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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발굴

등록일 2015-01-05 02:01 게재일 2015-01-0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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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신 로타리코리아 상임고문

월성은 2천년 역사를 지킨 경주인의 자존심이 서린 곳이다.

월성을 중심으로 경주엔 국가 지정 문화재만 205건으로 우리나라 전체문화재의 70%가 존재하는 곳이며 도심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적 유적 도시이다. 경주의 땅은 원삼국시대 이전 유적부터 층층이 잠자는 곳이다.

더욱이 월성은 세계 역사에서 찾을 수 없는 천년 왕궁이 있었던 자리다.

토성 속에서 어떤 문화재가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으나 실크로드를 오간 신라인들이 남긴 호사스럽고 예술미가 극에 이른 생활유물들이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또 성덕대왕신종에 돋을새김으로 남긴 일승(一乘)원음의 정신세계를 뒷받침하는 유적들이 나올 수 있어 관심이 집중될 지역이다.

지금은 옮겨갔지만 월성 가운데쯤 숭신전이 있을 땐 숲과 골기와 집 전각을 지나 석빙고 안압지(옛지명), 귀정문으로 내려오는 길은 최고의 이야기 길이자 답사코스여서 천 번은 더 오르고 내린 길이다.

이 월성이 앞으로 10년간에 걸쳐 발굴된다. 문화재청이 지난달 12일 고유제를 올리고 예산 500억원이 들어가는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1970년대 경주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천마총과 황남대총, 안압지, 황남동 일원의 발굴조사에 이어 황룡사 발굴을 뛰어넘는 대규모 조사다.

문화재 당국은 발굴조사에 앞서 전자탐지기로 월성 일대를 조사해보니 곳곳에서 건물 구조 흔적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흔적을 중심으로 트렌치를 넣어 유구를 찾아내고 실측, 유물 수습, 복원과정을 거친다.

월성은 토성이지만 성의 뼈대는 돌로 쌓여져 있다.

파사왕 기록을 보면 홍수로 서쪽 성의 일부가 훼손되자 남천바닥의 돌로 성의 기초 즉 토성의 심으로 삼았다. 월성은 남천, 북천의 바닥돌과 남산에서 옮겨온 돌로 기초를 만들고 흙을 덮는 고난도의 축성(築城)기술이 동원 됐다.

필자가 문화방송 기자로 신라 통나무배와 금관 등을 특종보도를 했던 1970년대 경주는 미추왕, 내물왕, 황남대총과 천마총 가는 길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미나리 밭, 호박이 달린 채소밭이었다.

현재 복원된 월정교에서 반월성으로 오르는 귀정문은 신라당시부터 유명했다. 차(茶) 통을 등에 짊어진 충담사가 귀정문을 통해 궁성으로 들어와 경덕왕에게 저 유명한 향가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70년대 경주문화를 이끌었던 윤경렬, 박지홍, 최남주 선생이 신라 천년의 흥망을 지켜본 귀정문에서 제1회 신라문화제 서제를 올려 후생(後生)의 도를 세운 곳이기도 하다.

명주실 한 방구리가 들어간다는 숭신전 석정(石井)의 전설로 겁먹은 소년들은 그믐밤엔 접근조차 못했던 신비스런 곳이다.

월성에 올라 경주를 바라보면 신라 왕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돌아서면 불국토로 가는 기와집 길이 들어서고 옆으로 서면 남산으로 가는 월정교와 해자(垓字)가 된 가로막는 지형이다.

문천엔 원효와 요석공주, 김유신을 사랑한 천관녀의 얘기가 있고 김유신의 두 누이였던 문희 보희가 꿈을 사고 팔았던 전설의 집터가 월성 언저리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가야에서 서라벌로 온 탈해(4대)가 숯덩이를 미리 묻어두고 호족에게 뺏은 명당자리가 월성이다. 파사왕이 왕궁을 지어 들어왔고 경순왕 9년 신라가 망할 때까지 천 년 간의 수도요, 왕궁이었다.

경주는 어설픈 발굴로 출토당시대로 보존되지 못한 뼈아픈 과거사도 간직하고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주령구를 불태우고 햇빛을 보는 순간 칠기의 그림이 날아가 버리는 등 그동안의 발굴조사를 보듯이 잘못된 발굴은 되돌릴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며 바로 멀쩡한 문화재를 파괴하는 현장이 된다. 일본은 나라시대 왕궁을 50년을 조사하고서도 아직 반밖에 하지 못한 조사과정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중국 역시 신중에 생명을 건 병마용 조사도 그렇다. 땅 밑에서 어떤 문화재가 출토될 지를 모르는 상황이다. 완벽한 기술이 없으면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늦추는 것도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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