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수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
1960년대만 해도 대다수 사람들은 라디오가 세상의 소식을 접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물론 신문과 TV가 있었지만 보급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라디오는 보물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라디오에 대한 추억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PR`(Public Relation)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시기가 5·16군사정부를 전후해서다. PR은 기관·단체·기업 등이 대중의 이해와 협력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표와 의지, 즉 의사전달의 수단으로서 선전·설득하는 행위로 정의되는데, 대중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군사정부는 자신들의 혁명 공약 등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성이 많았다. 실제 군사정부는 가장 먼저 전국의 각 시·군에 `공보실장`이라는 직제를 새롭게 만들었다. 영일군에는 포항고 4회 출신인 이상원 전 상공부 국장이 초대공보실장으로 임명됐다. 또한 `행정방송`이라는 것을 실시하였다. 경상북도에서는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라디오를 통하여 각종 행정사항을 각 시·군에 전파하였고, 각 시·군에서는 이 방송내용을 타자수가 타이핑하여, 이를 공문으로 만들어 각 읍·면·동으로 하달하였는데, 이를 이른바 `행정방송`이라 했다.
행정방송은 오늘날 세계 굴지의 기업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는, 뜻밖의 결과를 낳는다. 당시 금성사에서는 3천여 대의 라디오를 생산했으나 판매가 어려워 부도직전에 몰렸는데, 군사정부가 행정방송을 목적으로 이를 대량으로 구매해 각 시·군으로 내려 보냈다. 이로 인해 부도위기에 몰렸던 금성사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정부내에서는 잘 알려진 일화다. 군사정부는 처음에는 국영방송이었던 KBS를 통해 방송차량을 이용한 이동방송국을 운영했으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자 아예 행정방송을 만들어 정권 옹호 수단으로 활용했다. 목적이야 어떻든 간에 이는 결과적으로 오늘날 방송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포항에도 행정방송이 태동하기 이전부터 KBS이동방송국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공보부 소속이었던 KBS는 방송차량에 장비를 싣고 방송국이 없는 지역들을 돌며 방송 서비스에 나섰는데, 1957년 10월 그 중 한 대가 포항초등학교에 자리를 틀면서 포항방송국이 태동하게 됐다. 신기한 라디오방송 현장을 구경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보기 위해 방송차량 주변은 늘 구경꾼들로 넘쳤다고 한다.
그 이듬해인 1958년 이동방송차량이 철수하고, 포항 동빈동 한 건물에 방송장비를 설치한 후 정규방송을 시작했으며, 1961년 6월 포항시 덕산동 소재 2층 건물 포항교육청에 세를 들면서 마침내 정식방송국으로 승격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개국 당시의 출력이 250W에 불과해 야간에는 흥해에서도 청취가 불가능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포항방송국 초창기부터 아나운서로 입사해 13년 넘게 재직했고, KBS대구방송총국 편성제장국장을 마지막으로 퇴임한 후 아직도 KBS포항방송국 출신들의 친목모임을 이끌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최규열 회장은 포항방송국 태동과 발전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팔순을 앞두고 있는 내 인생에서 포항방송국을 빼고는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포항방송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최 회장은 개국 당시부터 스타 아나운서로 명성을 얻었으며, 향토방송인 출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최 회장에 의하면 포항방송국은 개국 당시 국장, 방송과장, 기술과장 등 13명의 직원이 전부였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미니 방송국에 불과했지만 당시로는 첨단시설이었고, 아나운서들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1960~1970년대 그가 맡았던 `직장대항 노래자랑` `해병의 밤` `농어민의 시간` `방송백과(문화, 경제, 산업, 체육 등을 다룸)` 등의 프로그램 역시 인기가 많았다고 전했다.
또한 지금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지만 국영방송국이었던 탓에 당시 방송국 청사에는 `합심하여 이룬 혁명 단결하여 완수하자` `반공으로 국가통일 재건으로 혁명완수` 등의 군사정부 구호가 걸려 있었다고 했다. 방송사정이 이렇다보니 갖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신청곡과 사연을 엽서에 적어 보내면 노래를 들려주는 `노래의 꽃다발`이라는 인기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돈을 빌려주지 않거나 데이트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녀 간의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사연을 소개해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여기에 1971년경 모 전국구 국회의원은 차기 지역구 출마를 계획했는데, 조항산 중계소 준공기념식에 자신이 예상하는 정적을 단상으로 모신 것에 불만을 품고 국장실에서 책상을 치며 소동을 일으켰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그에게 10분간의 의정보고 방송시간을 할애하는 해프닝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포항방송국은 이동방송국에서 동시에 정식방송국으로 승격됐던 속초·여수·포항방송국 중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다. 속초와 여수방송국은 지난 2004년 지역방송국 기능이 조정되면서 문을 닫았다. 우여곡절 끝에 오늘의 터를 닦은 포항방송국이 더 큰 발전을 이뤄 지역을 선도하는 국영방송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