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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심맥회(心脈會)를 아십니까

▲ 조진 전 포항시의원1960~70년대 포항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학생모임 심맥회가 있었다. 66학번 선배들이 1기인데 우리는 기(期)라 하지 않고 맥(脈)으로 불렀다. 한 기수별로 10명 정도 회원이 가입했고 이후 13맥까지 이어져서 회원이 13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필자는 7맥이다.필자가 대학 1학년 즈음에 회원들은 한달에 한번 서울 동숭동 중국집에서 주로 만났다. 고향을 떠난 선후배가 모여 향수를 달래며 술잔을 기울이던 옛 추억이 새삼스럽다.1970년대 초 여름이면 송도해수욕장 백사장 청소 등 봉사활동을 하고, 방학때 중학교에서 과외수업 지도를 해오다가, 1973년 겨울 우리는 포항에서 순수 학생들로써는 최초로 연극공연을 개최했다. `수업료를 돌려주세요`라는 연극이었는데 기획, 연출, 출연 등 모두 심맥회원이 맡았다. 생전 연극이라곤 처음 해보는 초보들이 한달 이상 대본을 들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밤 늦게까지 혼신을 다해 드디어 생애 첫 공연을 했으니 얼마나 긴장되고 떨렸을까? 공연 무대에 오를 때 난생 처음 분화장을 하고 빌려온 양복을 헐렁하게 입고 연기하면서 서로를 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당시 포항문화원(지금의 경찰문화센터) 강당에서 공연을 했는데, 다행히 수백명의 관객이 좌석은 물론이고 통로까지 꽉 차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준비한 회원들도 스스로 놀라 행사를 정말 잘 했다며 안도했다. 경비는 포스코를 비롯한 지역 기업체, 인사들의 도움과 약간의 자체 재원으로 충당했다. 공연에 참여했던 회원들이 공연이 끝나고 뒷풀이를 하는데 어린마음에 그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한밤중에 송도해수욕장을 배회하던 그날 기억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이후 심맥회는 3~4년에 걸쳐 `여우`라는 연극을 한차례 더 하고, 음악회도 수차 개최했는데 당시 시민회관(현재 중앙아트홀)과 죽도동 국제극장 등을 이용했으며, 가곡공연에는 엄정행, 김원경, 김청자 교수 등이 출연했고, 국악공연에는 조상현, 조통달 선생 등이 출연했다. 당시 서울음대 성악과에 다니던 6맥 박정하 선배(전 나사렛대 교수)의 활약이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음악회 역시 관객이 넘쳐 대성황을 이뤘다.심맥회는 당시 회지(會誌) `심맥`도 제작, 발간했는데 회 소식과 회원들의 시, 수필 등 문학작품 및 회원동정 등을 실었다. 당시 철필(鐵筆)로 쓴 인판지를 등사해 일일이 제본해 만들었다. 오직 회원들의 열정으로 잡지발행까지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후에는 회원들의 군입대가 잇따르고 사회진출이 늘어나면서 그런 활동이 계속 이어지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지만, 지금도 60여 명의 회원들이 포항과 서울에서 각각 모임을 이어가며 일년에 한번 합동 모임도 하고 있다.현재 포항회장은 1맥 남성규 (주)진영산업 대표이사이고, 서울회장은 3맥 이균호 전 동부화재 부장이다. 회원들은 사회에 진출해 각계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해오고 있다.회원 몇 분을 소개하면 1맥 문충배(전 포항사랑병원장), 손민(동해기연 사장), 김해규(서울 진주약국 약사), 2맥 오임상(전 서울대 교수), 3맥 고 권종락(전 외교부 차관), 오창록(정형외과 전문의), 4맥 이희달(전 산업은행 부행장), 정용호(화일약품 부사장), 5맥 김용길(고대교우회 포항지회장), 문대성(전 인천대 교수), 배영철(징콕스코리아 사장), 6맥 금태환(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장 겸 포항뿌리회장), 김진오(전 광주고검 부장검사), 7맥 박승대(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박정찬(전 연합뉴스 사장), 황영명(효산출판사 대표), 8맥 조병현(서울고등법원장), 김철구(전 포항MBC 보도제작국장), 9맥 이석철(천일가스 사장), 도성환(홈플러스 사장), 10맥 백남도(전 포항시 자원봉사센터 이사장), 11맥 문충도(일신해운 사장) 등이 있다.지금은 어느덧 황혼을 바라보는 회원들이 40여년 전 고향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 애쓰던 젊은 시절은 생각만 해도 흐뭇한 추억으로 가슴에 다가온다.

2015-01-09

KBS 포항방송국 태동과 에피소드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1960년대만 해도 대다수 사람들은 라디오가 세상의 소식을 접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물론 신문과 TV가 있었지만 보급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라디오는 보물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라디오에 대한 추억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PR`(Public Relation)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시기가 5·16군사정부를 전후해서다. PR은 기관·단체·기업 등이 대중의 이해와 협력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표와 의지, 즉 의사전달의 수단으로서 선전·설득하는 행위로 정의되는데, 대중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군사정부는 자신들의 혁명 공약 등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성이 많았다. 실제 군사정부는 가장 먼저 전국의 각 시·군에 `공보실장`이라는 직제를 새롭게 만들었다. 영일군에는 포항고 4회 출신인 이상원 전 상공부 국장이 초대공보실장으로 임명됐다. 또한 `행정방송`이라는 것을 실시하였다. 경상북도에서는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라디오를 통하여 각종 행정사항을 각 시·군에 전파하였고, 각 시·군에서는 이 방송내용을 타자수가 타이핑하여, 이를 공문으로 만들어 각 읍·면·동으로 하달하였는데, 이를 이른바 `행정방송`이라 했다.행정방송은 오늘날 세계 굴지의 기업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는, 뜻밖의 결과를 낳는다. 당시 금성사에서는 3천여 대의 라디오를 생산했으나 판매가 어려워 부도직전에 몰렸는데, 군사정부가 행정방송을 목적으로 이를 대량으로 구매해 각 시·군으로 내려 보냈다. 이로 인해 부도위기에 몰렸던 금성사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정부내에서는 잘 알려진 일화다. 군사정부는 처음에는 국영방송이었던 KBS를 통해 방송차량을 이용한 이동방송국을 운영했으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자 아예 행정방송을 만들어 정권 옹호 수단으로 활용했다. 목적이야 어떻든 간에 이는 결과적으로 오늘날 방송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포항에도 행정방송이 태동하기 이전부터 KBS이동방송국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공보부 소속이었던 KBS는 방송차량에 장비를 싣고 방송국이 없는 지역들을 돌며 방송 서비스에 나섰는데, 1957년 10월 그 중 한 대가 포항초등학교에 자리를 틀면서 포항방송국이 태동하게 됐다. 신기한 라디오방송 현장을 구경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보기 위해 방송차량 주변은 늘 구경꾼들로 넘쳤다고 한다.그 이듬해인 1958년 이동방송차량이 철수하고, 포항 동빈동 한 건물에 방송장비를 설치한 후 정규방송을 시작했으며, 1961년 6월 포항시 덕산동 소재 2층 건물 포항교육청에 세를 들면서 마침내 정식방송국으로 승격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개국 당시의 출력이 250W에 불과해 야간에는 흥해에서도 청취가 불가능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포항방송국 초창기부터 아나운서로 입사해 13년 넘게 재직했고, KBS대구방송총국 편성제장국장을 마지막으로 퇴임한 후 아직도 KBS포항방송국 출신들의 친목모임을 이끌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최규열 회장은 포항방송국 태동과 발전을 지켜본 산증인이다.그는 언제 어디서나 “팔순을 앞두고 있는 내 인생에서 포항방송국을 빼고는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포항방송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최 회장은 개국 당시부터 스타 아나운서로 명성을 얻었으며, 향토방송인 출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최 회장에 의하면 포항방송국은 개국 당시 국장, 방송과장, 기술과장 등 13명의 직원이 전부였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미니 방송국에 불과했지만 당시로는 첨단시설이었고, 아나운서들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1960~1970년대 그가 맡았던 `직장대항 노래자랑` `해병의 밤` `농어민의 시간` `방송백과(문화, 경제, 산업, 체육 등을 다룸)` 등의 프로그램 역시 인기가 많았다고 전했다.또한 지금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지만 국영방송국이었던 탓에 당시 방송국 청사에는 `합심하여 이룬 혁명 단결하여 완수하자` `반공으로 국가통일 재건으로 혁명완수` 등의 군사정부 구호가 걸려 있었다고 했다. 방송사정이 이렇다보니 갖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신청곡과 사연을 엽서에 적어 보내면 노래를 들려주는 `노래의 꽃다발`이라는 인기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돈을 빌려주지 않거나 데이트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녀 간의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사연을 소개해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여기에 1971년경 모 전국구 국회의원은 차기 지역구 출마를 계획했는데, 조항산 중계소 준공기념식에 자신이 예상하는 정적을 단상으로 모신 것에 불만을 품고 국장실에서 책상을 치며 소동을 일으켰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그에게 10분간의 의정보고 방송시간을 할애하는 해프닝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포항방송국은 이동방송국에서 동시에 정식방송국으로 승격됐던 속초·여수·포항방송국 중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다. 속초와 여수방송국은 지난 2004년 지역방송국 기능이 조정되면서 문을 닫았다. 우여곡절 끝에 오늘의 터를 닦은 포항방송국이 더 큰 발전을 이뤄 지역을 선도하는 국영방송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2015-01-08

포항이 각성해야 할 도심의 위기

▲ 손형석포항도시재생위원회 위원장 1970년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이 잘살아보자는 국민의 뜻을 모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속에 포항종합제철소(현 포스코)를 세워 오늘의 번영을 이뤘다. 1995년 포항은 민선시장이 선출되면서 영일군과 통합됐고, 인구 80만 도시라는 목표 아래 장성, 양덕 택지 개발이 이뤄졌고 오천, 문덕, 대이동 등 약 250만평의 택지가 개발됐다. 하지만 현재 포항에 심각한 위기가 오고 있다. 문제는 원도심의 공동화 현상이다. 원인은 전임 시장의 8년 임기 동안 약 320만평 택지가 지금까지도 개발되면서 원도심의 인구가 신도시 아파트 건립지로 이주했고, 2006년에는 포항시청 마저 현 청사로 이전했기 때문이다.모든 세상의 이치는 중심이 무너지면 대안이 없다. 포항의 통합 당시, 전주시와 청주시는 포항과 비슷한 인구였다. 지금 청주시는 인구 64만이 넘고, 전주시 역시 63만이지만 포항시의 인구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필자는 45년 동안 대흥동에서만 살아왔다. 돌이켜 생각하면 IMF시기에도 지난 한해만큼 이렇게 심각하진 않았다. 중앙동, 대흥동 등 원도심에 작은 사업장이라도 가졌노라면 아침에 눈을 떠서 자신의 사업장에 나가는 것이 두렵다고들 이구동성 말한다. 그 만큼 작금의 경제 상황이 어렵다. KTX가 포항 경제를 일으키는 동력 인양 이슈가 되지만 교통이 편리해지면 이용하는 고객이 편리한 곳으로 빨대현상이 심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우후죽순 늘어나는 대형유통업체의 입주는 행정으로 막는 것도 한계가 있고, 울산 고속도로가 내년에 완공되면 신세계 백화점 입점과 동시에 포항사람은 많은 쇼핑을 갈 것이다. 동대구 역사부지에 신세계백화점이 입점해도 마찬가지다.포항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이 난관을 극복할 것인지, 정치권은 이 사실을 진지하게 주목해야 한다.지난해 12월 26일 포항mbc에서 `포항역사 활용방안`에 관한 시사토론이 있었다. 당시 나온 대안들은 하나같이 지역 실정과 무관한 선진 외국 사례들이다. 과연 선진 미술관이나 공원 등의 입지가 지역 주민의 경제생활을 얼마만큼 향상시킬 수 있을지 진정으로 고민은 해보았는지 묻고 싶다. 포항 역사부지는 주변 개인 소유를 포함해서 그동안 정말로 지역주민들에게 끼친 피해도 많다. 주변은 시설부지로 묶여서 재산권 행사도 못하는 주민들도 있다. 진정 무엇이 이 지역에 필요한 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 답은 주민들에게 있다. 주민들은 떠나간 이웃이 다시 돌아오기를 원한다. 사람이 거주하고 사람이 찾아오는 사람 냄새 나는 도심이 되기를 바란다.특히 중앙동은 포항 상권의 중심이었고, 현재도 상업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도시 공동화 현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장사를 하며 주거를 했으나, 주변 지역의 개발로 신도시 아파트에 입주하며 모두 떠났으며, 이곳은 이제 노인과 오랜 건물들만 남았다. 거기에 주거환경 역시 최악의 상태로 도시가스 조차 설치되지 않고, 도심 한복판에서 아직도 연탄을 사용하고 공동화장실을 사용한다. 시장님과 시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신지 진정으로 민심을 읽어줬으면 한다.그럼에도 포항의 지방세수(稅收)는 중앙동이 어느 지역보다 높으며, 토지 공시지가는 장성, 양덕, 오천, 이동의 10배이다. 이러한 포항의 원도심이 서서히 병들고 뿌리는 썩어가고 있다.원도심의 주민으로서 시장님과 시·도의원들께 건의한다. 시민이 뽑은 시장님은 시민의 뜻을 살펴주고, 지역주민이 뽑은 시의원, 도의원은 그 지역 주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 현재의 직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뽑아준 주민과 시민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행정은 실패한다. 주민과 전체 시민의 뜻을 잘 헤아린다면 오랫동안 지역민과 함께하는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2015-01-08

월성 발굴

▲ 권오신 로타리코리아 상임고문월성은 2천년 역사를 지킨 경주인의 자존심이 서린 곳이다. 월성을 중심으로 경주엔 국가 지정 문화재만 205건으로 우리나라 전체문화재의 70%가 존재하는 곳이며 도심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적 유적 도시이다. 경주의 땅은 원삼국시대 이전 유적부터 층층이 잠자는 곳이다.더욱이 월성은 세계 역사에서 찾을 수 없는 천년 왕궁이 있었던 자리다.토성 속에서 어떤 문화재가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으나 실크로드를 오간 신라인들이 남긴 호사스럽고 예술미가 극에 이른 생활유물들이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또 성덕대왕신종에 돋을새김으로 남긴 일승(一乘)원음의 정신세계를 뒷받침하는 유적들이 나올 수 있어 관심이 집중될 지역이다.지금은 옮겨갔지만 월성 가운데쯤 숭신전이 있을 땐 숲과 골기와 집 전각을 지나 석빙고 안압지(옛지명), 귀정문으로 내려오는 길은 최고의 이야기 길이자 답사코스여서 천 번은 더 오르고 내린 길이다.이 월성이 앞으로 10년간에 걸쳐 발굴된다. 문화재청이 지난달 12일 고유제를 올리고 예산 500억원이 들어가는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1970년대 경주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천마총과 황남대총, 안압지, 황남동 일원의 발굴조사에 이어 황룡사 발굴을 뛰어넘는 대규모 조사다.문화재 당국은 발굴조사에 앞서 전자탐지기로 월성 일대를 조사해보니 곳곳에서 건물 구조 흔적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흔적을 중심으로 트렌치를 넣어 유구를 찾아내고 실측, 유물 수습, 복원과정을 거친다.월성은 토성이지만 성의 뼈대는 돌로 쌓여져 있다.파사왕 기록을 보면 홍수로 서쪽 성의 일부가 훼손되자 남천바닥의 돌로 성의 기초 즉 토성의 심으로 삼았다. 월성은 남천, 북천의 바닥돌과 남산에서 옮겨온 돌로 기초를 만들고 흙을 덮는 고난도의 축성(築城)기술이 동원 됐다.필자가 문화방송 기자로 신라 통나무배와 금관 등을 특종보도를 했던 1970년대 경주는 미추왕, 내물왕, 황남대총과 천마총 가는 길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미나리 밭, 호박이 달린 채소밭이었다.현재 복원된 월정교에서 반월성으로 오르는 귀정문은 신라당시부터 유명했다. 차(茶) 통을 등에 짊어진 충담사가 귀정문을 통해 궁성으로 들어와 경덕왕에게 저 유명한 향가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70년대 경주문화를 이끌었던 윤경렬, 박지홍, 최남주 선생이 신라 천년의 흥망을 지켜본 귀정문에서 제1회 신라문화제 서제를 올려 후생(後生)의 도를 세운 곳이기도 하다.명주실 한 방구리가 들어간다는 숭신전 석정(石井)의 전설로 겁먹은 소년들은 그믐밤엔 접근조차 못했던 신비스런 곳이다.월성에 올라 경주를 바라보면 신라 왕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돌아서면 불국토로 가는 기와집 길이 들어서고 옆으로 서면 남산으로 가는 월정교와 해자(垓字)가 된 가로막는 지형이다.문천엔 원효와 요석공주, 김유신을 사랑한 천관녀의 얘기가 있고 김유신의 두 누이였던 문희 보희가 꿈을 사고 팔았던 전설의 집터가 월성 언저리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가야에서 서라벌로 온 탈해(4대)가 숯덩이를 미리 묻어두고 호족에게 뺏은 명당자리가 월성이다. 파사왕이 왕궁을 지어 들어왔고 경순왕 9년 신라가 망할 때까지 천 년 간의 수도요, 왕궁이었다.경주는 어설픈 발굴로 출토당시대로 보존되지 못한 뼈아픈 과거사도 간직하고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주령구를 불태우고 햇빛을 보는 순간 칠기의 그림이 날아가 버리는 등 그동안의 발굴조사를 보듯이 잘못된 발굴은 되돌릴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며 바로 멀쩡한 문화재를 파괴하는 현장이 된다. 일본은 나라시대 왕궁을 50년을 조사하고서도 아직 반밖에 하지 못한 조사과정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중국 역시 신중에 생명을 건 병마용 조사도 그렇다. 땅 밑에서 어떤 문화재가 출토될 지를 모르는 상황이다. 완벽한 기술이 없으면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늦추는 것도 방법이다.

2015-01-05

길 잃은 공직사회, 茶山에게 길을 묻다

▲ 김만수 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교수신문은 전국의 교수 72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올해의 사자성어로`지록위마`(指鹿爲馬)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지록위마`는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나오는 말로 `사슴(鹿)을 가리켜 말(爲)이라고 부른다`는 뜻이다. 즉 남을 속이려고 옳고 그름을 바꾸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정치적으로는 윗사람을 농락해 자신이 권력을 휘두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 사자성어를 추천한 교수들은 “2014년에는 온갖 거짓이 진실인양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고, 세월호 참사,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 등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무너졌다”고 지적했다.어쩌다가 나라가 이 지경까지 왔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함양미달의 사람들이 정치권은 물론 공직사회, 종교, 교육 등 사회전반에 걸쳐 실권을 장악하다보니 그들에게 굴종하는 `간신모리배`들이 마치 자신들이 나라와 소속집단의 주인인양 권력을 농단하는 그야말로 순리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웃지 못할 코미디 같은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그렇다면 우리가 이 어두운 질곡에서 벗어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은 과연 없는 것인가? 그 해답은 조선시대 민본(民本)사상을 기본으로 한 가장 이상적인 관료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제시했었다. 다산 선생은 이미 200여 년 전 칠흑같이 어두운 봉건시대에 실낱같은 한줄기의 의지로 75년의 생애를 썩고 병든 조선을 개혁하고, 관리들의 횡포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하려는 애민과 위민정신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통해 구해내고자 치열하게 살다간 최고의 실학자이자 유네스코가 인정한 역사적 인물이다.정치 경제 조세 법률 의학 문화 과학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다재 박식했던 다산은 수 천년에 걸쳐 동양의 정신을 지배해왔던 유학을 철저히 고증하며 중앙 관리는 물론 지방 행정의 수장, 암행어사 행각 등 공직현장에서 경험한 생생한 견문과 실학사상을 토대로 병든 조선을 개혁해 부국강병을 꿈꾸다 40세가 되던 해에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포항 장기에 유배를 시작으로 18년 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산은 좌절 하지 않고 오직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한문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500권이 넘는 주옥같은 저서를 남겼다. 수많은 불후의 명저들 중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목민심서`는 부패가 극에 달한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조선 후기 최악의 사회 상태와 정치현안들을 민생문제와 결부시켜 공직자(목민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자격과 공직자의 책무를 총 12부 72조에 거쳐 일일이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공직윤리를 강조했다.특히 다산은 공직자가 되려면 먼저 인성과 품성과 덕성을 기르고 갖춘 후에 공직에 나가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하며, 공직자의 윤리는 능력과 분수를 지키는 일이며, 봉급 외에는 먹지 않는 청렴함과 “목민관은 술을 끊고, 여색을 물리쳐야 하며, 거칠고 방탕하게 놀아선 안된다”는 삼금론(三禁論), 그리고 뇌물은 아무리 비밀리에 주고받더라도 하늘이 알고 (天知), 땅이 알고(地知), 상대가 알고(子知), 내가 안다(我知)는 사지론(四知論)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다산은 공직 생활을 잘하는 요체로 두려워할 외(畏)자를 꼽았다.다산의 이 같은 사상과 공직윤리는 시공을 초월해 존경받고 있다. 가깝게는 통일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치민도 부패한 공직자들을 척결하기 위해 다산의 `목민심서`를 항상 머리맡에 두고 애독하고 공무원들에게 지침서로 애독케 했다고 한다.이 땅의 공직자들에게 당부드린다. “공직자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공직자들이여, 목민심서를 읽고 다산을 만나라. 거기에 길이 있고, 대한민국의 명운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2014-12-30

사회적 공감을 부른 `미생(未生)`의 시청률

▲ 권오신 로타리코리아 상임고문지상파 3사가 시청률 사투를 벌이는 곳이 드라마다. 그런 지상파를 누르고 케이블 tvN의 드라마 `미생(未生)`이 시청률 상위권에 올라 화제다.“회사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다”`미생`의 대사가 팍팍하게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30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등 연말을 맞아 속이 허전한 시청자들을 TV앞에 묶어둠으로써 매주 시청률을 경신하고 있다.지상파 3사는 아침저녁 황금 시간대를 시청자들이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드라마를 볼 수 있도록 눈물겹도록 고마운 편성을 했는데도 `미생`에 밀려버린 셈이다. 지상파의 주중 드라마가 올해는 거의 10%대 시청률에 머물렀던 반면 시청률로 고전했던 케이블 텔레비전 드라마를 뜨게 했다.지금 지상파의 드라마는 갈등을 부추기는 소재가 흔하다.출생의 비밀, 뒤틀린 인연, 숨겨진 과거 얘기 등 소재가 진부하고 비슷비슷하다. 사극도 퓨전이어서 시청자들이 금방 싫증을 내고 채널을 돌려버린다. 실제로 어느 지상파의 겨울 개편 설명회에서 예전처럼 이지 고잉(easy going·적당히 하는 것)을 하면 안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지상파 3사가 드라마를 뺀 금요일 황금시간대를 이용한 편성도 돋보인다.금요일 시청자를 토요일까지 붙들어두는 편성 전략도 돋보이지만 그 흔한 출생의 비밀이나 멜로를 집어넣지도 않고 안방극장을 평정했다. 기존의 드라마 형식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 성공한 사례를 만들은 셈이다.드라마는 `땅콩 회항사건` 등 우리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갑을 관계를 재미있고 현실감 있게 펼쳤다. 직장에선 항상 마이너라고 할 여성과 직장맘의 위상이 그렇고 스펙을 쌓지 못한 비정규 사원의 신세가 리얼하게 그려졌다.장그래(임시완 분)가 사업아이디어를 냈지만 돌아온 결과는 정규직 사원의 공로가 된 반면 자신에게 돌아온 엄청난 심리적 고통으로 인생의 무게가 실려지는 과정을 그렸다.바둑 입단(12월5일 방송)에 실패한 장그래는 말 그대로 문제의 청춘이었다. 영업사원으로 취직한 장그래는 팀장이 준 10만원으로 양말과 속옷을 사서 팔러 나가지만 바둑 말고는 아는 것이 없는 그는 기원을 찾아가지만 금방 분위기가 싸늘해 진 것을 눈치 챈다.양말과 팬티는 사우나 앞에 가서 팔아야 성공한다는 영업사원의 비밀을 풀기까지의 과정이 현장감 있게 풀어내는 등 구성자체가 탄탄하다. 드라마는 사회적 약자의 심적 아픔을 풀어보려는 친구들의 배려, 어느 곳에서든 살아있는 정의의 움직이는 존재감에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다”는 대사역시 혼돈으로 치닫는 우리사회를 건지는 평범한 진리일 뿐이다.우리나라 국민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소비수준으로 보면 4만달러 시대에 사는데 국민의 행복감은 소득 5천 달러 국가와 비슷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회원국을 대상으로 삶의 질을 쟀더니 27위, 사회적 갈등부분은 끝에서 2위이니까 바닥 수준이었다. 대한민국의 공정성은 끝에서 1위였다.얼마 전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정직지수조사(흥사단 윤리연구센타)에서 우리나라 직장인의 정직 윤리의식은 58.3점으로 지난해 이맘 때 조사한 청소년 정직 지수에 비해서 무려 15.7점이 낮았다.이런 사회 분위기를 드라마 `미생`의 작가는 놓치지 않았고 또한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치유해 주기 위해서 용기를 주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료들이 늘 뒷받침하는 심리적 공감대야 말로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게 된 배경일 것이다.30대에서 `미생`이 요동치는 현장은 정직과 현실이 갖는 의미의 차이에서 나온 것일까.물론 퓨전 사극의 틈에서 정통사극을 성공시킨 `정도전`의 시청률(종영 무렵 19%, 닐슨코리아)이나 중국 한류를 다시 끌어낸 `별에서 온 그대(최고 시청률 28.1%)`, `밀회`, `장보리` 등 지상파의 몇 몇 드라마 시청률은 알아줄만 했다.

2014-12-19

“국민의 안전 골든타임, 119가 지켜드리겠습니다”

▲ 성정민구미소방서 119구조구급센터 지방소방사 저는 간호사의 자격을 갖고 구급대원으로써 시민의 위급상황에서 응급처치가 필요할 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방관이라는 직업에 대해 자부심이 아주 높고 공익을 위하는 일이라 보람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감사한 직업이란 생각 듭니다.구급대원은 특성상 참 다양한 현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슬픈사연, 황당한사연, 가슴아픈사연 및 질병, 교통사고, 산악사고, 각종 사고부상 등등….그런 현장을 출동해 수습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럴때면 현장에 환자나 요구조자들은 전적으로 저희 대원들을 기다리며,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그리고 환자의 상태 파악 등 필요 시 산소투여, 약물투여, 출혈처치, 모니터로 환자감시 또 상황에 따라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병원에 통보하는 역할을 합니다.저의 처치로 환자의 회복에 도움이 될 때 저는 무한한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일이 종종 발생되어 이렇게 글울 쓰게 되었습니다.119구급차는 정말 응급 할 때만 이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 아플때면 119, 힘들 땐 119라는 인식이 많이 홍보되어있습니다. 실제로 위급상황이 아님에도 119요청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전체출동건수에 과반수이상이 단지 단순병원 이송만 하는 비응급환자로 보여 집니다. 단순 병원 이송하는 게 뭐 대수겠습니까? 도움이 된다면 도와드리는 게 좋지요. 급성심장질환, 사고로 인한 중증외상 환자의 생사는 정말이니 촌각을 다투는 시간싸움입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있지요? 최대한 빨리 발견하고 구조하며 응급처치 후 병원이송, 병원에서의 처치들이 하나하나 빠짐없이 이뤄져야만 생명 하나를 다시 온전히 살릴 수 있습니다.하지만 한 센터에 배정된 구급차는 한 대이고 그 한 대가 출동 중이면 인근 더 멀리 있는 구급차가 우리 관내까지 오는 데 시간은 2배 이상 걸리게 됩니다. 촌각을 다투는 시간싸움에서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지는 것입니다.이런 사례는 실제로 여러번 겪었습니다. 주취자와 병원 이송여부를 두고 실랑이 할 동안 실제로 제가 근무하는 곳 바로 뒤 화사에서 급성심정지 환자가 발생했고 저희 구급차는 이미 주취자와 씨름 중이었고 타 관내 구급차가 현장도착하기 까지 십여 분 가까이 걸렸습니다. 빠른 재세동처치가 이뤄졌다면 그분은 살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결국 그분의 심장은 안타깝게도 다시 소생하지 못했습니다.구급차란 무엇일까요? 언제 이용하는 것일까요?119구조구급에 관한 법률과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2조 정의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구급차라고 함은 응급환자의 이송 등 응급의료의 목적에 이용되는 자동차 등을 말하는 것이며, 응급환자라 함은 질병, 분만, 각종 사고 및 재해로 인한 부상이나 그 밖의 위급한 상태로 인해 즉시 필요한 응급처치를 받지 아니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거나 심신에 중대한 위해(危害)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환자 또는 이에 준하는 사람으로서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사람을 말한다.한마디로 요약하면 구급차는 응급환자를 이송하는 것이며 응급환자는 응급처치가 아니면 생명에 지대한 영항을 미치는 환자를 말합니다.119구급차, 여러분은 어떻게 이용하시겠습니까?긴박할 때 적절한 응급처치가 기본이 되어야겠지요? 여러분의 올바른 의식이 하나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2014-12-18

해맞이, 포항 호미곶으로 오세요

▲ 오원기포항시 호미곶면장 2000년 밀레니엄 국가 행사로 지정되면서 포항 호미곶 해맞이가 전국 최고의 해맞이 명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소통과 화합의 상징인 영·호남의 `상생의 손`사이로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희망의 태양`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포항 호미곶을 찾고 있다.해맞이의 시초는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태양의 정기를 되찾기 위한 제사에서 비롯됐으며 연오랑과 세오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포항은 전국에서 으뜸가는 일출명소이다.올해도 어김없이 간절한 소망을 담고 웅장한 일출을 보기 위해 수십만 인파들이 포항 호미곶으로 발길을 향하고 포항의 유명한 `구룡포과메기`와 `대게`, `호미곶 돌문어`, `검은돌장어` 등 별미를 즐기고 도란도란 가족, 친지들과 오래도록 추억에 남을 해맞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여행은 1년 동안 분주하게 달려왔던 일상에 저속 기어를 넣고 삶의 속도를 늦춰 진정한 쉼을 얻는 신선한 청량제이며 가슴 설레는 여행준비를 하는 것부터 여행이 시작된다.호미곶 면민들은 한 해를 잘 마무리 하고 다가오는 을미년을 풍성하게 계획하기 위해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전국의 관광객들을 위해 마을안길 청소, 주차장 준비, 친절봉사, 바가지 요금 근절 등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게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 놓고 있다.해맞이 여행과 더불어 204㎞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가진 동해안의 대표적인 해양관광 도시인 포항의 환상적인 해안선을 드라이빙 하면서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등대박물관`, `대보항 트릭아트` 등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근대문화역사거리는 100여년 전 일제강점기 과거의 아픈 역사도 보존해 미래 세대를 위한 교훈의 장소이기도 하며 일본식 가옥들을 보존해 `일본인 가옥거리`로도 불리며 6개월 뒤에 편지를 받아볼 수 있는 이색적인 느린우체통이 있는데 새해에 가족들에게 전하는 편지를 써도 좋을 것이다.호미곶 대보항에 조성된 세계 최장 160m 트릭아트는 기네스북에 오른 중국의 148.63m 보다도 12m가 더 긴 실물처럼 보이는 트릭아트 벽화길이 조성돼 방파제 길을 걷다 보면 마치 아쿠아리움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포항시청 페이스북에 공유돼 단 하루만에 12만 명이 게시물을 보는 등 온라인상에 상당한 반향을 보이며 1천200여 개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또한 해맞이 행사가 열리는 해맞이 광장의 `새천년기념관`에는 수 만 년 지구의 역사를 가늠케 해주는 `화석박물관`과 한국수석회 회원들이 기증한 전국 각지에서 수집된 진기한 모양의 수석들이 전시돼 있는 `수석박물관`도 있어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다. 해맞이 이후 포항영일대해수욕장나 죽도시장, 구룡포를 찾아 싱싱한 해산물을 맛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포항에서 가장 내세울만한 것은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서 보는 일출이다. 누가 뭐라해도 전국 최고의 일출 명소가 틀림없다. 이곳은 강원도 정동진이나 울산 간절곶보다도 더 뛰어난 일출 풍광을 자랑한다. 상생의 손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한 해의 소원을 빌어보라.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새해 첫날 해맞이를 간다는 것은 바로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맞으러 가는 적극적인 행동이며 한 해의 새 계획과 비전들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바라는 아름다운 마음의 향연이다.일출의 명소 해맞이 광장에서 새해를 맞이한다면 행복과 기쁨이 풍부하고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성취되리라 확신한다.

2014-12-15

다음 생에서 남편 피하는 법이 있을까

▲ 권오신 로타리코리아 상임고문얼마전 통계청이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남자는 43.6%가 하고 싶다는 답을 내놓은 반면 여자는 44.8%가 “해도 좋고 안해도 된다”는 심드렁한 답변을 내놓았다. 나이 들수록 젖은 낙엽처럼 찰싹 달라붙는 남편을 두고 늙은 아내는 기겁할 일이다.종종 사람들이 묻는 말이긴 하지만 배우자를 보는 시각에 따라 애꿎은 질문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박완서의 단편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도 입만 열면 도덕책 같은 소리를 되풀이해 넌더리를 내던 아내는 딸이 대학에 들어가자 딸의 뒷바라지를 핑계 삼아 서울로 가 별거에 들어갔다. 은퇴 이후에도 연금을 꼬박꼬박 받으면서도 남편을 찾지 않았다. 많은 아내들이 벼른다. “한번 늙어만 봐라”고.부부의 인연법에 대해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1891~1943) 대종사의 해법이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 그 시절에도 그런 부부가 있었던 모양이다. 대종경을 보면 부부사이가 늘 나빴던 그는 남편을 미워하고 “다음 생엔 부부의 인연을 맺지 아니 할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그 말을 들으신 소태산은 “그 남편과 인연을 맺지 아니하려면 미워하는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도 두지 말고 오직 무심(無心)으로 대하라”고 일러주었다.일상에서도 미워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옆자리가 잘 비워 있는가 하면 출근길 차 속에서도 자주 마주친다. 이걸 해결할 길을 찾지 못해 “저 인간만 마주치지 않으면 좋겠는데”하는 마음을 먹으면 미움을 사는 일을 덧칠을 하는 셈이다.석가모니를 연원불로 한 소태산의 진단은 예상 밖이다.참회(懺悔)가 아닌 무심(無心)이었다. 소태산은 인연 농사를 잘 지을 것을 강조했다. “너와 나의 선 긋기는 거리를 더 늘이는 방법이다” 그럴수록 선의 두께만치 인연의 두께가 쌓이는 것. 소태산은 대종경선외록(大宗經選外錄)등 여러 곳에서 미워하는 인연일수록 `밧줄로 둘을 묶어 버리게 된다`고 강조하셨다.소태산의 설법자체는 흥미롭다. “미워하지 말라거나 좋아하도록 노력해 보라”가 아니고 무심으로 만나는 거여서 실제 사용하기에도 거부감이 없다. 무심은 마음 작용은 되지만 미움이란 마음 찌거기를 남기지 않고 시공(時空) 속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마음을 자유롭게 쓰는 방법이 법구(法句)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몇 년 사이 자유로운 명상(冥想)수련으로 이름을 날린 마음수련원 창시자 우명 선생은 “인간의 집착은 마치 좋은 장면으로 사진으로 남겨 영구보존을 하려는 것처럼 집착으로 남는다. 이 집착을 버리는 것이 가장 급하다”고 말씀하셨다.2천500년 전에 다녀가신 석가모니는 “세상에 살면서도 집착을 놓아버릴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만이 열반(涅槃)의 가치관(價値觀)을 증득(證得) 할 수 있다”고 설법했으니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은 늘 재색명리를 찾기 위해 번뇌스런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의 생사(生死)를 윤회로서 파악, 생명의 인연(因緣)은 자신의 행위 결과에 따라서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윤회사상은 불교 뿐 아니라 힌두나 자이나(Jainism)교의 근본 교설(敎說)이기도 하다.밥 한 그릇도 지을 줄 모르는 남편일수록 나이 들면 아내 곁에 젖은 낙엽처럼 찰싹 달라붙으니 늙은 아내는 기겁할 일이다. 부부를 끌어당기는 고무줄은 탄력이 좋을수록 더 좋다.50대 백수가 흔한 요즘 같은 세상을 잘 헤쳐나가려면 남편이야말로 아내 뜻과 크게 다르지 않는 생활을 위해 굽혔다 폈다가 자유스러운 유연성을 40대부턴 길러야 할 것 같다. 말년이 춥고 고달프지 않는 길을 미리 찾아 두는 것도 인연농사를 잘 짓는 법이다. 이 칼럼이 신문에 나면 나의 아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벌써부터 입가에 웃음이 핀다.

2014-12-12

포항 민원 창구 `영포목우회`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지난 2010년 7월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이 하나 터졌다. 당시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민간인 사찰을 했다는 의혹이 나온 것이다. 특히 야당은 이와 관련, 포항 출신들을 몰아세웠다. 이모 공직윤리지원관 등 포항출신들이 국정농단을 했다며 연일 정부와 여권을 물고 늘어졌다. 여권에서 악의적인 정치공세라며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를 지켜본 포항출신 출향인들은 물론 포항시민들은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급기야 전국 신문과 방송 등에서 `영포게이트` `영포회` `영포라인`에 이어 `영포목우회`를 거론하며, 이들을 무소불위의 권력집단으로 오도하고 매도하기까지 했다. 포항인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지만 국민여론은 차가웠다. 결국 이 일로 대통령을 배출했던 포항이 국민들에게 마치 불법사찰을 일삼는, 불순하고 파렴치한 집단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고, 포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모래 섞인 밥을 먹으며 포스코를 세워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이끌었던 포항시민들은 명예와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당시 필자를 비롯하여 뿌리회 등 지역시민단체들은 일부 정치권의 악의적인 포항 매도에 단단히 화가 났다. 더이상 포항 매도를 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 발표에 이어 야당 당사를 항의 방문하고, 한 중앙지에 포항의 분노를 글로 싣기도 했다. 사실 포항과 민간인 사찰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녀사냥의 표적이 됐던 영포목우회는 2010년 사단이 나기 15년 전인 지난 1985년 10월 영일과 포항 출신으로 중앙부처에 근무하는 사무관 이상 공무원들이 만들었다.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우의를 도모하고, 더불어 고향발전에 기여하자는 취지로 창립했던 것이다. 이 모임의 초대회장은 필자가 맡았고, 이어 최주영 전 건설부 도로국장, 박명재 현 국회의원, 박승호 전 포항시장 등이 회장을 맡았다. 이렇게 수구초심의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영포목우회를 야당은 느닷없이 국정을 농단하는 파렴치 집단으로 둔갑시켜 향토출신 공직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서울에는 예나 지금이나 중앙부처에 근무하는 전국의 230개 지자체 출신들이 대부분 향토 출신별로 구성된 모임을 두고 있다. 동향출신 공직자 모임은 허다하며, 영포목우회는 그중 한 모임에 불과했던 것인데, 야당은 엄청난 화력을 쏟으며 초토화시켰다. 영포목우회는 그때 너무 큰 상처를 받아 아예 활동을 중단했고, 아직도 재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초대회장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당시 영포목우회를 탄생시킨 가장 큰 배경에는 고향에서 올라오는 민원을 처리하는데 도움을 주는데 있었다. 이러한 활동은 영포목우회가 창립되기 5~6년 전인 197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졌던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1972년부터 1988년까지 16년 동안 포항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고 강신우 삼일회장도 영포목우회 탄생에 영향을 주었던 분이다. 강 회장이 포항상의를 맡은 이후 중앙부처로 가져오는 고향민원이 날로 늘어났고, 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고향출신 공직자들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그래서 각 부처 사무관급 이상이 고향민원에 대해 행정적인 안내를 하자는 마음이 모아지면서 영포목우회가 태동했다. 당시 고향민원은 대부분 건설부, 상공부, 농수산부, 문화공보부 관련 소관이었다. 강신우 회장이 고향민원을 처리하기 위해 상경하던 초기만 해도 필자가 이를 받아 각 부처에 근무하는 향토출신 공직자들에게 다시 안내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고향민원이 점점 늘어나면서 혼자서 감당하기가 버거운 상황이 되면서 건설부는 필자, 총무처 박명재, 상공부 이상원, 농수산부 이기해, 문공부 이상용 등이 민원을 나눠 분담해 소위 `고향 관련 민원창구` 역할을 했다. 고향민원 중에서 가장 많았던 것은 해외건설 취업관련 민원이었는 데, 1970년 말에서 1880년대 초까지 대략 600여건에 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돌이켜보면 당시 포항 영일 출신 사무관 이상 영포목우회 회원들은 오직 고향발전에 힘을 보탠다는 목적 하나였고, 뜻이 모아져서인지 의지도 대단했으며, 성과 또한 많았다. 각 부처 예산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그걸 어떤 식으로든지 고향 포항에 내려보내려고 애썼다. 이런 것은 다른 자치단체 출신도 다 마찬가지였으니 그게 문제될 건 없었다. 상호 업무협조와 고향에서 올라오는 민원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된 영포목우회. 하루빨리 기력을 되찾아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한다. 경북매일신문이 2015년 1월 16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재경포항출향인 신년교례회를 개최한다고 하니 아픈 과거는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고향발전을 위해 함께 모이길 간곡히 당부드린다. 글로벌 철강경기 침체로 지금 포항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대들의 지혜 하나라도 아쉬운 마당이다.

2014-12-11

경주시의회 싱가포르 해외연수

▲ 한순희경주시의원·수필가 호텔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를 돌았다. 전 세계 지구인들이 찾아와서 24시간 살아 꿈틀거리는 젊은 도시다. 젊은 사람들 취향의 옷가게와 카페, 그리고 식당들은 지난밤을 이야기 하듯 어지럽고 골목마다 여행 가방을 들고 나가는 사람들로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시시각각 구름과 햇빛이 펼치는 하늘의 모습을 보았으며 지금 현재는 비가 내리지만 우산이 없어도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설계된 건물 구조가 이 나라의 기후 조건을 잘 반영한 듯하다. 형형색색의 아파트와 예쁜 파스텔톤의 색감이 예쁜 건축물들은 그 자체가 예술이다. 같은 구조의 건물은 국가에서 허가를 해주지 않아 설계에서부터 예술성이 가미된 독특한 디자인을 하고 있는 세련된 도시다. 한 번 심은 나무는 바람이 없는 관계로 아름드리 고목으로 자라 도심 속 공원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푸른 도시로 부르고 싶다. 정치가 안정이 되어야 연속적인 계획된 도시를 만들 수 있어 경제 부국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부러운 나라다. 장애인을 돌보고 있는 아동복지시설을 찾았다. 중증장애인들이 침대에 누워 생활하는 곳으로 후덥지근한 날씨로 천장에는 선풍기가 돌고 있는데 장애인을 보는 순간 내 마음까지 더워지는 것 같다. 대부분 누워서 생활하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 가정에서 돌보지 못하는 1급장애인들만 돌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시설을 둘러보며 프로그램 운영 방법과 자원봉사 교육을 받고 식사 배식을 했다.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환자를 침대를 세워놓고 죽을 떠 먹였다. 인내심을 가지고 한 숟갈 두 숟갈 정성껏 떠 먹였다. 경주시 노인전문 요양병원 등 다른 장애인 시설에도 가끔씩 봉사활동을 했지만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환자를 돌보는 곳은 처음이다.버스로 2시간을 이동해서 납골당(니르나바)을 찾았다. 장엄한 장송곡이 흐르는 곳이 아니고 5성급호텔에 휴식을 취하러 온 것 같은 분위기다. 싱가포르 자국민 절반가까이 안치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호텔보다 더 호화롭게 장식돼 있어 탄성이 흘러나왔다.주룽새공원을 탐방했다. 모노레일을 타고 숲 속을 달리는데 새 소리의 오케스트라와 공기의 상쾌함이 여행의 피로를 씻어주었다. 새들의 지상천국이다. 플라밍고의 군무 그리고 앵무새의 아름다운 소리 등 새들의 공연을 보며 경주시의 버드파크를 떠 올렸다. 어제 탐방한 국립식물원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 온 것을 실감하며 시의원과 공무원들이 좀 더 빨리 벤치마킹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식물원도 새공원도 원초적 자연과 어우러지게 인공이 가미되면 보는 사람들이 한층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것들이 기본적으로 면밀한 검토에 따라 장소 선정에서부터 선행돼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신라천년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본다. 동궁원과 버드파크는 갓 쓰고 양복 입은 건물의 외향부터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제2동궁원은 버드파크로 확장하고 식물원은 화랑교육원 앞 경북산림연구소 주변으로 남산을 끼고 계획해 봄이 어떨까 감히 진언해본다. 지금은 세계인이 찾는 `황금도시`경주다. 선택과 집중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파리하면 금방 떠오르는 것이 에펠탑, 모스크바는 붉은 광장의 크렘린 성, 덴마크는 인어공주다. 싱가포르는 무엇일까. 머라이언상이다. 머리는 사자 몸은 물고기다. 머라이언 조각상이 있는 머라이 공원은 일년에 해외 관광객이 1억3천만 명이 찾는 싱가포르 관광명소 중 하나다. 1972년 리콴유 총리가 사자의 도읍이라는 싱가포르 전설을 각색하고 기획하여 철저하게 마케팅을 해서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명소로 만들었다. 경주하면 떠오르는 세계적인 조각 금관은 어떨까. 전 세계 금관 7개 중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금관 6개가 황금도시 경주시에서 발굴됐다. 누구나 좋아하는 `황금`, 경이적이지 않는가?

2014-12-08

수술복 대신 앞치마

▲ 정숙영포항시 홍보담당관실 자녀를 양육하다 보면 `과연 이 아이의 재능은 어디에 있을까, 그 재능을 한 번 키워보고 싶다`기 보다는 남들이 다 가는 편안한 길로 넓은 관문으로 묻혀 가는 평범함이 최선의 선택일 거라 믿는 부모들이 부지기수다.자녀에게 부모란 필요의 존재일지 모르지만 부모에게 자녀란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이다. 아이에게 이 다음에 커서 슈바이쳐 박사의 인술을 펼치는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것과 아이가 커서 사람들의 다양한 미각을 만족시키는 요리사가 되기를 바라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대다수 부모의 솔직한 심정은 이왕이면 의사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미국 유명 의대 졸업을 1년여 남겨 두고 “어머니, 저는 요리사가 되고 싶습니다. 의대는 그만두겠습니다”라는 아들 앞에 어느 부모든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놀란 가슴 진정이 안 될 것이다.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두 살부터 혼자 힘으로 키운 외아들이 졸업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고 요리의 길로 간다고 했을 때 그 어머니는 반대했다고 한다. “안 된다. 실수하는 거야. 남자에게 요리는 취미일 뿐이다” 하지만 아들은 의대에 자퇴서를 내고 뉴욕의 요리학교(ICC·International Culinary Center)에 등록해 수술복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수술칼 대신 식칼을 들었고 어머니와 아들은 1년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뉴욕 맨해튼의 최고급 레스토랑 `다니엘`의 인턴을 마치고 정식 채용돼 일하던 어느 날 어머니가 손님으로 찾아오셨고 품격 있고 격조 높은 정중한 서비스와 완벽한 음식을 맛 본 어머님은 “네가 요리를 좀 하는가 보구나”하며 아들의 남다른 선택을 인정해 주셨고 아들은 그 이후로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됐다.남다른 선택을 한 그는 바로 김훈이(42·미국 이름 후니 김)씨다.그가 시작한 뉴욕 52번가 한식당 `단지`(Danji)는 한식당으로서는 최초로 미식계의 `성서`로 불리는 레스토랑 평가서 미슐랭 가이드의 별 하나를 받았다.“과학을 좋아해서 과학고에 진학했고 코네티컷대 메디컬스쿨 4년 과정 중 3년 과정까지 배우고 그만두고 요리의 길로 갔는데 자신을 요리사로 만든 건 요리 못 하는 어머니라고 한다, 패션 디자이너이신 어머니는 요리할 시간이 별로 없었고 변호사인 아내 또한 어머니 보다 더 요리를 못 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부지런히 식당을 돌아다녀야 했다고 덕분에 미각이 일찌감치 발달했고 어느 날 내 손으로 직접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에 잠시 요리 학원에 다니다 완전히 요리와 사랑에 빠져 들게 됐다고 한다.탄탄대로를 달리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미궁의 인생 뉴턴을 하기란 쉽지 않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의 용기 있는 결정에 과감한 결단력에 찬사를 보낸다.뉴요커들에게 한식전도사로서 한식의 세계화에 앞장 서고 있으며 배우 나탈리 포트먼도 빌 클린턴 딸도 고객으로 만들면서 된장찌개와 은대구조림 같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요리로 비범하게 뉴욕을 사로 잡아 한식의 새 지평을 열고 있으며 대표 메뉴는 `Dwenjang jjigae(된장 찌개)`고 다른 거의 모든 한식에도 된장을 사용하기로 유명한데 그가 쓰는 된장은 바로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시상식에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한 포항시 공동브랜드인 `영일만친구`, `죽장연`에서 가져다 쓰는 된장이라고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피를 말리던 수능이 끝이 나고 수험생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남을 도와 주고 싶어서 의사의 길로 갔다가 남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다시 요리의 길로 향로를 바꾼 김훈이 씨와 같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 가슴 뛰는 일들을 하는 과감한 선택과 결단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2014-12-05

일월문화제와 호미예술제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포항에서 문화예술제를 처음으로 개척하였던 서상은(徐相殷), 그가 영일군청을 떠난 지 15년 만에 군수가 되어 돌아왔다. 서 군수의 부임은 불과 3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던 보경예술제가 새롭게 재출발하는 계기가 된다. 서 군수는 1982년 10월 제4회 보경예술제를 흥해고등학교에서 더욱 성대하게 부활했다. 보경사 내연산악제를 비롯, 민속경연대회, 전국백일장 및 사생대회, 한시백일장, 모포줄다리기, 궁도, 그리고 읍면대항경연 등 모두 15개 행사가 다채롭고 화려하게 펼쳐졌다.특히 영일군내 각 양조장에서 보내온 탁주로 대회장 입구에 `탁주시음장`을 설치하여 이를 관객들에게 무료로 제공하였는데, 북새통을 이룬 관객들의 흥을 돋우어 보경예술제의 부활을 자축하는 한마당잔치와 다름없었다.서 군수는 행사 이후 보경예술제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종합평가회`를 열어 행사명칭을 `일월문화제`(日月文化祭)로 바꾸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 세오녀`가 포항에 비로소 등장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일월지`와 `일월천제`(日月天祭)도 나오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의 일이다.계획대로 1983년 10월 30일 보경예술제를 개칭한 `제5회 일월문화제`가 열렸다. 축제를 하루 앞둔 29일 오전에는`영일민속박물관`을 개관하고, 오후에는 `연오랑 세오녀 선발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축제 당일 인시(寅時 : 오전 3시~오전 5시)에는 동해면 도구리 면사무소 뒤 소나무 숲에서 처음으로 일월천제를 지냈다. 천제단(天祭壇)을 설치하여, 초헌관은 군수(서상은), 아헌관은 영일문화원장(정봉섭), 종헌관은 영일군교육장(최정석)이었다. 이때부터 매년 10월에 일월천제가 거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영일민속박물관은 전국 최초의 군립박물관이었다. 서 군수는 부임 이후 군청 및 읍면사무소 직원들에게 날로 사라져가는 민속자료를 1인당 10점 이상 수집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하여 총 4천604점에 달하는 민속자료를 수집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이를 과거 흥해 현감 집무실이었던 동헌 건물을 활용하여 영일민속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서 군수가 우리의 민속자료를 한데 모아 전시한 것은 참으로 자랑스럽고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공개하지 못한 자료들이 있다고 하니 박물관의 전시 공간 부족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던 일월문화제 또한 서 군수가 달성군수로 이동하면서 부침을 거듭한다. 이후 간헐적으로 개최돼오다가 포항시와 영일군이 합병되면서 일월문화제라는 명칭이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이를 다시 부활시킨 이가 박승호 전 시장이다. `영일만축제`란 이름으로 재탄생했다가 이후 명칭이 `일월문화제`로 개명돼 지금까지 개최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6월 14·15일 이틀간 개최되었던, 올해로 20회를 맞은 `호미예술제` 또한 그의 열정과 노력이 낳은 산물이다. 특히 2008년 제14회 호미예술제부터 `연오랑 세오녀 추모제`가 서제로 개최되었는데, 제1회 추모제에서 초헌관은 황대봉(연오랑 세오녀 동상 건립자), 아헌관은 김병관(포항노인회장), 종헌관은 필자가 맡았다.이러한 호미예술제가 내년부터 더욱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제21회 호미예술제부터는 바다의 날인 5월 31일에 맞춰 열리게 되고, 명칭도 `호미바다예술제`로 개칭하여 보다 다채로운 행사로 꾸며질 예정이라고 한다.그는 또 올해로 7회째를 맞은 `흑구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호미예술제 때 시상식을 가지는데, 이는 포스코의 협찬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다. 호미곶 보리밭마을 구만리에 `흑구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는 등 호미곶이 그에 의하여 지역 문화예술의 텃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또한 `호미예술지`(虎尾藝術誌)를 발간하고 있는데, 23집까지 나온 것은 물론 `중국 조선족 문학상`도 올해 처음으로 가졌는데, 수백 명의 조선족 문인들이 참가하였다. 여기에 `조선족 청소년 문예공모전`도 개최하여 연길 현지에서 시상식을 가지는 등 더 큰 뜻도 심어가고 있다.한편, 지난 1983년 당시 서상은 군수와 수필가 빈남수, 포항예총지부장 손춘익 아동문학가가 중심이 되어 `한흑구문학비`를 보경사 내연산 기슭에 제막하였는데, 이는 조전목, 이용덕, 하민영, 성홍근 등의 성금으로 이루어졌다.지난 1983년 착공되어 1985년에 개관한 호미곶 등대박물관이 오늘날 국립등대박물관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과 `한민족해맞이축제`가 열리게 된 동기 또한 그의 아이디어에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2014-12-04

청렴의 이유

▲ 이상식영덕소방서 소방위 우리는 `청렴`한 사람을 좋아한다. 청렴한 공직자가 있다면 그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고, 청렴한 삶을 살았던 위인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청렴은 사랑이나 배려와 같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미덕이고, 사람이라면 응당 가져야 하는 삶의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깊게 들여다보면 청렴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의 미디어에서는 종종 공직자의 부정, 부패 관련 사건을 보도한다. 사회적 책임을 지는 공인들이 청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기로 남의 돈을 빼앗거나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만행 또한 주변에서 보거나 들을 수 있다. 역시 청렴하지 않은 모습들이다. 청렴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보다 청렴하지 못한 인생을 사는 주변인들, 공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지금이다.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청렴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품곤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는데 남과 함께 살아가는 만큼 남에게 영향을 받기 쉽다. 공직자 혹은 나의 몇몇 주변인들이 작든 크든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고 거짓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을 접하게 되면 청렴하지 않은 인생에 대해 익숙해지고 나 또한 청렴한 인생을 선택하는 것 보다 그렇지 않는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청렴이라는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주변에서 혹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가 청렴하지 못해도 스스로 청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크게 두 가지 이유로 그 노력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청렴해야 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며 그 행복은 단순한 심리적 만족감이나 단기간의 쾌락이 아니라 충실하고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보면, 어떤 두 사람이 있을 때 한 사람은 단기간의 이익, 돈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고, 한 사람은 단기간의 돈보다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고 할 때, 누가 마지막에 자신의 인생이 `참 되었다`, `좋았다`, `훌륭하다`라고 평할 것인지는 모두가 쉽게 말할 수 있다.두 번째 이유는 청렴한 삶은 우리의 미래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부정과 부패가 아닌 맑고 공정한 절차로서 임하고, 사회 전체가 그 청렴함을 믿는 환경에서, 비효율적인 검열이 축소되고 불신에 의한 사회적 비용이 감소되며, 청렴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이 해소된다. 이 같은 청렴한 사회는 미래를 위해 발전하는 데 온 힘을 쏟을 수 있고 그 힘을 개인의 경쟁력, 국가의 힘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 사는 개인은 분명 현재와 미래가 아름다울 것이며 각 개인의 아들, 딸들 또한 안정된 사회에서 사는 만큼 더 좋은 성장의 발판을 지닐 수 있다.청렴한 사회는 개인이 행복해지고 함께하는 미래를 발전시킬 가능성을 지닌다. 그러한 사회를 위해 공무원들과 주변인들의 청렴하지 못한 행동을 보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스스로가 청렴을 위해 전진하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자. 그 순간, 나의 청렴한 삶의 방식이 남에게 영향을 주며 청렴한 이가 하나 둘 늘어갈 것이다. 청렴한 사회의 기틀이 나의 노력부터 시작된다. 우리 모두 청렴함을 위해 노력하자.

2014-12-04

전략적 인적자원개발이란?

▲ 박승대경북동부권 인적자원개발위원장인적자원개발(human resource development)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20세기에 인적자원개발은 조직 내 인력의 충원과 유지, 활용 등을 위한 단순한 교육 및 관리 활동만 이루어지는 인사관리 차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과거 인적자원개발만으로는 21세기 정보화·글로벌화로 급변하는 노동시장 환경과 세분화·전문화를 요구하는 기업의 인력니즈(needs)에 대응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현대 경영학계의 석학인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 교수는 그의 저서 `권력의 힘`을 통해 “조직행동, 인사관리 등 현대 경영학의 핵심영역에서 인간은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힘”이라고 강조하며 “인간에 대한 개발, 즉 인적자원개발(human resource development, HRD)에 대한 관리가 가장 중요한 핵심 성공 요소(critical success factor)가 될 것”이라고 역설한다.최근 기업에서도 단순한 인사관리 차원에서의 인적자원개발이 아닌 조직의 목표와 정렬된 인적자원개발 시스템을 도입·시행하고 있으며, 이를 전략적 인적자원개발(human resource development, HRD)이라 한다. 전략적 인적자원개발 시스템 하에서는 조직 목표 달성에 기여할 수 있는 직무능력을 지닌 기존 근로자들의 인적자원을 개발하고, 신규 채용자들에 대해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해 직무능력을 배양한다.그 결과 기업은 인력니즈에 부합하는 직무능력을 겸비하고 있는 인적자원을 확보해 시장 경쟁력 및 생산성을 증대하고, 근로자는 자신의 역량개발 및 경력경로(career Path) 설계 면에서 진일보 할 수 있어 양쪽 모두 윈윈할 수 있다.하지만 규모, 근로환경 등 여건이 되지 않는 중소기업의 경우 정부의 지원 없이 전략적 인적자원개발 시스템을 구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소기업으로서는 필요성은 절실하나 실천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중소기업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고 기업의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최근 기업의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2013년 10월 민간주도의 전국 14개 지역 인적자원개발위원회를 구성, 매년 지역·산업계의 인력 및 교육훈련에 대한 체계적인 수요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치를 근거로 지역의 공동훈련센터를 선정, 지역·산업 중심의 맞춤형 교육훈련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인적자원개발이 어려운 중소기업에 맞춤형 인력을 제공하고 재직자의 직무능력을 향상시켜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지역사회의 훈련공급과 수요를 조절하는 거버넌스 역할을 하고 있다.우리 경북동부권 인적자원개발위원회에서는 전략적 인적자원관리의 일환으로 정부기관(고용센터), 광역자치단체(경북도), 기초자치단체(포항시·경주시·영덕군), 유관기관(한국산업인력공단 포항지사), 산업계(산업별 단체·협회), 노동계 등이 참여한 지역·산업맞춤형 인력양성사업을 시행하고 있다.관할지역(포항·경주·영덕·울진·울릉)을 중심으로(2015년 경산·청도까지 확대예정) 중소기업 대상으로 인력수요를 사전에 정확히 파악하고, 기업이 요구하는 훈련과정을 개설해 기업은 원하는 인력을, 구직자는 희망하는 일자리를 찾아가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지금까지 지역·산업맞춤형 인력양성사업은 전국(서울 제외 16개 지역)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본 위원회는 산업계 주도로 구성되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북동부경영자협회 내에 설치된 경북동부권 인적자원개발위원회 운영사무국이 주축이 되어 공동훈련센터로 선정된 한국폴리텍대학 포항캠퍼스와 파트너훈련기관(5개)에서 수요에 맞는 맞춤형 교육훈련이 올해 1월부터 실시돼 현재 양성훈련 150명, 향상훈련 1천500명을 목표로 82.4%의 목표 달성률을 보이고 있다.

2014-11-28

`보경예술제` 탄생과 발전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이제 사흘만 지나면 한해의 마지막달인 12월이 시작된다. 12월의 의미는 한해를 잘 정리하고, 새해를 잘 준비하는데 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은 아무래도 새해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래서 새해맞이 축제나 행사가 많은 곳에서 열린다. 포항에도 이러한 의미를 가장 잘 담고 있는 축제가 있다. 호랑이 꼬리에 비유되면서 한반도의 정기가 집약된 호미곶에서 열리는 `한민족해맞이축전`이 그것이다. 올해 마지막 날 밤부터 새해 첫날 아침까지 있을 이번 해맞이축제에도 많은 국민들이 호미곶을 찾아 개인의 소망과 국태민안을 함께 기원했으면 한다. 요즘 포항에는 해맞이축제를 시작으로 포항국제불빛축제 등 계절별로, 그리고 지역별로 크고 작은 축제들이 무수히 열리고 있다. 그러나 50여년 전만해도 포항지역은 축제의 불모지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이러한 축제의 불모지를 안타까워 하며 개척한 사람이 있다.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천하의 명당으로 불리는 호미곶 출신으로 영일군수와 구미시장을 지낸 서상은(徐相殷)씨다. 서 전 시장은 포항지역 최초의 축제를 만든 장본인이자 주역이라 할 수 있고, 그가 만든 축제는 오늘날 지역에서 열리는 각종 축제들의 초석이 됐다고 생각한다. 포항에서 처음으로 문화예술제, 즉 축제가 처음 열리기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4년이었다. 그해 10월 영일군이 보경사에서 `제1회 보경예술제`를 개최하여 농악경연대회 등을 가졌는데, 이 축제가 포항지역 축제의 모태이자 초석이 된 기념비적 축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축제는 당시 김옥현 군수마저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서상은 당시 영일군 공보실장은 관광홍보를 내세워 당시 매일신문사 황영수 포항지사장과 손덕호 보경사번영회장에게 이 축제의 필요성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이런걸 왜하지`하며, 반응이 시큰둥하다는 것이었다. 서 실장은 두 사람에게 막걸리를 대접하며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마침내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축제를 위해 보경사 내연산 조교(弔橋:양쪽 언덕에 줄이나 쇠사슬을 건너지르고, 거기에 의지하여 매달아 놓은 다리)가 설치되고, 언론 홍보 및 광고는 황 지사장이 맡았고, 송라양조장을 경영했던 손덕호 회장은 막걸리 2섬을 내놓았다.그리고 보경사 주지스님은 개막식 서제를 담당했다. 축제를 열기에는 열악한 환경 탓에 행사장은 김장섭 국회의원과 영일농협의 상품협찬이 전부였을 정도로 초라했다. 모든 여건이 미숙했지만 축제를 제안한 서상은 공보실장은 이 일로 몸무게가 쏙 빠질 정도로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노력의 대가는 성공으로 돌아왔다. 이틀간에 걸쳐 보경사 입구 숲에서 열린 전국 농악경연대회가 순조롭게 마무리됐던 것이다.이것이 포항최초의 축제인 보경예술제의 시작이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마무리 단계까지 모든 과정을 주도한 서상은 전 공보실장은 아직도 포항에서 지역문화 창달에 자신의 한 몸을 던지고 있다. 실로 존경스럽다. 당시만 해도 포항 주변에서는 보경예술제보다 2년 전인 1962년부터 경주에서 열렸던 `신라문화제`가 거의 유일한 축제였다. 볼거리가 턱없이 부족하였던 때라 신라문화제에는 가을추수를 끝낸 주변 지역의 촌로들까지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듬해 10월 개최된 제2회 보경예술제는 `신라문화제` 못지 않았다. 보경사 경내에서 개최되었는데, 첫해보다 훨씬 큰 관심과 규모로 치러졌다. 당시 내무부에서 부임하였던 배수강 군수가 깊은 관심을 가졌고, 김인(仁) 경북도지사에게 이 축제를 보고하여 도비지원까지 받게 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개막식이 열렸던 보경사 대웅전 뜰에는 김인 경북도지사와 김판영 경북교육감을 비롯하여 도 단위 기관장은 물론 포항, 경주, 월성, 영덕, 영천 등 인근 도시의 기관단체장, 여기에 300여 스님들이 자리를 같이 했으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가능할터다. 실제, 보경사 내연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일대 교통은 마비됐다. 포항시내 상가가 철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니 보경예술제의 위상이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1966년 초에 서상은 공보실장이 경북도청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그해 10월 열린 세 번째 보경예술제는 축제를 만든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은 탓에 그 수준과 위상이 크게 떨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였던 예술제가 이후에는 아예 중단되고 말았다. 이러한 아픔과 위기를 겪었던 보경예술제는 훗날 보경문화제, 일월문화제 등으로 변모를 거듭, 오늘에 이른다. 다만, 포항항이 1962년 6월 12일 국제개항장으로 지정·선포된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제1회 포항개항제`가 1966년 7월 13일 전 시민의 참여 속에 성대하게 치러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2014-11-27

포항시의회 유럽연수기

▲ 안병국 포항시의회 의원로컬리티 건물에서 `브리게이드`(Brigade) 식당까지는 버스로 10분 정도이다. 템즈강을 건너 영국연방법원 앞 주차장에 주차하고 5분 정도 걸어 식당에 도착했다. 템즈강을 건널 때 버스 차창 저 멀리 런던브리지를 보는 것으로 영국의 볼거리는 다본 셈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식당은 한산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말쑥하게 차려입은 런던 시민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영국 런던은 장기실업자나 장애자 같은 취약계층을 적극 돕는 다양한 사회적 기업들이 활동 중이다. 그 중 한곳이 방문한 `브리게이드`레스토랑이다. 더불어 함께 일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노숙자와 범죄자 등 사회극빈층을 요리사로 길러내는 곳으로 관심을 모으는 곳이다.첫 시작은 2006년 설립자이면서 요리사인 사이먼 보일이 시작했고, 그후 보일은 작은 주방을 임대해 노숙자 3~4명을 대상으로 요리에서 손님 응대 방법 등 다양한 기술을 가르쳤다. 5년 동안 런던을 중심으로 16~60세 다양한 연령의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면서 요리학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2011년에 소방서 건물을 인수하면서 현재의 브리게이드 레스토랑을 만들었다. 정부에서 노숙인에게 지급하는 교통비 뿐이고, 나머지 모든 비용은 레스토랑에서 지원한다. 그들의 사회적 풍요는 약자를 배려하는 곳에서 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브리게이드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 후 런던의 서쪽에 위치한 베드제드(Bedzed) 주거단지 기관 방문이 예정돼 있었다.영국 런던의 남쪽 써튼(Sutton) 자치구에 2002년에 가장 먼저 건설됐고 가장 규모가 큰 친환경 탄소제로 마을인 작은 주거단지(82가구)인 베드제드(Bedzed). 베딩톤 제로 에너지 개발(Beddington zero Energy Development)이란 뜻으로, 석유와 석탄 등 화석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개발한 지역이라는 뜻이다. 한적한 베드제드에 들어서면 빨강과 노랑, 파랑, 초록 등 알록달록한 닭 벼슬모양의 환풍기가 달린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어린이 방송프로그램인 텔레토비에 나오는 집을 닮았다고 해서 텔레토비 마을로 불린다. 베드제드는 원래 쓰레기가 버려지던 공장터였다. 그러다가 환경컨설팅 기구인 바이오리저널과 친환경 건축가 빌 던스터, 그리고 자선단체인 피바디 트러스트 등이 친환경주택단지로 개발해서 탄소제로 도시 개발의 모델로 주목 받게 된 마을이다. 베드제드의 가장 큰 특징은 탄소배출을 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건축 설계이다. 앞에 언급한 텔레토비의 집 같은 형형색색의 환풍기가 바람에 따라 회전하는데, 열 교환기가 부착돼 있어 바깥의 찬 공기가 실내의 더운 공기와 섞이면서 따뜻해지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도 난방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집들은 모두 남향으로 지어져 있고 남쪽 벽면은 온통 유리로 돼 있어 온실처럼 태양열을 공급한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해서 전기 사용량을 줄일 수 있고, 추운 스칸디나비아에서 수입한 3중창으로 에너지 낭비도 최소화 했다.베드제드에서 소비되는 전기의 20%가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 집열판을 통해 생산되고, 잔디는 빗물을 흡수해 저장하고 이 빗물은 지하에 설치된 빗물탱크로 보내져 정화과정을 거친 다음 화장실과 정원에서 재활용된다. 이런 시설로 인해 베드제드의 사람들은 물 소비량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수도꼭지 또한 물이 많이 나오지 않게 만들어졌다. 전기와 가스계량기도 주방의 한 쪽에 설치돼 있어 수시로 에너지 사용량을 확인할 수 있고 베드제드의 건물에는 가정집과 사무실이 함께 있다. 낮에 햇빛이 잘 드는 남쪽은 가정집으로, 컴퓨터 등 사무기기에서 발생하는 열로 공간이 따뜻해질수 있는 북쪽은 사무실로 사용한다. 탄소배출 제로인 베드제드의 건물은 주민들의 생활양식까지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우리나라도 베드제드와 같은 방식으로 대규모 아파트식 주택을 도시 옆 근교에 짓는다면 화석연료 고갈시대를 맞아 대체에너지를 이용하는 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14-11-27

53만 시민의 힘으로 산불을 막읍시다

▲ 이재열포항시 건설도시국장 인류는 자연속에서 불이라는 강대한 에너지를 얻게 됨으로써 난방과 조명, 음식을 조리하고 준엄한 자연의 제약에서 해방돼 자연을 지배하게 됐고 오늘날과 같은 문명국가를 이룩했다.인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소중한 불이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화마(火魔)로 돌변해 조상들로 물려 받은 귀중한 자연유산들을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하게 하는 무서운 양면성도 함께 지녔다.매년 산불로 인해 소실되는 산림 면적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20배가 넘는다고 한다. 산불은 생태학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한번 산불로 피해를 입은 숲이 정상을 되찾기까지 짧게는 40년 길게는 10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포항시는 지난 14일 시청 대잠홀에서 이강덕 포항시장과 산불감시원, 의용소방대, 시민단체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산불 제로화를 결의하는 등 산불방지 발대식을 가졌다. 2015년 5월까지 7개월 동안 산불방지대책본부를 운영할 계획이며 대책본부는 소방서 등 관계기관과의 치밀한 공조로 산불예방 및 진화에 더욱 체계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우리나라는 산림이 울창하고 가연성 낙엽 등이 많고 산림구조, 지형, 기후상 산불이 발생할 개연성이 상당히 높으며 산불은 대부분 사소한 부주의에서 발생한다.실제로 산불의 피해를 보면 등산, 행락인구 증가에 따른 입산자 실화가 대부분(47%)이며 바람이 많이 부는 건조기에 논, 밭두렁 및 농산폐기물 태우기에 따른 산불도 많이 발생 (19%)하고 있다.또 산불발생시 초동진화의 어려움이 많다.산악형 산림으로 산불발생 시 즉각적인 지상접근이 곤란하고 연기와 고온 및 난기류, 진행방향 급변으로 근접진화 위험, 불기둥높이 20~30m, 중심부화염 1천200℃, 주변연기 600℃가 넘으며 임도 및 사방댐, 취수원 부족 등 진화기반시설이 미약하며 강풍과 야간산불 시 헬기에 의한 진화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산불은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포항시는 산불전문진화대 28명, 산불감시원 236명을 지역 내 457곳의 산불취약지에 배치했으며, 신속한 초동진화를 위해 담수용량 3천500ℓ의 대형헬기를 운영키로 했고, 산불감시 인력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산불상황관제시스템을 상시 운영해 봄철에 집중했던 논밭두렁 잡초 등 산림인화물질을 가을철에도 집중적으로 제거해 산불발생 요인을 사전에 없애기로 했다.산림에 대한 사랑은 산불을 예방하는 작은 실천부터 시작해야 한다.포항시 또한 지난해 3월 9일 한 중학생이 장난삼아 나뭇잎에 불을 붙이다 발생한 용흥동 산불로 막대한 인명적, 재산적 피해를 입은 바 있다, 산불피해지 62㏊ 중 올해까지 30.4㏊를 복구해 화목류 등의 힐링 숲과 편백나무 등의 경관 숲을 조성했으며 또 재해 위험지 6.4㏊는 사방사업을 함께 시행했고, 주변여건 등으로 미복구된 31.6㏊는 힐링 숲으로 조성할 계획이다.울창한 숲은 가꾸기는 어렵지만 훼손은 한 순간이다. 산불예방은 쓰레기 한 조각, 논밭두렁 몇 평 , 담배 한 개비 태우는 것을 산림 내에서는 자제하면 되는 것이다. 이같이 소중한 산림을 지키는 것은 곧 나라를 지키는 것이고 국민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다.더 나아가 산림내에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을 발견하면 즉시 제지하고 계도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산불을 발견하면 즉시 행정관서나 119에 신고하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대피해야 한다.산불예방은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53만 포항시민 모두가 산불예방의 첨병이 돼 단 한 건의 산불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 아름다운 푸른 강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

2014-11-24

탄소 전성시대

▲ 박양덕㈜씨알텍 CTO 최근 탄소재료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많아졌다. 특히 경상북도가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탄소소재 산업을 새로운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신성장 동력산업으로 육성하기로 하고,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탄소관련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반가운 소식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탄소소재를 수입해 사용하는 업체에서는 국산화에 대한 기대 또한 매우 크다고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탄소소재가 최근에 개발된 첨단소재로 인식하고 있으나, 인류가 탄소소재를 사용한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탄소소재에는 3형제가 있다. 가장 작고 최근에 태어난 것이 탄소나노튜브, 그라팬과 같은 나노소재이지만, 우리는 이미 소나무의 진을 태워 그름을 모아 먹을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카본블랙은 타이어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재이다. 둘째는 가장 아름답고 강한 형제인 다이아몬드가 있다. 다이아몬드는 천연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돼 왔으나, 공업용으로 사용되는 다이아몬드는 인공적으로 흑연을 고온고압으로 처리하여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흑연이 있다. 흑연은 탄소소재 중에서 가장 안정된 물질로서, 연필심을 만드는 원료일 뿐만 아니라, 고체 윤활유, 전극봉, 도가니 등의 제조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탄소소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로 사용돼 왔으나, 탄소소재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대량생산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이 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탄소재료에 대한 높은 관심은 탄소재료가 지닌 무한한 잠재력과 성장 가능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탄소재료는 제철, 반도체, 태양광 등의 수요산업을 비롯하여 항공우주산업의 필수소재로 자리매김했으며, 자동차의 경량화 및 고성능화를 위한 전략소재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의 보잉사는 일본의 토레이사와 10년 간 2조원 규모의 탄소섬유 구매계약을 체결하기도 했으며, 유럽의 에어버스사도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한 스마트 폰의 보급 확대와 더불어 전기 자동차용 배터리 및 에너지 저장장치(ESS:Energy Storage System)로서의 전지 수요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써, 고성능 리튬 2차전지의 음극재인 흑연소재의 성능향상 및 수요확대가 이뤄지고 있다.지난 19일 국회의원 회관에서는 지역경제 활성화 촉진을 위한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다름아닌 창조경제 선도지역의 지정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제정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지정목적은 기업주도형의 대·중소·중견기업 연계 및 협력 생태계를 조성함으로써 지역경제 활성화 및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정책이 본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사업추진주체인 기술주도형 강소기업 육성 및 지원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외부에 철강도시로만 알려진 포항이지만 철강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철광석과 탄소소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쇳물을 판재나 봉재로 뽑아내기 위한 노즐이나 열 충격에 견딜 수 있는 내화물, 고로 하부용 블록 및 도금강판 생산용 도전 롤, 고철을 녹이는 전기로 등 제철산업에서 사용되는 탄소재료만 해도 엄청나다. 또한 자동차나 전자부품 생산을 위한 금형생산에도 흑연전극을 이용한 방전가공이 필수적이며, 반도체를 생산하는 도가니와 발열체, 원자로의 구조재 등도 모두 탄소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탄소재료를 탄소 성형체라 부르며, 아직도 전량 수입해 사용하고 있다.포항시가 철강도시에서 탈피해 새로운 첨단소재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이번 기회에 경상북도가 정부과제로 추진 중인 탄소소재 육성클러스터 조성사업과 창조경제 선도지역 조성사업과의 연계를 통한 시너지효과를 극대화 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되면 당분간 지역경제의 활성화 동력을 얻기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따라서 포항시에서는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지역에 있는 기술주도형 탄소소재 전문기업을 발굴하고 강소기업으로 육성함과 동시에, 관련 산업과의 네트워크를 통한 연계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탄소소재 육성 클러스터 사업과 창조경제 선도지역사업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14-11-21

경조사비

▲ 권오신 로타리코리아 상임고문결혼은 둘이 다리 하나씩 묶고 뛰는 이인삼각이다.윤달 9월이 끝나자 청첩장이 쌓인다. 해를 넘기려하지 않으려는 예비부부들로 인해 올해는 12월, 1월이 결혼 성수기가 됐다. 음력 10월이 시작되는 주말부터 예식장 서너 군데를 찾는 것이 일상이 돼 버렸다.이럴 때마다 봉투에 얼마나 넣어야 할지를 두고 잠시 머리를 굴린다. 친분도 따지고 전에 내가 얼마를 받았더라 하는 생각이 들면 제 낯이 뜨겁다. 사람의 관계를 금액으로 환산해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얕은 짓인가.결혼식 평균 비용이 억대를 넘어서니 부조금을 받지 않고서는 감당하기가 힘든 세상이다. 청첩장을 돌릴 수밖에 없지만 받는 입장에서 보면 부담이 만만치 않다.18세기에 등장한 현금부조는 그 편리함 때문에 계속 확대됐다. 원래는 흉사(凶事)에만 장례용품으로, 몸으로 돕는 품앗이가 많았다. 생활이 빈곤했던 일제강점기엔 몸으로 돕는 품앗이와 혼례식에 쓰일 물품 부조가 현금보다 많았으나 시대모습에 따라 요즘처럼 변해서 20세기 후반부터 현금부조가 극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민연금공단이 두 해전 월 100만원을 넘게 연금을 받는 은퇴자를 대상으로 사용처를 조사한 내용을 보면 65%는 생활비로, 16%는 경조사비로 지출했다. 의료비(8%)와 여가비용(7%)의 곱절이 됐다. 활동 범위가 넓고 적금 붓는 마음이어서 조금은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직장인도 이 비율과 별 차이는 없을 것 같다.경주시 천북면으로 귀향을 했다 다시 서울 살던 집으로 돌아간 군 출신 고위직 인사는 골프보다 경조사비 끊기가 더 힘들었다고 한다. 밀려드는 청첩장과 부고가 무서워 역 도피이민을 한 셈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야 할 지방 생활에서 경조사에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사람 행세가 어렵다. 먹고살기에도 빳빳한 연금을 체면치례에 넣는 실정이자 축의금, 부의금의 무게에 눌려 마음 병(病)을 앓는 셈이다. 세계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특히 우리 경조사는 손님이 북적거려야 체면이 쓴다고 여겨진다. `갑`의 논리가 통하는 모순사회다. 고위공직자가 청첩장을 돌리지 않고 자식 혼사를 치렀다는 뉴스가 돋보이는 것 자체가 그렇다.결혼 시즌이 되는 봄. 가을엔 직장인 은퇴자 가릴 것 없이 받을 때 상황과는 달리 비명을 지른다. 작은 결혼식 캠페인이 신문지면을 채우고 `가족 친척 중심으로 간소화하자`는 개선의지는 보이지만 현실은 꿈쩍도 안 한다.병원과 장례식장이 한 공간에 배치된 장례문화도 기이한 풍경으로 꼽히지만 돌아가신 분이 누구인가 보다는 유족에게 눈도장 찍으러 온 조문객들로 북적이고 현금을 넣는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이웃 일본도 조의금은 받는다. 그 대신 우리처럼 무차별 부음을 날리지도 않고 상을 치른 다음날부터 조문객들에게 답례품을 보내어서 정중함을 나타내는 것이 완전 틀린다.우리나라에서 프리랜서 기자 생활을 한 외국인은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결혼식을 치르려고 값비싼 드레스를 빌려 입는 것도 이해가 안됐지만 입장, 혼인서약, 축하 연주까지 일사천리로 해 치우는 것이 너무 정신없고 놀라웠다”고 지적했었다.축의금, 조의금을 받지 않는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얘기가 아니다. 모두가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합의정신이 보편화 됐으면 한다. 부조금은 글자 그대로 서로 돕는 정신이다. 억대가 넘는 결혼식 씀씀이가 청첩장을 뿌리게 만들었다. 미국의 결혼비용 3만8천 달러의 무려 다섯 배에 이른다. 검소한 결혼식을 치룬 부부일수록 행복비율이 높게 나왔다는 조사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우리사회 모습이다.

2014-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