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정치에서 당원은 그 정당의 정책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 기본자세이며 이런 기본자세는 당원에게 요구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기본자세는 모든 사회단체에도 마찬가지다. 근자에 이르러 통진당이 모든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그것은 통진당 국회의원이나 당원들이 그 몫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궤도를 이탈하는 모습들이 언론을 통해 안방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국회도 당리당략이 우선시 되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기본정신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같은 경우는 정당 정치나 일반 사회단체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교회는 교회로서의 정당한 활동을 감당해야 하며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의 원리가 적용될 때에야 교회가 교회로서의 몫을 감당할 수 있음이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합당하게`(ajxivw)라는 말은 `가치 있게`, `어울리게`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 내용 중 제일 먼저 등장하는 용어가`겸손`이다. 여기서 사용된 겸손이라는 단어는 `타페이노프로쉬네`(tapeinofrosuvnh)인데 굽실거리면서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된 단어다. `겸손은 모든 미덕을 담은 보석 상자`라는 말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 또한 바로 겸손한 삶이다. 초대교회 신앙생활의 미덕은 굽실거리면서 자신을 남보다 낮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삶이었다. 이러한 삶을 멸시하거나 천히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이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 사회 문화에서는 겸손한 삶이 한 차원 높은 아름다운 신앙인의 삶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겸손`이란 단어를 예수 이전에는 천박한 사람에게 사용하였지만, 예수 이후에는 가장 아름답고 차원 높은 미덕 중 첫 번째로 꼽는 단어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겸손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한 차원 높은 삶의 미덕으로 이해하며 존중해야 하고, 겸손하지 못하면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천박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겸손은 자기인식(自己認識)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이 주 앞에서 무가치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삶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겸손은 자기의 삶의 내용이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의 표준이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는 데 있지 않고, 언제나 그리스도가 표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베들레헴에는 콘스탄틴 대제 때 주의 모친 마리아를 기념하여 말구유 자리에 세운 기념 예배당이 있다. 그런데 기념 예배당은 꽤 큰데 출입구는 하나뿐이다. 그것도 아주 좁고 낮다. 성지순례를 가신 분들은 들어가 보셨겠지만, 그곳에 들어가려면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겸손해야 함을 의미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며, 그 자체가 겸손임을 교훈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 첫 번째는 겸손한 삶이다. 교회마다 거리마다 성탄축하의 노래가 요란하지만, 겸손을 통해 우리의 삶을 연주하는 것이 진정한 성탄축하임을 기억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