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보따리를 풀어두고 고향 길을 가장 걷고 싶은 시기가 추석 무렵이다. 어머니와 마실 나갔던 뒷산은 새소리 곱고 녹음은 여전히 아름다운데 세상살이는 세월호와 같은 참척의 고통이 닥치는 등 늘 평화롭지 못하다.
38년 만에 일찍 닥친 추석이다. 명절 선물은 휴가지에서도 모바일로 구매하면 택배회사가 가져다준다. 차례 상에 올릴 제수꺼리도 마찬가지. 지금은 송편 빚는 집도 많지 않고 따로 명절빔을 사 입히는 집 역시 드물다. 고향집 가족과 이웃집이 줄어들어 차례자리에 서 있어야할 부모, 형제, 자식의 그림자가 그립기만하다. 큰 집에 가족들이 모이고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는 일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세월인가.
원룸, 아파트로 대체된 거리는 가을햇살의 파리함에 곧 묻힌다.
나이가 들어 그런 것이려니 생각해도 허전하기는 마찬가지다. 올해는 대체휴일까지 낀 추석연휴여서 여행을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이들이 늘어났다. 올 추석연휴는 잘만 활용하면 일주일은 놀 수 있어서인지 유난히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조상님 여행 잘 다녀오겠습니다”이다.
한 두세대전의 일이지만 어머니는 볕 좋은 날을 잡아 집안의 문짝은 죄다 떼어내 물로 씻고 햇볕에 바짝 말린 뒤 새 문종이를 바르셨다. 떼어낸 문짝들이 담벼락에 기대져 해바라기를 하면 추석이 오는구나고 여겼다.
어머니는 지난 가을 책갈피에 끼워두었던 고운 단풍잎 두 장을 딸아이 방 문짝 고리 옆에 반듯하게 창호지로 덧발라 주시는 멋스러움도 늘 간직하셨는데 세월이 흘러 그 집들은 다 허물어지고 문종이를 발라야하는 문짝대신 유리창이 달린 시멘트집들 뿐이다.
문짝을 떼어내 일 년 내내 쌓인 먼지를 물로 씻고 창호에 찹쌀 풀을 입히던 일, 풀비가 유리 닦기로 바뀌었을 뿐 집나간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은 오늘도 그대로이다.
바깥세상에서만 돌다보니 설탕 맛, 조미료 맛에 길들여진 자녀들은 어머니의 손맛이 추석 무렵이면 유독 그립다. 가마솥 뚜껑을 열고 잡곡밥위에 얹어 속살까지 구수하고 얼큰하게 만들어진 장떡하며 가지, 밀가루를 살짝 입힌 애동 고추를 꺼내며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가야 이것들도 다 제 간을 가졌다. 양념을 너무 치면 제 간을 잃는다”라고.
제 간을 잃는 처사가 세상살이에 어디 한두 가지만 될까.
어머니의 마음은 하나라도 자신의 것을 물려주고 싶어 하셨고 다듬지 않은 말이라도 생활의 지혜고 길잡이다.
백석은 `고야(古夜)`에서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째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 집 할머니가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 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백석은 정겹고 푸근했던 어릴 적 명절맞이를 다채로운 시각·후각으로 넉넉하게 살려 냈다.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 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 자연의 풍요로운 생명력은 한가위에 한껏 치오른다.” 김남주(1946~1994, 전남 해남)의 시(詩) `추석 무렵`이다.
시인이 본 추석 무렵은 그 관능적 생산력을 귀향길 고추밭에서 마주친 여인네들의 엉덩이로 표현, 익살맞게 노래했다. “고향이 아무리 객지처럼 썰렁하다 해도 자식 보고픈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다. “막내딸이 추석이라고 송이를 보내왔다./ 바빠서 못 온다고/ 아 내겐 송이 냄새보다는/ 사람의 냄새가 그리운 것을” (조병화의 시 `송이`)
고향 명절의 추억은 어느 사이 흑백 사진처럼 빛 바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