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운하 뱃길 주변에 해바라기가 지천으로 피었다. 여름 꽃 해바라기와 포항의 인연은 1446년 단종 복위에 가담했다 경상도(慶尙道) 영일(迎日) 대잠산(大岑山)으로 유배를 온 사정(司正) 권수해(權壽海)공에 의해서 시작됐다.
사정공(司正公)이 유배지(포스코 주택단지내 영일대와 효자 음악당 사이)에서 처음 한 일이 향일재(向日齋)란 편액을 걸고 적소 마당에서부터 임금을 뜻하는 해바라기를 심는 일이었다. 유배 3년이 지나면서 해바라기 밭이 끝없이 펼쳐져 해맞이 땅 영일이 해바라기 꽃과 어울려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1410년에 예천 대죽리에서 경력공(經歷公) 권관(權寬)의 넷째로 태어나신 사정공은 좌의정을 지내신 종조부 문경공(文景公,軫)으로부터 수학(修學), 경서와 사기를 즐겨 읽으면서 절의불의(節義不義)를 부르짖는 청년시절을 보냈다.
1446년 단종(端宗) 복위라는 큰 뜻을 품고 밤마다 단종의 안위를 빌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 다음해 단종 복위가 탄로 나자 백형 권산해(權山海, 단종의 이모부, 문종의 동서)이 자결하는 날, 경상도 연일 땅 대잠산으로 유배됐다.
포스코 효자 주택단지로 바뀐 대잠산 적소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 문지방에 편액(向日齋)을 걸고 하루 4배씩 단종이 유배중인 영월을 향해 절하는 것으로 선왕(先王) 단종에 대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나타냈다. 1990년에 발간된 영일군사(迎日郡史)에도 공의 나이가 45살(1455년) 되던 해 영일지방에 들어 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1466년 공의 나이 57세에 세상을 하직, 자신이 해바라기를 직접 심었던 대잠산 관동(단종에게 절을 올린 곳)에 묻혔다. 사후 공을 기리는 지역 주민들이 해바라기를 더 심어 대잠산 일대는 여름만 되면 지천으로 핀 해바라기로 인해 시인 묵객들이 숱하게 찾아 관산(觀山)을 했던 곳으로 이름났다.
1469년 해바라기 산에 추원재(追遠齋)가 건립되어서 후손과 유림들이 묘향을 받들었으나 추원재(追遠齋) 역시 포스코 주택단지에 편입(編入), 월성군(月城郡) 안강읍(安康邑) 두류리로 이전됐으며 공의 유허비는 향일제가 있었던 곳에서 2km쯤 떨어진 포항시 대잠길 16번지에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일대에서 살았던 사정공의 후손들이 조선후기까지 해바라기 산을 가꿨으나 이후부터 차츰 줄어들다 포스코 주택단지 조성이 본격화된 1970년 들어 완전 사라졌다. 시군(市郡)으로 나눠져 있을 때는 포항시화(浦項市花)를 해바라기로 지정 하자는 여론이 있었을 정도로 상징이 됐다.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해바라기는 보통 4m에서 최대 8m까지 자라며 지름 30cm크기의 꽃이 태양을 따라 움직이는 한해살이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인물론(人物論)과 구봉(龜峯) 권선생유사(權先生遺事)집을 지은 공의 13대손 권혁근(權赫根,78) 선생과 유허비를 돌보는 후손 권혁조(74)옹에 따르면 공의 묘소(墓所)는 이 일대가 포스코 주택단지로 조성되던 1968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비봉산으로, 2013년엔 이 일대가 폐기물 공단으로 조성되면서 안강읍(安康邑) 양월리 산려로 다시 이장(移葬)됐으며 이곳엔 묘소(墓所)와 봉산재사(鳳山齋舍) 주변에 해바라기를 심고 충절(忠節)정신을 기린다.
공은 사후에도 유배생활을 했던 그의 생애만큼이나 유택(幽宅)이 안정되지 못했다. 후손들 백년(百年)금고(禁錮)형에 처해져 과거를 보지 못하고 경주, 영일 일대로 흩어져 살다 공의 현손(4대손)대에 이르러 이언적(李彦迪)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권덕린(權德麟, 병조정랑)이 처음으로 대과(大科)에 급제, 그로부터 관로(管路)가 열리긴 했었지만 역적(逆賊)의 후손이라는 낙인(印)이 찍혀 궁핍(窮乏)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대과(大科)에 급제한 구봉공(龜峯公)의 아들 매헌(梅軒) 권사민(權士敏)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장군과 함께 화왕산, 노곡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언양 현감(縣監)과 정려각(旌閭閣), 시호(諡號)를 받은 유명한 의병장이다. (자료인용:영일군사, 안동 권씨 인물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