우리
그는 대낮에 길을 다니는 것이 고행(苦行)이었다. 팔다리가 멀쩡하고 눈도 귀도 밝았으나 그는 대낮에 길을 다니지 않으려 했다. 손가락질과 욕설 따위야 안 보고 안 들으면 그만이어도 날아드는 돌과 똥을 피할 재간은 없었다. 그의 성명은 황일광(1757-1801). 누가 그의 이름을 지었는지 몰라도 그것이 `日光`이었다면 처절한 역설, 처절한 능욕의 이름이었다. 본디 그의 인생은 암흑이었다. 도대체 빛이 없었다. 태어난 순간, 아니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잉태된 순간, 그는 이미 빛을 상실한 생명이었다. 백정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사회적으로 노비나 금수보다 못한 취급을 받은 백정. 그 황일광이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천국이 둘이 있다. 하나의 천국은 여기 현세에 있고, 또 하나의 천국은 죽은 뒤에 갈 곳이다.”
황일광에게 현세의 천국은 천주교 형제들이 자신을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시공(時空)이었다. 그때 영혼과 일신을 천주의 품안에 맡기고 있었던 그는 아마도 평안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저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내 귀에는 절규처럼 들려온다. 인간다운 대우와 인간다운 자유, 그 진정한 삶의 빛과 행복을 찾은 한 인간이 외치는 `환희의 절규`로 들려온다. 어쩐지 그 음색은 7년 만에 드디어 어둔 땅속에서 세상의 빛으로 나와 버드나무 우듬지에 달라붙은 매미가 땡볕을 즐기듯 맹렬히 울어대는 그것을 닮은 듯하다.
약관이라 부를 16세, 이 나이에 그는 사마시에 합격하고 진사가 되었다. 수재였다. 임금의 총애가 그에게 오지 않을 수 없었고, 권문세가의 눈빛들이 그에게 모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황일광과 대척점에 태어나 황일광과 전혀 다르게 성장했다. 인간다운 대우는 늘 넘쳐났다. 집안에 노비들이 많아서 몸을 부리느라 땀 흘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는 바로 그것들이 양심적으로 부담스럽고 수치스러웠다. 아니, 그것들 때문에 자신이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성명은 황사영(1775-1801). 그가 현세를 마친 장면은 비장하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 전말과 천주교회 재건책을 중국 베이징의 신부에게 알리는 백서(帛書)를 작성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효수형을 당했던 것이다.
황일광, 황사영. 생년의 격차가 신분의 격차만큼 벌어진 두 사람이 믿음의 천국으로 들어간 해는 같다. 1801년, 신유박해의 순교자들이다. 그로부터 213년이 지난 이 여름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에서 집전하는 미사를 거쳐 복자(福者)로 거듭날 두 순교자는 그해 순교한 정약종과도 인연이 깊다. 황일광은 그의 집에 함께 지내다가 잡혔고, 황사영은 그에게 사사를 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종교가 없다. 다만, 지구의 현존 성직자들 중 가장 존경하고 가장 좋아하는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교황`에서 `황(皇)`자를 빼고 다른 적절한 말을 넣어야 당신의 빛깔과 향기에 더 어울릴 것이라는 투정을 갖고 있을 정도다.
묘한 노릇이지만, 나는 또 한 분의 프란치스코(1181-1226)를 잊지 않는다. 그분은 이탈리아 아시시의 조그만 언덕 위에 벽화로 존재한다. `새에게 설교`를 하는 프란치스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성장하여 군인으로 전쟁까지 했다가 어느 돈오(頓悟)의 찰나에 삶의 길을 바꿨던 그분은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 앞에서 구걸하는 걸인에게 충격을 받아 문득 순례를 접고 아시시로 돌아갔다. 사제 서품을 받지 않고 수도사로 현세를 마친 그분의 한 모습을 포착한 그 벽화. 프란치스코가 나무 곁에서 비둘기를 닮은 새들에게 무슨 설교를 하고 있는 그림. 소박하고 호젓한 성당에서 `새에게 설교`하는 그 말씀을 듣고 싶어서 사십대에 아시시를 세 번이나 찾아갔던 나는 장편소설 『붉은 고래』(2004, 현암사)에서 이렇게 썼다.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사제복을 입은 성인의 온화한 얼굴을 마치 부처의 후광 같은 빛살 바퀴가 둥글게 감싸고 있는데, 그는 맨발이다. 이 맨발 앞에는 열댓 마리의 새들이 모이보다 더 진귀한 무엇을 기다리듯 머리를 세워 앉아 있고, 나무 밑 허공에는 서당 공부에 지각한 학동처럼 흰 새 한 마리가 사뿐히 내려앉고 있다. 그는 모이통을 들고 있지 않다. 빈손이다. 오른손은 내려앉고 있는 한 마리의 새를 향하고 있고, 왼손은 시선과 함께 땅바닥의 새들을 향하고 있다. 모이를 쪼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 모여든 새들.
옛날에 프란치스코 수도사가 아시시의 조용한 언덕에서 새들의 심장까지 감화시키는 `말씀`을 했다면, 오늘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의 웅장한 대성당에서 무뎌질 대로 무뎌진 인간의 양심을 건드리고 반인간적 불평등 사회구조를 두드리는 `말씀`을 하고 있다. 황일광의 처절했던 환희의 절규와 황사영의 의연했던 피범벅 죽음, 그 참뜻을 한국사회가 곰곰이 헤아려보는 계기가 되어야 당신의 한국 방문과 말씀은 이 땅에서 포근한 축복이 되는 동시에, 종교적 복음(福音, Gospel)이 사회적 복음으로 확장되는 또 하나의 축복을 부르리라. 황일광, 황사영을 순교에 이르게 했던 그 복음은 인간의 양심과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적 복음이면서 반인간적인 모순투성이의 조선 지배체제에 맞서는 첨예한 저항의 사회적 복음이 되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닷새 만에 한국을 떠난다. 장엄한 행사들도 곧 기록보관실로 들어간다. 그때 이 땅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무엇이 남아야 하는가? 이것은 당신의 몫이 아니다. 우리 국민, 우리 사회의 몫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과 기도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지는 못한다. 올해 5월, 당신이 예루살렘을 찾아가 이스라엘 권력자와 팔레스타인 권력자가 손을 맞잡게 했으나 누군가 그것을 비웃듯이 다시 인간에 의한 참혹한 인간 살육이 자행되고 있지 않는가. 당신의 말씀과 기도가 세월호 참사의 고통과 슬픔을 지극히 위로할 수는 있어도 한국사회의 적폐를 해소하지는 못한다.
남북이 평화체제를 만드는 일, 돈을 절대적 가치로 숭배하는 한국사회의 타성적 야만성을 다스려 나가는 일, 묵정밭을 개간하듯 고함과 몸부림을 대화와 타협의 문화로 일궈나가는 일. 이 엄청난 시대적 과제들은 지금, 여기,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대환 <작가, 계간 문학지 ASIA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