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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호모 모빌리쿠스

▲ 김학서봉화군 봉성면장 지난해 몇 년째 쓰던 폴더형 휴대전화가 고장이 나서 서비스센터에 가니 정비 기사가 요즘은 모두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며 이번 기회에 바꾸라고 권한다. 가격도 만만찮고 통신비도 그렇고, 더군다나 복잡한 기능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몇 번을 망설이다가 스마트폰이 대세라는 권유에 큰맘 먹고 스마트폰을 장만했다. 얼마 뒤 군에 간 큰놈이 휴가를 와서 집중지도를 받은 덕에 이른바 `카톡`이니, `카카오스토리`를 시작하게 됐다. 이젠 제법 능숙해져서 사진도 여러 장 편집하여 올릴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됐으나 관심은 내가 올린 글에 몇 사람이 댓글을 달았느냐에 집중된다. 댓글이 몇 개 없으면 괜히 올렸나 싶기도 하고, 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스마트폰은 언제 어디서든 친구, 가족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상대가 내 앞에 없어도 가상적 존재와 친밀해 질수 있다. 풍부한 정보와 편리하고 신속한 이동성을 갖춘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서 많이 진화해 휴대전화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라는 새로운 인류(?)가 탄생한 셈이다.현대인에게 휴대전화는 `제2의 나`이자 분신이다. 고려대 언어학과 김성도 교수는 휴대전화로 모든 일상을 관리하고 의사소통하는 현대인을 일컬어 `호모 모빌리쿠스`라 이름 붙였다휴대전화를 쓰는 세계 인구는 2008년 말을 기준으로 40억명, 보급률은 약 61%가 된다고 한다. 2013년에는 세계 보급율이 90% 가까이 치솟을 전망이다.최첨단 이동통신 대국이자 매달 수 백 개의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한국은 2008년을 기준으로 4천500만명(보급률 95.2%)이 휴대전화를 쓰고 있다. 경제활동인구를 고려하면 보급률은 100%를 웃돈다.이렇듯 우리는 첨단 정보화시대에 살면서 휴대전화가 개인의 필수 무기가 되고,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온라인으로 타인과 관계를 쉽게 맺고 있다. 이렇게 동시에 맺은 관계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으나 더욱 신뢰하고 친밀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가에는 많은 의문이 간다. 외부와 소통을 넓히기 위해 시작된 휴대전화는 인간을 더욱 고립화시키고 있으며 외로움에 사로잡힌 현대인은 남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려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른바`인증 샷`을 찍기 위해 자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타인의 관심에 목마른 이들은 얼마 전 할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는데도 슬퍼하기에 앞서 사이트에 올리기 바쁘다. 냉장고녀나, 노인요양시설에서 고교생 패륜 동영상이 좋은 예일 것이다. 또한, 이렇게 올린 자신의 글에 댓글 몇 줄이 달리면 우쭐해지기도 하고, 타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의기소침해 지기도 한다.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 소외되고 고립된다고 하지만 이 소외를 극복하고 고독을 해소하여 타인과 소통을 원활하게 하려고 만든 휴대전화가 인간을 더욱 외롭게 만드는 현실이 너무도 역설적이다. 외출을 할 때는 꼭 휴대전화를 챙겨야 하고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으면 세상에서 나만 외톨이가 된 것처럼 불안하고호모 모빌리쿠스들은 참 힘들고 어렵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바야흐로 가을이다. 지난여름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 내가 먼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일 차례다. 이 가을 가슴에 묻어둔 사람에게 한 줄 편지라도 써보는 것이 어떨까? 어딘가에서 나처럼 흰머리가 늘어갈 여드름투성일 때 짝사랑하던 여학생이라도 좋고 누구라도 좋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로 돌아가자.

2013-11-07

변화에 앞서는 교육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앞으로 인간의 삶은 획기적인 변화를 겪을 것 같다. 이제 인권은 절대적인 명제가 돼서 각 사람들은 사회의 엄연한 주체가 돼 살아가고 있다. 그에 따라 개개인이 강조되는 사회로 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가족은 개인이 모여 있는 사회의 제일 작은 기본단위이다. 서로 사랑으로 녹아들어 있는 각자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가정은 자주성을 인정하는 곳이 될 것이다. 부부간에는 현재도 분업적인 평등한 관계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이후에는 동거, 유사(계약)가족, 다문화 가족, 독신 가구, 동성 결혼 등 다양한 가족 모양에 대한 인식과 배려를 필요로 할 것이다. 앞으로는 자기 위주의 생각 때문에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는 방법이나 이기주의를 극복한다든지 가족 안에서 서로 간에 소통하여 이해력을 높이는 것 등을 배우기는 점점 어려워 질 것이다.직업은 삶의 질 확보에서도 중요한 변수가 된다. 직업 활동의 내용도 많이 바뀔 것이다. 현재의 좋아하는 직업의 기준은 안정성, 수입성, 이후의 전망 등이다. 그러나 미래에는 여가 유무와 자아실현 여부가 직업선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고 가치의 다양화와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에 선택에 많은 변화가 올 것이다. 일과 삶을 서로 균형 있게 만들어서 자아를 실현하려고 할 것이다. 노동과 놀이 사이에는 경계가 모호해 질 것이다.제품 생산도 첨단화 될 것이다. 생산에는 기술과 문화, 그리고 예술적 가치까지를 융합해 시민의 정서적 공감도를 높여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생각을 키워 나가는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 즉 사회의 변화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교육 정책이 요구된다.앞으로 이 사회에서는 점점 더 시장 경제 사상이 넘쳐나서 시장 지상만능주의로 변질되어 홍수처럼 흘러갈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그것에는 도덕적으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일례로 그들은 암표매매도 시장의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암표 구입은 선하게 차례를 기다리는 시민을 제쳐두고 새치기로 빠른 서비스를 받기 위해 돈을 사용하는 행위이다. 이는 기존의 시장 도덕을 기회주의로 바꾸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암표가 시장 만능주의자에게는 자연스런 경제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정 행위일 뿐이다.시장 만능 생각의 또 한 가지 예로는 자원봉사자에게도 일을 독려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인센티브는 자원봉사라는 갸륵한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보상받기 위한 `노동`으로 변질시켜 버릴 수 있다. 그럼으로 모든 것이 시장의 지배를 받으면 불평등은 더 커지게 되어서 양극화의 간격은 점점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그래서 바람직한 미래 설계를 위해서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상호 창의성을 증진시키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해결책으로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학생을 서열화 시키는 평가는 교육에서 지양해야 한다. 입시 위주의 정책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다양한 창의성을 키워야 한다. 개개인 서로 간에 잠재적 창의성을 융합하여 새롭고도 더 좋은 생각을 키우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특수 영재 교육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에게는 공동학습, 창작, 공연 등의 그룹 활동과 토론도 장려해야 한다.어느 학자가 사회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거나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을 했다면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창의성과 노력을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서 그가 이루어 낸 것이다. 이런 것은 그 사회 모두의 창의성이 모여서 만들어 낸 답이다. 개인중심의 교육에서 서로의 창의적 생각을 모으는 교육과정을 개발해야 한다. 교육의 방향은 난제가 얽혀 질 21세기 시대 상황에 맞추어 추진돼야 한다.

2013-11-01

깨끗한 선거문화

▲ 김연기 안동시선거관리위원회 사무국장바야흐로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황금들판과 오색 단풍으로 물들인 우리의 금수강산은 저마다 관광객을 유혹하는 계절이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풍요를 누릴 수는 없을까.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인 불황을 맞아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선량한 국민들의 시선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경제면에서는 대체로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정치면에서는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우리 국민들은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정치권을 바라보는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각종 모임 등 일상생활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단연 단골 화젯거리로 오르긴 하지만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에 더 열을 올리곤 한다.이와 같이 정치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불법정치자금`과 `정경유착`이라는 좋지 않은 과거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정치권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그건 국민이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못해서는 아닐까.우리나라와 같이 대의민주주의를 하는 정치제도 하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바로 정치자금이다. 정치자금은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하는 필수 영양소인 것이다.문제는 정치자금의 수입과 지출의 투명성에 달려있다 하겠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공급(수입)에서 깨끗하지 않은 음성적인 방법(불법정치자금)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정치에 검은 돈이 개입되면 깨끗한 정치를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깨끗한 정치를 위해서는 투명하고 깨끗한 정치자금이 공급돼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정치자금의 원활한 공급이 이뤄져야 정당에서는 국민을 위해서 책임 있는 정책을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이에 정치자금법에서는 정치자금의 적정한 제공을 보장하고 그 수입과 지출내역의 투명성을 확보하며 정치자금과 관련한 부정을 방지함으로써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법인이나 단체의 정치자금기부를 전면 금지시키고, 국민 개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소액다수의 정치자금 후원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즉 정치자금 후원은 법인이나 단체에서는 일체 할 수가 없고 개인만이 기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많은 폐단을 가져왔던 정경유착의 고리를 완전히 차단하고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개혁적인 조치라 할 수 있겠다.정치후원금은 자신이 지지하는 국회의원의 후원회를 통해 기부하는 후원금과 선거관리위원회에 기탁해 일정한 요건을 갖춘 각 정당에 국고배분비율에 따라 지급하는 기탁금이 있다.기탁금은 정치활동을 할 수 없는 공무원과 사립학교교원도 기탁이 가능하다. 정치자금의 기탁방법은 정치후원금센터(www.give.go.kr)를 통해 계좌이체나 신용카드, 휴대폰 결재 등 쉬운 방법으로 할 수 있으며, 가까운 구·시·군선거관리위원회에 문의하면 간편히 할 수 있는 방법을 안내받을 수 있다. 정치자금 기탁금에 대해서는 소득세 연말정산시 10만원까지는 전액 세액공제도 받을 수 있다.우리 국민이 후원하는 정치자금은 바로 우리 정치에 대해 깨끗한 정치를 담보하는 것이다. 많은 국민이 참여하는 소액다수의 깨끗한 정치후원금은 우리 정당과 정치인에게 국민을 섬기는 기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건강한 힘을 불어넣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정치선진화를 이루기 위한 거대한 변화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2013-10-31

가축과 공생을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인간은 신석기시대부터 가축을 길러왔다. 가축이란 집에서 기르다가 그러는 사이에 정이 든 짐승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정든 짐승이 아니라 대량으로 판매하는 산업생산물로 바뀌고 있다. 살찌워서 양을 최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해 효율적으로 가축을 사육하는 장소를 `공장식 가축 농장`이라 부른다. 이때의 가축은 생명체가 아니라 부의 축적을 위한 `상품`일 뿐이다.가축은 많은 이윤을 위하여 비좁은 공간에서 밀집시켜서 키운다. 여기에 갖가지 동물약품을 사용하고 단일품종을 대량으로 사육하는 소위 `집중적인 가축시설`이 많다. 대규모 공장식 축산 농장은 전체의 2%정도 이지만 시장으로 출하되는 비율은 80%가 넘는다고 한다.공장식 축산업이란 모든 과정을 수직적 통합으로 계열화한 거대 축산기업들을 말한다. 이곳은 사료생산에서 수의약품, 종축, 사육, 도축 및 가공포장, 유통 판매에 이르기 까지 한 곳에서 전체를 통제할 수 있게 조직됐다.공장식 축산 방식은 엄청난 항생제, 살충제, 소독약이 필요하고 대량의 폐기물은 환경을 오염시킨다. 이런 공장식 축산업으로 많은 이윤을 남기려다가 그만 동물을 학대하고 괴롭히게 돼서 드디어는 가축의 행복과 권리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됐다.연구에 따르면 동물들도 인간과 똑같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감정과 심리적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 가축들이 이제는 물건 취급을 받는다. 가축은 좁고 더러운 곳에서 키우기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진다. 근래에 있었던 세균의 감염, 광우병, 조류 독감 등과 같은 질병의 유행도 언론을 통해 우리는 알고 있다.지난 몇 년 간 있었던 구제역이나 조류 독감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1천여만 마리가 생매장을 당했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의 잔혹성을 확인했다. `우리도 저렇게 잔혹할 수 있구나` 파묻던 사람 중에는 그 후에 정신과 치료를 받은 자들도 있었다. 공장식 축산업은 윤리적 측면에서도 동물의 자유를 억압한다.60년 전 어린 시절에 우리는 배고파 보았다. 가축도 배고픔은 동일하게 느낀다. 갈증이나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고통이나 상처 없이 움직일 수 있다가 조용히 죽을 수 있다면 생명들은 기뻐서 이 지상을 천국으로 여길 것이다.원시시대의 조상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먹거리를 찾는 것에 소비했으나 근래에는 쉽게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좀 더 먹음직하고 보기에 좋은 육식을 원한다. 마블링이 좋은 꽃등심, 고소한 삼겹살, 향긋한 치킨의 생산 이면에는 유전자가 조작된 사료를 화학비료로 키워서 먹인다. 소, 돼지, 닭들은 비좁은 축사에서 고통스럽게 자라고 있으나 소비자는 모르고 있다. 산업계는 마치 가축들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건강하게 사육되는 것 같이 광고하지만 빛깔이 연한 고기를 위해 조그마한 곳에서 송아지가 빈혈이 되도록 사육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갓 태어난 돼지의 이빨과 꼬리 자른다. 사료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병아리 부리를 태어나면 잘라내고 닭은 A4용지만한 공간에서 40일 정도 살다가 도축된다.광우병은 공장식 축산 방식에 저항하는 동물들의 역습이며 생매장된 매몰 구덩이에서 밀려나온 핏물은 이 세상이 생지옥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축보호도 환경 운동의 하나이다.가축의 복지는 소비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빈번히 외식하는 습관, 카트에 물건을 잔뜩 실어 나르는 쇼핑 등은 육류 소비를 늘리고 동물의 복지를 악화시킨다. 축산업은 사회에 공헌하는 산업이다. 그러나 공장식 축산업은 중단돼야 가축이 행복하고 인간이 건강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2013-10-25

선한 자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걷든, 차를 타든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 마지막 도달점은 천당이나 극락, 소멸 등 그가 자라온 환경과 믿음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죽음까지의 과정이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데는 누구나 동감한다. 사람의 인생길에는 논밭 사잇길, 오솔길, 비포장 도로, 등산로, 신작로, 고속도로 등이 있다. 재수있는 사람은 고속도로를 휘파람 불면서 달릴 것이다. 제일 억울한 자는 달리는 길에서, 표식도 없이 낭떠러지를 만나는 사람이다. 짐을 지고 힘겹게 오솔길을 가는 사람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보다 수십 배의 고통을 당하지만 종교에서는 어느 길로 가고 있든 모두는 신을 찬양하라고 한다. 그 결과에 대한 해답은 신만이 알고 있고 숙명이라면서.인생길은 험난하다. 평평한 곳은 잠시일 뿐 가파른 산속 길에서 지쳐서 쓰러지거나 물웅덩이에 빠지거나 무서운 짐승을 만나기도 한다. 오솔길을 가다가 장대비를 만나면 물에 흠뻑 젖고 찻길은 홍수로 유실될 수도 있다. 동행자가 없으면 지겹고 따분함을 느낀다.재수 좋아서 고속도로를 달려도 교통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숨어 있다. 간혹 휴게소에서 돈과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 커피 한 잔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지만 이 사람도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같다. 또 현실에서는 가난한 자와 부자는 자기들끼리만 가기 때문에 서로가 도중에 마주치기는 매우 힘들다.어느 길로 가든 그는 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한다. 가는 길에 나무가 쓰러져 있으면 치워 주고 두려운 상황이 나타날 때는 보호해 주며 옆 사람이 고통을 느낄 때에는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을 `선한(지혜 있는, compassion, 긍휼) 사람`이라고 한다.선한, 지혜로운 삶이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과 공감을 하면서 살 때를 말한다. 지혜로운 행동에는 자원 봉사, 나눔과 섬김, 기부, 공감 형성, 장애자 보호 등이 있다.선은 순간순간의 위기를 잘 넘기는 사람의 노련한 기술 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스한 정신과 행위를 권장한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주로 `잔 머리 굴리기`를 잘 한다. 이것은 꾀를 부리고 꾸미고 지름길만을 찾는 얄팍한 술수이다. 또 사람은 그런 짓을 하고 싶은 욕구를 항상 가지고 있다. 선한 생각을 실행하면 손해를 보는 것 같다. 선은 꾀를 부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선한 사람은 마음의 기본을 `민망함`과 `송구(悚懼)함`에 둔다. 이 단어는 과거 동양 문화권에서 많이 사용했으나 사회가 복잡하게 변한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민망함은 비통히 여김, 불쌍히 여김, 어쩔 줄 모름, 안타까움, 남을 섬김 등의 자세다. 송구함은 도움을 받았을 때 되갚지 못하고 도움 받음에 대한 기쁨을 마음 안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고마움, 미안함, 등을 말할 때 사용한다. 7정에도 본시 희로애구애오욕으로, 송구함이 들어 있다. 선한자는 강자에게는 관심이 없다. 도움이 필요한 자, 즉 병자, 가난한 자, 품팔이, 외국인 근로자, 그리고 평소에 깜박 잊어버릴 수도 있는 사회적 약자인 우리 이웃들의 사연을 듣고 관심을 가진다. 선한 자는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지 않고 이웃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눈을 뜨고 귀와 마음을 열어서 따뜻하게 손을 내민다. 못 본채 고개를 돌려 버리지 않는다. 귀 막고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가 울부짖을 때 아무도 들어 주지 않을 것을 안다.긴 인생에서 기술은 때에 따라서 필요할 수도 있다.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선한 목표를 먼 미래에 두고 그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선현은 기술보다 지혜 쪽에 대해 많이 듣고 생각할 것을 권한다. 이런 정신자세를 긍휼이라고 한다.

2013-10-18

그리운 것들

▲ 이원락 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행복하게 살겠다고 그렇게도 별렀던 날들은 꿈결같이 지나간다. 이전 것은 그리움만 남긴 채 아득한 하늘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져간다. 삶에 지치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도 인생의 나이테는 불어난다. 운명이라는 덫에 걸린 우리는 시간에 밀리면서 살아 왔고 살아갈 뿐 이런 자연의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다.흘러가버린 것들은 이제 기억으로 축적돼서 누구나의 가슴속에 아련히 추억으로 내재되는가 보다. 겹겹이 녹아들어 그리움의 씨앗이 된다. 그리움은 애틋함으로 포장돼 마음 저 깊이 저장된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들과 따뜻하게 정을 나누는 생활 속에서 싹을 틔운다.`사랑한다`와 `보고 싶다`가 만나면 변하여 `그립다`로 한 차원을 높여 준다. 그리움의 대상에는 남녀 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고독한 자기 자신, 과거의 추억, 예술과 학문, 진리 등도 빌미를 제공한다.흔히 느끼는 남녀 사이의 그리움은 아쉽고도 애절하다. 아름다운 인연으로 이뤄져 계속 옆에 두고 싶은 소망이 나를 애끓게 한다.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당신을 만나지만 그것은 더 큰 그리움을 만들어 버린다. 그대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세상을 훈훈하게 만들고 싶다. 누군가와 새벽이 될 때까지 온기 넘치는 대화를 갈망한다.자신의 모든 것이 한 줌의 숯덩이가 되더라도 그리움이 변하여 사랑으로 이뤄지기를 기도한다. 그는 가슴속을 불살라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텅 빈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면 그는 그리움과 동시에 허전, 허무, 애석, 영원, 황혼의 노을, 아련함 등을 느낀다.그리움은 남녀 사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도 가지고 있다. 돌아가신 부모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고향의 옛 동산이 그립다. 이웃끼리는 인정이 그립다. 아름다운 풍경도 그리울 때가 있다. 세상은 온통 그리움으로만 꾸며진 것 같다. 혹시 인생이란 그리움이라는 고리를 이어가는 과정은 아닐까?또 조국의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워 할 때 그는 나라의 역사를 이끌고 갈 수 있다. 좀 더 좋은 사회를 그리면서 살아가는 자의 그리움은 인간끼리의 애정이나 사랑의 차원을 넘어 선다. 그리움은 에로스 세계에만이 아니고 아가페 세계에서도 역시 엄존한다.선과 진리를 향한 사람은 그냥 세월이 흘러가 버림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때로는 하늘에 자기의 아련한 바람을 소리쳐 아뢴다. 이들은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교류가 아닌 영혼의 소리로 그리워한다.이때는 자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다. 이제 그들은 종교의 문을 기웃거려 본다.몸과 생각 등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홀로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고독하다`라고 표현한다. 이런 상태에서 고독은 철학적 사고로 이어져 간다. 홀로 조용한 시간이 되면 생활 잊혀졌던 자기를 찾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과 속 깊이 내재된 사랑으로 이해를 주고받는다. 이들은 영원을 생각하고 그 결과 무한대로 그리워 질 때 종교에 의지한다. 그리움이란 신이 인간을 부르는 방법이다.어느 하늘아래 떠남이 없겠으며 어느 산천에 서글픔이 없겠는가만 아무래도 역시 삶은 외롭고도 그리운 것이다. 그리움은 인생에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 그것은 애절함, 사무침, 간절함 등과 같이 온통 가슴을 붉게 석양노을의 빛깔로 물들인다. 핏빛 노을의 그리움은 점점 어둡게 흑색 칠을 하면서 깊은 밤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끝 모를 이별에 울면서 저 산을 넘어간다. 소리쳐 불러 봐도 대답 없이 사라지는 노을은 안타까운 그리움 그 자체이다.

2013-10-11

평화로운 곳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친구와 대화를 하는 중에 어쩌다가 평화 이야기가 나왔다. “이 시대는 어떤 상태라야 평화스럽다고 말 할 수 있을까?”를 그에게 물어 보았다. 조금 머뭇거리더니 “기쁘게 살아가는 곳이겠지. 자기가 할 것은 모두 스스로가 하고, 남을 도우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곳이겠지. 때로는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어도 양보하고 타협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생각과 다양한 환경, 그리고 개인 특유의 인격을 가지고 살아간다. 각자의 교육을 받은 정도와 내용은 모두가 다르다. 그래서 각자는 자기만의 개성과 경향, 기호, 경험이 있다. 평화는 사람들의 다양한 입장을 배려하는 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도 않다. 많은 시민들을 위하는 복지가 잘 되어 있는 곳이면 그 사회는 평화를 지향하는 편에 가깝다. 그러나 복지국가인 노르웨이에서도 극우 청년의 테러가 일어났다. 영국의 한 복판에서도 난동과 폭력, 그리고 약탈 사건이 일어났다. 종교의 위력 앞에 숨죽이던 북아프리카 지역에는 지금 소요의 와중에 있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평화를 달라!”고 외치고 있다.평화를 위한 교육은 이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하는 교육, 사랑으로 희생정신을 존중하도록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역사를 보면 인류의 평화를 주장하던 링컨, 폰 회퍼 등의 말로는 비참하였다. 평화는 대가를 치루면서야 겨우 조금씩 자라왔다.또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런 삶인가를 모범으로 보여준 틱낫한 스님이나 데레사 수녀, 모든 생명을 존중하던 알베르트 슈바이처,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다는 신념을 선택한 간디 같은 삶도 평화의 전도사 같이 어려운 삶을 살았었다.인간은 누구나 평화를 기원하면서도 마음속에는 항상 탐욕과 증오심, 시기함 등이 있어서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원한과 대결을 부추긴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하면 영웅시하고 과격함을 좋아하며 평화를 지향하면 나약한 사람으로 몰아 부친다.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에서는 정의로운 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 정의로운 자는 어쩌면 어리석은 자일지도 모른다. 오로지 승리자만이 역사 무대에서 주연을 담당했다. 그러나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오늘날 세계 강국들은 더 발전하기 위해 평화로운 환경을 필요로 하고 평화안정을 수호하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그럼 평화를 지향하는 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화평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 주위의 환경을 더 좋게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즉 남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다. 또는 연구실에서 인류를 위해 밤새워 노력하는 자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누구나 상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평화주의자가 된다. 사랑의 실천 자, 다양성을 인정하는 자,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자, 지구의 아픔을 절감하는 자 등은 모두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그럼 평화로운 곳이란 어떤 장소일까? 아마도 그곳은 험한 바다의 파도를 넘어 저쪽에 있는 산천경개 좋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곳일 것이다. 격랑의 밤이 지나가고 환한 새벽에 멀리 보이는 희망찬 나라일 것이다. 돛을 달아서 부는 바람을 맞아 물결을 넘어가면 도달하는 자유, 평등, 행복, 희망이 가득한 그곳이 평화로운 곳일 것이다.그곳에서는 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화해의 언덕이고, 노래가 흐르고 흥에 겨워 어깨가 들썩이는 곳이다. 서로가 격려하면서 살아가며, 약점이 있는 인간이 서로를 위로하고 도움을 주는 곳이다.

2013-10-04

▲ 이관홍 신부·포항 죽도성당 부주임 다문화가정 가톨릭지원센터 담당신학대학 재학 중에 결혼이주여성의 상담을 한 적이 있다. 캄보디아에서 온 여성이었는데 상담의 주된 내용은 고부간의 갈등이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면서 왜 고부간의 갈등이 발생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원인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시어머니의 `말`때문이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두 돌이 지난 자신의 아기가 너무나도 예쁜데 시어머니는 자신의 아기에게 `똥강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설명하였지만 도무지 왜 자신의 아기를 강아지라고 부르는지를, 거기다 더럽고 혐오감을 주는 단어인 똥이라는 단어까지 붙여서 부르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아기를 부를 때 `똥강아지`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시어머니 역시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더 이상 아기를 부를 때 `똥강아지`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했다. 문화적, 언어적 차이에서 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지만 `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같은 말과 같은 글을 사용하더라도, 그리고 사실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말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곤 한다. 요즘 자주 사용되는 `막말`이라는 단어가 이를 의미하지 않을까? `막말`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곳은 아마도 정치권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민심을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국민들 앞에서 `막말`정치를 한다는 것은 국민을 모독하는 것이고, 정치인들의 자질 문제라 생각이 된다. `귀태(鬼胎·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태어났다는 뜻)`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지역 감정을 부추기는 말까지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말`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말` 한마디에 역사가 바뀐 사례도 많이 있다. 18세기에 프랑스에서는 마리앙투네트가 한 말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는 말 한마디가 프랑스 혁명의 불씨를 당겼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연합군의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일본 측 의도와는 다르게 일본 언론이 “무시 한다”로 발표해서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고 한다. 1980년 대 독일에서는 동서 베를린 시민의 왕래가 가능한 여행법 개정을 발표한 동독 측이 발표했는데 독일어에 서툰 외국 기자가 `여행을 개방 한다`를 `국경을 개방 한다`로 오역하는 덕분에 1961년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단초가 됐다.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명언은 수없이 많다. 성경의 잠언에는 “입을 조심하는 이는 제 목숨을 보존하지만 입술을 열어젖히는 자에게는 파멸이 온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말은 남을 죽일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고 한다. 칼에는 양날이 있지만 사람의 혀에는 백 개의 날이 달려있다고 한다. 특히나 사회 지도층, 정치인의 말 한마디에 국력이 낭비될 수도 있고 나라의 품격이 저하되며 진실을 왜곡하는 말 한마디로 나라가 망할 수 있다. 지금 정치권의 막말 논쟁은 우리에게 말의 중요성, 말을 함에 있어서 신중해야함을 다시금 상기시켜주고 있다.정치권 뿐 아니라, 사회 지도층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막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서로에게 `막말`을 삼가는 새로운 문화가 생겨날 때, 상처나 오해를 주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는 말을 하는 아름다운 문화가 생겨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 만큼이나 아름답고 따뜻하게 변화되어 갈 것 같다.

2013-10-01

열심을 다하라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뱀띠인 올해도 벌써 음력으로 추석기간이 지나갔다. 뭣이든 이뤄야 한다고 작정했던 것도 점차 윤곽이 희미해진다. 남은 몇 달간이라도 최선으로 노력하면서 훤히 뜬 달에 나의 기원을 띄워보자.서아시아 지방의 이스라엘도 오순절 등의 절기를 달의 크기를 기준으로 한 음력에 맞췄다. 그래서 그 날들이 현재의 달력에서는 매년 다른 일자에 정해진다. 수천년을 이어온 민족의 음력절기인 추석은 지금도 우리 문화에 엄존하고 있다.올해는 뱀의 해다. 뱀은 혀를 날름거리면서 소리 없이 접근하며 독이 있기 때문에 징그럽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구렁이는 집을 지키는 존재로 또 뱀은 매년 허물을 벗기 때문에 변화와 재생을 의미해 왔다. 또 뱀은 다산이나 재물의 풍부함을 대표하는 동물로 여겼다. 성경에서는 `뱀처럼 지혜로워라`고 했다.이제 어느 정도 살아보니까 삶이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와 같다는 생각을 나는 문득문득 하게 된다. 바다 저 건너편에 도달해야 하는데 갈 길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피곤해도 멈출 수가 없다. 앞으로 항해에서 괴로울 때에는 신이든 뭣이든, 보이지 않는 것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다.그러나 경험상으로 볼 때 노력해도 일은 잘 풀리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게 유리한 조건들은 한 밤중에 깊이 잠들었을 때 소리 없이 나를 비껴 지나간다. 정신 차리고 눈을 부비면서 행운을 기다리지만 하필 조름이 퍼부을 때에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로또에 당첨되려면 먼저 복권을 사야 하듯이 행운도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맥도날드의 창업자 레이 크록은 이렇게 말했다. “땀 한 방울을 흘릴 때마다 더 많은 행운이 찾아온다”금년 한 해도 좋지 않는 뉴스가 넘쳐났고 넘쳐날 것이다. 온갖 인간의 갈등과 국제 분쟁이 신문지상을 꽉 메울 것이다.성실하게 항해하면서도 인생의 한 복판에서 재산을 날린다든지,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이유도 모르게 고난과 풍랑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때로는 억울하게 당하기도 하고, 설명할 수 없는 역경을 수없이 많이 맞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모여서 인생이 된다.고난이나 불행을 잘 이겨낸 자가 10명중 8~9명이라면 이상하게도 성공과 번영을 잘 이겨낸 사람은 1~2명뿐이라고 한다. 성공과 번영은 이겨나가기가 고난보다도 어렵단다. 자기만족과 기뻐서 교만한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란다. 인기 있을 때, 건강할 때, 부유할 때, 우리는 오히려 자숙하면서 홀로 조용히 스스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척추 병, 폐질환, 직장암을 앓았던 `빙점`의 저자 미우라 아야코는 `삶에서 병들고 불행해져야 인생을 겨우 알 수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병들지 않고는 드릴 수 없는 기도가 따로 있고, 병들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따로 있고, 병들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얼굴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감사할 수 없는 감사가 따로 있고, 오! 병들지 않고는 나는 인간이 될 수조차도 없습니다”질퍽한 인생길을 질병과 장애를 겪으면서 살아 온 사람의 비장함과 극복의 아픔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했다. 그 녀는 정상인보다 더 긍정의 노래를 부르면서 삶의 항해를 했었다.금년에 당신은 어디로 누구와 함께 항해를 떠나고 있는가? 앞으로의 항해를 위해 지난날의 기록을 성찰해 보았는가? 순풍, 역풍, 맛바람, 폭풍, 해일 등의 여러 가지 바람에 대비하는 자세를 가졌는가? 2013년은 이미 3/4이 지나간다. 부디 항해를 하는 중에는 열심을 다하라.

2013-09-27

`아! 목동아`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20여 년 전 어느날 저녁을 먹고 난 후 친구들과 대구가 내려다보이는 산위에 올라간 적이 있다. 누가 노래하자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거기서 자연스레 합창이 흘러 나왔다. 그러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아! 목동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는 박수를 쳤다. 자기들이 불렀으면서도 스스로를 격려하듯이 자연스럽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노래는 아일랜드 북부에 살던 제인로스(1810~1879)가 창밖에서 한 집시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곡을 악보로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이 노래는 시골 목동이 도시로 떠나는 사랑하는 소녀와 헤어지기 안타까워 부르는 이별의 노래였다고 한다. 그 후 웨슬리가 1913년에 쓴 시 `Danny Boy`라는 가사를 붙인 것을 우리가 자주 노래로 부른다.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억압 속에서 조국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고향의 평화로운 마을을 그리워하면서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높지 않은 구릉으로 이어지는 목가적인 곳, 조국을 잃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애인마저 멀리 도시로 떠나보내야 하는 목동의 가슴은 멍들어 저미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인간은 이렇게 가슴에 아리함과 아련함으로 적셔지면서 성장해 간다.이별이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삶에서는 가슴이 따갑기도 하고 잔잔한 바다일 때도 있지만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도 많다. 그 어느 순간인들 서럽고 애잔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만 역시 이별은 그리운 사람을 심장 저 깊은 곳으로 갈무리하는 과정인 것 같다. 또 사라진 조국을 그리워하는 것, 역시 인간끼리의 헤어짐만큼이나 머릿속을 텅 비게 한다.멜로디가 단순하면서도 부르기에 고난도가 없는 `아! 목동아`를 들어보면 이 곡은 가슴으로 연주하고 영혼으로 노래하는 듯 하는 뭉클한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노래란 이런 것이다`라는 본래의 모습을 이 노래를 통해 확실히 느낄 수 있다.어느 읍 단위의 시골에서 음악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끝날 즈음에 색소폰 연주자가`봄비`와 `당신은 나의 운명` 다음에 `아, 목동아`를 멋 떨어지게 연주했다. 흥에 겨운 청중은 거기에 맞춰서 자연스레 하나가 되어 노래를 합창했다. 음악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사람들은 그 노래에 취해서 콧노래로 흥얼대었다.이 노래는 우리나라의 가곡인 `고향의 봄, 청산에 살리라, 한 송이 흰 백합화, 아무도 모르라고` 등과 비슷한 분위기로 가슴 결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알퐁스 도테의 `별`과 같이 아름답고도 순수한 사랑의 세계가 주옥같이 마음속에 엮여진다. 이때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향해 우리는 추억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된다.이 노래가 아일랜드에서는 장례식에서 전통적으로 부른다고 한다. 죽어간 남편을 땅에 묻거나 애인과 영원한 이별을 할 때, 애틋함을 마음속에 채곡채곡 채우는 수속절차에 필요한 노래라는 것이다.삶이란 무엇인지, 그리움의 무게는 몇 억만 톤인지, 영원의 길이를 인간은 잴 수 있는지, 무한이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하게 하는 노래다. 아마도 `그리움과 영원`은 친구일 것이다. 그립다면 영원할 것 같고, 영원한 것은 모두가 그립기 때문이다.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역사와 주위의 환경, 그리고 민족성이 합작하여야만`장엄하고도 그리운 인간의 심정`을 끄집어낼 수 있다. 그런 노래는 인간에게 자진하여 선과 사랑을 향하여 나아갈 마음을 일깨워 준다. 현세를 이상향 쪽으로 끌어 당겨 준다.

2013-09-13

`You Raise Me Up`

▲ 서임중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You Raise Me Up`(주님 날 일으키시네).이 노래는 나의 입술의 중얼거림의 기도가 되었다. 중얼거림이라는 표현과 기도라는 표현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 중얼거림의 기도가 되었다. 중얼거림이란 사전적으로는 “남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자꾸 혼잣말을 하다”라고 정의한다.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중얼거림`이란 영어로 설명하면 mumble, mutter가 아니라 murmur라고 하면 보다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응얼거림이 더 나은 표현일 수 있다.“내 영혼 지치고 피곤할 때에, 근심 걱정 내 맘 짓누를 때,난 잠잠히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내 곁에 오실 때까지.주님 날 일으켜 산위에 세우네. 거친 바다 위 걷게 하시네.주님만 의지할 때 강함 주네. 크신 능력 내게 부어주시네.”어느 날 저녁에는 부르면서 울고, 울면서 부르고 그렇게 밤이 깊도록 온몸이 눈물과 땀으로 흠뻑 젖도록 불렀던 밤이 있었다. 이 노래는 감성과 서정성, 그리고 감미로움이 마음을 형언할 수 없는 평안함과 따뜻함으로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하며, 더 나아가 기독교적인 사랑의 가사로 번안되어 불릴 때는 정말 눈시울이 저절로 젖게 한다.이 찬양은 시크릿 가든의 멤버 롤프 뢰블란(Rolf Lovland)이`Silent Story`라는 기악곡으로 작곡하였다. 이후에 롤프 뢰블란이 `Whitest Flower`라는 소설을 읽고 나서 그 저자를 찾아가 자신의 곡에 가사를 붙여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소설가의 이름이 브렌던 그레이엄(Brendon Graham)이다.그 후 Josh Groban의 `You Raise Me Up`이라는 이 노래의 원곡은 2002년 발매된 시크릿 가든의 4집 앨범인 `Once In A Red Moon`에 수록된 `You Raise Me Up`의 리메이크 버전으로 나왔다. 이 곡은 Josh Groban 외에도 영국 팝그룹 웨스트라이프, 아일랜드 여성 그룹 켈틱 우먼 등이 리메이크해 불렀고, 세계적인 색소폰 연주가 케니지의 색소폰 연주로도 유명하다.다만 원곡이 뉴 에이지 아티스트에 의해 불리었다는 것이 조금은 걸리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문의 You가 누구냐는 견해다. 거두절미하고 복음적인 측면으로서는 You는 `주님`으로 해석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고 그러하기에 기독교인은 이 노래를 찬양으로 많이 부르면서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부르는 것이다.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원문의 You가 당연이 주님이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그 원문의 You는 문자 그대로 `당신`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당신`은 `너에게 있어서 나이며 나에게 있어서 너`라는 것이다. 즉 내가 힘들고 어렵고 지칠 때 `너`가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너`가 힘들고 지쳐 어려울 때 `내가` 너를 일으켜 주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You, 곧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이 마태복음 25장 40절과 요한일서 4장 21절의 조명인 것이다.좌절과 아픔에 힘겨워하는 `너`, 마음이 무겁고 일상에 지친 `너`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고 평안과 희망을 주어 일으켜 세워주는 것, 그 `너`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그들이 감동하고 감격하여 눈물 흘리면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사람이 원문의 `You`가 되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진정 그 `You`를 바르게 이해할 때 노래의 의미와 감동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2013-09-09

종교의 대두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인간이 신을 창조했는가? 또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이 신을 새삼 알아가고 있는가? 만일 인간이 신을 설정했다고 하면 무신론이고 그 반대의 개념이라면 창조론이다. 매일의 생활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현재의 삶도 두렵고 그것의 미래의 전개에 대해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더 큰 것은 죽음 이후의 과정을 생각하면 막막함과 아연함을 느낀다. 인간은 개인의 삶의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모여 살고 그래서 크게는 대도시까지 이루었다. 그리고 심연 모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여러 종교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있다. 철학자 스펜서 “사람은 삶이 두려워서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만들었다”고 했다.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두렵고도 불안해하는 인간 군상을 보고서 “누군가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 하고,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고 했다. 이는 종교를 인간 사고방식의 공통된 한 부분으로 본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종교가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종교가 일으킨 여러 가지의 일, 예를 들면 자살 폭파, 십자군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스라엘과 파레스타인 간의 갈등, 보스니아의 인종 청소 등이 종교가 없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했다.우리는 살아가면서 유·무신론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일로 가득찬 일생을 보내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많아진다. 앞날을 전망할 수 없음으로 보통은 신이 살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100년 이내이다. 광대무변한 우주의 영원한 시간 속에서, 100년은 순간에 불과하다.불안한 미래 때문에 우리 사회는 보험제도가 있다. 종교란 이 무한대의 시간을 잘 보내려고 신을 믿는, 일종의 보험을 드는 것과 같다. 무한대 시간을 짧은 일생동안에 믿기만 하면 보장되니까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종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각 종교에 따라 믿는 신이 다르고 신의 수 또한 다르게 정해져 있다. 무신론자는 신을 없애버린 자, 유일신을 믿는 자는 하나의 신만 살려둔 자, 다신론 자는 자기들의 생각에 맞게 적절한 수의 신만을 살려 둔 자들이다.세상의 신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왜 빛만 있으면 좋으련만 어둠을 만들었느냐? 악을 만든 이유는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닌가? 인간이 악에 빠진 후에 비로소 구원을 한다면 그 신은 무능하지 않느냐? 혹시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모양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면, 변태적이지나 않을까?그러나 종교에서는 이런 것은 신의 소관이고 인간의 두뇌로서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상대적인 기준은 넘쳐나고 절대적인 기준은 아직도 없다. 아마도 영원히 우리는 절대적인 기준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비교급과 최상급에 쓰이는 말도 상대적인 기준 안에서의 표현하는 방법이다. 시간도 공간개념도 절대 표준은 없고 그냥 편리상 인간이 만들어 둔 것이다.우리는 절대적인 기준을 갈망하고 그 결과 종교가 나타났다.`나란 어떤 존재이고 운명이란 무엇인가? 우주란 무엇이고, 진리란 뭐냐?`등의 명제 앞에서는 인간이란 풀잎위의 이슬과 같은 존재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등의 말은 의미가 없다.인간은 도덕적으로 일을 해도 행복을 보장받을 수 없다. 성실히 일한 결과가 실패로 나타날 수도 있다. 행복의 완전한 보장도 인간 차원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신앙의 차원에서는 가능하다. 신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러한 윤리적 부조리 등 삶의 여러 문제에서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

2013-09-06

책을 읽는 이유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인간 사고의 성장은 가정에서 형성된 생각을 바탕으로 해 이루어져 간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습득한 체험을 거기에 보태면서 점차 생각의 범위를 넓혀 나간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각자의 삶에 대한 개념을 우리는 그의 `생활 철학`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사람은 모두 그가 살던 시대의 흐름 틀 속에서 일생을 마친다. 그 시대의 사람들 생각의 주류를 주의(主義) 또는 관(觀)이라고 한다.각자는 성장해온 환경의 차이로 인해 자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장애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많다. 이때 독서는 우리가 이런 요소를 줄이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준다.독서는 지금보다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게 하고 다양한 관점을 이해시켜 준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알지 못했던 세상의 흐름도 발견하게 한다. 독서는 세상의 격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방향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준다. 많은 사람이 `이것이 옳다`고 말해도 그의 판결은 다를 수 있다. 이때에도 그의 마음은 흔들림 없이 잔잔하다. 그의 정신세계는 폭이 넓고, 남다른 이해심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고 받아드리기가 쉬워 진다.교육에서 독서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곳은 교육 철학이다. 이것은 국가가 교육정책을 추진할 때 먼 미래를 향해 가는 방향이다. 그 정책은 학생이 미래를 살아가기에 필요한 각자의 인생관을 살찌우게 하고, 거기에 국가가 바라는 진로를 합한 것이다. 학생들에게 지혜를 갖추게 하고, 살아가는 일에서 판력을 높여줄 것이다.독서는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데 필요한 열쇠 역할을 한다. 많은 키를 가지고 여러 곳을 열어보면 그는 그만큼 많은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 경험은 나의 꿈과 미래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학교 교육은 그 축적효과가 단기에 나타난다. 성적표, 입학시험이나 취직 시험에서 합격자 수 등으로 결과가 눈에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독서가 효과를 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생각의 성숙이란 긴 세월이 걸려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성장 속도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급한 성격을 가진 자가 보면 독서로 식견을 넓히고 정신적 양분을 축적하는 것을 매우 지겹게 여길 것이다. 독서는 즉효성이 없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정보가 넘치는 사회에서는 생리가 맞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그러나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독서는 흐름이나 변화에 대한 인지력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판단력을 도와준다. 읽은 만큼 인생의 폭을 넓히기에 알게 모르게 일상적인 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읽는 만큼 앞으로 나아간다. 교육의 궁극적 목표인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일의 전개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에 독서는 결정적 도움을 줄 것이다.사회에서 앞장서서 세상을 이끌려면 그에게는 독서가 더욱 필요하다. 리더십을 발휘하거나 남의 말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판단을 내릴 때, 의미 있는 대안을 찾을 때, 미래의 비전을 찾을 때 등에서 독서는 많은 도움을 준다.독서는 비록 그가 작은 목소리일지라도 드디어는 상대의 마음을 울리고 사회를 변하게 하는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더 합리적인 관점으로 시각을 옮겨 줄 수도 있다. 또 주위조건이 변하면 그 변화에 맞추어서 새로이 짜 맞출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준다.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독서에서 얻을 수 있다.

2013-08-30

코미디 세상

▲ 지월 스님포항 보경사 불교문화원장 세상은 보는 관점에 따라 크게 보이기도 하고 작게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가 크게 느껴지다가도 어떤 때는 외소하게 보인다. 세상이 어떤지 모르지만 단지 보는 사람의 마음 크기가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는 사실이 더 진실이다. 특히 요즘처럼 세상살이가 더 힘들어졌다고 하는 푸념 섞인 마당에 오늘은 살만하다 싶더니 내일은 뭔가 결정을 해야겠다고 또 마음이 바빠진다. 이처럼 마음이란 것은 학교 운동장처럼 소란스럽다가 고요해지는 것을 거듭 반복하는 놀이터와 같은 것이다.`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이 있다. 세상에 똑똑하다는 사람들을 모아 우두머리에 앉혀두었더니 하나같이 먹물과 오물을 품어낸다. 대통령, 국회의원, 기업가, 종교 지도자들 등 말은 청산유수에다 눈인사는 사람을 녹이고, 모델처럼 잘 차려 입었는데 하나같이 코미디언이다.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코미디언 임에 틀림이 없다. 때로는 혀를 차고 웃고 때로는 목을 놓고 웃는다. `정말 병원에 안가도 될 건강한 사람이 살기란 희유한 것인가`하고 생각하게 된다. 오염된 물이 큰 소리를 치고 세상을 속일 듯 하지만 작은 도둑은 얼마가지 않아 들통나고, 큰 도둑은 세월이 흐르니 자연 밝혀진다.그리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들은 생은 넘어서 과보를 받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그 석·박사 과정을 어렵게 통과한 내로라 하는 이들이 간단한 인과의 원리를 못 배웠으니 참으로 우둔한 노릇이다. 알 만한 사람들이 왜 그것을 모르는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답답하다. 그러하니 아랫물은 어찌하랴. 뭐든 흘러내려가고 있음을 모른다. 왜냐면 탐욕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신이나 귀신을 본 사람은 없는 듯한데, 없는 관념을 잘도 만들고 의미부여 하고 또 사람을 위협한다. 누군가 의심하고 물어오면 으름장을 놓고서 나무래고 달랜다. 먹고 살기에 급급한 탐욕에 물든 사람들이 내놓는 끈질길 호구지책에 순진한 사람들은 속아 넘어간다.그래도 선조의 문화가 이어왔는지 아이들에게는 열심히 공부하고 마음 착하게 쓰라고는 가르친다. 한 때 이 서라벌의 화랑도였으며 문무에 통달해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난세의 출가승이던 원효스님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가르친 것이 인과법이다.세상에는 다양한 방송들이 있지만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무엇이 문화 흐름의 상식인지 아닌지를 대중과 더불어 깨닫고 넓혀나간다. 어쩌면 삶은 본래 코미디겠지만 그래도 사는 사람은 괴롭고 아프다고 아우성이니 안타깝다. 사람 사는 세상에 사람을 속이고 웃지 못 할 일들이 주변에서 속속들이 일어나지만 특히 자기가 자신 스스로에 속아 넘어가는 꼴들이 허다한 것이다.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자기 자식은 못 가르치고, 사람의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는 사람들이 자기 몸과 마음이 병든 것은 모르고 세상을 떠들썩하며 행복전도사라는 사람들이 우울증에 자살하는 등 어른이라고 하면서 어른 노릇을 못하는 지도자들 모두가 코미디언인 것이다. 최근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 `마음챙김`에 관한 철학, 심리학, 영성 및 심리치료 분야에서 뜨거운 관심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필요에 의해 만들고 갇혀버린 관념의 벽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음을 말해준다.21세기는 개명의 시대처럼 “그때는 그랬지!” 하는 웃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우리 주변의 사회 및 종교 지도자들도 사람들을 현혹시키지만 사람들은 개인의 탐욕심이 늘 자기 자신을 속이려고 하고 있음을 모른다. 누군가를 탓하기 어려운 스스로의 재잘거림에 속지 말아야 하며, 결국 자신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자각은 깨어나는 돌파구이다. 진리를 통한 진실이 사랑인 것이다.

2013-08-29

인격자란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누구든지 자신에게 긍지를 가진다면 그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긴다. 그는 자존심과 신뢰가 자아 속에서 넉넉하게 녹아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지 않고 평상심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모두 고통과 시련에서도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 이렇게 긍지를 가지고 덕이 되는 일을 해온 사람들을 우리는 인격자라고 한다.인격자란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해 내는 사람들이다. 또 인격자는 세상을 하직할 때 그가 남을 위해 베풀었던 시간이 많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그는 살면서 좋은 습관을 가지고 덕을 쌓으려고 노력한다.인격자가 되려면 먼저 사람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만사에 감사함을 표할 줄 알아야 한다. 또 생활 중에는 좋은 사람과 교류를 가지며 정해 둔 인생목표를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추진한다.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실패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기 때문에 새로이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장점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다른 점은 등한히 하면 기울어 진다. 좋은 건물은 시멘트로 튼튼하게 짓기만 해서는 안 된다. 환기 시설, 배수 시설, 그리고 설비의 적당한 배치 등이 모두 요구된다. 다른 면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입신출세만이 성공은 아니다. 이 시대의 상황에서는 학교교육만으로는 청소년의 인격 연마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지식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인성을 키워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인성교육은 소명의식과 이타심을 많게 하고 변화를 따라 잡으며 성실하고 법을 잘 지키게 만드는 교육을 말한다. 올바른 가치와 성공에 대한 개념이 섰을 때 그는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다.우리는 극단적인 사고에 물들어 있다. 시험문제에도 OX 답안에 숙달되어 있다. 양자택일보다는 자기의 의견을 잘 개진하도록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다가 자질 향상을 위한 노력이 절대 필요하다. 그래야만 어떤 일을 밀고 나가는 용기와 앞날을 밝게 전망하는 태도를 키울 수 있다.살면서 우리는 사람들을 매일 만나게 된다. 이때 좋은 사람에게는 장점을 배우고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버려야 할 부분을 배운다.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하고 부정적인 생각은 노력하여 긍정적인 사고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감이 뒷받침되어 좋은 습관이 몸에 베게 된다.어떻게 보면 인격을 위한 훈련은 장기간의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마라톤 경주에 비견할 수 있다. 좋은 인격을 양성하려면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 등 모든 면에서 절제정신이 필요하다. 현대인은 바쁜 삶이 최고인양 한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자기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그렇지 않으면 절제력을 키우는 자기와의 대화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된다.지금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는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심과 포용력도 가져야 한다. 주위의 사람에게도 정성을 쏟는다. 자기의 실수를 받아드릴 줄 알고 불리한 경우에도 그럴듯하게 얼버무리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인격자는 남을 위한 봉사에도 관심을 가진다. 그럴 때 그는 단정한 모습으로 밝은 표정을 짓는다. 자기 안에는 항상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배려와 양보, 상대에 대한 존중심이 중심을 이룬다. 인격의 수양으로 마음에 평화가 가득하면 그는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2013-08-23

흰 가루의 정체

▲ 서임중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한 마을에 원님이 부임했다. 고을에서는 연회를 준비했고 그 연회의 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하인이 세숫물을 담은 대야를 대령했다. 그런데 그 대야 옆에 흰 가루가 담긴 조그마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처음 본 원님이 “이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입에 탁 털어 넣고 물을 마시고는 삼켜버렸다. 그리고 나서 세수를 했다. 이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하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웃었다. “네 이놈, 무엄한지고! 감히 누구 앞에서 그렇게 함부로 웃느냐? 네놈이 웃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호통을 쳤다. 하인이 황급히 땅에 엎드려 “아니옵니다”라고 이유를 말하려 하지 않자 원님은 더욱 그것이 알고 싶어 호통을 쳤다. 마침내 하인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원님이 입에 넣은 가루는 소인이 특별히 콩과 팥을 갈아서 섞은 비누이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원님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들은 겉치장에만 신경을 쓰느라 세수할 때만 사용하지만 나는 속이 더 깨끗해져 마음이 수정같이 맑아야 하겠기에 속을 씻기 위해 먹은 것이니라. 콩과 팥으로 만든 가루이기에 얼마나 먹기 좋으냐? 우리 고을을 맑고 깨끗하게 다스리려면 내 자신부터 깨끗해야 하는 법이니라” 하인은 더욱 마당에 엎드려 오히려 자기가 웃었던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원님은 그 후 이 사건으로 인하여 더욱 맑은 정치를 하였다. 원님의 지혜와 덕(德)이 돋보이는 이야기다. 중국의 3대 기서(奇書)가 삼국지·수호지·서유기인데 그 리더들을 살펴보면 공통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서유기의 삼장법사, 삼국지의 유비현덕, 수호지의 송강은 덕장(德將)이라는 것이다. 삼국지를 오래전에 읽었다. 인물사로 본다면 지장(智將)의 제갈공명, 용장(勇將)의 관우와 장비, 덕장(德將)의 유비현덕이 등장하는데 지장의 머리도 용장의 힘과 우직함도 덕의 힘 앞에서는 모두 머리를 숙이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비가 제갈공명보다 똑똑하지 못하고, 관우만큼 리더십도 없고, 장비만큼 용맹하지도 않지만 삼국의 통일이 유비를 통해서 진행되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손자병법을 보면 용장(勇將)보다 지장(智將)이 낫고, 지장보다 덕장(德將)이 낫다고 했다. 그런데 덕장보다 더 귀한 것이 일반적인 통념으로 운장(運將), 혹은 복장(福將)이라고 한다. 아무리 지(智) 용(勇) 덕(德)을 겸비해도 하늘이 내려주는 복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평론으로는 운(運)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섭리론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다.현대 정치사, 아니 정치사는 목사가 평론하기는 너무 무겁고 근대 교회사를 보면 삼국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운장(運將)의 복을 받았음에도 덕(德)이 부족하여 통감(通鑑)의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智)와 용(勇)이 전부인줄 착각하고 힘을 사용하는 소위 꼴뚜기 리더십을 사용하다가 공동체를 혼란하게 하고 카오스 현상으로 마무리하고 자신의 모습도 제갈공명처럼 역사의 뒤안길에 남겨지는 경우를 흔히 본다.사울과 다윗은 운장(運將)이라 할 수 있다.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은총이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자신의 지(智)와 용(勇)이 전부인 듯 이기적 교만의 리더십을 발휘하다가 그의 리더십의 역사는 카오스 현상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다윗은 지(智)와 용(勇)을 넘어 덕(德)을 갖추어 치리하다가 그 운(運)이 하늘에 닿아 오늘까지 빛으로의 역사를 남겼다. 나는 어떤 지도자인가? 교회도 교단도 한국교회도 덕장(德將)의 리더십이 그리워지는 시대가 됐다.

2013-08-22

경제적 발전과 행복

▲ 이관홍 신부·포항 죽도성당 부주임 다문화가정 가톨릭 지원센터 담당지난달 25일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 대구·경북 지역의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과 결혼 이주 여성들과의 간담회를 위해서 대구가톨릭근로자회관을 방문하였다. 필자 역시도 포항·경주 지역의 필리핀 공동체 담당 신부로서 환영인사를 하고 간담회에 참석하였다.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은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고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제12대 필리핀 대통령을 지냈다. 피델 라모스 대통령과 한국과의 인연은 60년 전 한국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전쟁 당시 피델 라모스 대통령은 장교로서 참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려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간담회 중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은 한국 전쟁 당시의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황폐하고 가난한 나라였지만 근면한 국민성을 바탕으로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리고 새마을 운동의 정신을 배우고 싶다고 언급하며 “우리도 할 수 있다”를 수차례 외쳤다.한국이 한국 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룬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 성장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을까? 한국은 경제 성장을 위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만 했다. 특히 경제 성장의 주역이었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희생해야만 했고 이와 반대로 부정부패를 통해서 부를 축척했던 대기업들은 아직까지도 그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과연 한국인들은 행복한가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문득 필리핀 유학 시절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던 마닐라 외곽의 어느 빈민촌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루 한 끼 먹기에도 빠듯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 한국인들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국민성의 차이도 있겠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행복의 척도를 경제적인 수준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늘 여유 있는 모습,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경제적 성장과 풍요로움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은 전 세계 151개국을 대상으로 한 행복지수에서도 잘 드러난다. 남미의 코스타리카가 1위를 차지했고, 베트남이 2위, 방글라데시가 11위, 인도네시아가 14위, 필리핀은 24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는 63위에 그쳤다. 행복지수가 상위권인 국가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들지 못한 나라들이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전 세계에서 국민 총생산(GDP)이 가장 높은 미국은 105위에 그쳤고 최근 급속도로 경제 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은 종전의 20위에서 60위로 추락했다.문득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난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행복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을 두고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가난한 삶을 선택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가난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궁핍하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교의 교리에 비추어 본다면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사실 90만원을 모아놓은 사람은, 100만원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100만원을 모아놓은 사람은 1천만원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돈에 집착하는 사람과 물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은 돈만 바라보고 살게 되고 자신이 집착하는 물질만을 보고 살아간다. 사람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외로워진다. 많은 돈이, 많은 물질들이 자신들을 위로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결국 마음속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는 경제성장을 목표로 정신없이 달려오면서 “사람”을 잊고 살아가게 되었고 지금도 우리는“사람”보다, 구체적으로 “가족”이나 “친구”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질적인 부와 풍요로움이 행복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사람”을 바라보는 삶, 사람이 “행복”한 삶을 고민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

2013-08-19

세상의 소금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대화를 할 때 분위기에 맞지 않게 뜬금없는 말로 웃기려 하는 사람을 우리는 `싱거운 사람` 또는 `맛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런 같잖은 이야기를 들을 때는 피식 쓴맛이 나는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그러나 의미가 있어서 맛있는 말이라면 깊은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음식에서 맛은 파, 고추, 들깨 같은 것을 사용하지만 그 근본은 소금이다. 특히 매운탕이나 설렁탕은 소금을 많이 넣거나 적게 넣으면 맛이 사라져 버린다. 맛에는 염분 조절이 중요하다.성경에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는 구절이 있다. 이때의 `짜다`라는 것은 `맛을 낸다`는 뜻이다. 또 기독교인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다.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장소는 맛이 없는 곳이란 뜻을 강조하면서 맛을 내는 역할을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살아갈수록 살 맛없는 세상이다. 경쟁에 경쟁을 거듭하고, 취직할 곳이 없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가 힘들고 노년에는 빈궁과 고독으로 매일을 지루하게 보내게 된다.사람들은 부자이면서도 작은 돈 한 푼의 사용에 벌벌 떨면서 아끼면, 그를 `짠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다른 말로 `자린고비, 구두쇠, 이기주의자, 꽉 막힌 사람` 등으로도 부른다. 그렇다고 돈을 헤프게 써 버려도 안 된다. 사람은 짜게 살아도 싱겁게 살아도 안 되고 간에 맞게 살아야 한다.우리는 자주 사회와 가정에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를 뒤돌아보아야 한다. 맛을 내는 자는 세상을 `유별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일반 사람과는 다르게 사는 자`를 말한다. 한 인간으로서 자기의 일할 몫을 실행하는 사람이다.성경에는 신자에게 소금이 `되라`고 하지 않고 너는 소금 `이다`고 했다. 이는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말이다. 이미 소금이 되어 있으니 세상에 나가서 역할을 맡으라는 말이다.소금에는 여러 기능이 있다. 첫째는 부패 방지의 기능이다. 안동 간 고등어가 그 좋은 예이다. 둘째는 깨끗하게 하는 역할이다. 옛날 가난한 시절에는 닭의 창자를 씻은 후 소금을 친 후에 먹었다고 한다. 또 과거에는 칫솔질도 소금으로 했다. 넷째는 폭파하는 기능이 있다. 김에 소금을 묻혀 불에 그을리면 탁탁 튀는 소리가 난다. 폭탄에도 쓰였다고 한다. 다섯째는 녹이는 작용을 한다. 눈이 길에 많이 쌓이면 염화칼슘을 뿌려서 길을 뚫는다.성경에는 세상에 소금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고관대작이라야 하는 것이 아니란다. 오히려 소금은 청결하고 지위가 낮으며 마음 좋고 천하고 주린 슬퍼하고 진리를 목말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지칭했다. 그들 각자가 세상에 나가서 해야 하는 일을 `소금 역할`이라고 표현했다. 어부나 농부 등 소시민에게 `그들의 가치를 알게 하고 사회에 대한 사명과 의식을 가질 것`을 강조한 말이다. 평소에 이런 것을 생각지도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켜 주는 말이다.사람이 자기의 욕망이나 편견, 주장 속으로 빠져 버리면 그는 맛없이 걸림돌이나 방해물이 될 뿐이다. 그러나 자기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는 맛이 있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평소에 자기 수련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을 하느냐 마느냐`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문제는 또 다른 곳에도 있다. 현대인은 소금 맛보다 설탕 맛에 길들려져 버린 것이다. 단 것을 먹고, 마시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시대에 예수는 무슨 말씀을 하실까?

2013-08-16

부부 동행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부부의 삶은 둘이서 석양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는 동행하는 과정이다. 이때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 순수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동행자는 자기의 마음을 오직 한 사람에게 바쳐서 상대방의 심중을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다. 동행을 행복하게 하려면 상대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한다. 동행은 둘이서 한다. 그래서 자기의 몫만을 주장한다면 대화가 되지 않아 반려하는 동행은 될 수 없다. 동행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상대를 받아들일 공간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동행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주장하던 내용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있다.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갈등의 원인이 된다.동행을 잘 하려면 배우자를 내 시각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어라. 조금은 미흡해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갈등을 이겨내면 즐겁게 동행할 수 있다.살아오면서 좋지 않았던 과거를 계속 반추하다보면 행복한 발걸음은 불가능하다. 만족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동행하려면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서서히 소화해야 한다. 이때 서로가 “이런 점은 나의 잘못이구나”라고 생각하면 큰 문제가 없다.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 행복한 동행을 할 수 있다.`나만은 항상 옳다`는 생각을 줄이고 상대의 입장도 생각해 주는 이타적인 태도라야 동행을 가능케 한다. 1회용 인생은 그 어느 누구도 대치할 수 없는 자기만의 것이다.서로의 더 좋은 미래를 기원하는 부부가 되려면 주도권을 상대에게 내 주라. 긴장을 풀어주라.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배우자를 위해 헌신할 줄 알면 매일이 행복한 동행길이 되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과 동행한다면 괴로울 것이다. 또는 가정을 망치는 길로 향한다고 생각될 때는 고되고도 절망케 한다. 이때는 끊임없는 조율이 필요하다.살다보면 생각하기조차 지긋지긋한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의 사실을 우리는 추억으로 변화시켜 갈무리해 둔다. 먼 훗날 언젠가는 과거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 속을 거닐고 싶어진다. 젊은 시절에 쌓아놓은 추억은 이후 어느 날 행복한 동행의 씨앗이 된다.생활에는 불행이라는 먹구름 속에도 행복이라는 태양이 감춰져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햇빛은 사람도 환경도 변하게 만든다. 부부가 현실의 삶에서 서로를 위해 노력하면 현 상태에만 머무르지 않고 힘들어도 새로이 다짐하며 나아갈 수 있다. 노력이 중요하다.가장 즐겁게 살아가는 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동행을 위해서는 서로가 적절히 조율을 한다. 발걸음의 속도를 서로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동행 중에는 배우자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음을 감사하라. 행복한 부부의 삶은 숨겨지지 않는다. 그들의 동행은 전부 외부로 노출되어 다른 사람이 알아차린다.오늘만 살 것 같이 생각지 말고 좀 더 멀리 내다보라. 덕만 보려고 하지 말라. 오히려 돕는 자가 되라. 취미 활동이 다르면 한 사람이 양보해야 한다. 동행을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배워 볼 용기도 내어야 한다.이들 부부는 아직 가보지 못하고 향해 바라보고만 있는 미래가 있다. 미래의 무엇을 향해 응시하는가에 따라 동행의 방향은 결정된다.인생은 끝없는 학습이다. 부부란 배우면서 행복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배워 온 좋은 생각은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당신의 작은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면 오늘도 당신은 행복한 동행의 기쁨에 미소를 띌 것이다.

2013-08-09

아이들의 여름나기

▲ 권정찬 화가·경북도립대 교수무더운 여름이다. 올 여름은 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니 바깥나들이를 하기 싫을 정도다. 집이나 직장이나 에어컨을 켜 놓은 상태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참 시원하고 여름에도 이런 환경에서 일을 본다는 것이 좋은 시절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늘 감기기운이 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 탓이다. 아이들은 더위에 쉽게 지친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각별한 여름나기를 연구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에어컨에 집착하는 것이다. 문을 꽁꽁 닫아 놓고 에어컨을 켜고 선풍기 바람에 의존하다보니 아이고 어른이고 호흡기 건강에 지장이 많다. 이럴 땐 우리가 어릴 적에는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릴 적 여름이면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매미소리 들어가며 할머니 무릎을 베고 할머니가 흔들어 주는 부채 바람과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오수를 즐기지 않았는가? 아니면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깔아 놓고 삼베를 배를 덮고 낮잠을 자거나 가족끼리 이야기를 오순도순 나누며, 우물 속에서 꺼낸 수박 먹으며 여름나기를 하지 않았는가? 소나기가 내리면 옷을 벗고 마당에서 비를 맞으며 폴짝 폴짝 뛰며 좋아 했고, 개울물이 넘치면 온 동네 사람들은 개울가로 가서 물 구경하는 것도 피서의 범위였다.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면 모두들 좋아라하며 어른들은 잘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곳에서 아이들은 그 아래서 물장구를 치며 놀든 시절이었다. 밤이면 원두막에서 수박이나 참외를 먹고 하룻밤을 자기도 하며 산짐승 소리에 더위를 잊었다. 바깥나들이를 하고 들어오면 모두 우물가로 가서 엄마나 형수가 부어주는 바가지 물에 등물을 하니 그 차가움과 시원함에 숨이 턱 멎는다.이처럼 아버지 어머니 세대에서는 어릴 적 추억 속에 여름을 이기는 법을 몸소 터득해 왔다. 부채를 이용한 자연 바람의 활용법을 잘 알고 나무 그늘의 시원함도 여러 가지 유년시절의 체험을 잘 알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나 밀폐된 공간에서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하루 종일 틀다시피 하며 아이들에게 여름을 나게 하는 것이 지나친 사랑인지 모를 일이다.과일도 사다 놓고 아이스크림도 사다 주고 불편함이 없다. 그리고는 공부에 매진하도록 하는 것 아닌가? 영어, 수학, 미술 피아노, 바둑 등 할 것도 배울 것도 많다.무더운 여름이고 방학이라지만 우리는 아이들에게 요구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일과 스케줄을 빈틈없이 짜놓고 아이들을 학습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여름나기인지 모를 일이다.그래도 여름 한철은 우리식구들에게는 산사 보문사의 모락재(주택이름)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이다. 매년 여름이면 어김없이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간단한 짐을 꾸려가서 여름나기를 한다. 사방을 둘러싼 아름드리 소나무들, 병풍처럼 보이는 산, 온갖 나무나 풀, 아름다운 꽃, 다람쥐, 이름 모를 새들, 개구리, 가재 등등 아이들에게는 호기심의 천국이다.수확을 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박덩어리를 차 트렁크 가득 실고 오니 여름 내내 수박걱정 없고, 집근처의 이곳저곳에는 버섯이나 부추, 머구, 상치, 쑥, 민들레, 엉겅퀴, 가시 오가피, 밤, 호두, 도토리 등 채소나 약초를 쉽게 보거나 구할 수가 있다이러하니 아이들은 휴양지나 놀이터 보다 보문사를 더 좋아 한다. 선풍기 하나 없는 곳, 자연 바람과 새소리, 벌레소리, 산짐승 소리에 흠뻑 취하게 하는 작은 정자에서의 밤은 어른이나 아이들에게는 더 없는 여름나기인 셈이다.

2013-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