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우리 영혼에 그 말씀이 남을 것인가

등록일 2014-08-18 02:01 게재일 2014-08-18 3면
스크랩버튼
특별기고프란치스코 교황을 마음으로 배웅하며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Don`t cry for me Argentina)`―이 유명한 노래는 영화 `에비타(Evita)`의 주제곡이다. 에비타(1919-1952)는 1945년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이 시민혁명으로 군사정부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올렸던 흰 도밍고 페론(1895-1974)의 아내이다. 페론의 재선이 확실시되던 1951년, 남편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서 선거운동 중 운집한 시민들 앞에서 후보를 사임한다. 온몸에 퍼진 암세포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바로 그 장면에서 영감을 얻은 노래가 저 주제곡이라 한다.

에비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머니 같은 권력자였다. `남미의 파리`로 불린 부에노스아이레스 변두리에 임대료 낮은 주택들과 빈민 숙소들을 지었다. 청년들을 위한 체육관도 지었다. 어느 날 빈민촌을 방문한 에비타는 그 비인간적 참상에 충격을 받아 “마을 주민 모두는 꼭 필요한 것만 챙겨서 마을을 떠나세요!”라고 한 다음에 즉시 그들을 버스에 실어 보내고 마을을 불살라 버렸다. 이것은 천사의 재림 같은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삶(믿음과 사상)을 키운 프란치스코 교황(78세)의 방한 기간에 나는 영화 `에비타`를 방영해주는 TV채널이 없는가 하여 한참을 뒤졌다. 찾을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한국보다 더 혼란한 역경을 헤쳐 나온 아르헨티나에서 인생의 예민한 시절을 감당했던 당신의 영혼에는 에비타와 페론 그리고 저 노래의 흔적이 얼마나 깊게 남아 있을까?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를 흔들었던 해방신학은?

대전 월드컵경기장, 성모승천대축전 미사. 당신은 당부했다.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현존 자본주의의 숨길 수 없는 폐단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종교는 마치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 서바이벌 게임에 몰두한 것처럼 왜 외형만 비대해지는가? “청빈 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수도자)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음성 꽃동네에서 남긴 이 말씀을 먼저 우리 종교 지도자들이 영혼에 새길 일이다.

“외적으로는 부유해도 내적으로 쓰라린 고통과 허무를 겪는 사회 속에서 암처럼 자라나는 절망의 정신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돈을 절대적 가치로 숭배하는 물질주의와 더 많은 돈을 가지려는 욕망에 휘둘린 무한경쟁체제의 폐해를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깊이 생각해볼 인격적 품위와 인간적 면모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가?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나는 여러분이 인간 증진이라는 분야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도록 격려하며,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저마다 품위 있게 일용할 양식을 얻고 자기 가정을 돌보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에 담은 지극한 인간애가 과연 우리의 영혼을 건드려주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초청한 청와대에서 당신은 평화와 정의를 거론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입니다. 정의는 하나의 덕목으로서 자제와 관용의 수양을 요구합니다. 정의는 우리가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을 통하여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합니다.” 이 말씀은 `피 묻지 않은 정의에 의한 평화`를 역설한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이 피 묻은 정의를 초월하는 정의와 평화. 과연 우리는 6·25전쟁에서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에 이르기까지 그 잔혹한 과거의 불의를 어떻게 용서하고 관용하여 남북평화체제와 상호협력의 시대적 새 지평을 열어젖힐 것인가? “한 가족이 둘로 나뉜 것은 큰 고통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하나라는 희망이 있고, 가장 큰 희망은 같은 언어를 쓰는 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국 청년에게 들려준 당신의 이 말씀에 `피 묻지 않은 정의에 의한 평화`로 가는 오솔길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나고 대화하라, 또 만나고 대화하라, 또다시…. 남북은 같은 언어이니, 그 언어 속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와 정서가 혈액처럼 흐르고 있으니!

무릇 인간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적응하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기도 한다. 환경은 인간의 조건이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과 성격을 창조한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이고 노인이다. 라틴아메리카, 아르헨티나의 고통이 어른거린다. 이제 당신의 말씀은 인간적 소통의 수단을 넘어 복음(福音, Gospel)으로 세계에 퍼져나가고 있다. 인간 존재의 근원을 성찰하라는 종교적 복음이기도 하고, 인간의 조건(사회 또는 사회체제)을 통찰하여 그것을 끝없이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역설(力說)의 사회적 복음이기도 하다.

광화문 광장의 시복미사. 당신의 강론은 `종교적 복음`과 투쟁의 해방신학으로 미끄러지지 않은 `사회적 복음`의 절묘한 일체(一體)였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이 나라와 온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애초에 종교적 복음과 사회적 복음은 일체였는지도 모른다.

`나으리`라는 조선시대 호칭이 사라졌다. 농담의 호칭으로만 한국사회에 존재한다. 문학용어에 `서발턴(subaltern)`이 있다. 하위의 종속계층은 스스로를 말할 수 없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한국사회에 스스로를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부자든 빈자든 누구나 SNS를 통해 정치적 발언도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인간 가치`나 `피 묻지 않은 정의에 의한 평화`를 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의 심각한 현안 문제이다.

발언들이 홍수를 이루는 한국사회를 뒤로하고,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을 떠난다. 가톨릭의 장엄한 행사도 당신의 소박한 행보도 머잖아 우리의 추억으로 남을 테지만, 진실로 우리의 영혼에 남아야 하는 것은 당신의 말씀이다.

이번 가을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이탈리아로 가고 싶다. 로마를 거쳐야 하는데, 바티칸이 아니다. 아시시다. 아시시 언덕의 소담한 프란치스코성당에 가서 `새에게 설교`를 하는 그 벽화의 말씀을 네 번째로 들어보고 싶다. 내 기억에는, 프란치스코 수도사가 새들에게 이렇게 일러주는 것 같았다.

“새들아, 모이를 더 먹기 위해 부리나 발톱으로 형제들을 공격하지 마라. 어린 새들과 약한 새들이 눈치 보지 않고 모이를 먹을 수 있게 해줘라.”

이대환 <작가, 계간 문학지 ASIA 발행인>

특별기고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