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치바이스와 한국화 체계 세운 위대한 화가, 김영기

등록일 2014-08-22 02:01 게재일 2014-08-22 18면
스크랩버튼
▲ 권오신 로타리코리아 상임고문

홍콩 등 국제경매시장에서 가장 고가(高價)로 잘 팔리는 세계 5대 화가 가운데 3명(제백석, 이가염, 장대천·齊白石, 李可染, 張大千)이 중국출신 작가이다. 미술 쪽에 깊이 발을 딛지 않은 사람도 세 사람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을 것. 물론 지금의 중국이 G2에 이르는 막강한 부를 업은 신 부호들의 영향이 크기도 하지만 이들 3명이 동양미술을 이끌었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반론이 없다.

후난성 상담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치바이스(齊白石·1863~1957))는 소목장(小木匠)을 만들어 입에 풀칠이나 했다. 가구에 간단하게 입힌 초충(草蟲)류 그림솜씨가 시장 일대에 화제를 뿌렸던 시기, 제백석의 그림에 놀란 북경대학 백발의 교수가 직접 찾아와서는 치바이스에게 체계 있는 화업(畵業) 공부를 제안한다.

거듭된 간청에 굴복한 치바이스는 나이 마흔이 넘어 북경대학에서 문인화 공부에 몰두, 중국 근세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으며 이가염, 장대천을 걸출한 화가로 키웠다.

그가 버린 화선지는 누각을 덮었다.

거리의 화가를 서울대에 입학시켰다면 나라가 들썩일 데모가 일어나고도 남았을 것이지만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시킨 중국의 문화적 융숭함은 배울만하다. 문화 대국이란 말이 실감나는 치바이스의 성장 일화이다.

간결하고 도끼로 나무를 내려찍듯이 힘차게 붓을 휘둘러 초화(草花), 새우, 벌레 등을 삶의 정취, 유머가 넘치는 화풍으로 숱한 작품을 남긴 그의 미술세계는 명·청 시대를 살았던 팔대산인(八大山人), 오창석의 화풍을 많이 따랐다. 선이 굵은 전통적 수묵 바탕에서 청신한 현대적 감각을 드러내는 독특한 화풍을 창조했었다.

치바이스는 북경 미술학원 교수로, 혁명이후 말년엔 중국미술가협회 주석에 올랐다. 치바이스 밑에서 먹을 갈고 화업을 전수받은 인재가 일제 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난 청강 김영기(晴江 金永基·1911~2003)이다.

한말의 저명한 서화가 이신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의 맏이로 태어난 청강은 1932년, 당시로서는 일본을 택했던 조선의 젊은이와는 달리 북경 유학길에 올랐다. 보인대학에 입학하는 한편으로는 바로 제백석의 문하에 들어가 동양화의 전통적 기법과 정신을 익혔다. 청강은 당시 우리 화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당(以堂)이나 청전(靑田) 등 6대가의 화풍에 물들지 않고 문인화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 독창적인 한국화를 완성시켰다.

청강 김영기는 중국 일본 화풍이 섞여 혼란스러웠던 1950년대에 한국화라는 예술체계를 완성시킨 위대한 화가이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그림 실력을 인정받고 귀국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에서 그림이 팔릴 수도 없었지만 먹고 살기조차 빠듯한 시대여서 치바이스의 작품처럼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청강은 한국전쟁 때 피난지였던 경주에서 3년간 교편(경주고등학교)을 잡았다. 그 시절 `남산과 월성`, `계림의 가을`과 같은 경주에 대한 그림을 많이 남겼으며 포항에도 자주 들러 겸제가 그렸던 `내연산 폭포`, `동빈 내항(개인소장)`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1980년대 말에도 흥해 출신 정치지망생이었던 권동수(權東守·74)씨를 따라 산장에서 묵으면서 내연산 하경을 주로 그렸다. 1957년 뉴욕에서 열린 `현대 한국회화전`때 작품 선정을 위해 서울에 온 큐레이터 프사티(Psaty)는 “당신의 새우는 스승만은 못하지만 스승 치바이스가 그리지 못한 달을 그렸다. 특히 달빛을 품고 새우가 유영하는 물결은 매혹적이었다”고 평론, 국내외 미술계에 화제를 뿌렸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건국 이래 미국인 평론가로부터의 극찬은 청강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말년에 빠진 `월출산 하경`, `남해 비경`, `추당유정(秋塘有情)`과 같은 군청색 그림이나 중년의 `자화미술(字畵美術)`, `수세미(국립박물관 소장)`는 백미 중에 백미다.

청강의 그림은 국제 미술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세 명의 작가가 된 제백석, 이가염, 장대천의 그림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나라의 경제력만큼 예술인이 대접받지 못하는 문화적 텃밭의 차이일 뿐이다.

특별기고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