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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포항역

등록일 2015-04-30 02:01 게재일 2015-04-3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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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진포항시의원
#장면 1=1963년경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포항시 남빈동에 살던 필자와 동네 친구 K는 어느 봄날 학교를 `땡땡이`치고 놀러 가기로 했다. 둘이서 시내를 돌아다니다 점심 때가 되어 도시락을 먹어야 하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우리는 포항역으로 갔다. 역 안에서 `밴또`를 까먹고 하교 시간에 맞춰 각자 집으로 돌아 갔는데 집에 오니 아버지와 인부 몇이서 마당에 큰 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서던 필자를 발견한 아버지, 대뜸 커다란 대문 빗장을 들고는 “너 오늘 학교 안갔지?”하며 쫓아 오는게 아닌가. 혼비백산해 도망을 가는데 정말`걸음아! 날살려라!`하고 뛰었다.`잡히면 죽었구나`하며 수 백 미터를 뛰었는데 다행히도 그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따돌렸다.

#장면 2=1979년 7월 포항역. 학업 때문에 한참 늦은 나이에 육군 입대를 위해 입영열차를 타러 나온 필자와 장정(壯丁)들, 그 가족들이 대합실로부터 승강장 주변에 여기저기 모여 이별을 하고 있다. 머리를 빡빡 깎은 장정들이 객차를 가득 메우고 출발 준비를 하는데 창가에서 하염없이 우는 가족들. 필자의 어머니와 여동생도 충혈된 눈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내며 차창에 매달려 있다. 이제 곧 출발하면 충남 논산훈련소로 달려갈 입영열차. 호송을 맡은 기간병들이 매서운 눈초리로 장정들에게 주의사항과 행동요령을 가르치면서 군기를 잡는데, 생전 처음 군대가 어떤 곳인지 실상을 마주하는 장정들은 긴장 속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숨도 제대로 못쉬었던 객차 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장면 3=2007년 12월 이명박 대통령 후보, 그리고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유세가 열린 포항역 광장. 구름처럼 모여든 수만 명의 지지자와 시민들 속에 후보가 등장하자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광장이 떠나갈 듯 하다. 가까이서 얼굴 한번 더 보고, 손 한번 잡아 보려고 밀치고 밀리면서 서로 웃던 순간이 기억 속에 또렷하다. 포항시의 큰 옥외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집회장소로 이용되던 포항역 광장. 포항의 중심이자 고향마을 앞마당 같은 곳이었다.

그 옛날 포항사람들의 추억과 애환(哀歡)이 서린 포항역. 역(驛)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인생의 축소판이라 하였던가. 경부고속도로 완공에 이어 1972년 포항 고속버스가 개통되기 전까지 서울로 가는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 열차이던 시절. 포항에서 출발한 기차가 경주역에서`노리카에`(乘換·열차의 기관차를 떼어서 반대 방향으로 옮겨 붙이는 것)하고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는데 거의 9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포항역 앞에는 숙박시설도 많이 있었지만 당시 역 바로 앞에 `신선소주`와 `동방사이다`라는 향토 브랜드의 큰 광고판을 단 회사도 있었다. 신선(神仙)소주는 고구마로 담근 증류주(蒸溜酒)로 빨리 취하고 빨리 깬다하여 꽤 인기가 있었고, 동방(東邦)사이다는 지금의 `천연사이다`와 비슷한 맛으로 지역에서 애용되었으나 두 가지 모두 어느새인가 대형 메이커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포항역에서 도보로 불과 10여 분 거리에 동해안 최대의 재래시장 죽도시장이 있고, 시장에서 또 10여 분 거리에 송도해수욕장이 있어 수많은 관광객이 열차를 타고 포항을 다녀갔다. 이제 KTX 개통과 함께 흥해로 옮겨간 포항역, 추억이 서린 포항역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현재 구(舊) 포항역 부지 활용 방안에 대하여 용역조사가 진행 중이고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필자 소견으로는 구 역사(驛舍) 건물 만은 보존하고 포항역에서부터 죽도시장, 송도해수욕장으로 연결되는 관광코스를 개발해 `근대 포항역사(歷史) 거리`로 조성하면 포항 도심의 역사도 보존하고 관광자원화도 이룰 수 있지 않겠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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