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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넘긴 식량증산 계획

등록일 2014-09-11 02:01 게재일 2014-09-11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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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이석수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2)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

나는 1963년 4월 15일 공무원으로 영일군 오천면 지방농업기원보(현9급)로 첫 발령을 받았다. 그해 3월에 있었던 지방공무원채용시험에서 행정직 일등으로 합격했지만 농업직으로 전직이 되었다.

요즘 세대는 상상조차 어렵겠지만 당시는 국민들의 먹거리 해결이 가장 큰 국정과제였다. 5·16군사정부는 `보릿고개`를 넘어 국민생활의 기본이 되는 먹거리 자급자족을 위해 식량증산에 팔을 걷어야했다. 이런 연유로 식량증산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이 계획은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함께 우리나라의 빈곤 퇴치와 극복을 위한 양대 산맥과 같은 계획이었다.

식량증산에 대한 군사정부의 의지가 워낙 강하다보니 관련부처 장관부터 도지사, 시장과 군수, 읍면동장은 물론 농업관련 기관과 부서에서는 전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오천면은 영일군청으로부터 각종 식량작물의 생산목표를 부여받았고, 이를 다시 리동별 목표로 하달하였다.

하지만 각종 수치에 오류가 많았다. 또 당시 농촌지도소 밑에 3~4개 읍·면 단위로 농촌지도소 지소가 막 생겨났는데, 생산증대를 위한답시고 미숙한 영농기술을 마구잡이로 보급하다보니 막상 생산현장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 비일비재로 일어났다. 이는 당시의 행정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나는 오천면에서 식량증산계획을 담당했는데, 상업계 학교를 졸업한 탓에 주산과 부기, 타자에서 모두 4급 수준이어서 각종 수치의 오류들을 수정하며 시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내가 혼신을 다해 마련했던 오천면 식량증산계획은 영일군 12개 읍면동에서 1위를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나는 이 일로 영일군청 식량증산계획 실무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영일군에서 세운 식량증산계획이 경북도에서 다시 1등을 차지하게 되어 나는 경북도청 농정과로 차출됐다. 근무처는 영일군이었으나 일은 경상북도에서 식량증산계획을 담당했다.

나는 공무원 초임시절의 대부분을 식량증산 업무에 매달렸다. 다시 말해 내 젊음을 국민의 먹거리 해결을 위해 최대 국정과제였던 식량증산에 고스란히 투자했던 것이다. 내가 맡은 경북도 식량증산계획은 전국에서 또 다시 2등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도청 차출 1년 만에 이룬 결과였다. 이후 나는 본래 근무지였던 영일군청 산업과 농산계로 다시 돌아와 `경지정리사업` 업무를 맡았다. 일제가 수탈의 목적으로 추진하던 농지구획정리사업이 해방 이후 20여 년간은 농업용수 확보에 밀려 침체되었다가 1963년 10월에 와서 다시 추진된 업무였다.

오천면이 당시 농지개량사업 시범지구로 지정되었는데, 현재의 용덕네거리에서 냉천 쪽에 위치한 3천여 평이 그 대상지였다. 시범지구에서는 주로 용수로와 환지, 농로 조성방법 등 경지정리사업의 기법을 가르쳤고, 그 결과가 경북도 농지개량사업의 기본이 됐다. 이 일로 농지수리조합이 농지개량조합으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

포항에서는 이전에도 농지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된 적이 있었다. 1920년대 일제가 농지개혁의 미명하에 경북에서 이 사업을 최초로 벌였는데, 연일들, 즉 `어미들`에서 그 작업이 벌어졌다. 사업이 마무리되자 어미들은 용수확보가 쉬워져 농사가 잘됐다.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 이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일제의 수탈은 어미들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첫 시작은 누구에게나 혹독한 법, 당시 포항 농민들이 겪었을 아픔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포항이 일제의 농지구획정리나 1960년대 경지정리사업의 최초가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포항은 수도작(水稻作)에 필요한 강우량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저 수준으로 연간 평균 강우량이 1천여㎜에 불과해 타 지역의 1천200여㎜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경지정리사업 등에서 늘 시범, 아니면 최초 지역으로 이름을 올렸다.

포항에 산림녹화사업인 사방시업이 시행되고 사방공원이 생긴 이유도 강우량과 무관하지 않다. 수자원 관계자들은 나무를 `워터 바킷`(Water Bucket : 물 양동이)으로 부른다. 물을 많이 저장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는 논리다. 강우량이 부족한 포항은 사방사업의 대표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뭄 등 기후환경 탓에 포항은 조선시대부터 기우제가 가장 많았던 지역으로 꼽힌다. 기우제는 반드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3대 명산에서만 지냈는데, 비학산, 형산, 운제산이 그곳이었다. 당시 포항에는 `명산에 묘지를 쓰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속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실제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명산에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명산에 묘가 있으면 이를 파헤치기 일쑤였다. 또 묘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집단적인 체형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195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어 왔으나, 식량증산계획이 시작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포항은 2000년대 들어 형산강 정비 사업이 이루어지고, 임하댐 물이 공급되면서 그제야 물 걱정에서 벗어났다.

1960년대 영일군에서 추진했던 경지정리사업은 이후 여러 변화를 몰고 왔다. 원래 풍부한 일조량에다 편리해진 작업, 그리고 물 관리 향상에 따른 풍부해진 용수, 여기에 통풍까지 향상되어 그 전에는 포기당 벼 알이 평균 60여개 달렸으나 이후에는 많게는 100개까지 달리는 등 평균 30%정도의 식량증산을 이룰 수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젊음과 열정을 온전히 던졌던 식량증산계획의 결실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실제로 나는 이후 공직생활에서 일궈 낸 그 어떤 성과보다도 보릿고개를 넘어 우리나라의 식량자급자족에 조그마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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