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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동물의 권리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동물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권리를 동물권이라 한다면 현실에서 그것은 너무나 열악하다. 동물은 인간의 요리 접시에 먹음직하게 담기거나 곡마단에서 인간의 눈요기를 위해 매를 맞으면서 훈련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세상에 존재할 섭리가 있듯이 동물과 작은 풀꽃 등 모든 생물은 우주에서 자신의 본성대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구제역과 조류 독감 등으로 생매장되거나 살 처분된 생명은 무려 2천800만 마리 정도란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불평등과 착취도 문제이지만 인간과 동물간의 불평등은 점점 더 커져서 심각해지고 있다.조류 독감이 발생하면 발생 농가 3km반경 사이의 모든 가금류를 `살 처분`하는 것을 잔인하게 표현하면 `몰살`시키는 것이다. 독가스로 죽여서 집단으로 매장하는 것은 야만적인 동물 대 학살극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의 비윤리적 반생명적인 정책으로 여겨지기에 그것은 우리들 마음에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기고 있다.인간은 자기들의 예리한 두뇌를 이용해 질병을 방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세균들은 그보다 수 백 배 더 빨리 증식하거나 변종을 함으로서 인간을 비웃고 있다.동물 농장 TV프로그램에서는 인간의 성격에서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동물을 살리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데 반해 어떤 악한 자들은 심하게 학대하거나 괴롭히면서 즐기는 정신병적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았다.동물도 자연 치유력이 있지만 대기업 형 축산은 저항력을 키우는 기회를 동물에게 주지 않고 허약하게 키운다. 닭은 태어나자 말자 A4용지 크기의 면적에서 날개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바비큐나 닭갈비가 되어 죽을 뿐이다. 겨우 6개월 남짓 분뇨 옆에서 살다가 죽는 돼지 역시, 사회성이 강하고 실은 매우 깨끗한 곳을 좋아한다.대기업 형 축산의 본질은 `가축이란 정신적 감정적인 면이나 또는 모성 등의 다양한 본성이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오직 경제적 가치로만 판단해 버린다. 가축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다. 순수하여 오히려 인간이 그들에게서 순진성을 배워야 한다.유럽에서는 이미 가축이 비록 식탁용일지라도 `생명이 갖는 최소한의 복지와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 그 걸음은 동물을 인간과 같이 지각과 감각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영국농장동물복지위원회는 가축들이 살아가는 데는 첫째,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자유, 둘째, 불편함으로부터 자유, 셋째, 고통과 질병에서 자유, 넷째, 움직일 수 있는 자유, 다섯째, 공포와 불안에서 자유 등 5가지 자유를 주장했다. 또 동물 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정책이나 법 또는 제도개선도 중요하지만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그 해결 방법으로는 첫째, 채식을 하거나, 육식을 줄인다, 둘째, 동물복지가 인증된 축산물을 구입한다, 셋째,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은 화장품이나 생활용품을 구매한다, 넷째, 곰 쓸개즙 등 동물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는 과도한 보양문화를 없애자, 다섯째, 동물 쇼를 관람하지 않고, 모피나 오리털 제품을 구입하지말자 등이다. 이것들은 동물복지의 근간이 된다. 생태계에서 불균형과 부조화로 인해 재앙이 발생하면 가장 큰 피해는 바로 우리 인간이 받는다.정부는 녹색 성장이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이는 환경과 생태를 경제적 성장(가치) 밑에 두는 잘못을 저질러 버렸다. 생명존중과 생태조화를 통해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이 모두 행복하게 공존 할 수 있는 진정한 녹색성장 정치가 필요하다. 그런 곳이 곧 천당이다.

2014-03-14

가축의 생존권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의 서울 촛불시위는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요구에서 시작해 국민의 생명과 건강권, 검역주권, 거기서 정치적 자유까지 시위 주제가 점차 커져 나갔다. 1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300만명이 거리 시위에 나섰다. 근래 우리는 자주 광우병, 신종 플루, 조류 독감, 구제역 등의 사태를 겪어왔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가축을 소비하는 문제가 먹을거리의 안전문제에 그치지 않고, 질병이 전파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과거에는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사람은 부자나 고위층 몇몇에 불과했을 뿐 보통은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허덕였다. 그러나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로 농업과 축산업은 눈부시게 발전하여서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고기도 이제는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다.현재 세계의 가축 수는 인구의 약 10배 정도인 600억 마리로 추정한다. 1960년에 비해 2007년에는 인구는 2배 증가했지만 고기 소비는 4배 증가했다. 우리나라도 1970년에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5.2kg의 고기를 먹었으나 2010년에는 41.1kg으로 소비량이 무려 8배나 늘었다. 미국인들은 2007년에 1인당 127kg을 소비했다.문제는 고기를 많이 먹는 이면에는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다. 육류의 지나친 섭취로 비만을 비롯해 심장발작, 암, 당뇨병 등이 불어났다. 또 대량소비를 위해 이윤을 추구하는 거대 다국적 농축산 기업이 생겨나서, 곡물, 가축, 사료와 가공식품의 생산, 유통, 소비까지 모두 장악하여 막대한 수입을 올린다. 근래에는 축산업을 위하는 화학비료, 농약, 유전자 조작 사료, 항생제 등의 생산 공장도 활력을 갖고 있다.축산업 책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다.“닭으로 만드는 요리가 많은 우리나라는 닭고기 소비가 많다. 소비를 충족하기 위해 3마리가 살 공간에 10마리의 닭을 키우고 있다”1970년에 비해 2010년에는 닭고기 소비가 7배나 늘었다.삼겹살도 1970년에 2.6kg를 소비했는데 2010년에는 19.1kg로 40년간 7배가 늘었다. 서로 젖 물려고 상처내고 공격하기 때문에 새끼 때 송곳니를 자르고, 꼬리도 자른다.살코기 속에 지방이 촘촘히 박혀 있어야 맛이 좋은 쇠고기라고 한다. 송아지로 도축되는 놈은 태어나자마자 나무로 된 사육 상자에 갇혀서 150~200kg으로 겨우 6개월을 산다. 육성우는 280kg까지 12개월이다. 비육우는 꽃 등심 만드는 단계로 16~20개월 키운다. 한국은 24~30개월간 600kg까지 2~3년 남짓이 일생 전부이다. 또 빨리 살찌우고 더 많은 우유를 위해 초식동물인 소에게 동물사료를 먹인다고 했다.그러나 근래 선진국에서는 가축의 여러 잔인한 사육에 대해 성찰이 일어났고, 가축의 복지 문제가 사회의 화두가 됐다. 1964년 영국 해리슨은 `동물들을 감각을 가진 생물로 인정하지 않고 기계로 취급하는 공장식 축산방식의 잔인성을 고발했다. 1975년 피터 싱어는 동물차별을 반대했고, 이후 1990년대 말까지 거대 기업형 축산업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유럽 연합은 2006년에 가축사료에 항생제 섞는 것을 금지시키고 2008년에는 생 후 8주 이상 송아지는 폐쇄식 우리에서 사육을 금했으며 2012년에는 산란계의 케이지 사육을 금했다. 2013년에는 돼지가 임신 중일 때는 비좁은 틀에 가둬서 사육하는 것을 금했다.인류의 역사는 노예제도, 인종차별, 여성차별 등을 철폐하면서 도덕적으로 끊임없이 진보해 왔다. 이제는 동물의 생존권 문제에까지도 인간은 염두에 둬야 한다. 동물을 잔혹하게 학대하는 축산 방식을 규제하는 것은 인간이 그만큼 더 윤리적으로 성숙해 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2014-03-07

지속 가능한 환경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오늘날은 정부가 국가정책을 일방적으로 주도해 관리하기에는 사회의 다양성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사회의 단체들과 협동하는 체제의 구축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이 조건에 부응하는 방법으로 공공문제를 해결할 때 국민을 참여케 하는 방법이 있다. 이른바 `거버넌스`이론을 도입하려는 운동이 환경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내년에 열리는 `제 7차 세계 물 포럼`이 그것으로 주최하는 지방의 당사자들 준비 총회가 지금 경주에서 열리고 있다. 이 단체는 더 좋은 지구의 환경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려고 노력하는 국제기구이다. 환경운동 단체는 공기나 물, 또는 교통 문제를 다루어 왔지만 이제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나 경제, 사회의 모든 것을 다루려 하고 있다. 이 포럼 역시 환경보전 운동에서 시작하였으나 환경과 관계가 깊은 경제 발전, 사회 통합 등의 문제에서도 갈등을 극복하여 협력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운동영역을 넓혔다.한국에서는 과거 1980년대까지는 반 독제 민중 운동이 일어났고 그 후 많은 NGO가 결성되었다. 그래서 1990년대에는 한국에서 시민운동이 새로운 분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92년 리우회의에서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의 비정부 조직들이 참여하여 그들 운동의 활동 내용과 이때 발생하는 쟁점 등을 분석한 후 새로운 메시지를 제시해 주었다.리우회의의 주제인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협력사회로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방향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놓았다. 그래서 경제 발전과 사회 통합, 환경 보전을 동시에 추구하려고 접근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을 목표로 하였다.이제까지 이 운동은 주로 환경문제 해결에 집중되어서 마을 가꾸기나 하천 살리기 등을 했었으나 그 후 자연적으로 식단문제, 경제 문제, 더 나아가 에너지 대책, 기후 변화 대응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쟁점과 분야로도 활동을 확장했다. 이로서 많은 이해 당사자들이 환경 친화적 생활과 지속가능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제도적 발판을 만들었다.지구환경 보전 활동을 하기에는 지역단위가 적당한 크기이며 지방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2002년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지역의 행동이 세계를 움직인다. 지역은 지속가능발전의 이상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현장`이라고 국제적으로도 인정했다.올해 민선 6기의 선거는 지역별로 미래상이 제시될 것임으로 이러한 활동의 중요한 시점이 될 것이다. 후보자들은 저탄소 도시, 생물 다양성 도시, 효율적 자원 운용 도시, 녹색 도시경제,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는 방법 등을 내세우면서 자기주장을 내세울 것이다. 이런 공약을 서로 견주어 보고 질문해 보아서 그 지역의 발전에 제일 도움이 될 자를 선택하는 절호의 기회이다. 이런 활동의 결과물을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에 반영시킨다면 지방 정치를 몇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오늘날 한국에서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공동체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할 수 있는 요인으로는 근대적 발전 이념인 국가주의, 성장주의의 부정적 영향이다. 지난 근대화 과정을 이끌었던 국가 주도의 총량적 성장체제, 즉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와 성장제일주의가 만들어 낸 가치와 제도의 잔재들은 아직도 국가나 지방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또 대표자가 자기의 사익을 추구하거나 정당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략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지속가능성에 대한 시민의 바람을 흩뜨리게 할 수 있다.이런 점을 극복하려면 권력의 정당성 강화와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참여의 증대, 다원적 가치 보존, 지방에서 공론장의 활성화 등의 분야를 강화해야 한다. 지금 이런 것은 환경 분야의 활동에서 시작되고 있다.

2014-02-28

부부, 사랑의 승화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평범한 두 남녀 간의 사랑을 우리는 애정, 또는 에로스라고 부른다. 이는 그들 둘만의 문제로서 서로만을 좋아한다. 에로스는 자기 몸이 상대에게 포박당하여 스스로가 그의 소유로 되기를 자원한다. 또 다른 이성에게 에로스를 갖는 것에 관심이 없어진다. 애정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공개될 수 없는 공간이 형성된다. 두 사람 사이에만 사용되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버린다. 만일 내가 이성(異性) 2명과 동시에 애정을 쏟는다면 나를`애정을 줄줄 흘리는 사람` 또는 `저급한 인간`으로 매도하면서 나와의 애정을 실망해 버릴 것이다.연애란 애정 관리의 초기 단계이다. 애정에서 최후의 목표는 자식을 갖는 것이다. 성욕이 개입한다. 처음에는 살짝 머리를 들어 밀다가 애정이 익어갈수록 성관계 갖기를 점점 더 바란다. 성욕은 지구를 끌고 가는 기본 힘이며 인류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사춘기의 넘치는 열정은`나의 몸이 자식을 만들어 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육체의 호소이다. 원초적인 본능의 소산이다.사랑하던 두 사람이 마음에 결심을 하면 결혼한다. 결혼은 `내가 상대의 몸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생명을 나의 후손으로 하겠다`는 것을 각오할 때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부모들 앞에서 맹세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다. 남녀가 자식을 낳을 수 있을 조건이 이루어 져야만 임신이 가능한 부부관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처녀 총각 시절에는 결혼이란 세상살이를`스피드를 즐기면서 달리는 드라이브`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혼 후 살아가는 과정은 녹녹치 않다. 온통 자갈밭이고 때로는 큰물이 일어나서 길이 푹 파이기도 한다. 또는 결혼을 항해에 비견하기도 한다. 둘은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에 노를 저어 떠나려고 무서움 없이 도전한다. 비바람이 치는 바다를 둘이서 노 하나에 의지하여 용기 있게 나아간다. 그러는 중에 서로는 방향에 대해 많이 다투기도 한다.결혼 생활은 행복을 느끼는 중에도 수많은 갈등과 희열, 고통과 기쁨, 믿음과 의심을 양산하면서 지루하게 지속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삶의 내용은 어려움과 사랑, 오해와 용서가 서서히 섞이고 농축되면서 푸른 과일이 노랗게 변하듯 점차 생활이 익어간다.그럭저럭 인생은 흘러가고 자식은 사춘기를 거친다. 그 후 흐르는 세월은 손자를 보게 하고 분가한 자식에게서 좋지 않는 소식이 가끔 들려오곤 한다. 가슴이 철렁거리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자식의 전화를 받는다.평범한 부부에게는 처음에 가졌던 에로스가 어느새 날아가 버리고 덤덤하게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가 문제가 일어나면 언제나 상의하기 위해 `여보~!`를 점점 더 많이 찾게 된다. 이때쯤에야 비로소 또 다른 사랑의 씨가 맺힌다. 둘만의 사랑에서 관심의 폭이 더 넓어진다. 예리함보다는 감싸 안는 자세로 이웃의 문제에도 점차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사랑을 아가페라고 한다. 이제는 부부가 서로를 아끼게 된다.살면서 `사랑을 확대하느냐, 또는 못하느냐?` 하는 것은`그의 결혼 생활의 결과가 어떠하냐?`하는 것에 달려 있다. 조금이라도 확대할 수 있다면 그는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한 것이다. 일반 사람이 에로스에서 아가페로 가는 과정은 이렇게도 긴 시간이 걸리고 어렵다. 성공적인 에로스는 늦게라도 아가페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그러나 요즈음에는 미혼모가 불어나고 있다. 내가 청소년이었던 시절 때만 해도 출산은 결혼과 동일하게 취급하였으나 지금의 풍속은 성교란 기쁨을 표현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하기야 의술의 발달로 인체 문제의 대부분은 처리될 수 있으니까!

2014-02-21

발의 노고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사람이 걸으면 발바닥은 체중으로 짓이겨 진다. 60kg의 체중이라면 땅에 닿는 발바닥은 걸을 때는 1.3배인 80kg, 뛰면 3~5배인 200kg~300kg의 압력을 받는다. 그러면 바닥 쪽의 살 속에 있던 피는 짓눌려서 위로 밀려서 올라가게 된다. 그렇게 순환을 도우므로 발을 `제2의 심장`이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적혈구가 파괴되기도 한다. 발은 눈에서 제일 먼 거리에 있고 땅과 접한 곳에 있기에 먼지 등으로 매우 쉽게 더러워진다. 사람 몸에서 제일 더러운 곳이라면 의당 손톱 밑 콧구멍 내부와 발가락 사이라고 누구나 알고 있다. 특히 발가락 사이에는 땀이 고여서 습하기 때문에 무좀이 잘 번식한다.사람들이 생업을 하거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할 때 제일 기본은 발을 이용하여 서거나 걷는 것이다. 특히 중년 이상의 나이에서는 몸 전체의 건강을 위해 체육 분야에서는 걷기 운동을 권한다. 이럴 때에도 만보 걷기는 1만 번이나 발을 사용해야 한다.발은 가장 낮은 밑바닥에서 몸의 모든 부위를 하늘로 떠받치고 있다. 거기서 신체의 다른 부위 즉, 심장이나 간, 심지어 위장안에 있는 밥까지도 안전하게 받들어 준다. 그러나 `고맙다`는 감사의 말은 들어본 적도 없고, 오히려 발을 천하게 여기고 존재하는지 관심조차 없다.직업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고된 노동 등에서 과도하게 일하고도 수입이 변변치 못하며 주로 사회에서 밑바닥 수준의 직장에서 일한다. 그러나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수고했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서 하는 일을 몸에 비견하면 발바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들이 거칠고도 험한 일을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재 외국인 근로자도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발은 아름답게 붉게 물들이는 입술이나 사랑을 받아들이는 가슴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좋은 음식의 맛을 경험하는 혀가 되고 싶기는커녕, 식당까지 가는데 인체의 무게를 지탱함으로써 남모르게 고생만 한다.그래도 발은 묵묵히 자기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면서 한 번도 서운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때로는 유리 조각을 밟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져서 고통스러워도 주인은 재수 없다고 신경질만 부린다. 발은 봉사만 하다가 일생을 마친다. 어느 의사가 쓴 글을 보면,“인간에겐 두 발이 있어어디든 가고픈 곳 갈 수 있기에얼마나 편리하고 좋은가!하지만 정작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면아름다움은 두 눈이 보고,즐거운 소리는 두 귀가 듣고,감미로운 것은 입이 맛보고,기쁨은 가슴이 느끼고,좋은 것은 두 손이 만지지만,두 발은 그런 와중에도온몸을 떠받들고 있어야 한다.쉬지 않고 지쳐가며 힘들게 걸어준두 발의 소중함도 모르면서자주 씻고 발 관리도 잘 안 해주면서퀴한 발 냄새가 난다며불만 불평을 털어놓으니어디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미안함을 표시했다.발은 손도 자주보고 깨끗이 해야 한다. 그와 같이 사회에서 제일 약하게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정부 차원에서 보호해야 한다.여유가 된다면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도 도움을 줘야 한다. 그래서 사회에서 발과 같은 역할, 전체의 밑 부분에서 기본적인 일을 하는 이들에게 한 번쯤 발의 역할을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2014-02-14

고난과 깨우침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누구나 다 그럴 것이지만 오늘까지의 나의 삶을 생각해 보면 긴장의 연속으로서 평온한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종일 허심탄회하게 살아 본 날이 며칠 되지 않은 것 같다. 성인이 된 후에 살아가는 길에는 가야할 방향표시판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매일 고난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나 스스로가 찾아 나서야 했다. 우리는 잘못하여 실수로 고난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는 고의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가끔 있다. 고난은 나의 잘못으로 자업자득으로 내가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때로는 피치 못하여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이때 사람들은 `알면서도 당했다`고 한다.그러나 단체 기합적인 성격의 고난도 있다. 아버지가 죄를 지어서 생활이 곤궁하다면 그 잘못으로 가족들이 고생할 수 있다. 군대에서는 한 사람의 잘못으로 부대 전원이 기합을 받기도 한다.때로는 내 잘못이 아니라도 이유 없이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 이웃에서 일어난 불이 나의 집을 덮치는 경우 등이다. 이때 우리는 이유도 모르게 아무 죄도 없는데 애매하게 당했다고 원망을 한다. 단지 이상할 따름이다.대속적인 고난도 있다. 어미가 자식의 미래를 위해 키우는 과정에서 받는 고난이다. 이러한 고난을 우리는 `희생한다`라고 표현한다. 나의 잘못은 없지만 나를 위한 부모의 가없는 고생이다.예수가 당한 고난도 일종의 희생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죽는 과정을 통해 전체 인류를 살리려는 것으로서 이런 고난은 일종의 신비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고난의 이유를 `사랑`때문이라 한다.통제력을 벗어난 고난도 많다. 이것이 일어나면 우리는 위기를 경험한다. 이것들에는 질병, 실패, 자녀 문제, 부도, 배신, 가정문제 등이 있고, 이때 우리는 절망, 좌절, 비난, 분노, 부정, 원망 등을 한다. 이것은 인생의 독이 된다. 그러나 이때 내가 살아온 삶을 슬퍼하지 않고 수긍하여 받아들이면 놀라운 힘이 생기는 변화가 온다. 마음이 평정해 진다.고난을 잘만 이용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단련시킬 수가 있다. 고난을 받아들이면 그 결과로 어떤 형태이든지 변화를 가져와서 인간을 깨우치게 한다. 키가 커지듯이 이로써 정신 수준을 높일 수 있다.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모두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정신력을 키워 왔다.그러나 풍부나 출세 등으로 인생을 누리기만 하는 생활이 되면 고난은 그곳을 피해 버린다. 때문에 거기서는 깨우침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델라는 토호의 아들로서 변호사로 귀하게 살 수 있었지만 자기를 독립운동에 던져 버렸다. 풍부와는 정 반대의 위치로 이동했다. 그래서 그는 국가의 독립을 가져오는 장엄한 일을 해 내었다.세상에서는 출세를 하거나 돈을 많이 벌었다면 그를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귀란 그냥 사회적 물질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일 뿐 성공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노화의 과정 또한 인생을 정리하는데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노화란 “너는 늙어서 이제는 죽음을 앞둔 연약한 존재임으로 정신 차려라”는 것을 신이 늙은이에게 가르치는 방법이다. 이 세상의 가치에 깊이 젖어버린 고령자를 흔들어 일깨우는 충격요법이다.큰일을 하면 할수록 더 심한 고난을 당하지만 그에 따라 극복의 기쁨도 더 커진다. 극복한 수준만큼 자기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된다.그러나 요즈음에는 고난의 기회가 줄어들었다. 쉽게 배부르게 먹고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으며 여흥과 유희가 점점 발전했기 때문이다.

2014-02-07

암에 대한 대처법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누구나 죽기를 싫어한다. 살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모든 관계가 단절되어 무섭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죽으면 육체와 체온은 사라져서 영원으로 옮겨지고 천길만길 낭떠러지인지 끝모를 터널인지 얼마나 깊은지를 모르는 미지의 곳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죽은 후에 예수가 살리셔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한 번 죽어보아서 무서웠는데 또다시 죽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까 그 후로는 한 번도 웃지 않았다는 농담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일생 간에 질병이나 간혹 암과 동거하면서 살아가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한다. 똑같은 `오늘`이라도 혹자에게는 태어나는 생일이 되고 누구에게는 결혼식을 올리는 기쁜 날임인 동시에 어떤 이에게는 재수 없는 장례 일자가 된다.장수 시대인 근래에는 사람들의 1/3은 암을 앓으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의과대학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죽음을 이기는 삶과 죽음에 지는 삶`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죽음에 굴복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삶을 살도록 호소했다.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암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미국의 엠디엔더슨 병원은 550개 병상에 연간 6천억원을 투자하고 1천600여명의 자원 봉사자와 1만8천700명의 직원이 일하면서 치료와 연구에 매진한단다.암은 퍼지기 전에 들어내는 것 이외에는 진행을 멈추지 않기에 완치란 없다. 단지 진행을 억제시킬 뿐이다. 암세포는 몸의 구석구석을 다니다가 여건이 되는 곳에서 증식을 하게 된다. 암 조직 1제곱센티미터에는 1조개의 암 유발체가 있단다.암이 조금 호전되는 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겸손한 사람, 믿음이 깊은 자, 반드시 살아서 할 일이 있는 자들이란다. 또 치료 효과가 비교적 좋은 자는 지방에서 사는 자, 시골인, 적게 배운 사람들이라고 한다.대성통곡을 하는 자들이나 `앞으로 얼마쯤 살까?`를 걱정하는 자는 일찍 죽는단다.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면 좋을까를 생각하는 자는 잘 견뎌 나간단다. 안 죽으려 악쓰는 자, 슬픔이나 공포에 사로잡힌 자 등은 치료가 잘 되지 않는단다. 이때는 암 대신에 죽음을 차분히 받아들이면서 생애를 뒤돌아보게 되면 삶의 질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된다고 했다.치료 과정에서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 것이 일반인들보다 더 많은 암세포를 죽일 수 있단다. 일반인 보다는 전문음악가나 성가대원에게서 면역세포 수치가 200배~1천배 높았단다. 찬양대원이 합창하면 입 안에 병과 싸우는 면역 단백질이 240% 증가했단다. 또 좋아하는 음악을 감상하거나 노래를 부를 때 환자의 통증이 줄어든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는 우리가 건강한 생활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암 등으로 허약해져 있을 때야말로 자기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절대적인 기회가 된단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절망`이라고 했다. 소망이 없는 절망의 결과는 죽음뿐이란다. 그러나 신앙이란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희망`이라는 것이다. 즉 죽음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것이 종교이다.철학은 `참(眞)과 거짓`이란 뭔가를 묻는 것이다. 도덕은 선(善)과 악의 문제이다. 무엇을 실천했느냐의 문제이다. 그럼 신앙이란 뭔가? `생과 사(生死)의 문제`이다. 종교는 죽음을 속죄한 후 신의 나라로 가는 끝이 아닌 하나의 매듭으로 본다. 암은 죽음과 관계를 가짐으로 신의 영역이고 신비하다고 일부 과학자는 주장한다.죽음을 의식해온 사려 깊은 자는 말기가 되면 현실을 받아들여서 치료에만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죽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자식들에게 부탁한다. 잡다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 죽음에 삼켜지는 내가 아니라 죽음을 긍정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2014-01-24

빛 속으로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우리는 진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수많은 모순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가운데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여유도 없이 바쁘게 가족을 부양하고 매일 남과의 갈등으로 세파 속을 헤매게 된다. 인생의 밝은 면이라든가 진리라는 단어가 있는 줄도 모르고 허우적 거리듯이 살아간다. 앞날에 대한 전망도 지금의 삶과 마찬가지로 어두울 뿐이다.그래서 사람들은 환한 대낮인데도 빛을 느끼지 못하고 희망을 찾으려고 더듬거리면서 헤매고 있다. 이런 것은 지난날의 잘못된 경험으로 인한 선입견에 휩싸여서 전후좌우를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에 밝은 빛인 진리의 등대를 놓쳐버리고, 마치 거센 파도가 넘실거리는 컴컴한 바다 위를 통나무에 매달려서 비명을 지르면서 살아가는 모양새이다.어쩌면 우리는 진리라는 환한 빛보다 어두움에 더 친근하거나 숙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는 것에 습관이 되어있거나, 뭔가가 우리 눈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아집이나 모순된 주장, 살면서 피부로 느껴온 경험 등은 우리의 관점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뜨고도 앞을 보지 못한다.때로 우리는 지구보다 수백 배 더 큰 태양도 작은 손바닥 하나로 눈을 가려 버리거나 외면해 버릴 수 있다. 고개를 돌려 버리면 아무리 좋은 경치나 절세미녀가 있어도 볼 수가 없다. 생활 중에 진리나 정의에 벗어나서 혼란과 어리석음 등 미망에 빠지면 우리는 빛이 비취어도 깨닫지 못하고 그만 어둠에 익숙하게 된다.또 다른 이유는 우리는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빛을 등지고 살기 때문이다. 옛날 시골에서 밤에 논둑길을 걸어 갈 때 솔가지 불을 든 사람은 앞에서 걸어간다. 불을 든 자보다 앞에서 걸어가면, 자기의 그림자로 길이 컴컴해져서 발을 헛디딜 가능성이 많아진다.빛의 속성은 앞장서는 것이다. 빛은 세상 모든 것의 제일 앞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빛을 등지지 않아서 실족하지 않고 빛을 따라갈 수 있다. 어두움은 내 뒤에 있게 된다. 또한 빛은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진해진다.빛과 어두움이 정면으로 마주보면 어두움은 존재할 수 없다.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어두움을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빛은 모든 것을 보여 주면서 알게 해 준다. 자기의 위치와 외형, 주위의 사정과 넓게는 우주와 생명의 경이까지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은 `어둠`이라는 의미가 된다.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 중에서 최고의 형태는 신비를 체험하는 것이다. 신비는 만물의 조물주를 느끼게 해 준다. 눈앞에 있는 것을 잘 아는 자나 꾀뚫어 보는 자가 되면 그는 그 끝에 숨어 있는 신비까지를 볼 수 있어서 감격하게 된다. 아무리 많이 알고 재주가 있다고 해도 신비를 모르면 속속들이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깨어 있으면서 빛을 보는 자에게는 현실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경이와 신비가 합해지면 황홀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의 심장은 놀라움으로 쿵쾅 힘차게 뛴다. 그는 살아있다. 정지는 죽은 것이다. 황홀과 경이로 가슴이 뛰지 않으면 살아 있어도 산 삶이 아니다.빛은 생명과 지혜의 근원이다. 태양이 없다면 인간을 포함한 생물은 존재할 수 없다. 식물들도 태양을 향해 잎을 벌려 기뻐한다. 모두는 같은 빛의 원천아래서 살아간다.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빛으로 향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연구를 하거나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크게 보면 미래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무지는 빛 속에서도 어둠만 찾게 되지만 진리 쪽으로 바라본다면 흑암 속에서도 빛으로 향하게 된다.

2014-01-17

건강을 위한 음식 조합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19세기 중반까지도 위생의 개념이 없었다. 어느 의원에서는 산모와 애기가 많이 죽었고 어느 의원에서는 생존자가 비교적 많았다. 한 곳의 의사는 손을 씻은 후 산모를 보살폈고 다른 곳은 손을 씻지 않은 채 산모를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은 군량미가 모자라서 동물 사료용 곡물을 가축에게 주지 않고 사람이 먹었는데 결과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34%나 줄어들었단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시민들이 먹을 육류를 공급할 수 없어서 중단했다. 그 결과 순환기 계통의 병이 확실하게 줄었다. 그러나 그 후 육식을 하니까 사망률 등은 또다시 증가했단다.한국전쟁에서 300구의 전사자 유해를 부검해 본 결과 미군의 77.3%는 좁아진 심장혈관을 보였지만 한국인 군인은 모두 깨끗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런 현상을 인종적 체질의 차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한국군 중에 일부가 미군과 유사한 식사를 하니까 그들에게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오르고 동맥 경화의 조짐이 뚜렷했다고 한다.그후 연구를 계속하여 1970년에 서양의 7개국에서 식사 패턴을 분석한 결과 심장 질환과 뇌졸중은 유전이 아니고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이 일으키는 문제라고 선언했다. 완전 채식가는 1:10, 육식가의 10배나 적게 순환기 병에 걸린다고 발표했다.미국에서 1998년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채식을 한 결과 음식만으로도 막힌 혈관이 열리는 것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심장수술이나 약물치료를 받지 않고도 심장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이때쯤에는 의학에서도 순전히 채식만 하기보다는 동물성 단백질을 조금 먹는 것이 더 좋다는 의견도 조금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1990년에 질병과 식사와의 관계를 연구했고 그해 뉴욕타임즈는 이 보도를 하면서`동물성 식품을 많이 섭취할수록 심근 경색에 영향을 미치고 암 발병율은 높다. 동물성 단백질에 있는 성분의 섭취는 심근경색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등으로 음식종류와 질병이 직접으로 관련 있다는 것을 발표했다.그 이전 1917년과 1940년에 미국의 낙농업과 육류업계에서는 `동물에게 동물성 단백질을 먹이면 빨리 자란다`는 것을 발표한 이후, 사람들은 동물성 단백질을 `완전한 식품`으로 여겨 왔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 머리 속에 깊이 박혀서 오늘에 이르렀다.그러나 1960년대부터 과학자들은 동물성 단백질이 성장은 빠르게 하지만, 당뇨, 암이나 고혈압 등의 심장 질환 등을 앓게 하고, 수명을 단축한다는 실험 결과를 계속 발표해 왔다.2000년대 초까지도 일반 사람들은 자기 체중kg을 gm으로 고친 수치만큼 단백질을 먹으면 건강하다고 했다. 60kg인 사람은 60gm을 먹으면 충분하지만 노동을 하는 자는 그것의 2배, 운동선수들은 3배의 단백질을 섭취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60gm은 달걀 1개 보다 적은 양이다. 더구나 된장을 먹으면, 더 적게 단백질을 섭취해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1988년에 미국의 영양사협회는 “채식 식사가 건강에 좋으며, 골고루 먹는다면 영양학적으로 충분하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2009년에 이 단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채식은 건강에 좋고 영양이 충분하며, 특정 질환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적당한 채식은 임신기, 수유, 아동, 청소년 등 어느 때나 적절하며 운동선수에게도 적당하다고 주장했다.영양학자들은 20년 전부터 “인류는 고기, 계란, 우유, 설탕 때문에 병들고 있으며,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고혈압, 뇌졸 중, 암, 당뇨 등 소위 풍요 병의 대부분은 식물성 식품을 먹는 것만으로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현미, 과일, 채소와 콩 등을 균형 있게 만든 식사를 균형식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동물성 식품을 제외했다.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2014-01-10

의로움에 대한 갈망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위한 노력이 필요치 않다. 그냥 하루하루를 보내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생각으로 정당한 일을 많이 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되려면 남다르게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미래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준비하는 자는 삶의 자세가 일반인과는 차이가 난다. 그는 의(義)의 편에 서기를 원한다. 성인(聖人)들은 이런 노력으로 자기를 완성한 분들이다. 그는 의를 알고 싶어서 굶주린 심정이고(餓), 실천하고 싶은 갈증(渴)으로 목말라 한다.`굶주리다`라는 단어를 요즈음의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한다. 빈궁은 우리나라에서도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봄에 보리가 익을 때 양식이 떨어지는`보릿고개`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단어였다. 그때에는 거의 절반의 학생들은 점심밥을 먹지 못했다.`갈증`에 허덕이는 암사슴의 이야기는 성경의 시편에 나온다. 바싹 마른 벌판에서 새끼를 밴 암사슴이 물을 찾지 못하고 허덕이다가, 드디어 긴 목을 마른 대지위에 눕히면서 죽어갔단다. 생명체에는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이 절체절명의 문제이다. 진리를 알고 싶은 자는 이렇게 갈증을 느끼는 형상이다.1960년대 말에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교에서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해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자고 하여 해방신학을 제창하였다. 어느 신부가 성당 계단에서 피골이 상접한 여신도가 쓰러져 있는 옆에서, 말라서 엉크런 애기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신부는 “애기에게 젖을 먹이세요”라고 요청했다. 그 여인은 피가 맺힌 젖을 보이면서 처절하게“먹은 것이 없어서 젖이 안 나와요.”라고 겨우 대답했다고 한다.그 신부는 과감히 총을 들었다. 그래서 돈이 한 곳으로 쏠리는 불균형된 사회를 향해 의의 총을 겨누었다고 한다. 한 번도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지만 굶주림에 대해 절망한 듯 했다. 의로운 자가 되려면 진리에 대해서는 목말라 하는 자의 심정이 되어야 한다.우리가 살아가는 뒤엉킨 이 사회에서는 의롭게, 이른바`올바른 생활`을 하기가 어렵다. 올이란 실의 굵기이다. 옛날에는 섬유산업이란 것이 없어서 집에서 물레로 직물을 짰다. 그때는 실의 굵기를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실이 굵다가 가늘다가 또는 끊겨 버린다든지 하여, 올이 바르게 된 좋은 옷을 만들기가 어려웠다.올바른 삶이란 `의`를 중심으로 하는 정의의 생활을 말한다. 즉 올이 바른 생활을 하려면 배고파서 밥을 찾듯 목말라 물을 찾듯 진리를 향하여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형편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의를 의식 하면서 살아야 한다.시대는 변한다. 그러면 그 올도 변하는가? 이 시대에 올바른 길은 어느 쪽인가? 가치관은 어디에 두어야 좋을까? 지금 청소년들의 생각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표준이 되는 올의 길이와 굵기가 있는가? 특히 서양 문화와 철학이 세계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현재는 나이가 든 사람들은 헷갈린다.올바른 삶을 위한 노력을 우리는 `마음공부`라고 표현할 수 있다. 마음을 위한 공부를 소홀히 한 사람은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지푸라기 의(義)`라고 루터는 말했다. 반대로 공부를 많이 할수록, 자기는 아는 것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올바른 사람이 되는 입문 과정에 와 있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일지라도 더 노력하면 올이 바른,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때 그는 표정을 찡그리지 않고 웃으면서 인생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올이 바른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객관적 입장에 두고, 스스로 관찰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2014-01-03

오늘의 예수님

▲ 서임중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2014년 새 해가 밝았다. 푸른 말의 힘찬 기운이 오늘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모두가 힘들다고 말을 하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에 넉넉함이 메마르고 광야 사막 길에 먼지와도 같은 온갖 불평과 원망의 넋두리가 삶의 옷이 된다. 전국 방방곡곡 말씀 사역으로 헌신하면서 느껴지는 아픔 가운데 하나가 힘들어도 아파도 성도들이 성전에 올라오면 어머니 품 같은 따뜻함에 몸도 마음도 피곤에 지친 삶도 평안과 쉼을 경험하면서 희망과 생명의 힘을 입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교회마저도 사랑에 젖어드는 눈이 아니라 퀭하니 메말라버린 눈빛에 겨울 바닷물처럼 차가운 감정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조용필 선생님의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라는 노랫말이 생각난다. 겨울 바닷가 바위를 후려치고 스스로의 몸을 하얗게 부셔버리는 파도처럼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겨울 바닷물처럼 차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말들을 쉽게 한다. 계절의 겨울이 깊어가듯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가는데 좀 더 이해 하고 사랑하며 축복하고 감사하는 말을 하면서 살아갈 수 없을까 생각해 본다.주일 예배를 마치고 퇴근할 무렵이면 예배당 마당 구석에서 목사를 기다리는 분이 계신다.어느 한 주일도 예외가 없다. 내가 현관에 나타나면 한걸음으로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면 나는 지갑에서 만원을 그분의 손에 쥐어드리고 어깨를 한 번 감싸 두드려주고 “밥 잘 잡숫고, 똥 잘 누시고, 아셨지요?”하면 얼굴이 환하게 밝아 지면서 쏜살같이 돌아가신다. 어느날 지갑이 비어 있었다. 낭패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목사는 그냥 인사만 하고 천연스럽게 모른척 하고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말 없이 차를 몰고 떠나는 목사를 몇 번 돌아보며 예배당을 떠나는 그 분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리고 그 한 주간은 불편스럽기 그지없이 보냈다. “어이구 이놈의 목사야, 빌려서라도 드려야지. 한 주간동안 얼마나 널 보고 싶어 했겠니?” 스스로 자책하면서 마음이 천근만근이 되어 한 주간을 보냈다. 괜스레 스스로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나고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후에는 누구에게라도 빌려서 꼭 1만원을 그분의 손에 쥐어 드렸다. 목사를 보고 싶어 하는 그 분, 손에 만원을 쥐어 드리면 금방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천진스럽게 어린아이처럼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 분의 모습은 수 천 만원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인간애, 순수함 그것이다. 나는 주일마다 그렇게 그 분을 만난다. 말 한마디 없는 그 분은 수천 만 마디를 눈빛과 얼굴 표정으로 목사에게 말한다.그러던 그 분이 어느 주일에 보이지 않았다. 덜컥 마음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혹시 싶어 차 안에서 잠간 기다려 보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 편찮으신가?” “혹시?” 그러다가 다음 주일에 나타난 그 분을 보면서 괜스레 눈시울이 젖었다. “아픈데 없지? 괜찮지요?” 그러면서 그 날은 2만원을 손에 쥐어 드렸다. 목사는 그렇게 주일만 되면 1만원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그 분은 오늘의 예수님이다. 그래서 그 분이 나를 보고 싶어 한 걸음에 달려올 때 나는 주님을 보듯 반기고, 그것이 매 주일의 행복한 시간이 됐고, 나도 매 주일 그분을 주님처럼 생각하며 보고 싶어진다. 그러면서 계절의 겨울이 깊어 가듯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가는데 더욱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그러다가 다시 오시는 그 분을 만나고 싶다. 인생의 겨울도 깊어 가는데….

2014-01-02

목표가 있는 삶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삶에서는 뭣이든 하나의 사실을 어떤 각도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죽도록 슬플 수도, 아플 수도, 괴로울 수도, 기쁠 수도, 덤덤할 수도 있는 여러 가지를 경험한다. 또 이러한 감정의 신호에 따라 행동도, 용서를 할 수도, 살인을 할 수도, 그냥 지나가게 할 수도, 교정하려고 애를 쓸 수도 있다. 정보를 어떤 각도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전혀 다르게 보일 수가 있다.지금 이 시대에는 다양한 정보가 날마다 넘쳐나고 있다. 앞으로는 우리가 소화시켜야 할 정보의 양이 지금보다 점점 더 많아 질 것이다. 그래서 뜻 있는 일을 하고 싶어도 살기가 워낙 바쁘고 어려워서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21세기를 신경증의 시대라고 불렀다. 우울증, 성격장애, 행동장애가 증가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울한 성격을 가진 자는 자기를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여겨서 스스로를 공격하기도 하고 행동 장애는 타인을 괴롭히고`묻지마 살인`을 하려 한다. 이런 것은 건전한 정신을 갖지 못했거나 영혼을 부정하는 행위이다.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건전한 정신을 가진 자가 많아야 한다. 그들이 세상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이웃이나 사회, 또는 국가나 세계에 기여할 수 있다. 다행히도 근래에는 이런 사람들이 신문지상을 크게 메우고 있다.자신의 젊음을 세계에서 제일 오지인 아프리카에서 바치고 세상을 떠난 현대판 예수, 이태석 신부는 삶 자체가 하나의 소설이자 거의 픽션에 가까웠다. 인간을 초월한 우주적인 사랑을 보여줬다. 사랑은 느낌일 뿐,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온도를 느끼게 했고 형태와 색깔을 시각적으로 보여줬다.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3성, 채명신 장군은 평소에 자기의 지휘를 받던 사병들 옆에서 영원한 잠자리를 폈다. 마치 죽으면 인간의 계급은 의미가 없다는 듯이 그는 적장이 돌보던 어린이를 맡아서 대학 교수로 키웠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관계에서 한 생명을 살리는 장엄한 일을 했다. 적장도 훌륭했던 것 같다.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친구 한 사람은 자기의 아버지 시신을 의과대학에 실험용으로 기증하는 어려운 결단을 했다. 살점 하나하나를 떼면서 마지막에는 뼈까지 외울 것은 외우고 버려지는 연습도구로 기증한 것은 크나 큰 선행을 한 것이다.넬슨 만델라라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21세기의 성자인 그는 앙갚음을 화해로 폭력을 사랑으로 되갚는 어쩌면 시대를 역행하는 행동을 보여줬다. 인종차별이 휩쓸던 남아연방에서 그는 1964년에 정치범으로 투옥된 후 27년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1990년에 출옥됐다.1994년에 대통령이 된 그는 정적인 백인들과 총칼을 겨누는 전쟁도 가능했으나`화해와 관용`이라는 정신을 기초로 인종 차별을 없애고 국민을 통합하는 정치를 행했다. 8만명의 시위대는 보복과 응징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는 흑인들에게 무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외쳤다.6개월에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을 뿐, 어머니 사망 시에도 출감을 못하던 곳인 형무소를 출옥 후에는 오히려 그곳을 그리워했다. 거기서는 인간애와 동지애, 그리고 사색할 시간이 있었고, 편지를 쓰거나 묵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목표는 항상 난관 뒤에 숨어 있다. 위에 예를 든 분들은 난관을 박차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우리도 자신의 삶을 주위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과 행동을 돌려야 한다. 항상 결단의 심정을 가지고 매순간 최선을 다 해야 한다.인생의 목표는 꼭히 커야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는 자기에게 맞는 목표를 세우면 된다. 모든 이의 목표가 한 곳으로 모여서 위대하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 가야 한다.

2013-12-27

몽골 봉사활동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몽골에서의 봉사활동은 인간애를 실천하는 훈련기간이었다. 인생살이가 썰렁하거나 으스스 하게 느껴질수록 뜨뜻한 훈기를 위해 이 사회에는 사랑과 자비의 봉사활동이 필요하다. 집을 떠나 외국에서 1주일간 목욕을 하지 못했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고 너른 들판을 보면서 복잡한 도시생활과 환경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다.특히 이곳에서 우리는 지구의 환경을 많이 생각하게 했다. 적은 인구라서 환경오염이라는 단어가 필요 없었다.생물은 지구를 더럽히지 않는다. 다른 짐승들은 대소변마저도 모두 비료로 쓰게 하지만 쓰레기 배출로 인간만이 땅과 바다를 오염시킨다. 지구위에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려서 우주 질서에 도전장을 내민다. 신이 땅속에 묻어 두었던 탄소인 석유나 석탄을 캐내어 태워서, 인간은 지구 온난화로 생물을 멸망시키고 있다.인간의 행동이 지구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지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만물의 영장`이라고 뻐기는 인간의 교만함 때문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더러워진 지구위에 살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절망감을 지울 수 없다.또한 여기서 며칠 지나면서 `선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불을 밝혀 둔 마당에서 목장 주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과거에 어느 목장에서 일꾼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양의 수가 자꾸만 줄어들었다. 어느 날 주인이 숨어서 보니 일꾼 2명이 양을 훔치는 게 아닌가! 다음 날 그들을 잡아서 이마에 인두로 `양 도둑`을 의미하는 `st(sheep thief)`를 새겨 넣었단다.한 사람은 부끄러워서 그 목장을 나와 버렸다. 그 후 여러 곳에 취직했지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 글자의 의미를 알려하니 고통스러워서 결국 자살을 했단다. 또 한 사람은 일할 수 있는 마땅한 곳이 없어서 그 집에서 계속 일을 했단다.50년 쯤 세월이 흘러 그 일꾼은 70~80세 정도의 노인이 됐다. 옛 사람은 모두 죽고 세대가 바뀌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 10대 청년 몇 사람은 할아버지와 알고 지냈다. 그들은 할아버지가 이웃을 도와주며 사는 것을 보아왔다. 그들은 “이마에 적힌 st는 아마도 성자(saint)를 의미할거야”라고 했다. 도둑이었는데 성자라니! 이것이 인생이라고 그는 설파했다.그 노인이 성실하게 살아가니 양을 훔쳤던 도둑인 그를 주위의 사람들은 성자같이 여겼다. 후에는 성자로 늙어 간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모든 성자는 과거가 있고, 모든 죄인은 미래가 있다”고 했다. 그는 과거가 있는 성자였던 것이다.선한 행위의 생활로 이 늙은 주인공의 이미지는 최악의 시궁창에서 최선의 자리로 옮겨진 것이다. 내가 지금 있는 위치에서`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로 옮겨 가 있게 된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해 준 것이다. `st`를 이마에 새긴 노인은 젊었을 때의 과오를 거울삼아 성실한 삶을 이어왔기 때문에 성자의 외모를 지닐 수 있었다.넓은 벌판에서의 봉사활동은 우리들 마음속의 사랑을 크게 성장시켰다. 그 후로는 걸음을 걸을 때도 사뿐 사뿐 가볍게 걷고, 얼굴에는 미소가 떠날 날이 없었다. 흥얼거리면 모두가 음악이 되는 것으로 보아, 몸속에는 사랑과 음악만으로 가득한 것 같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노래와 즐거운 긍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주위의 환경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선하게 살아가기를 다짐한다.젊은 시절에는 꿈이 많으나 영글지 않았다. 이때 집을 떠나 자연 속에 묻혀 보는 것도 꿈을 잘 익도록 하는 큰 수양이 될 것 같다.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2013-12-20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 - 겸손

▲ 서임중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정당정치에서 당원은 그 정당의 정책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 기본자세이며 이런 기본자세는 당원에게 요구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기본자세는 모든 사회단체에도 마찬가지다. 근자에 이르러 통진당이 모든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그것은 통진당 국회의원이나 당원들이 그 몫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궤도를 이탈하는 모습들이 언론을 통해 안방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국회도 당리당략이 우선시 되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기본정신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이 같은 경우는 정당 정치나 일반 사회단체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교회는 교회로서의 정당한 활동을 감당해야 하며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의 원리가 적용될 때에야 교회가 교회로서의 몫을 감당할 수 있음이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합당하게`(ajxivw)라는 말은 `가치 있게`, `어울리게`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그 내용 중 제일 먼저 등장하는 용어가`겸손`이다. 여기서 사용된 겸손이라는 단어는 `타페이노프로쉬네`(tapeinofrosuvnh)인데 굽실거리면서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된 단어다. `겸손은 모든 미덕을 담은 보석 상자`라는 말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 또한 바로 겸손한 삶이다. 초대교회 신앙생활의 미덕은 굽실거리면서 자신을 남보다 낮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삶이었다. 이러한 삶을 멸시하거나 천히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이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 사회 문화에서는 겸손한 삶이 한 차원 높은 아름다운 신앙인의 삶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겸손`이란 단어를 예수 이전에는 천박한 사람에게 사용하였지만, 예수 이후에는 가장 아름답고 차원 높은 미덕 중 첫 번째로 꼽는 단어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겸손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한 차원 높은 삶의 미덕으로 이해하며 존중해야 하고, 겸손하지 못하면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천박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이와 같은 겸손은 자기인식(自己認識)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이 주 앞에서 무가치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삶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겸손은 자기의 삶의 내용이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의 표준이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는 데 있지 않고, 언제나 그리스도가 표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베들레헴에는 콘스탄틴 대제 때 주의 모친 마리아를 기념하여 말구유 자리에 세운 기념 예배당이 있다. 그런데 기념 예배당은 꽤 큰데 출입구는 하나뿐이다. 그것도 아주 좁고 낮다. 성지순례를 가신 분들은 들어가 보셨겠지만, 그곳에 들어가려면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겸손해야 함을 의미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며, 그 자체가 겸손임을 교훈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 첫 번째는 겸손한 삶이다. 교회마다 거리마다 성탄축하의 노래가 요란하지만, 겸손을 통해 우리의 삶을 연주하는 것이 진정한 성탄축하임을 기억해야 겠다.

2013-12-19

몽골 봉사활동<상>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해마다 해 오던 봉사활동을 금년 여름에는 몽골에서 하기로 하였다. 20여 년 전부터 봉사활동을 하여 왔지만 해가 지날수록 더 진한 강도로 봉사를 해 온 것 같다. 그래서 활동을 마칠 때면 항상, 전 해보다는 더 열심히 일한 것 같아서 늘 가슴 뿌듯한 느낌을 갖는다. 이번에 행한 활동은 자비 부담이었다. 그 기간 동안 일행은 물이 부족하여 목욕도 하지 못하고 마룻바닥에서 잠을 잤으며, 수면 시간도 부족했다. 그러나 모두는 매일 서로를 위로하고 웃음꽃을 피웠다.이런 봉사는 나누는 기쁨을 잘 아는 자가 되어야 할 수 있다. 기쁨 중에서 제일 크고 가치 있는 기쁨은 봉사활동으로 약자나 이웃과 함께 하는 기쁨이다. 반대로 좋지 않은 기쁨은 나를 꾸미거나 치장할 때의 기쁨이다. 자기만의 기쁨이다. 제일 가치 없는 기쁨은 소유의 기쁨이다. 소유욕에서 모든 악한 행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열심히 진료하다가 들판을 내다보면 거기에는 흰색의 덩이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양떼들이다. 그놈들은 시력이 좋지 않아서 길을 잘 잃어버리기 때문에 목자가 끌고 다닌다. 양은 죽으면 살코기는 음식으로, 가죽은 옷으로 주인에게 봉사한다. 순하고 모두 주어버리기에 양을 천사로 비유하기도 하는 모양이다.이번 기회에는 목장에서 양을 잡는 것을 보는 귀중한 경험도 했다. 양은 주인의 품에 조용히 안겨 있는데 주인이 가슴에 세로로 10cm 정도의 칼질로 피부와 근육을 절개 했다. 양은 꿈틀거린 후 잠잠해 졌다. 주인은 상처부분을 통하여 가슴 깊이 손을 넣어 급소를 눌러서 단번에 죽였다. 저항이나 끙끙거리지 않고 양은 움칫하면서 눈을 크게 뜬 채 목숨을 잃었다. 저 세상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난 것이다.모두는 성경에 쓰여 있는 인간을 대신하는 양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한 사람이 “우리, 저 양의 고기를 먹을까 말까?”라고 조용함을 깨트리니 모두는 숙연히 “양고기를 씹어보면서 생명이란 뭔가를 생각하겠다”고 하였다. 양의 죽음 앞에서 생명에 대한 경건함과 영원 등 고차원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일행들은 무한과 신비를 향한 열기로 후끈거렸다. 서늘한 공기를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저녁 식사 후 우리들은 들판으로 나가서 반짝반짝 손짓하는 수많은 별을 보고 합창하면서, 우리의 미래와 각자의 행복을 생각하였다. 별들은 우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삼라만상과의 대화를 우리들은 `이룰 수는 없어도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다.끝없는 지평선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은 우리에게 “인간의 행위는 모두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았다(無所不容). 또 광활한 지평선은 우리에게 “땅위에는 뭣이든 놓아둘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았다(無所不載). 땅은 필요한 것만 선택해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더러운 오물도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몽골에서 양을 잡던 숙연한 그날 밤에 컴컴한 평야의 바람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제까지 세상을 더럽히고 얼룩지게 한 것을 용서받으세요. 인간 마음의 선한 부분을 살려보세요. 짐승들과도 나눌 수 있는 사랑과 자비로 지구를 구출하세요` 등을 밤늦게까지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아침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왔다. 지평선이 보이는 것만 다를 뿐, 해의 밝기와 시간의 논리는 한국이나 몽골에는 차이가 없었다. 세상의 원리는 끝없는 광야나 대도시의 빌딩 숲에서나 어디서든 같은 잣대를 적용하는 것 같다.

2013-12-13

덕스러운 노인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1950~60년대에는 시골의 길가 나무그늘 밑에서 젊은이 몇 사람과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나이 차이는 물론, 부담도 없어 보였다. 그냥 친구와 같이 따스하고 자상한 분위기여서 사랑이 넘치는 할아버지로 느꼈다.또 정치의 흐름이 막혀버렸을 때, 국가의 원로들이 해결방향을 지시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이때 우리는 원로어른들이 제시한 의견을 따라 감으로서, 흑암에서 길을 찾게 된 적도 있었다. 이런 설득을 잘하는 노인들의 능력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이런 것들은 인생을 살면서 겪었던 풍부한 경험이 덕(德)이 되어, 주위에 좋은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경우이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온 노인들은 지혜를 갖으며, 사물을 신중하게 통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덕스러움은 노력 없이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노력의 덕분이다. 노력이 크면 클수록 영향은 더 널리 미치며, 이는 그 사회에 많은 축복이 된다. 이런 덕이 있는 노인들은 몇 가지 특성이 있다.그들은 우선 온순하고 부드럽다. 마음이 넓고 여유롭다. 덕이 있는 노인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향기를 주위에 뿌리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상대에게 내면의 따뜻한 온기를 전함으로서, 사람들은 그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덕이 있는 노인은 누구와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새로운 사랑이 마음속에서 샘물이 되어 졸졸 흘러내린다. 그는 남을 비난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싫어한다.만일 노인이 불만이 있거나 무언가에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 노인이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닿아오는 즐거움을 배척하는 것이다. 감사를 모른다면 그 노인에게는 희망이 없어지고, 기쁨이라는 선물을 거부하게 된다. 사람들은 냉정하고 자비심이 없거나, 엄하고 깐깐하게 고집이 센 노인을 대면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들은 그와 가까이하기를 주저하고, 그가 주위에 있다면 거리를 두려고 한다.또 불행하게도 노인은 쉽게 이기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런 노인은 자신만을 생각해 버린다. 그는 자신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덕이 있는 노인은 어떤 사실이나 생각에 묶여버리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며 비난성 발언을 하지 않는다. 삶에서 여유를 부릴 줄 알고 스스로 일하며, 마음속은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그는 윤리나 도덕을 강조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부드럽게 전개시킨다. 자기의 이야기만 강조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말은 불편하더라도 인내를 가지고 들어 준다. 자기순서를 끈기 있게 기다린다. 그는 다른 사람의 결점과 잘못을 잘 참아 나간다.인내란 가슴에 뭔가 부담을 가지고 있음에도 오래 참으며 공격에서 한 걸음 물러섬을 의미한다. 인내는 큰 고통을 주기에 극복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나 극복하는 과정은 그를 수양시키고, 마지막에는 희망의 꽃을 피어나게 한다. 이것은 힘들게 견디어 내는 정신을 말한다.덕이 있는 노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두고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좀 더 먼 거리에서 관용하며 내다본다. 그는 노력하여 무관심이나 경멸, 채념 등 잡다한 생각을 억눌러나간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조급함에서 벗어난다. 그는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의 중심을 무겁고 깊은 곳에 둔다. 덕이 많은 노인이란 이런 분이다.

2013-12-06

미래의 사회 변화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앞으로의 사회에서 주요 이슈로는 크게 3가지로 애기 키우기가 힘들다와 두려운 노후, 그리고 상대적 빈곤문제 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최근의 경제, 사회, 인구 변화 속에서 가장 주요한 미래형 복지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래서 1, 2차 저 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 등을 통해 우리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어 추진하고 있다.첫째는 육아문제이다. 현재 추세라면 2005년의 합계출산율 1.08의 최저점을 거쳐서 반등하더라도 2040년경에도 여전히 세계 최저 수준이 된다고 한다. 또 이혼이나 독신으로 인한 홀 부모의 증가로 위기상태에 놓이게 될 아동이 증가할 것이다.향후에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계속 증가될 전망이다. 양성 간에 `시간의 재분배 문제`가 크게 대두될 것이다. 특히 전통적 가부장 문화가 지속되면, 부부간에는 사용하는 시간활용문제로 갈등이 증폭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래 사회에는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점차 해체되고 가족개념이 재정립되면서 애기 키우기가 힘들어 지게 될 것이다.그 다음은 노인 부양비에 관한 것이다. 노인 인구가 2040년에는 59.1%로서 젊은이 2명이 노인 1명 이상을 부양해야 한다. 그러나 이 분야는 약간의 완화의 여지가 있다. 첫째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거나, 건강한 고령자는 근로자가 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둘째는 노인의 개념 자체를 새로 만드는 것이다. 주요 복지제도의 과도한 재정압박은 연금 등의 수급 시작 연령을 높여서 유연화 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법적인 노인 연령은 70세 또는 그 이상으로 높이거나 아예 철폐될 수도 있다.미래에는 65세 퇴직은 무의미하게 된다. 고령 근로자가 증가하지만 이들은 건강 상태와 생산성에 따라 개인 간 격차가 심할 것이다. 그래서 노인과 장애자를 개념으로 통합할 수 있다. 즉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기능상의 불편한 정도`에 따라 개인별로 퇴직 시점을 선택하는 방법 등이 있다.또 고령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노인병이나 만성 질환자가 절대적으로 증가하여 노인에 대한 의료비 부담은 폭증할 것이다. 건강보험, 노인 장기 요양 보험 등의 재정 지출이 급증하여 보험료 상승은 불가피하다. 의료기술이 발전해도 고 비용이어서 노인에 대해서는 질 높은 의료가 불가능해 노인 병동보다는 요양기관이나 재가 요양 기관을 많이 이용할 것이다.또 한 가지는 경제 성장 이후에도 `남게 되는`, 또는 `새로 생기는` 취약계층의 문제가 크게 대두될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생활 보호 수준의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빈곤층이 확대될 수 있다.또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고용이 늘어나지 않을 것이 예측된다. 자동화 등으로 총체적 필요 노동량의 감소가 더욱 심화될 것이다.많은 사람들은 비정규직으로 취업하거나 또는 프리랜서, 파트타이머 등의 직장도 양산될 것이다. 임금이나 긴 근로시간 등의 열악한 고용형태에는 주로 저 숙련 노동자와 노동 이민자로 대치될 것이다.중산층의 붕괴와 빈부 격차의 양극화는 더욱 커질 가능성이 많다. 세계화에 따른 경쟁의 심화, 지식 경제기반 사회로의 변화, 산업구조의 재편, 사교육 시장의 증가로 인한 교육의 양극화, 노동 이민과 국제결혼으로 인한 다문화 가정이 확산될 것이다. 그에 따라 계층 간의 이동 통로는 점차 좁아질 것이다.복지에서는 현재와 같은 기본 생활 보장이라는 `일반적 욕구`는 기타 서비스까지도 보장되는 `특수한 욕구`까지 바라게 될 것이다. 큰 복지와 작은 규제의 `보살피는 정부`를 필요로 할 것이다.

2013-11-22

시련의 은혜

▲ 서임중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독일의 신비주의자이며 성자(聖者)로 불리던 `수우쏘`의 이야기는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도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느 날 문을 두드리며 우는 여자의 소리에 놀라 문을 열며 달려 나갔을 때 한 여자가 “이 아이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만큼 키웠으니 이젠 당신이 키우세요” 하면서 갓난아기를 수우쏘의 가슴에 안겨 주고 도망을 쳤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고 곧 소문은 퍼지기 시작하여 수우쏘는 위선자, 거짓 성자, 바리새인이니 하며 공격의 표적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우쏘는 한 마디 변명을 하지 않고 열심히 아이를 키웠다. 수우쏘는 이 아이를 `시련의 은혜`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마련하신 시련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수우쏘는 그렇게 온갖 억울한 소리를 들으면서 극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아이를 길렀다.오랜 세월이 지난 후 여자는 자기의 죄를 자복하기 위하여 수우쏘를 찾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우쏘는 그 전날 숨을 거뒀던 것이다. 성자 수우쏘를 평생토록 괴롭혔던 여자는 통곡을 하면서 회개를 하지만 하늘나라로 간 수우쏘는 이 여인의 울음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일 후에 수우쏘는 온 독일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성자로 불리워졌다.찬송가 413장을 작시한 `호레이시오 게이츠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씨는 변호사이며 대학교수이고 독실한 신앙인으로 예쁜 아내와 사랑스러운 네 딸을 두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유명한 시카고 화재가 발생하여 아내와 사랑하는 네 딸을 프랑스로 보냈는데 그 가족이 탄 여객선 하브(Ville du Hawe)호가 1873년 12월22일 새벽 2시에 영국 배와 충돌하여 승객 226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져 부인만 구출되고 사랑하는 네 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비통에 싸인 부인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그들의 배가 하브호의 침몰한 지점을 통과하게 됐을 때 그들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지만, 부인이 남편 스패포드씨를 위로하는 순간 그의 가슴은 성령으로 뜨거워졌고 그의 입에서 신앙시(信仰詩)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찬송가 413장 가사다.“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던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던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영혼 평안해 내영혼 내영혼 평안해”삼중고(三重苦)의 성녀(聖女)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생후 19개월 만에 성홍열(猩紅熱)을 앓아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불구자가 되었지만 그의 은사 설리반 선생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수화법을 배우고 미국의 유명한 하버드 대학의 래드클리프 칼리지를 졸업하고 문학 박사가 되었다. 그녀의 생애는 하나의 기적이요, 눈물겨운 감격이며, 커다란 경이(驚異)이기에 그녀가 남긴 숱한 명언 가운데 “신앙을 가집시다”라는 말은 시련의 은혜를 경험한 자의 고백으로 이 땅의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생명 같은 힘을 주고 있다.시련의 은혜, 그렇다. 믿음 안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시련의 은혜가 있다. 때로는 견딜 수 없는 아픔 때문에 외롭고 힘들지만 성도는 그 시련 뒤에 준비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인고(忍苦)한다. 그리고 시련은 아픔이지만 아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은혜로 생각하며 살아간다.오늘도 내일도, 지금 이렇게 어려운것은 하나님이 나를 훈련 시키시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셔서, 지극히 나를 사랑하셔서 야곱처럼 심하게 훈련시킨다고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2013-11-21

셈본 철학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홈 커밍데이라는 모교 축제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서 만나자 마자 왁자지껄했다. “사업은 잘 되는가?” 또는 “애들은 결혼 시켰나?”등으로 반가운 인사 나누기에 열을 올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뿔뿔이 헤어진지도 벌써 40여년이 지났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긴 사연이 있는 것, 승패 사이를 왕복한 것, 매일을 그냥 흘러 보내 버린 것 등등의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다.착실하고 열심히 월급을 받으면서 살아 온 영기가 하던 일의 대부분은 별 탈 없이 이뤄졌다. 셋방살이하던 20년간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서 드디어는 28평 아파트를 살 수 있었으니까.철수를 소개해 보자. 학벌도 미약하던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엄청나게 큰 성공을 거뒀다. 도시로 나가서 공장에 다니다가 어렵게 금형기계 하나를 샀다. 조그마한 창고를 빌려서 시작한 사업이 대박에 대박을 터뜨리더니 이제는 9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중소기업 사장이 됐다.그럼 착실하기로 소문이 나 있던 정우는 어떻게 변했는가? 회사에 다니면서 하는 일 이외에는 자주 친구들과 단체로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 돈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주말이면 등산을 하거나 요양원을 찾아가서 잡스러운 일을 도와준다.태석이는 좀 색다르다. 성당에 열심히 나가더니 드디어는 신부가 됐다. 처음에는 연락이 전혀 없다가 그는 조국에 봉사하는 대신에 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도운다면서 5년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신부로 봉사한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2년 전에는 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일대기가 영화로 촬영돼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재물을 셈법으로 표현하면, 차곡차곡 모으는 +형, 왕창 끌어 모으는 ×형이 있는가 하면, 조금씩 나누는 형과 남을 위해 많이 희사하는 ÷형으로 사람은 대별된다.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제일 좋은 삶이 되겠는가?이제 기우는 나이가 되어 보니까 +와 × 이외에도 젊은 시절에는 잘 보이지 않던 와 ÷가 눈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것을 셈법으로 `25와 5`라는 숫자로 표현하면 25+5=30, 25×5=125, 25-5=20, 25÷5=5로 나타낼 수 있다.+와×는 재물을 모으는 것이다. +는 차곡차곡 재물을 모으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경우가 해당된다. 비교적 착실하게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는 자기 능력으로 모으면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큰 뇌물을 받았거나 부정축재 또는 남모르게 훔친 경우가 많다. 간혹 한꺼번에 일확천금하는 자도 있단다.그러나 -는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는 자, 재물 욕심이 없거나 보통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들이나, 또는 약간 생업에 실패한 경우를 말한다.그러나 ÷는 좀 색다르다. 돈과 관계없이 자기를 던져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거나 사업의 실패나 화재를 당한 경우에 해당된다.체중으로 치면 20은 좋으나 5는 매우 가볍다. 그러나 30은 약간 무겁고, 125는 비만함을 말한다. 사람들은 무겁기를 바란다. 특히 젊었을 때는 +보다 ×를 바란다. 왕창 많이 벌어서 어깨를 쫙 펴서 걸어 다니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인간은 매일 죄를 많이 짓는다.기복적인 종교지도자만이 물질축복을 기원할 뿐, 일반 종교 지도자는 나누기나 빼기를 강조한다. 천사는 죄는 물론, 소유한 것 마저 없어서 체중이 0kg이다. 그래서 거리를 초월해 가볍게 100km도 0km같이 하늘을 순간적으로 이동할 수 있다.

2013-11-15

역사 발전과 분노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분노란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대상이나 사람이 그 정도의 값어치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낮게 평가됐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하나이다. 분노의 강도는 당하는 것에 기울였던 관심이나 정성의 크기 정도에 비례한다. 이런 상처를 받으면 그는 자기가 무시됐다고 생각한다. 분노는 격한 감정으로서 건설적일수도 때로는 파괴적일 수도 있다. 분노는 사람들 사이를 벌어지게 하고 사랑을 차단시키지만 사랑의 화신인 예수도 명절에 성전에서 장사치들이 판매에만 열중할 때 판매대를 밀어내면서 분노했다. 이와 같이 분노와 사랑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을 때도 있다. 자식에게 잘못을 훈계할 때와 같이 인생관 설립에 필요한 사랑의 분노 등은 관계의 안정성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분노는 통제될 수 있다. 조절된 분노는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현재를 안정시켜서 이후의 상황이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 반면 절제되지 못하면 탓할 상대를 찾기에 고심한다.분노란 어느 개인이나 사람에게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그 지역의 모순된 일들이나 조국의 현실에서 부조리한 상황을, 꿈이 더 큰 사람은 세상에서 정의의 부족을 분노하기도 하고,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한다. 변영로는 시 `논개`에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고 했다.공자는 개인이나 단체의 억울함이나 원망을 해결하지 못하면 정의가 훼손되고 분노가 움튼다고 했다. 권력자의 자기중심주의는 국가에서 정의가 말살됨으로 분노의 대상으로 보았다. 국가는 모자라서 조금씩만 나눌 수밖에 없더라도 고르게는 분배되어야 한다고 했다.독과점 등 정의롭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조직이 흔들린다고 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면 분노하여 왕을 쫓아내는 것까지도 자연권으로서 정당하다고 했다.분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여 분노는 어떤 면으로든 건강치 못한 폭력과 증오를 가져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분노 자체만으로는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 싸움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분노를 절제해야 한다.분노는 하나의 명백한 이유와 선을 향한 의도의 방향성을 가지며 사람들이 그 정당성을 잘 이해해야 가치가 있다. 이럴 때 분노는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고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현실의 좌절에서 적극적인 관여로 나오게 한다. 이럴 때 간디의 `비폭력` 행사가 정치적으로 갈등의 원인을 제거하는데 좋은 방법임을 알 수 있다.분노의 실행은 상황이 충분히 진전돼 있는 적절한 시간에 행하는 것이 좋다. 또 그것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을 용감한 사람에게 전달돼야 행정과 분배 등 경제 문제, 의료 및 복지 정책 등 사회의 각 분야는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역사는 비록 느리지만 근본적으로 개혁되면서 발전한다. 사회의 여러 분야는 서로 연결돼 있기에, 시민들의 마음과 관습 등 모든 것이 바뀌어야 역사는 진보해 나아간다.`철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새 시대에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고 이후의 지구는 어떻게 변하여 있을지 나는 생각할수록 흥미로움을 느낀다. 새로운 시대에는 지금과는 다른 지식, 새로운 전망이나 사상 등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간다. 이 길에서 나 자신부터 점차 탈바꿈을 하여 그것을 거대한 하나로 통합된 변혁의 대로로 연결시켜야 한다.자기가 나아가야 할 길에서 분노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는 단계이다. 그 후에는 열정을 가지고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다가올 미래를 예측한다. 이때 그에게는 지금과는 변화된 미래를 전망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2013-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