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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비행장 그리고 포도밭

등록일 2014-09-04 02:01 게재일 2014-09-04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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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수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

포항은 울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주도한 대표적인 도시다. 국가기간산업인 철강을 생산하며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성장을 견인했고, 근면·자조·자립정신의 새마을운동을 일으켜 근대화의 정신적 토대까지 마련한 도시다. 지역사회 원로이면서 현재는 해맞이회장으로 활동하는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로부터 포항의 현대화 과정에서 있었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시리즈로 싣는다.

<편집자 주>

외지인들은 포항하면 가장 먼저 포항제철소를 떠올린다. 실제로도 포항제철소가 포항 근대화의 주연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포항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하는데 단초와 기반이 된 조연들도 여러 있다. 그 중 하나가 오천비행장이다.

현 포항공항의 전신인 오천비행장은 1943년 9월 영일군 오천면 일월동에 건설됐다. 당시 일월동을 비롯해 비행장 인근의 도구와 청림동 등이 모두 행정구역상 오천면에 속했기 때문에 아마 오천비행장으로 명명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용도는 일제의 군용비행장이었다. 누가 만들었던 간에 이로써 포항은 땅과 바다와 하늘 길을 모두 가지게 됐다.

일제의 징용에 의해 끌려와 비행장 건설에 투입된 인력은 현장을 관리·감독했던 일본군들로부터 혹독한 노동을 독려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치 노예처럼…. 타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 해외 전쟁터 등으로 징용돼 많은 희생을 치렀던 반면에 포항사람들은 대부분 비행장 건설에 징용되어 상대적으로 희생이 적었던 것은 이런 배경이 자리한다. 오천비행장이 건설된 지역은 원래 동양 최대의 포도밭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현재의 해병사단 내에 있는 일월지와 골프장 일대, 청림동 해병숙소 일대, 그리고 동해 도구에 이르기까지 `삼륜(三輪)포도원`이 광활하게 자리했다. 이 포도원은 우리나라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된, 이른바 식민지 착취기관인 일제의 동양척식회사가 1914년 5만여 평의 국유지를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분양하면서 만들어졌다. 이 포도원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영일군사(史)는 1934년 당시 이 포도원의 면적이 자그마치 60여만 평에 달해 동양 최대 규모의 포도농장이었으며, 한국인 인부도 연간 3만2천여 명이 동원되어 포도농사를 지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 포도원에서 생산된 포도주는 동양 최고의 포도주로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또 이 포도원은 포항지역 농업이 그전까지는 대부분 품앗이, 두레 등 전통방식과 영세규모로 이루어졌던 것과 달리 비교적 큰 규모의 공동작업장을 갖추는 등 농장 형태의 첫 사례로 꼽힌다. 특히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탄생시킨 곳으로도 더욱 유명하다.

이 포도원이 비행장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부터다. 일제가 이 포도밭에 군용비행장인 오천비행장을 건설하면서 포도밭은 점차 잠식되기 시작했다. 그 후 6.25전쟁을 거치고, 우리나라 해병대 기지와 골프장 등이 들어서면서 포도밭은 거의 사라졌다. 필자가 1963년 오천면사무소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천비행장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전하면서 일본과의 인연을 마감한다. 포도밭과 비행장, 이 둘은 지역에서 일제의 수탈과 만행을 보여주는 아픈 역사를 가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오천비행장은 군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이다. 만약에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오천비행장을 점령하게 되었다면 미군의 전투기가 뜨지 못하고, 군수품이 제대로 보급되지 못하여, 특히 동해안 지역의 작전수행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세기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도 오천비행장과 인연이 깊다. 그녀는 휴전 이후인 1954년 2월 인덕산 중턱에서 1만여 명이 넘는 미 해병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오천비행장에 내렸다. 오천비행장은 오늘의 포항공항으로까지 발전하기에는 숱한 영욕을 함께 했다.

오천비행장이란 존재로 인해 해방 이후 미군이 포항에 용이하게 주둔할 수 있었고, 6.25전쟁 때는 미 해병1사단이, 그 이후에는 우리의 해병대가 터전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군과 해병대의 주둔이 지역경제에 큰 도움을 주게 된 것도 결국은 오천비행장의 덕이라 볼 수 있다.

어쩌면 포항지도를 확 바꾼 포스코가 포항에 둥지를 틀 수 있었던 이면에는 포항공항의 존재 사실도 한 몫 했다 할 수 있다. 오천비행장이 포항공항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돌아보면 군사시설을 넘어 지역경제의 디딤돌 역할을 했음을 회고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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