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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원자력 발전소 안전한가

▲ 권서진경주시 양남면 최근 우리들은 뉴스나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위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경제위기, 테러나 전쟁에 대한 위기, 에볼라 바이러스 등 질병에 대한 위기, 강도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에 대한 위기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위기가 찾아오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위기이다. 1971년 고리1호기 착공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내놓으라하는 인재들이 원자력 산업에 뛰어들어 청춘을 불태웠고 그 결과 지금의 눈부신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운영실적을 달성해 오고 있다.하지만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국내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2012년 2월 고리1호기 정전사고 은폐 사건을 기점으로 납품비리, 금품수수, 인사 청탁 등 가히 비리백화점이라 불리울 만큼 줄줄이 터진 원전비리 소식은 국민들에게 크나큰 좌절과 배신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그 여파로 사장, 부사장 할 것 없이 100여명이 넘는 한수원 임직원이 구속 수감되었고, 국민들의 원전에 대한 피로감은 극에 달해 있는 실정이다. 이에 정부는 외부 피 수혈 등 한수원을 탈바꿈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으나, 연이어 터진 자재비리 등으로 개혁을 추진하고자 임명하였던 사장을 중간에 교체하는 등 그 추진 동력을 상실하는 듯 보였다.한편 원전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실망감은 극에 달해 원자력산업 전반에 대한 국정계획마저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삼척과 영덕에 건설하기로 한 신규 원자력발전소, 10년 이내에 포화상태에 놓이게 될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유치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이 난관에 부딪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실정이다.하지만 정작 위기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대다수 국민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 국내에는 22기의 원자력발전소가 현재 운영 중이며, 그곳에는 밤낮 구분 없이 교대로 일하면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부서, 그리고 설비의 안전점검 및 정비를 책임지는 정비부서, 그 밖에 일근부서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은 바로 그들 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그들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집단 우울증` 바로 이것이 그들의 현재 상태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의 표정에는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다.비리척결, 청렴회사 구현을 기치로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신규 정책과 제도는 그 동안의 부정 및 비리와는 무관한 선량한 직원들을 옥죄고 있다. 밖으로는 나라를 좀먹는 해충취급을 받고, 안으로는 살인적인 업무강도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싫은소리 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현재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는 직원들의 실태이다.이런 그들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소의 미래는 그야말로 암흑기에 빠져들 것이 명약관화이다. 5천만 우리민족의 명운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원자력발전소의 직원들은 바로 우리들의 자녀이자, 남편이며, 가장이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욕설과 비난이 아닌 위로와 격려이다. 어려운 역경을 딛고 다시 한 번 재도약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진심어린 관심과 사랑을 듬뿍 전해주자.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2014-10-20

포철 건설과정에 있었던 일화들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큰일을 치르다보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이 있기 마련이다. 포항종합제철도 건설과정에서 숱한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1967년 7월 종합제철의 입지가 포항으로 확정되면서 건설부의 첫 번째 업무는 포항공사사무소 설치였다. 필자는 당시 건설부 포항현지 창구 역할을 맡았기에 포항공사사무소를 구하는 일에 매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부적으로 정한 사무실 규모는 100평 내외. 포항시내에 위치해야 하는 조건이 달렸다. 문제는 당시의 포항 여건으로는 그만한 사무소를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100평이 넘는 평수를 가진 건물이라고는 현재의 포항소방서 2층이 유일했던 것이다. 필자는 집안 어른들은 물론 지역의 모든 요로를 총동원하는 방법으로 소방서를 설득했다. 처음엔 완강하던 소방서 측도 `국가 사업`이라는 명분을 들이대자 사무실 이용을 허용했다. 일 할 공간이 마련되자 관련 업무가 쏟아졌다. 필자를 포함, 영일군은 무수한 잡무들을 처리하느라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러나 모두들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했다. 건설부 포항창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도 컸기에 힘든 줄도 몰랐다.필자가 당시 정열을 쏟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직업관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기간산업인 종합제철이 고향에 세워진다는 기쁨이 더없이 컸고, 종합제철이 고향에 안겨줄 미래가 너무나 희망적이어서 그에 따른 신명이 남달랐던 것. 자랑하자면 필자는 포항에 내려 온 건설부 직원들로부터 `이석수를 통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과분한 호평을 받기도 했다.편입지역 보상과 강제철거 과정에서 지주들과의 마찰로 인한 일화들도 많다. 영일군은 편입에 반발하는 지주들에 맞서 포항시내 학생들을 동원하여 한창 자라고 있는 보리를 모조리 베어 버리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관의 밀어붙이기가 본격화되자 그에 비례해 저항도 매우 강했다. 일부 편입주민들은 강제철거에 나선 불도저 앞에 누워 “나를 죽여라”고 극렬하게 맞섰고, 몇몇 노인들은 조상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며 안방에 앉아 끝까지 버티는 등 진통이 매우 심했다.부자간에도 심하게 충돌한, 기가 막힌 경우도 있었다. 당시 편입지역에 고향을 두었던 경북도청의 모 간부는 자신의 고향집에 체인을 걸어 불도저로 잡아당기는데, 그의 부친은 지붕으로 올라가 아들에게 호통을 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제1고로 위치 선정 비사도 기억이 새롭다. 가장 중요한 시설을 어디둘 것인지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론 도출이 안되자 결국 풍수를 보는 지관들을 동원했다. 지관들이 찍은 곳은 송정동 수녀원 쪽과 공동묘지중 모 문중의 명산 묘역. 마지막 선택도 끝내는 지관들이 했는데, 수녀원 쪽이 낙점됐다. 이곳은 형산강 하구와 너무 가까워서 강줄기를 북쪽으로 돌려야 하는 난제가 있었지만 그대로 추진됐다. 제1고로 위치로 선정된 수녀원은 해방 전에는 일본군 연대 급 군영이 주둔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동지상업중학교가 태동한 곳으로, 1947년 학교가 죽도동(현재의 한일아파트)으로 이전하면서 천주교 측이 매입했는데, 지관들은 그 곳을 길지로 꼽았다.현재의 포항제철소 중앙도로 부근에 자리 잡고 있던 당산나무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일화이다.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 주민들도 이 당산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기며 매년 제사를 올렸고, 당산나무를 훼손하는 사람은 재앙을 받아 죽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미신을 들은 인부들은 아무도 당산나무 제거작업에 나서지 않았다. 현지에서 당산나무를 제거할 인부를 찾는 노력은 허사가 되면서 결국 당산나무는 맨 나중에 제거하기로 결정되었다. 필자는 당시 궂은 일을 도맡아 했던 터라 종국에는 당산나무 제거 임무도 떠맡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포항에서는 그 나무를 베어 낼 간 큰 선수를 구할수 없다는 것. 그때 강원도 평창에서 목상을 할 때 알게 되었던 인부 2명이 떠올랐다. 그들을 찾는 것 자체가 쉽지않았지만 수소문 끝에 알이낸 후 당산나무를 좀 제거해 달라고 읍소했다. 나무를 베어 낼 선수를 구하자 이번에는 당산나무 제거작업을 함께 해야 할 불도저 기사가 나서지 않아 애를 먹었다. 이 일은 결국 불도저 기사가 재앙을 받아 사망할 경우 포항제철에서 가족에게 보상한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성사시킬 수 있었다.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당시 장기영 부총리는 포항종합제철 기공식 참석을 위해 포항으로 오던 도중에 자신의 해임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장 부총리는 이에 개의치 않고 기공식에 참석하여 “개천개지한지 4천200년 만에 우리나라 최대의 제철공장을 5개국 차관으로 건설하게 되었으며, 종합제철의 성패여부가 곧 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성패를 가름하는 만큼 강철 같은 책임감과 철석같은 단결로 이를 성취해 달라”는 요지의 치사를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2014-10-16

젊은이들이여! 포항에서 꿈을 찾아 가십시오

▲ 서진국포항시 안전행정국장 `인류에의 봉사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사업임을 우리는 믿는다`는 신조로 뜨거운 열정과 청년의 용기로 역동하는 대한민국 역사 발전과 성장의 원동력이 된 한국JC(㈔한국청년회의소) 1만6천여명의 회원과 가족들이 창조도시 포항(Creative Pohang)을 방문한다.`제63차 한국JC 전국회원대회 포항 개최`는 창립 48년의 전통과 500여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로컬 포항JC(㈔포항청년회의소)의 `지역사회의 개발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부단한 유치 노력의 열매다.지역경제 발전의 신성장동력이자 일자리 창출의 원천으로 기대되고 있는 `창조경제`는 강력한 네트워크로서 질적·양적으로 확대돼 `연결된 지식`이 창출하는 집단지성이 뿌리내려 `도시`, `지역`의 창조경제의 핵심인프라가 됐다.소통을 바탕으로 한 끈끈한 응집력과 신뢰로 다져진 한국JC의 네트워크는 창조경제의 플랫폼(Platform)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며 창조경제도시라는 포항의 새로운 도시브랜드 실현을 위해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하고자 `21C 한국경제중심 창조도시 포항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17일부터 철강도시 포항에서 전국회원대회가 열린다.19일까지 2박3일의 일정으로 1만6천여명의 회원과 가족들이 포항을 찾아 청년포럼, 포항관광시티투어, 전국리틀야구대회와 영일대해수욕장에서 열리는`회원환영의 밤` 행사에 깊어가는 가을밤의 향연을 즐긴다. 이날 행사에는 인기가수 이문세, 걸그룹 애프터스쿨, 박상철 등이 초청돼 포항 시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무대도 마련한다.포항시는 `함께하는 변화, 도약하는 포항`의 앞서가는 다양한 문화를 선보여 줄 수 있는 최적의 기회인 이번 행사를 위해 지난 10일 `한국JC 전국회원대회 부서별 추진상황 보고회`를 열어 주요홍보 계획, 위생업소 지도점검 계획, 행사장 주변 청소대책, 주요행사 및 교통소통 대책, 의료지원계획, 불법 주정차 및 노점상 단속 계획 등 철두철미하게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활력 가득한 아름답고 친절한 포항시, 머무르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포항시`라는 도시 브랜드를 전국에서 오는 청년들과 그 가족들에게 알린다. 특히, 철강도시이자 관광도시인 포항의 매력적인 모습을 다양하게 선보일 계획이다. 이번 행사를 통해 포항은 세계적 기업 포스코와 포항운하, 죽도시장, 영일대 해상누각, 보경사 등 천혜의 관광자원을 이들에게 보여줘야 한다.전국에서 `조국의 미래 청년의 책임`이라는 푯대를 실천하는 선각자 열혈 청년인 `한국JC 소통 네크워크`를 통해 생산된 새로운 고부가가치 창조경제로 음식점, 숙박, 관광 및 기타 시설물 사용 등으로 100억 원대의 지역경제 유발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한국JC 회원들은 조국근대화를 일궈낸 창조도시 포항에서 긍정 에너지를 받아 선진강국을 일구어 가는 큰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란다.한국JC 전국회원대회의 포항 개최는 역동하는, 깨어 있는 `젊은 도시 포항`, `내일이 더 기대되는 포항`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창조경제의 기틀을 마련해 준 한국JC와 포항JC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53만 포항 시민과 2천여 공무원들은 우리 고장을 방문하는 1만6천여명의 회원과 가족들이 포항에서 `아름다운 추억과 감동`을 남길 수 있도록 친절하게 맞이해야 한다.

2014-10-16

대한민국 원자력, 위기를 기회로

▲ 이호민경주시 양남면 대한민국을 뒤흔든 세월호 참사가 많은 과제를 미봉으로 남긴 채 조금씩 그 관심이 사그라지고 있지만, 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그 어느 때 보다 높아졌다. 얼마 전 있었던 삼척시 자체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에서 반대가 80%를 웃도는 것은 안전불감증에 빠진 대한민국에 대한 우려감이 그대로 반영된 현상이다. 삼척시의 위 주민투표결과는 그 자체로 법적인 효력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또 다른 신규 원전부지인 영덕에 이어진다면 2035년까지 국내 발전설비 부분에서 원자력발전의 비중을 29%까지 높이는 정부의 제2차 에너지기본계획 이행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국내 원자력발전산업은 세계적 탄소배출 저감에 대한 합의의 바람과 UAE 원전 4기 수출 쾌거의 호조를 타고 원전 르네상스의 도래를 외쳤으나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연이은 국내원전 비리사건의 여파로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경기하락과 사회안전망에 대한 불신으로 예민해진 국민정서 상에서 원자력에너지는 정치와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 끊임없이 공격당하고 있다. 2008년 수립된 제1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설정된 원자력발전의 국내 발전설비 목표 비중이 41%였다가 이번 제2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는 29%로 대폭 하향 조정된 것만 보아도 국내에서의 원자력발전의 입지가 얼마나 축소됐는가를 보여준다.1978년 미국 웨스팅하우스사로부터 Turn-Key 방식으로 들여온 고리 1호기의 운전을 시작으로 국내 원자력발전은 값싸고 안정된 전력을 공급해옴으로써 전력소비가 큰 제조업중심의 국내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 이에 더 나아가 40년이 안되는 짧은 시간 만에 원전 수입국에서 원전 수출국이 되는 극적인 역사를 세웠다. 그 수출대상이 국민소득 7만 불의 자원강국인 UAE인 점을 고려하면 이는 단순히 저가공급전략이 먹힌 것이 아닌, 우리의 원자력발전소 건설 및 운영능력이 세계정상급임을 증명한다.세계원자력에너지산업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잠시 주춤하였지만 주류의 변화는 없는 상태이다. 독일을 위시한 몇몇 국가가 원전정책 폐기를 선언했지만, 이들은 모두 원전 의존도가 낮은 국가로 그 필요·의존도에서 우리에 비할 대상이 아니며, 탈원전을 선언한 후쿠시마 원전사고 당사국 일본 역시 막대한 무역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얼마 전 원전 재가동을 선언한 상태이다.원자력에너지는 발전단가가 다른 화석연료나 신재생에너지에 비해 월등히 낮고, 전력 공급의 안정성, 대용량성, 환경오염, 국제유가 급등이나 전쟁 등과 같은 비상사태시의 국가에너지안보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제약사항을 감안했을 때 현재 국내 에너지수급상황에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원자력발전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위험을 우려하지만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중국은 현재 운전 중인 22기와 추가 건설 중인 27기의 원전이 그들의 동쪽 연안에 집중 위치해 있고, 일본 또한 운전 중인 47(1)기 외에 2기의 원전이 건설 중에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원전의 잠재적 위험은 국내 원전산업의 조정만으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산업 축소 시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은 잠재가 아닌 즉시 발현될 부담이자 위험이다.지금 중국과 일본, 특히 원전수출 강국들은 국내 원자력발전산업의 혼란을 라이벌의 견제차원에서 반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위기로만 받아들인 기존 원전강국들이 원전산업의 고삐를 늦추었을 때 우리는 그 때를 기회로 삼아 그들을 따라잡아서 이 자리에까지 왔다. 그 비상의 시점에 다시 후쿠시마 사고가 발생한 것은 공교롭기가 그지없다. 단순히 원자력산업에 대한 위험의 경고라 받아들이고 발전을 멈출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 번 재정비와 도약의 기회로 삼을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지금 안·밖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도전에 직면해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적인 흑·백의 논리가 아니라 원자력의 정확한 사실정보를 기반으로 한 이해와 이를 통한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내일을 준비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2014-10-15

가을바다의 왕자 `전어` 맛을 느껴 보시길

▲ 이채성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동해지사장 전어는 가을에 가장 맛있어 전국 곳곳에서 축제가 열리는 등 인기가 최고라 할 수 있다. 옛부터 `가을 전어 대가리에는 깨가 서말`이라는 말이 있고, `가을 전어는 며느리 친정 간 사이 문을 걸어 잠그고 먹는다`,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말로 가을 전어의 맛을 표현했다.전어는 봄철인 3~6월에 산란을 하고, 여름내 각종 플랑크톤과 유기물을 먹고 자라 바닷물이 차가워지는 가을쯤 되면 몸길이 20㎝정도로 자란다. 이때는 누렇게 벼가 익을 무렵으로 1년 중 지방질이 가장 많아 뼈가 부드러워지며, 고소한 맛이 강해진다.사실 가을에 나는 전어는 봄이나 겨울에 비해 지방성분이 3배나 높아지는데, 여기에는 DHA와 EPA와 같은 불포화지방산도 다량 들어있어 있어서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등 성인병 예방에 도움을 준다. 또한 잔뼈를 뼈째 먹게 되면서 많은 양의 칼슘을 섭취하게 되고, 이런 칼슘은 골다공증을 예방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한방에서는 전어가 소변 기능을 돕고, 위(胃)를 보(補)하며 장(腸)을 깨끗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특히 아침 기상 때 사지와 온 몸이 잘 붓고, 팔다리가 무거우며 소화가 잘 되지 않는 50대 후반 이후 장노년 층에게 가장 좋은 약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는 `전어는 기름이 많고 맛이 좋아 상인들이 염장해 서울에서 파는데 귀천이 모두 좋아했으며 사는 사람들이 돈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전어(錢漁)라고 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큰 놈은 한자 정도로 몸이 높고 좁으며 검푸르다. 기름이 많고 달콤하다`고 기록하고 있다.전어는 먹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가 흔히 냄새에 반한다는 전어구이는 소금을 뿌려서 한 시간 정도 놔뒀다가 구워서 먹으면 된다. 이렇게 통째로 구운 전어는 김치에 싸서 대가리부터 창자 꼬랑지까지 뼈째 씹어서 먹는 게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다.회로도 먹을 수 있는데 약 3~5㎜정도로 뼈째 썰어서 마늘과 파 등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 막장이나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방법이다. 살과 함께 잔뼈가 입 속에서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지방질과 어우러져서 감칠맛 나는 고소한 회 맛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또한 초고추장과 갖은 채소를 초고추장과 버무려 회무침으로 먹을 수도 있다. 이걸 그대로 따뜻한 밥에 싹싹 비벼서 먹는 것 또한 별미라 할 수 있다.전어는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해지는 뒷맛은 깨소금 맛보다도 더 깊고 은은하다. 활어의 쫄깃쫄깃한 살맛을 강조한 다른 회와 확실히 구분되는 맛이다.전어로 젓갈을 담그기도 하는데, 전어 새끼로 담근 것을 엽삭젓 혹은 뒈미젓, 내장만을 모아 담근 것은 전어속젓이라 한다. 내장 중에서도 위만을 모아 담은 것은 전어밤젓 또는 돔배젓이라 하는데, 양이 많지 않아 귀한 젓갈에 속한다.가을철이 되면 전어잡이가 한창이다. 전어잡이는 전어가 밑으로 도망가지 않는 성질을 이용한 것으로 전어 무리를 발견하면 그물의 선수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 둘러싼다. 그물은 부채꼴로 펴지고 그물 밑 부분은 뚫려있다. 어부들이 전어 떼에 접근해 어로장의 장단에 맞춰 방망이로 배를 두둘기고 돌이나 장대로 위협하면 전어 떼는 그물코에 꽂힌다. 이런 전어잡이를 부채꼴로 둘러싸인(旋) 그물(網)에 전어가 스스로 꽂혀 들어가(刺) 잡힌다는 뜻으로 선자망(旋刺網)어업 혹은 두리걸그물이라 부른다.전어는 담수가 바다로 유입되는 연안에서 산란했기 때문에 여름동안 넓은 바다에서 자라서 성어가 되면 자기가 태어났던 연안으로 되돌아온다. 전어는 성질이 급하기 때문에 하루 이틀 살려 놓기가 쉽지 않은 어종이다.음식이 가장 맛있고 영양이 높아지는 시기는 제철을 만났을 때이다. 제철 과일이 있듯이 물고기도 가장 맛있는 시기인 제철이 있다. 이와 관련한 속담중 대표적인 것이 `봄 도다리, 가을 전어`다. 전어는 가을에 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제철에 나는 재료를 찾아 제대로만 먹으면 보약이 따로 없다. 가을철 면역력을 기를 수 있는 가을 전어 많이 드시고 원기 회복하시길 기대해 본다.

2014-10-10

종합제철 편입지주들의 반발과 저항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1967년 6월 우여곡절 끝에 종합제철 입지가 포항으로 확정되자 건설부는 곧바로 포항공사사무소 설치에 들어갔다. 당시 영일군 내무과에 근무했던 필자는 포항공사사무소를 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기공식 준비, 편입지역 토지보상 관련 조례안 입안 등 포항제철소 건설에 따른 민감하고 까다로운 건설부 업무들을 지원하는 창구역할을 담당하게 됐다.종합제철 입지가 포항으로 확정된 후 주민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부지조성 사업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편입지주들의 반발과 저항이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철소 편입부지들은 입지발표와 함께 지가가 치솟아 부지매입을 위한 지가산정과 예산확보에 많은 애를 먹었다.그래서 경북도에서는 `애향심운동`이라는 캠페인까지 전개하면서 편입지주들에게 입지선정 이전의 가격으로 매수에 응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300여만 평에 달하는 사유지 편입지주들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철소 대상부지는 총 350여만 평이었는데, 이중 국유지는 50여만 평에 불과했다. 경북도청 건설국장과 지역개발과장, 영일군수, 조흥은행 포항지점장, 주민 대표 2명 등으로 구성된 토지보상심의위원회는 편입부지 보상금으로 평당 398원78전을 제시했다.이 보상금은 당시의 시세와 큰 차이가 없었다. 제철소 입지 인근 땅값은 정부 발표 후 급등했다. 발표 이전에 비해 무려 5~10배 인상된 곳도 수두룩했다. 보상금은 발표전이 아니라 원만한 수용을 위해 급등한 시세를 그대로 반영했다. 그럼에도 일부지주들은 이에 불복하여 중앙과 지방의 토지수용위원회에 이의신청을 내었고, 심지어 정부를 상대로 소송까지 벌였다. 하지만 모두 패소하여 4~5년 후에 매수 당시의 보상금을 받게 되어 도리어 손해를 봤다.편입지역에 대한 매수가 일단락되고 본격적인 부지조성에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부지 내 지장물 철거와 주민이주 문제가 대두되면서 발목이 잡혔다. 당시 편입지역 내에는 대송면에서 가장 큰 부락이었던 동촌동에 300여 가구가 살았고, 지금의 제3고로가 들어선 곳에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였던 예수성심수녀회 수녀원과 송정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포항시내로부터 형산다리를 건너 강변도로로 들어가는 입구, 송내동에도 가옥 등 철거대상 지장물이 총 533건에 달했다.특히 신부 2명과 수녀 160여 명을 비롯하여 노인, 고아, 일반 직원 등 모두 700여명의 가족을 거느린 수녀원 측의 저항이 강했다. 이들은 청와대까지 찾아가 토지수용대상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이일은 사안이 워낙 민감, 영일군과 경북도, 정부등이 나서 이들을 차분히 설득했다. 제철소는 나라의 장래가 걸려있는 사업이라는 끈질기게 이해를 구하자 마침내 수녀원 측도 정부 입장을 받아들였다.영일군청은 당시 제철소 부지 수용이 가장 큰 현안이다보니 군정을 집중, 편입지역 주민들을 만났다.그 결과, 대부분은 정들었던 고향 땅을 뒤로하고 포항 시내와 오천 등지로 뿔뿔이 이주해 갔다. 그러나 이들 중 107세대 주민들은 이주를 거부했다.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며 연일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괴동동 일대 소나무 숲에는 2천230여기에 달하는 대규모의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다수의 주민들이 이장을 거부하면서 그야말로 큰 곤혹을 치뤘다. 영일군은 반발과 저항이 거센 대상은 어쩔 수 없이 강제철거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실제로 시행했다. 이후 지지부진하던 부지조성사업도 탄력을 받아 그해 10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그리고 1967년 10월 30일 마침내 영일군 대송면 현지에서 포항종합제철 공업단지 기공식을 가졌다. 부지 발표 후 착공까지 걸린 시간이래야 불과 4개월여였다. 지금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주민들이 포항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양보해줬기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기에 가능했다.기공식에는 당시 장기영 부총리를 비롯하여 김윤기 건설부장관, 김인 경북지사 등이 참석했으며 인근의 수많은 주민들도 함께 했다. 도약하는 포항과 종합제철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며 벌였던 흥겨운 농악놀이와 가장행렬 등 그날의 장면은 아직도 선하다.

2014-10-08

고출력 레이저산업 `창조도시 포항` 건설 선도한다

▲ 황병한포항시 경제산업국장 2015년은 UN이 정한 `세계 빛의 해`이다.2천여년 전, 신라시대 해와 달의 정령인 연오랑과 세오녀의 `태초의 빛`은 포항 빛의 시작이었다.산업화와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의 토양이 되었던 포스코의 용광로를 뜨겁게 달구던 `산업의 불`, 방사광가속기의 `과학 창의의 빛`, 3년 연속 대한민국 우수축제로 지정된 포항국제불빛축제의 `화합의 빛`, 미래 창조도시 포항의 프로젝트인 고출력 레이저사업에 이르기까지 포항의 발전상은 현재진행형이다.포항시는 산업기술의 무게중심이 기계, 전자에서 빛의 시대 레이저로 옮겨감에 따라 급격한 기술의 패러다임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불과 빛의 도시` 포항에 미래 글로벌 녹색 경제성장을 이룰 핵심 신기술 개발의 큰 축이 형성되어 포항지역 창조경제와 미래 정보에너지(Photonics) 산업인 고출력 레이저 상용화 기반구축 사업이 태동하고 있다.산업통상자원부 `2014년도 산업핵심 기술개발 사업`의 공모과제에 한동대가 선정되어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국비 40억원으로 `표면 개질용 125J.Hz급 레이저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필자는 지난 4월 KITIA(한국부품소재투자협의회) 주관으로 독일 슈튜트가르트를 방문해 세계 고출력레이저 시장의 거인이라는 독일의 트럼프사를 견학했다.이곳에서 상용화된 레이저 기술을 활용한 면도칼로 종이를 자른듯한 금속 커팅, 표면에 자국이 전혀 없는 용접, 이밖에 절단, 절곡, 천공 등의 기능으로 부품의 대량생산 공정을 견학하면서 철강도시인 포항의 새로운 성장 모멘텀(Momentum)이 될 고출력 레이저사업은 산업기술 패러다임 이동에 따른 최선의 선택이며 미래 유망 블루오션 사업이이라고 확신했다.21세기 첨단산업의 핵심키워드인 초정밀, 초고속, 고효율의 모든 요소를 두루 갖춘 고출력 레이저사업은 친환경적인 지식집약형 RD산업으로 신기술에 기반을 둔 고부가가치 사업이다.국내 산업용 고에너지 레이저 산업은 자동차, 조선, 항공기, 로봇 산업뿐 아니라 원자력, 반도체 기반 IT산업에 이르기까지 철강 및 금속을 이용한 특수 가공 산업 전반에 걸쳐, 기존의 기술보다 진보된 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녹색 차세대에너지 사업으로 침체된 지역경제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의 새로운 창조경제 돌파구가 될 것이다.또, 11월3일 `고출력 레이저 상용화 기반 구축 사업`의 필요성과 시급성에 대한 여의도포럼 정책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으로 명실상부한 고출력 레이저 산업의 메카로 부상하고 있다.더불어 포항시는 창조경제 산업의 정책에 부합하고 철강산업의 고도화와 새로운 먹거리산업에 대한 대응책으로 온실가스 저감과 저탄소녹색성장 도시 구현을 위해 2012년 환경부 3차 EV 선도도시로 선정됐으며 세계최초 배터리무인자동 교환형 전기버스 시범사업으로 선정되어 자동차산업 유치로 일자리 창출 및 지역경기활성화로 미래주도형 창조산업 육성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가고 있다.세상의 모든 길은 가장 앞선 자가 만들어 나간다.국내 최초 연구중심대학으로 포항연구클러스터 구축을 견인하고 있는 포스텍, 한동대학과 글로벌 철강기업인 포스코,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 석·박사 3천여명이 있고 창조산업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세계최고 수준의 첨단과학 인프라인 막스플랑크한국연구소, 포항테크노파크, 포항가속기연구소, 포항산학연구원 등이 제2의 영일만신화 창출을 위해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창조적 마인드로 무장한 포항시는 미래 에너지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인 녹색 차세대에너지 산업의 메카가 될 필요충분조건(必要充分條件)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 앞으로 고출력 레이저산업이 창조도시 포항건설을 선도할 것으로 확신한다.

2014-10-08

한글날을 앞두고 생각해 보는 우리말

▲ 김학서 봉화군 봉성면장필자는 세계경영을 꿈꾸다 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간 대우자동차의 `누비라`를 아직도 운전하고 있다. 자동차 번호가 `대구 27누`로 시작 되는데 아이들은 어릴 때 자동차의 이름이 `누비라`여서 당연히 `누`로 시작 되는 줄 알고 있었다. 남들 보기에는 `로시난테`같지만 나에겐 적토마와 다름없는 이 차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끔 고장이 날 때가 있다.긴급출동 서비스에 전화를 걸면 위치와 자동차 상태를 물어서 시동이 안 걸린다고 했더니 “배터리가 방전되신 것 같습니다”고 한다. 방전됐으면 됐지 방전되신 것은 무슨 말인가?옛날 새색시가 시아버지 머리에 검불(마른풀)이 붙은 것을 보고 “아버님 대갈님에 검불님이 붙으셨습니다”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참으로 듣기 거북하다. 이런 경우는 식당에 가도 쉽게 볼 수 있는데“5만원되시겠습니다”, “자판기는 고장이세요” 문제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단순하게 어느 방송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객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일상생활에서 어법에 어긋나는 높임말이 너무 많다. 어디 그뿐인가. 먹방, 생선, 생파 등 뜻 모를 줄임말과 멘붕, 관피아, 로망, 꿀벅지, 떡 실신…. 국적을 알 수 없는 저속하고 희한한 말들을 방송이나 신문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어느 때나 비속어는 있겠지만 요즘 우리말의 혼란은 참으로 심각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맨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방송 출연자들의 말이라 하겠다. 속되고 요란한 말장난으로 시청자의 관심만 끌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또 조금 유식하다는 축에서는 “모럴 헤저드가 말이 아니야”, “대화가 너무 드라이해”, “트렌드가 지났어” 등…. 제 나라 말을 이처럼 업신여기고 아무렇게 쓰는데 누가 우리말을 귀하게 여기겠는가!언어와 민족은 운명을 같이한다. 조선시대 외국어 교육기관인 사역원에는 거란, 여진 말을 전공하는 교육과정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지구상에 거란, 여진 말을 교육하는 기관이 있는가. 거란, 여진의 말은 잊힌 말이 됐다. 말이 소멸되면 나라도 자취를 감추는 것이 역사의 진리다. 제 나라말은 남들이 지켜주지 않을뿐더러 지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말과 글을 쓸 수 없었던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있다. 그래서 선열들은 조선어학회를 조직해 죽음으로써 우리말과 글을 지켰는데 일제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는 취지로 유죄 판결을 내려 탄압·투옥했다.지구상에는 제 나라 말이 없는 민족도 많으며 혹 제 나라 말이 있다고 해도 제 나라 문자가 없는 민족 또한 많다. 제 나라 말을 제 나라 문자로 쓰는 국가는 진정 몇 나라 되지 않는다. 유럽, 미주는 물론이요 아프리카, 우리나라 주변에도 몽골, 베트남, 터키 등 알파벳을 빌려 제 나라말을 나타내고 있다.우리 한글은 2009년, 2012년 세계문자올림픽에서 잇달아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옥스퍼드대학교 언어대학의 세계 언어 평가에서 으뜸을 차지했다. 또한, 국제교류재단에 따르면 2013년 말 현재 세계 94개국 977개 곳(대학포함)에서 한국어 학과가 개설돼 우리말과 글을 가르친다고 한다.이렇듯 세계 각 곳에서 우리말과 글을 배우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 것을 귀한 줄 모른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가!우리말은 민족의 얼이요 생명이다. 아끼고 곱게 다듬어 우리 스스로 가꾸고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자산이며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우리의 엄숙한 책무다.

2014-10-06

사선(死線)에 간 리더십

▲ 권오신 The Rotary Korea 상임고문파리 등 유럽의 이름난 도시는 도로는 좁히고 시민들이 걷는 공간을 넓힌다. 우리처럼 인도에 깔린 블럭은 이가 맞지 않고 튀어 나온 곳이 없어 사람에 대한 배려가 우선적으로 시행되는 나라다. 성장제일주의에 초점을 맞춘 나라는 사람이 다니는 인도보다 도로가 더 잘 뚫려 있다. 선진국이 아니란 얘기다. 포항시내만 보더라도 그렇다. 걷는 사람이 많은 오거리, 육거리를 중심으로 어느 거리를 걸어도 이가 맞지 않고 꺼지고 파이고 블럭의 일부가 날아가 버린 현장이 비일비재하다. 이것이 우리도시의 자화상이다.도로 상황도 마찬가지다. 연신 빵빵 거리는 운전자들, 횡단보도를 돌진하듯이 차 앞바퀴를 들이대는 운전자들, 위험스럽게 끼어들기를 하는 차량들이 거리를 메운다. 심지어 모퉁이 길이나 횡단보도에도 차를 세워둔 현장이 숱하다. 교통법규를 다 지키는 사람은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고 조금 덜 떨어진 취급을 받는 사회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이후에 가장 바뀌지 않은 부분이 표심과 연결된 기초질서가 무너진 현장들일 것이다.육상이 이 모양이니 여건상 감시가 덜한 해상은 더했을 것이니 세월호 같은 초대형 참사가 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눈앞에 인명이 갇힌 현장을 두고도 한명도 구해내지 못한 실상이 우리의 위기관리 시스템이다. 이런 형편없는 위기관리능력, 초대형 참사 현장을 조사하기 위한 세월호 특별법이 167일간의 입씨름 명수들의 싸움 끝에 합의를 이끌어 냈으나 앞으로 해결할 일이 산 넘어 산이다.사후 수습에 우왕좌왕했던 정부당국과 정치권의 상황은 실패한 리더십이다.한국사회의 리더십은 마치 사선(死線)을 가르는 것 같다. 법정에 선 세월호 선장은 팬티차림으로 승객 475명을 버리고 살 곳을 찾아 가장 먼저 탈출했다. 반면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맞아 목숨을 건 해전으로 나라와 백성을 건진 역사적 사실이 500년 이란 긴 시공을 뛰어넘어서 비교되는 사회다. 영화 `명량`에 1천7백만 국민이 화답한 것이 그 답이다. 국내 최대 흥행작이 된 이유도 우리사회의 공통적 화두가 된 리더십 때문이다.내공이 쌓인 입씨름 고수들이 위기관리 시스템이란 본질을 비켜가는 지루한 공방이었다. 눈에 보이는 현장에서 3백여명의 귀한 생명이 갇혔는데 한 명의 국민을 살려내지 못한 나라가 이 지구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불투명하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한국의 기업문화(미국 포브스)가 참사의 원인이며 기술수준이 생각보다 떨어진다는 지적이 공감처럼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지난 2월 하필이면 미국 미시간호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얼어붙던 날 시카고에서 열린 로타리 월드 매거진 세미나(Rotary World Magazine Seminar)에 한국로타리회원을 대표해서 참석했을 때다.필자의 옆자리에 앉았던 유럽 로타리 대표자가 서울 얘기를 꺼냈다. “서울은 시원스럽게 트인 도로와는 달리 인도 불럭이 이가 맞지 않아 불편을 느꼈다”고 했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지나쳐버리는 우리와는 달리 사람들의 일상을 중요시하는 선진국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을 세월호 사건이 터진 이후에야 따가운 지적이란 것을 느꼈다.한 시대를 평가하는 일은 역사의 몫이겠으나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우리시대가 성장이란 나무만 붙잡다보니 사선을 넘나드는 사건이 잇달아 터지는 국가가 됐다는 것을 고귀한 희생을 치루고 서야 깨닫게 됐다. 민본 국가이자 초일류 나라인 미국은 리더를 인정하고 말을 아낀다. 정치인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한국과는 가장 다르다. 공정한 룰이 사회를 지배하고 맘대로 고치고 적당히 봐주는 현장이 없다. 미국이 그래서 초일류국가이다.

2014-10-03

와! 대박이다

▲ 박상호수필가·공무원 늘 출렁이는 푸른 바다 영일만에 가을이 부서진다. 언제나 설레는 청춘이 남발되지 않는 용기를 내어 창살을 겨눈다. 파도의 심장을 향해 내려 꽂는 패기가 대단하다. 거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바다사나이 들이 끌어 올리는 것은 희망이다. 언제나 살아있는 꿈틀거림으로 일렁이고 물결치는 우리네 인생이 꿈을 꾼다. 그 꿈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의 아버지가 있고 형님과 아우가 있다. 칠 흙 같은 어둠의 바다 밑에서 돌 장어를 잡아 올리는 거친 손과 때와 땀에 찌든 얼굴이며 피멍 든 몸은 차라리 눈물이다.그렇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 온 것도 어쩌면 저 눈물 같은 이들의 희생이며, 뻘 밭 같은 삶의 가시밭길에서 헤쳐 나온 뜨거운 사랑이 아닐까?오늘도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자식을 위해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장어 잡이 배를 타고 풍랑 더 센 바다에 몸을 던지는 대열 씨와 돌 장어 잡이 어부 들, 그들에게는 바다는 무서움과 두려움의 바다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희망과 꿈의 바다이기도 하다.돌장어가 드디어 이름값을 했다. 제1회 포항영일만 검은 돌장어 축제! 축제는 성황이었고 대박이었다. 과연 이 축제는 성공할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와서 돌장어를 사먹을까, 왕창 적자만 나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들은 기우에 불과했다. 행사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이 시민들로 붐볐고, 메인 요리인 돌장어 구이를 파는 곳에는 3일 동안의 축제기간 동안 줄을 서서 10여분정도 기다려야 맛볼 수 있었다.스태미너가 필요한 아저씨도 한 접시, 가족 뒤치다꺼리에 고생만 진 땅하는 아지매도 한사라, 술이 좋다 친구가 좋다 친구도 한잔…. 별빛 쏟아지는 해변에서 만끽하는 자유의 축배!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이번 축제는 경제적 효용과 생산적 가치는 물론이고 창의적 요소가 가미된 성공한 축제였다. 또한 이번 축제는 창조경제를 표방하는 포항시의 시책에 딱 맞아떨어지는 축제였다. 지역의 어민들이 잡은 돌장어가 외지로 가 엉뚱하게 둔갑해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을 우리지역의 특산품으로 자리매김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밑거름이 됐다.세상은 준비하는 자의 몫이라고 한다. 돌 장어 축제는 몇 년전 부터 동해면 흥환, 발산리 어민들이 돌장어 작목반을 구성해 장어를 잡고 해당 공무원들은 적극적인 행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경북매일신문이 특집으로 시리즈로 엮어 홍보와 마케팅에 큰 역할을 했으며 포항수협은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축제는 깔끔했고 잔치는 한바탕 신이 났고 우리 모두는 즐겁고 행복했다.창조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기존의 틀에서 새로운 색깔과 변화를 주어서 생산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창조다. 천혜의 자연의 보고인 우리포항에는 아직도 무궁무진한 먹거리와 볼거리가 지천에 깔려 있다.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먹거리와 볼거리가 그 만큼 많다는 얘기다. 경북매일신문에서 포항 과메기를 전국적 식품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일조했고, 영일만검은돌장어도 그에 못지않은 인기를 이번 축제를 통해 확인시켜 주었다.그래서 포항을 가리켜 `먹거리 천국`이라고 불렀던가. 포항이라는 곳이 보면 볼수록 매력덩어리다. 철강도시이자 첨단과학도시, 그리고 해양관광, 먹거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도시가 바로 포항이다. 우리 모두 이제 새로운 것을 찾아 창조의 옷을 입히자. 그래서 `함께 하는 변화, 도약하는 포항`에 다함께 동참하자.

2014-10-02

철의 고장 지역, 얻은 것과 잃은 것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조선조 연일과 흥해는 미곡생산지로, 청하는 군영지로, 장기는 유배지로 모두 현청이 소재했던 고을이었다. 단일지역에서 4명의 현감이 있었던 고장은 아마 포항이 유일할 것이다. 또한 포항은 당시 단일지역에서 전국적인 특산품을 6가지나 생산한 유일한 곳이다. 쌀과 해산물, 도자기, 삼베·모시, 천일염, 그리고 철이 그것이었다. 세계에서 젓가락 문화가 발달한 지역은 한·중·일, 즉 동북아 3국이다. 이중 중국은 대나무 젓가락을, 일본은 일반나무 젓가락을, 한국은 유독 신라 때부터 쇠 젓가락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포항에서 철이 생산된 것과 무관치 않다.포항은 고대로부터 철의 생산지였고, 그 중심지는 신광 비학산 일대였다. 기계천과 형산강 등의 사철을 녹여 철을 생산하였는데, 지금도 이 일대에는 철을 생산했던 고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신광(神光)은 또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귀신 신(神)자가 들어간 지명을 쓴다. 신라 때 임금이 이곳을 지나는데 고로에서 피어나는 불을 보고는 그 불의 출처에 대해 묻고는 `귀신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신광`으로 불렀다고 전한다.조선조 천문과 지리 등을 담당했던 관상감(觀象監) 이성지(李聖智)가 연일현감으로 있던 처남에게 둘렀다가 이 지역 바닷가 지형을 살펴보고는 `竹生魚龍砂 可活萬人地 西器東遷來 回首無望砂 어릿불에 대나무가 솟아나니 가히 많은 사람을 살릴 땅이다. 서양기물이 동쪽으로 옮겨와서 머리를 돌려보니 모래가 없네`라는 글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처음엔 그 말뜻을 짐작하지 못했지만 종합제철소가 세위지면서 이성지의 예언이 적중,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돌아보면 포항에 종합제철소가 입지하게 된 것(배경은 다음 기회에 기록)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포항은 신라 때부터 철 생산 중심지로 찬란했던 신라의 천년문화를 지탱했던 기운이 있었고, 여기에 풍부한 먹거리와 오천공항 등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견인한 철강 산업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군사정부는 1965년 혁명후 바탕이 됐던 `재건국민운동`을 해산하면서 지방정부를 추스리기 위해 전국 각 시군에 농업직 7급 2명의 자리를 배정하는 선심을 썼다. 당시 9급이었던 나는 영일군청 직원중 유일한 대학출신이라는 이력으로 인해 승진시험을 칠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합격했다. 두 단계나 뛰었으니 파격적 대우였다. 이후 행정계로 옮겼고, 1967년 종합제철소 입지가 포항으로 결정되면서 필자에게 이와 관련된 대외업무를 담당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고향에 산업 핵심 시설이 들어온다는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종합제철소와 깊은 인연을 쌓으며 열심히 일했다. 아마도 필자가 9급에서 출발하여 공무원 최고봉인 1급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9급에서 시험을 거쳐 두 단계 뛴 것과 포항제철을 만난 것이 결정적 계기가 아닌가 지금도 생각한다.종합제철소에 편입된 부지는 영일군 대송과 오천의 일부로 형산강과 냉천 사이의 영일만에 접해 있었다. 당시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기에 종합제철소가 들어서면서 포항시내와 오천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제철소 편입 지역은 당시 형산강과 냉천 하구의 퇴적층이 매우 발달했고, 일대 해변은 강 하구의 퇴사와 파도의 영향을 받아 은빛 백사장이 눈부시게 펼쳐진 그야말로 명사십리였다. 바닷가 송정동과 도로변 송내동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백사장을 따라 울창한 해송들이 즐비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광을 연출했으며 당시 최고의 어부림으로 손꼽혔다. 어부림은 물고기 떼를 끌어 들이기 위하여 간만의 차가 적은 바닷가 등지에 나무를 심어 이룬 숲을 말하는데 그만큼 고기가 많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울창한 해송과 송도~도구를 연결했던 명사십리 백사장에 노닐던 바닷새들의 군락 또한 장관이었다. 특히 몸놀림이 빨랐던 아이들은 하루에 수백 마리를 잡아 인근의 포장마차 등에 팔아 제법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해수욕장으로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용이한 접근성과 완만한 해저경사, 해송 같이 쉴 수 있는 환경, 민물, 일조량, 그리고 풍부한 먹을거리 등이 필수적인데, 포항 송도와 형산강하구, 도구를 잇는 해수욕장은 이를 충족시킨 최고의 해수욕장이었다.아직도 그 울창했던 송림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당시 종합제철소 입지선정을 주도했던 건설부 인사들도 그 해송을 오랫동안 기억했고, 그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었다. 사실 종합제철소 부지로 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혜의 자연경관이었던 것이다. 포항은 종합제철소를 얻은 대신에 천혜의 자연을 잃어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도 포항제철이 들어오기 전 그 아름답고 멋졌던 풍광을 기억하는 포항사람들의 마음에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아있다.

2014-09-26

원자력과 환타

▲ 박종희경주시 양남면 갈증이 나서 음료수를 사기 위해 마트에 갔을 때 무엇을 먹을지 고민을 했던 경험을 모두 갖고 있을 것이다. 시원한 탄산음료 중 환타라는 제품이 있다. 환타의 유래를 찾아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1885년 탄생한 코카콜라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독일에서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연간 판매량이 450만병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콜라를 즐겼던 독일인들은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여하면서 콜라를 즐길 수 없게 됐고, 당시 독일 코카콜라 지사장은 콜라를 대체할 새로운 음료를 개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환타이다. 이 환타는 물이 부족했던 독일군에겐 적절한 물의 대체재가 되었고 물자부족으로 설탕이 부족했던 독일 가정에는 설탕의 대체재로 사용됐기에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된다.특정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했을 때 동일한 만족감을 제공해주는 것을 대체재라고 한다. 10원짜리 동전 5개와 50원짜리 동전 1개의 관계완 달리, 환타는 콜라 및 설탕과 맛이나 사용 장소 및 속성이 달라 완전대체재는 아니지만 대체관계가 높은 대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원자력과 환타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너무 생뚱맞은 반전인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여러 가지 에너지원을 두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석탄 및 석유 등 화석에너지, 원자력에너지 등등을 말한다.환경 친화적인 측면에서 신재생에너지는 온실가스 감축 및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에너지이다. 하지만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kWh당 원자력이 10g, 태양광은 57g, 풍력 14g으로 환경적 측면에서 원자력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또한 신재생에너지로 원전과 동일한 전력 생산은 더 많은 부지가 필요하다. 미국원자력에너지협회(NEI)에 따르면 원자력에 비해 태양광은 75배, 풍력은 350배의 면적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 재생에너지는 강한 햇볕, 평균 4m/s이상의 바람, 조수간만 등의 특수한 조건이 필요한 한계가 있다.경제적 측면에서 원자력은 현재 가장 저렴한 에너지원이다. 2011년 발표된 한국전력공사의 발전원별 단가를 보면 원전은 39.2원, 유연탄은 67.22원, 무연탄은 98.64원, 수력은 136.19원, 천연가스 187원, 태양광 475.65원으로 원자력에 비해 유연탄은 1.7배, 태양광은 12배 가격이 높다.이렇듯, 원자력은 다른 에너지원의 대체재로 적절한 에너지원이다. 환타가 물이 부족하고, 설탕이 부족하여 콜라와 설탕의 대체재가 된 것과 같이 다른 에너지원의 경제성, 환경 친화, 수급안정성 등의 이유로 원자력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인간은 불이라는 도구를 발견해 사용해왔다. 안전하게 이용하면 따뜻함을 제공하고 음식을 조리해주는 좋은 도구가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불은 큰 재앙을 불러온다. 후쿠시마 사고 및 한수원에서의 사고로 인해 우리는 원자력이 불러온 재앙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를 안전하게 사용한다면 유용한 도구가 된다는 것, 그 역시 알고 있다.원자력이라는 도구를 이용하기 위해서 한수원은 사고에 대한 우려와 걱정을 하는 국민들을 위해 열린 자세로 정보제공과 소통 및 대화를 해 국민의 이해와 공감을 얻어야한다. 또한, 국민들이 설비개선과 후쿠시마 후속조치, 인적오류개선, 인간공학적 접근, 그리고 안전문화와 지역민과의 화합 등으로 재무장하고 있는 한수원을 이해한다면 원자력은 차세대 에너지원이 나타나기 까지 다른 에너지원의 대체재로서 완벽한 역할을 해줄 것이다.

2014-09-26

태극기 달기를 통해 다시금 나라사랑의 마음을

▲ 허윤수포항시 자치행정과장 10월은 일 년 중에 국가경축일이나 기념일이 가장 많은 달이다. 우선 오는 10월1일은 우리 군의 위용과 전투력을 나라 안팎으로 과시하고 군 장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지정된 `국군의 날`이 66번째를 맞게 된다. 여기에 반만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생일인 개천절이 10월3일이고, 우리 글자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한글날이 10월9일이다. 그래서 10월은 그 어떤 달보다 태극기가 많이 게양되는 달이다.세계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국가경축일 등이면 으레 국기를 게양하고 온 국민이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기념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기는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 4괘로 이뤄져 있어서 태극기(太極旗)로 불린다.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있는 태극기의 주된 의미는 평화, 단일, 창조 광명, 무궁, 조화, 평등이라고 한다.사전적 의미로 국기(國旗)는 일정한 형식을 통해 한 나라의 역사와 국민성, 이상 따위를 상징하도록 정한 깃발을 말한다. 그래서 국기는 그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고 그 나라 국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그런 이유로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태극기를 몰래 숨기고 항일독립만세운동을 펼쳤고, 광복의 그날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에는 온 나라를 뒤덮었던 태극기의 물결과 붉은 함성을 통해 전 세계에 우리의 하나 된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금 이 시각,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서는 태극기를 흔들며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새삼 태극기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딸 때마다 경기장에는 태극기가 드높이 거양되고 애국가가 울려퍼진다. 메달을 딴 선수는 눈물을 흘리며 가슴에 새겨진 태극기 위에 손을 올려 감격해 한다. 경기장에 온 관중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한다.그렇듯 태극기는 우리들 가슴에 애국심의 본능을 우러나오게 하는 힘이 있고, 우리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태극기를 곱게 접어 국기함에 넣어 보관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얼굴은 물론 온몸에 태극기를 그리고, 태극기로 만들거나 태극기가 그려진 옷과 모자로 치장할 정도로 태극기에 대한 사랑의 행태는 많이도 변했다.그럼에도 현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국경일임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에 드문드문 걸려 있는 태극기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것은 필자만의 심경은 아닐 것이다. 국경일이 되면 반상회와 언론을 통해 태극기 달기를 홍보하고 있지만 행인의 눈에 잘 띄는 도로변을 제외하면 태극기를 달지 않은 집이 허다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우리는 그동안의 역사를 통해 태극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됐고, 우리가 하나의 민족임을 확인했다. 그런 태극기에 대한 사랑은 특정행사에 맞춘 단발성으로 끝나서는 안 될 일이다. 태극기의 소중함과 그 의미를 통해 역사적 사실에서 배우고 지켜내는 일이야 말로 나라사랑의 시작이 아닐까?나라사랑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찾아야 한다. 태극기 사랑은 바로 나라사랑의 길이다. 모두가 어렵다고들 한다. 이럴 때일수록 국경일 단 하루만이라도 “나부터”, “내 집부터”라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다는 것은 어떨까? 다가오는 국경일에는 집집마다 거리마다 나부끼는 태극기의 물결을 통해 우리가 다시금 하나 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4-09-25

화랑과 예니체리

▲ 김기조경주문화원장 단풍이 물들기는 아직 이른 가을이지만, 신라의 달밤은 이미 `이스탄불`로 물들고 있다. `형제의 나라` 터키가 자국을 대표하는 문화를 가지고 1만 2천km나 멀리 떨어진 신라 천년고도 경주에 온 것이다. 그렇기에 `이스탄불 in 경주 2014`는 매우 특별한 행사다. 하지만 이 특별한 행사에서 주목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마스코트 화랑과 예니체리다.신라시대 화랑이 있었다면 터키 오스만 제국에는 예니체리가 있다. 이 둘은 다른 점도 있지만 공통점이 참 많다. 당시 이들은 국가의 동량이었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상징이었다.창설 시기는 다르지만 상황은 닮았다. 화랑도는 신라 영토 확장으로 통일의 기반이 된 진흥왕(534~576)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예니체리는 1360~86년까지 27년 간 재위하면서 넓은 영토를 확장한 무라드 1세에 의해 탄생했다.구성원 모두는 매우 뛰어난 학식과 함께 용맹함을 가지고 있었다. 예니체리는 14세기 무렵 창설된 오스만 제국의 국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군 체계 중 하나다.`새로운 병사`라는 뜻을 지닌 오스만 술탄의 친위 보병으로 최정예 부대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아가`라고 불렸다.화랑도는 5세기 경 신라 진흥왕 때 인재 양성 기관이며, 군사체계의 하나로 우두머리를 화랑 또는 풍월주라고 불렸다. 통일 신라의 기반이 된 김유신, 김춘추, 용춘, 사다함 등이 화랑 출신이다.수백에서 많게는 1천여명에 이른 화랑도와 제국의 전성기 때 1만5천명에 달했던 예니체리. 이들은 평소에는 학문에 정진하고 산하를 누비며 무예를 연마했다. 물론 사회 지도층으로서 절제된 생활과 모범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 전시에는 전쟁터로 나아가 물러섬이 없이 국가를 위해 싸우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쳤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의로운 일에 앞장선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었다.이들은 사회 융합과 소통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예니체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정복지의 유대인 자녀로 많이 채워졌다. 배움의 열의가 높고, 지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인간 신체 능력을 초월한 전사 집단으로 키워졌다. 하지만 이슬람교인 오스만 제국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유태교의 정체성을 인정했다.화랑도 또한 평민부터 귀족까지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가야 출신이지만 풍월주에 오르고, 통일 대업의 후광이 된 명장 김유신도 있다.아이러니하게도 세월이 흘러 이 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모습도 닮았다. 예니체리는 훗날 술탄조차 바꿀 정도로 막강해지고, 반란을 도모한 끝에 1828년 해체된다. 화랑도 역시 신문왕 때 김흠돌의 난으로 일정 기간 폐지됐다 다시 부활하지만, 병부에 예속된 형태의 기관으로 막강하던 힘도 없어져 버렸다.경북도와 경주시 그리고 이스탄불시가 `이스탄불 in 경주 2014`의 마스코트를 화랑과 예니체리로 정한 것에는 깊은 뜻이 있다. 화랑과 예니체리는 지난해 터키 이스탄불을 한국의 문화로 물들인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마스코트였다. 대개 행사가 다르면 마스코트 또한 다르다. 하지만 두 행사의 마스코트를 동일하게 사용한 것은 이번 행사가 지난 해의 연속행사로 양국이 `형제애`와 `미래를 향한 동반자 관계`를 지속해 이어 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특히 이번 행사가 열리고 있는 황성공원은 신라시대 화랑들의 수련장이었던 곳이어서 의미를 더한다.지금 경주는 감동과 아름다움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이번 행사의 의미를 상징하는 화랑과 예니체리의 근본정신을 더한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2014-09-19

직장신공

▲ 권오신 로타리코리아 상임고문인생의 멋진 부분은 대부분 후반부에서 일어난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문신 유만주(문신 1755~1788)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 한마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함정에 빠트려 죽었던고….” 재능도 별로고 끈질긴 노력도 않으면서 평생을 입신의 허망한 꿈에 매달리는 조선의 선비들을 두고 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해도 안 될 일에 헛된 희망을 거는 것은 무모하기까지 하며 봄날처럼 지나쳐 버리거나 끝내 오지 않을 날을 기다리게 만드는 대기만성은 그래서 슬펐다”라고 했다.공동체(共同體)나 회사 내에서 인기 있는 사람들은 역시 부드럽고 호불호다. 애매한 태도로 아래 위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게 덧칠을 하는데 능한 사람이다.이런 사람의 큰 특징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법이 없고 자신의 판단이 반드시 정확하다는 말을 어디서도 하지 않는다. 조직 내에서 자신의 인기는 누리겠지만 회사의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형이다.사실 그런 처세(處世)로는 정상에는 갈 수가 없다. 요즘 같은 인터넷 세상에서는 더 걷잡을 수 없다. 아첨을 잘하면 누가 뭐래도 승승장구하고 올곧은 사람의 말은 종종 내침을 받으니 입이 근질근질해도 끝까지 다 말하는 것은 금물이다. 제 패를 함부로 까 버리면 100% 실패하니 목표가 보일 때까지 꾹 누르고 억지로 참는 것.요즘 SNS상에 나도는 일 못하는 직장인의 11가지도 같은 흐름이다. 대표이사의 눈에 쏙 들어오는 사원은 지각을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남보다 먼저 출근해서 신문 읽고 자기자리를 줄곧 지키는 근면성에다 여러 가지 업무를 잘 소화하는 멀티 테스킹이면 승승장구한다. 필수품 프리젠테이션은 첫 1분을 무조건 성공하기 위해서 사나흘을 파고드는 형이다.최근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상사가 늘어나니 성향파악을 하는 것도 출세에 보탬이 된다. 휴가를 100% 소화하지 않는 사람, 회사 동료와 잘 어울리는 마당발하며 하루 일과 정리를 습관적으로 하는 직원은 쉽게 승진 반열에 오른다. 출근하자마자 메일을 잡고 아침시간을 허비하는 직장인은 그 반대다.무엇보다도 취미활동을 통해 체력도 기르고 머리를 비우고 출근하는 것이 산뜻한 출발로 보인다. 회사도 좋고 100세 시대를 살아야 할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며 창의성을 키워 주기 때문이다. 신간(新刊)을 정독하는 습관은 자신을 신지식(新知識)인으로 보이게 하고 미래를 키우는 중요한 습관이다.(출처:SNS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난폭하게 보이는 행동은 절대 금물이다. 아직까지 직장의 주류는 남성인데 그런 처신으로 낙인이 찍히면 곤란하다. 난폭(暴)운전의 성향이 남성들에게서 잘 나타나는 반면 여성들에게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두고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제프리 베티 교수는 “남성 운전자가 여성보다 공격적으로 운전하는 이유는 석기시대의 습관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베티 교수는 남성들이 운전할 때 표출(表出)하는 공격적인 모습은 살아남기 위해 먹을 것을 사냥하던 신· 구석기 시대에 지녔던 난폭한 상황에서 비롯된다는 해석을 달았다. 이처럼 고정관념(固定觀念)이 박혀 있는데다 여성들이 속속 주류사회로 등장하는 우리 사회의 실상에서 보면 당연하다.특히 직장 내에서 공채 합격증(合格證)을 목에 걸고 다니는 천재들과는 정면 승부를 걸지 마라. 단거리(短距離)는 절대 피하는 것이 좋다. 고전의 단골로 등장되는 줄거리 즉 인생의 멋진 부분은 대부분 후반부에서 일어나니 원칙(原則)을 줄곧 지키면서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직장 신공이 두려울 것이 없다.삼국지의 사마의는 병법의 대가이자 천문 기문술에 달통했고 잔인함까지 뒷받침된 당대의 인물이었으나 조조와 그 아들 대까지 엎드려 참는 인내심(忍耐心)으로 서진(西晉) 건국의 기초를 세웠다.

2014-09-19

전국 최대 가마니·새끼 생산지로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6·25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는 모든 것이 여의치 못했던 우리 형편에 가뭄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까지도 이러한 형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의식주의 기본이 되는 식량이 크게 부족했다. 그래서 지방행정의 중심은 단연코 농정 관련 업무들이 차지했다. 필자가 1965년 당시 영일군청에서 근무했던 양정(糧政)계도 농정 중요부서 중 하나였다. 식량의 수급과 유통, 가격 등 식량정책을 관리했는 데, 당시 구호물자였던 외국원조미(미국잉여농산물)가 동빈부두(포항항)에 하역되면 도정 업무를 도맡아 했다.동빈부두는 동해안 수산업 전진기지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6·25전쟁 기간과 직후에는 군수물자와 인력을 수송하는 군사항으로, 1962년 6월에는 국제항으로 개항하면서 외국선박과 외국원조미를 운반하는 대형선박이 입항하는 등 당시에는 우리나라 식량공급의 창구역할을 담당했다.외국원조미는 보통 한 번에 2만여 t이 들어왔는 데, 지역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외국 원조미 중 6할은 입항지인 포항지역에서 도정하고, 나머지 40%는 인근 경주와 영천, 영덕 등으로 분산하여 도정하였다. 당시 산업이 워낙 빈약했었기에 도정업자들은 지역경제를 쥐락펴락했다. 당연히 돈도 많이 벌었다. 포항 부자를 대표한 이들은 지역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냈고, 은행에도 큰 손이었다. 포항의 김유, 최귀돌, 홍봉춘, 정명바우(삼화압맥 사장)씨를 비롯해 영일 흥해의 이장우·배수성·김석암 씨, 연일 박병일, 대송 이영준, 기계 박용수, 청하 정기수씨 등이 그 대표적 인사였다.특히 지금의 중앙상가 영남병원 옆에 자리했던 삼화압맥공장은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할만큼 명성을 날렸다. 압맥(壓麥)은 기계로 납작하게 누른 납작보리를 말하는데, 보리에 적당한 수분과 열을 가해 눌러주었기 때문에 통보리보다 밥을 지을 때 연료가 적게 들고 소화율도 좋았다. 연료부족이 심각했던 당시 군대에 공급되었던 압맥의 대부분은 삼화압맥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온 겨는 경주를 전국 최고의 축산지로 만드는데도 일조했다.외국원조미가 지역경제에 끼친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포항을 전국 최대의 가마니와 새끼 생산지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당시 흥해를 비롯한 포항지역은 일찍부터 가마니와 새끼 생산지로 유명했다. 어장을 막고 그물을 내리는 데 전적으로 이들을 사용하였기에 기술이 앞서 있었던 것. 원조미를 싣고 온 선박의 창고에서 벼를 하역하려면 1t에 보통 14장의 가마니가 필요했는 데, 외국원조미 2만 t이 하역될 때마다 가마니 28만장과 상당한 양의 새끼가 필요했다. 이를 포항지역에서 전량 조달했다. 당시 흥해에서만 일주일에 평균 5천여 장의 가마니를 생산했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고, 부업농가들은 알게 모르게 주머니를 짭짤하게 채웠다. 또한 하역 때마다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보통 20~30명의 인부들이 하역작업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큰 장화를 신고 보관창고에 들어가 나올 때는 장화에 벼를 가득 채워 나오곤 했다. 이를 모으면 하루 평균 1인당 30㎏은 족히 되었는데, 모두 인근식당 등으로 비공식 운반되었다.이처럼 밀반출된 양도 많았지만 하역 기술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작업과정에서 낙곡이 많이 발생했다. 하역장 모래자갈밭에는 이 낙곡을 주워 끼니에 보태는 사람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외국원조미는 당시 하역 인부들과 인근 주민들에게 소소한 소득이 되기도 했다.외국원조미가 동빈부두에 하역된 것은 동해안 지역의 미곡생산이 평야가 많은 호남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 포항과 경주 등에 원조해 줄 수요자가 많았기도 하지만 항구가 있어 군량미 공급이 용이하였던 점도 한 몫했다. 또 당시 포장에 필요한 가마니와 새끼가 전국 주요 생산지라는 부분도 하역기지로 선정되게 하는데 한 요인이 됐다. 외국원조미는 우리의 식량사정을 완화시켜 국내의 곡물가격을 안정시켰는데 포항이 그 중심에 있었다.

2014-09-18

쌀 관세화, 왜 실시하는가

▲ 이종부포항시 농업기술센터 소장 내년 1월부터 우리나라 쌀 시장이 완전히 개방된다. 2014년 말로 20년간 유지해 온 쌀 관세화 유예가 종료되기 때문이다. `쌀 관세화`는 말 그대로 쌀을 수입할 때 관세를 내는 것이다. 2차 대전이 종료되자 세계 각국은 자유무역을 촉진해 경제번영을 꾀하고자, 교역규모가 크지 않은 농산물과 서비스 부문을 제외한 공산품의 관세율 인하에 초점을 맞춘 7차례의 다국간협상(GATT)을 벌여왔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공산품 외 분야의 교역비중이 크게 높아지자 농산물,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을 포괄하는 다자간 협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1994년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 설립과 함께 모든 농산물에 관세를 매겨 교역을 투명하게 하자는 원칙이 마련되었다.당시, 수출주도의 급속한 공업발전을 추진해온 우리나라는 농산물시장의 국제경쟁력이 지극히 낙후되어 쌀 시장 개방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했기에, 우리 민족의 피요 살이요 혼이며 문화인 쌀만큼은 결코 개방할 수없다고 버티었으며 결국 개발도상국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아 10년간(1995~2004년) 쌀 의무수입량(MMA)을 수용하고 나머지 농산물의 예외 없는 관세를 받아들였으며 2004년에는 다시 10년간(2005~2014년) 관세화 유예를 연장하였던 것이다. WTO회원국 중 아직까지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필리핀 뿐이다.20년간 쌀 관세화 유예를 택한 일종의 패널티로 외국쌀 의무수입량은 매년 2만t씩 늘어났으며, 올해는 경기도 전체 쌀 생산량과 맞먹는 40만 9천t이나 된다. 우리나라가 2015년 이후 관세화 유예를 또 하게 되면 가뜩이나 쌀 소비가 줄고 있는 상황에서 쌀 의무수입 물량을 더 늘려야 하기 때문에, 국내 쌀 UR협상에서 정한 국내 쌀과 수입쌀 가격의 차이를 기준으로 높은 관세율을 유지하여 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의무수입량을 늘리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인 것이다.우리나라보다 먼저 쌀을 관세화한 일본은 800%라는 고율관세로 수입쌀은 거의 없고 오히려 일본쌀이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되는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쌀 관세화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 지금, 정부는 쌀 재배 농업인의 소득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쌀 고정직불(쌀 재배농가에게 쌀값 등락과 관계없이 12월 1헥타르(3천25평)당 90만원의 고정직불금 지급), 쌀 변동직불(정부가 고시하는 목표가격과 수확기 산지 쌀값 차이의 85퍼센트에서 고정직불금을 차감한 금액, 익년 3월 지급), 재해보험 등 소득 안정장치를 보완해 나가며 또 쌀 생산기반 정비, 기계화 등 쌀 전업농 육성, 수입쌀 혼합판매금지로 부정 유통을 방지할 계획이다.포항시에서도 지역 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친환경재배단지 확대, 들판공동체 육성, 경영비 절감을 위한 직파재배 확대보급, 농기계 및 농자재 지원 확대, `영일만 친구`로 브랜드화와 직거래장터 개장, 친환경 학교급식 등의 사업을 추진하여 쌀관세화 전환에 만반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쌀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식량이 아니라 우리 농촌의 근간이며 우리 농부들 나아가 우리 민족의 뿌리깊은 정체성이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어려운 난국들을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 밥심으로 극복해 왔다.쌀을 뜻하는 한자 미(米)는 쌀 한 톨을 얻기까지 농부의 손길이 무려 88(八+十+八)번의 손길이 필요함을 표현한 회의문자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 안부를 물을 때 “식사 하셨어요?” 라고 물을 정도로 한국인에게 밥은 먹고사는 문제, 생명, 인생의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인고의 시간을 거쳐서 밥상으로 올라 온 한 톨의 쌀의 소중함과 사시사철 수고로운 농부들의 신성한 노동에 찬사를 보내자.쌀 관세화라는 또 다른 파고 앞에 국익에 도움이 되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2014-09-17

국회는 국민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 김영문 한동대 교수공전에 공전을 거듭하며 마비상태에 이른 국회가 제 식구 감싸기만 하는 것을 보며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지난 5개월 동안 단 한 건의 경제·민생 법안도 처리하지 못한 국회다. 이런 와중에도 야당은 국회를 떠나 장외집회를 계속하며 강경 일변도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시가 급한 법안들을 외면하고 국회 밖으로 뛰쳐나가 국정을 마비시키는 행태를 국민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국회가 일도 하지 않으며 세월호를 악용하는 세력의 총공세에 사실상 동조하고 있다는 우려와 함께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물론 중요하지만 국회가 하루 빨리 정상화되어 민생·생활정치에 매진해 달라는 국민들의 염원을 이제는 잘 들어야 한다. 여야 원내대표는 지난달 7일과 19일 두 차례에 걸쳐 세월호 특별법에 합의한 바 있다. 합의한 특별법 골격에는 그동안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던 주요 민생 법안들을 함께 처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여야 지도부는 이미 세월호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직접 부여하는 일은 법체계를 뒤흔드는 것이어서 수용할 수 없다는 결론이 포함된 합의이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의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의 `양보`가 법체계를 유지하며 수용한 특별법이 그 골격이다. 그러나 새정연은 여야가 두 차례나 합의한 세월호특별법을 백지화하며 유족대표가 마주 앉아야 한다는 `3자 협의체` 재협상 안을 내 놓았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정치의 기본을 무시하고 줄곧 유족과 당내 강경파들의 목소리에 끌려 다니는 태도는 거대 야당이 보여줄 모습이 아니다.세월호 특별법 2차 협상을 인준해야 하는 야당의 의원총회 자리에서 새정연은 총력 투쟁에 나설 것을 결의하며 또다시 장외투쟁으로 선회하였다. 세월호 특별법 합의안을 두 번씩이나 뒤집은 야당이 장외투쟁 운운하는 일은 그 명분이 약하기도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정부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것이 야당의 본질기능이라면 야당은 그렇게 싸우도록 제도적으로 마련된 국회 안에서 싸워야 한다. 그 본래의 무대를 뒤로 하고 거리로 나가는 행태에 이제 국민들은 지쳐있다. 야당의 7·30 재·보선 참패와 현재 여론 지지율이 바닥을 치는 까닭이기도 하겠다.세월호 특별법이 제1야당이 국회를 보이콧할 정도의 대단한 법안인가. 세월호 참사가 심각한 사건임은 사실이다. 그리고 유가족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 때문에 정치권이 특별법을 제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은 법치의 상식과 합리에 따라 제정되어야 한다. 관련 법안과 정책은 유가족의 `동의`를 모두 받아야 한다며 국회의 고유 입법권을 저해하는 법안이 되거나 유가족들에게 무한 특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보다는 사고발생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서 근본적인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는 `안전한 대한민국`과 `국가혁신의 계기`가 되는 합리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제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논란이 진행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시급한 경제·민생 법안들은 마땅히 논의되고 통과시켜야 한다는 것이 민심이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60~70%의 국민이 이에 동의하고 있으며 반대는 20% 내외로 보인다.여야가 빠른 시간 내에 절충점을 찾지 못할 경우 지난해처럼 국회 파행이 장기화돼 국정이 고사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15일 국회 본회의가 예정돼 있다. 여기서 경제·민생 법안이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 경제회생을 앞당겨야 한다는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양당 원내대표는 지금이라도 당장 협상에 나서야 한다. 강경대치만이 능사가 아니며, 정치는 대화와 타협의 장이 아닌가. 국민이 만들어 준 과반 의석을 가지고도 국회선진화법에 발목이 잡혀 사태 수습을 위한 법 하나 만들지 못하는 여권의 무능도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야당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타협이 어렵다면 여당이라도 중심을 잡고 입법부가 최소한의 역할이라도 할 수 있도록 주도해야 한다. 대한민국에는 세월호 유족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사태이후 침체의 바닥을 헤매는 경제 탓에 가슴앓이를 하는 국민들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014-09-15

원자력, 제2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 황병선경주시 성건동 지금 대한민국은 `세월호 참사` 여파로 안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큰 타격을 입었던 원자력산업계 또한 `안전`에 대한 우려와 관심을 더 크게 받게 됐다. 원전 안전, 방사능 피폭, 설계수명을 다한 원전의 계속 운전, 폐로, 신규 원전 건설, 사용 후 연료의 재처리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부상하면서 사회적·경제적 이해관계들의 대립이 심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원자력의 딜레마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원전 제로를 외쳤던 일본 원전정책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것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제1차 국가에너지 기본계획에 따라 원전의 비중을 2030년까지 설비용량 기준 41%까지 늘리고, UAE 원전 수출을 이뤄낸 당시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원자력산업은 `원전 르네상스`라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 이후 결정된 제2차 국가에너지 기본계획에서 원전 비중을 20%로 대폭 낮추게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전 비리사건 등이 불거지면서 불과 5년 사이에 원자력의 위상은 정점에서 바닥으로 내려앉고 말았다.최근 독일·벨기에·스위스 등의 탈원전 정책을 지켜보며 우리나라 역시 원전을 폐쇄해야 된다는 환경단체들의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탈원전 정책은 에너지 자급률이 3%에 불과하고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구조를 가진 대한민국 에너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신재생에너지가 경제성이 떨어지는 작금의 현실에서 탈원전 정책을 시행하게 되면 화력발전을 늘릴 수밖에 없는데, 이는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시행을 목전에 앞둔 대한민국 현실과 상반되는 정책이다.환경운동가로 변신한 엘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그린피스 창시자로 원자력을 반대해왔던 패트릭 무어 박사도 원자력 예찬자로 돌아섰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현재 원자력이 경제성과 환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재생에너지가 기술혁신으로 경제성을 충분히 갖추기 전까지, 화석에너지의 비중을 점차 줄여나가며 징검다리 역할로 원자력을 활용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리므로 우리는 원자력 찬반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는 소모적 논쟁을 잠시 접어두고, 지금보다 더 안전하고 투명하게 원자력에너지를 이용하고 관리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원자력은 발전지향주의와 생태지향주의 가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분야이다. 그래서 명확한 답이 없고, 최고의 선택이 아닌 최선의 선택이라는 단어가 붙여지는 분야이다. 따라서 국민의 신뢰를 무시하는 국가는 멸망한다는 `무신불립`이라는 고사성어처럼 원전 정책은 국가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져 가야한다.그러기 위해서 먼저 국가와 원자력계는 대한민국 원전의 전문성과 안전성, 기술력 등을 국민이 이해하기 쉽게 홍보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야 하는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며, 투명경영과 소통을 통해 실추된 명예와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그리고 국민들은 부정적 시각으로 원자력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에너지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요즘 원자력 일선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근로자들의 사기가 많이 저하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히 소수의 잘못으로 벌어진 사건들로 인하여 사회에서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는 상황 때문이라고 한다. 안정적인 전력생산을 위해 명절 및 공휴일에도 교대로 출근하고, 자신이 맡은 기기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새벽에도 회사로 뛰쳐들어오는 직원들의 노고도 국민들이 알아줘야 할 것이다.우리나라는 후쿠시마 후속대책으로 지난 3년간 방호벽 증축, 이동형 발전차 설치, 수소제거설비 설치 등 사고 예방과 완화 대책을 마련하고 안전성을 강화하고 있다.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원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국민들의 신뢰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지속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노력이 선행되어 국가와 국민 모두가 상생하고 소통하며, 공감할 때 대한민국은 제2의 원자력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2014-09-12

보릿고개 넘긴 식량증산 계획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나는 1963년 4월 15일 공무원으로 영일군 오천면 지방농업기원보(현9급)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해 3월에 있었던 지방공무원채용시험에서 행정직 일등으로 합격했지만 농업직으로 전직이 되었다. 요즘 세대는 상상조차 어렵겠지만 당시는 국민들의 먹거리 해결이 가장 큰 국정과제였다. 5·16군사정부는 `보릿고개`를 넘어 국민생활의 기본이 되는 먹거리 자급자족을 위해 식량증산에 팔을 걷어야했다. 이런 연유로 식량증산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이 계획은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함께 우리나라의 빈곤 퇴치와 극복을 위한 양대 산맥과 같은 계획이었다.식량증산에 대한 군사정부의 의지가 워낙 강하다보니 관련부처 장관부터 도지사, 시장과 군수, 읍면동장은 물론 농업관련 기관과 부서에서는 전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오천면은 영일군청으로부터 각종 식량작물의 생산목표를 부여받았고, 이를 다시 리동별 목표로 하달하였다.하지만 각종 수치에 오류가 많았다. 또 당시 농촌지도소 밑에 3~4개 읍·면 단위로 농촌지도소 지소가 막 생겨났는데, 생산증대를 위한답시고 미숙한 영농기술을 마구잡이로 보급하다보니 막상 생산현장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 비일비재로 일어났다. 이는 당시의 행정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나는 오천면에서 식량증산계획을 담당했는데, 상업계 학교를 졸업한 탓에 주산과 부기, 타자에서 모두 4급 수준이어서 각종 수치의 오류들을 수정하며 시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내가 혼신을 다해 마련했던 오천면 식량증산계획은 영일군 12개 읍면동에서 1위를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나는 이 일로 영일군청 식량증산계획 실무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영일군에서 세운 식량증산계획이 경북도에서 다시 1등을 차지하게 되어 나는 경북도청 농정과로 차출됐다. 근무처는 영일군이었으나 일은 경상북도에서 식량증산계획을 담당했다.나는 공무원 초임시절의 대부분을 식량증산 업무에 매달렸다. 다시 말해 내 젊음을 국민의 먹거리 해결을 위해 최대 국정과제였던 식량증산에 고스란히 투자했던 것이다. 내가 맡은 경북도 식량증산계획은 전국에서 또 다시 2등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도청 차출 1년 만에 이룬 결과였다. 이후 나는 본래 근무지였던 영일군청 산업과 농산계로 다시 돌아와 `경지정리사업` 업무를 맡았다. 일제가 수탈의 목적으로 추진하던 농지구획정리사업이 해방 이후 20여 년간은 농업용수 확보에 밀려 침체되었다가 1963년 10월에 와서 다시 추진된 업무였다.오천면이 당시 농지개량사업 시범지구로 지정되었는데, 현재의 용덕네거리에서 냉천 쪽에 위치한 3천여 평이 그 대상지였다. 시범지구에서는 주로 용수로와 환지, 농로 조성방법 등 경지정리사업의 기법을 가르쳤고, 그 결과가 경북도 농지개량사업의 기본이 됐다. 이 일로 농지수리조합이 농지개량조합으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포항에서는 이전에도 농지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된 적이 있었다. 1920년대 일제가 농지개혁의 미명하에 경북에서 이 사업을 최초로 벌였는데, 연일들, 즉 `어미들`에서 그 작업이 벌어졌다. 사업이 마무리되자 어미들은 용수확보가 쉬워져 농사가 잘됐다.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 이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일제의 수탈은 어미들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첫 시작은 누구에게나 혹독한 법, 당시 포항 농민들이 겪었을 아픔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포항이 일제의 농지구획정리나 1960년대 경지정리사업의 최초가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포항은 수도작(水稻作)에 필요한 강우량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저 수준으로 연간 평균 강우량이 1천여㎜에 불과해 타 지역의 1천200여㎜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경지정리사업 등에서 늘 시범, 아니면 최초 지역으로 이름을 올렸다.포항에 산림녹화사업인 사방시업이 시행되고 사방공원이 생긴 이유도 강우량과 무관하지 않다. 수자원 관계자들은 나무를 `워터 바킷`(Water Bucket : 물 양동이)으로 부른다. 물을 많이 저장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는 논리다. 강우량이 부족한 포항은 사방사업의 대표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가뭄 등 기후환경 탓에 포항은 조선시대부터 기우제가 가장 많았던 지역으로 꼽힌다. 기우제는 반드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3대 명산에서만 지냈는데, 비학산, 형산, 운제산이 그곳이었다. 당시 포항에는 `명산에 묘지를 쓰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속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실제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명산에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명산에 묘가 있으면 이를 파헤치기 일쑤였다. 또 묘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집단적인 체형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195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어 왔으나, 식량증산계획이 시작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포항은 2000년대 들어 형산강 정비 사업이 이루어지고, 임하댐 물이 공급되면서 그제야 물 걱정에서 벗어났다.1960년대 영일군에서 추진했던 경지정리사업은 이후 여러 변화를 몰고 왔다. 원래 풍부한 일조량에다 편리해진 작업, 그리고 물 관리 향상에 따른 풍부해진 용수, 여기에 통풍까지 향상되어 그 전에는 포기당 벼 알이 평균 60여개 달렸으나 이후에는 많게는 100개까지 달리는 등 평균 30%정도의 식량증산을 이룰 수 있었다.밤낮을 가리지 않고 젊음과 열정을 온전히 던졌던 식량증산계획의 결실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실제로 나는 이후 공직생활에서 일궈 낸 그 어떤 성과보다도 보릿고개를 넘어 우리나라의 식량자급자족에 조그마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14-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