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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간의 종류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근래에는 살아가기가 참 좋은 세상이 됐다. 한 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나 딸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으며 반 팔 셔츠를 입기도 한다. 여름에는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TV를 보면서 낮잠을 잘 수도 있다. 과학의 힘으로 계절 변화의 느낌을 무력화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느 때나 수확이 가능하다. 계절은 내 맘대로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주인인양 행세한다. 아무 때나 하고 싶은 일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삶에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화내거나 기쁠 때가 있어야 하듯이 4계절이 뚜렷해야 수확이 풍성하고 좋은 한해를 보낼 수 있다.시간은 형체가 없다.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시간이지만 우리는 이 시간을 계획하여 당길 수도 있고 연기시킬 수도 있다. 때로는 정보를 빨리 취득하여 일을 남보다 먼저 성취함으로서 경쟁에 이기려 한다. 또는 시간을 잘게 쪼개어 활용을 잘하면, 한정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양의 일을 될 수 있는 한 빨리, 정확히 처리할수록 더 많이 칭찬을 받는다.시간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루가 24시간, 1년은 365일 등 헬라어로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chronos)는 시 분 초, 낮과 밤, 계절, 등 일반적인 시간을 말한다. 수평적, 사회적, 양적인 시간이고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이다. 시간 관리를 잘 한다는 것은 바로 이 시간을 의미한다. 또 이것은 지루할 때는 느리게, 기쁠 때는 빠르게 지나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응급실 환자의 한 시간은 영원과 같을 것이고 파티장의 그 시간은 순식간으로 차이를 느낄 것이다.또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경험하게 되는 학생이어서 공부하는 시기, 결혼 시즌, 양육할 때, 은퇴 시기 등의 시간을 호라(hora)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이것은 대체로 크로노스에 포함된다. 크로노스와 호라는 측량 가능한 시간이다.그 외에도 시간의 표현어로는 카이로스(kairos·제우스신의 아들이름)가 있다. 신이 정해 둔 시간을 의미하며 모든 생명의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징계를 받는 때, 축복을 받는 때 등의 시간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크로노스 기간을 짐승처럼 살면, 죽음이라는 카이로스의 마지막에는 비참한 종결을 받는다고 했다. 이 시간은 신과의 수직적이고도 질적인 시간을 의미한다.크로노스 시간은 인간이 관리하기가 불가능하지만 복을 받는 등의 카이로스 시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다. 카이로스 시간을 잘 사는 자는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 되어서 가치 있고 효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시간을 많이 가지면 알찬 인생이라 한다. 카이로스의 다소가 인생의 질적인 수준을 좌우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이것을 놓친채 허겁지겁 크로노스를 발버둥 치듯이 살아가기 때문에 알찬 카이로스 시간을 놓친단다. 간단하다. 때를 거스리면서까지 자기의 세속적인 의도를 관철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란다.죽음이라는 기한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에게 시간은 공간과 함께 인간을 속박하는 한계이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자기의 능력에 맞게 적당한 일을 행하여서 선을 이루기를 권한다. 작자 미상의 시 구절이 생각난다.“오늘은 좋은 날, 햇빛에 눈이 부셔 좋은 날/ 바람 불어 머리 날려 좋은 날/ 비내리니 질퍽거려 좋은 날/ 태어나기 좋은 날/ 살아가기 좋은 날…/ 딱 죽기 좋은 날”보기에 따라 하루하루는 좋은 날의 연속이다. 이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결정된다.

2013-08-02

슬픔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엄청나게 큰 결단을 했을 때,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 내는 순간,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기고 살아났을 때에는 결단이나 성공으로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별이나 상실이 안타깝고 슬퍼서 상대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길 때, 사태가 자꾸만 꼬이면서 진행될 때, 격한 흥분이나 분노가 밀어 닥칠 때, 애타게 호소하고 기도할 때 등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이는 정서나 경험을 표현하는데 꼭 필요한 방법이다.슬픔은 누구나 갖고 있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슬프면 마음이 아프고 가라앉아서, 사소한 일에도 눈물이 난다. 슬픔에서 회복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별 같은 큰 상실의 회복에는 2년이 걸린단다.슬픔은 파도같이 밀려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울기, 털어놓기, 기도하기를 반복하다보면 슬픔은 줄어들게 된다. 슬픔은 또 대화를 하면 마음의 부담이 적어지면서 훨씬 편해진다.인생에는 자연스러운 이별이나 상실이 있는가 하면 엄청나게 크게 또 부자연스럽게 갑자기 찾아오는 상실도 있다. 상실은 어떤 것이나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때로는 깊은 슬픔으로 나약함에 빠지고 때로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제방 둑이 무너져서 거리로 넘쳐흐르는 수해를 당할 때와 같은 무력감을 갖기도 한다.슬픔은 그 대상이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때 느끼는 마음이다. 슬픔은 사랑하던 사람, 천진무구함, 마음의 평화, 경제적 안정, 신체적 건강 등 과거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과 이별을 의미한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모두는 동정하고 공감을 보낸다.슬픔이 그에게 도움을 줄 때도 있다. 그것은 단순한`극복하기`를 넘어서`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결심을 하도록 마음을 열어 줄 때`이다. 그는 슬퍼하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상실로 인한 슬픔은 보통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지만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도 필요 이상의 괴로움이나 상실감을 안기게 된다. 슬퍼하면서 외로움을 느낄 때 그는 무력해 진다. 슬플 때는 우울하거나 당황, 불안, 좌절을 느낄 수도 있다. 그는 스스로에게 상실감을 갖도록 한 상대방을 비난할 수 있다. 상대가 하지 않았던 일, 했어야 했다고 여기는 일 등을 들먹이며 비난하기도 한다.특히 퀴블러 로스는 대체로 죽음을 선고받은 자의 슬픈 마음은 부정, 분노, 타협, 좌절, 우울, 수용(받아드리기)으로 단계별 이동과정을 거쳐서 상실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러나 심한 슬픔의 덫에 걸려버리면 슬픔의 마지막 과정인 수용단계를 거부한다고 했다.우리가 크나큰 슬픔을 이겨나가려면 영혼에 울면서 호소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자신과의 대면을 각오해야 한다. 홀로 고독 속에서 슬픈 마음으로 있는 시간은 좋은 성찰의 기회가 된다. 그러나 이때 외로움을 느껴서 불안하다면 자신이 세상에서 동떨어진 존재로 여겨지는 때이다. 이때는 친한 친구나 가족 또는 상담자와 같이 있는 것이 좋다. 외로움의 반대말은 단순히`옆에 있음`이 아니라 마음을 주고받는 `친밀함`이기 때문이다.상실을 있는 그대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슬픔에서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때 뻥 뚫린 가슴의 빈자리는 치유되어 메워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죽음을 경험해야 부활이 가능한 종교적 원리와 동일하다.상실의 슬픔과 대면하다 보면 자기의 인간관계를 평가해 볼 기회가 나타난다. 그 경험을 잘 이겨 낸다면 그는 인간관계를 더 성숙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된다.

2013-07-26

마음이 건조하면 안된다

▲ 서임중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감사하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들이 다 감사할 것뿐이다. 불평스러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들이 밉살스럽게 보인다.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인해 마음이 먼지를 일으키고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은 거칠어지고 생활은 메말라지는 것을 경험한다.일에 지치다 보면 그런 경우를 더욱 경험한다. 선교지에서 귀국하자 말자 주일을 보내고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안동의 대학원 대학교 감사원 감사를 받는 중에도 여수노회 여전도회 여성지도자세미나 강사로, 순서노회 아동부교사 강습회 강사로 금요일까지 그 먼 거리를 오가고 봉사하면서 결국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했고 주보 마감시간을 맞춰 목회단상을 쓰다가 결국 코피를 쏟아내야 했으니 천하장사라도 견뎌낼 수 없는 일정이기에 마음이 각박해 진 것이다.그러다보니 몸도 마음도 시간도 돈도 소진되다시피 해 목사는 마음이 건조해 일주일 내내 기도만하고 남편 얼굴 한 번 마주할 수 없이 보내는 아내에게 이유도 없이 역정을 내게 됐다. 그래도 천사 같은 아내가 “그래. 내가 휴지통이니까 당신 찌꺼기 다 내게 쏟아 넣으세요”라고 웃고 받아넘기지만 그 얼굴 또한 쓸쓸하고 외롭고 지친 모습을 보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지 않기에 그것도 내 스스로를 못 견디게 하는 자괴감에 마음조차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경험한다.`나는 왜 이렇게 유별나게 사역하는가` 종종 스스로 묻는 질문이지만 명쾌한 답이 없기에 언젠가 우리교회에 방문해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나의 몸이 녹슬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닳아서 못쓰는 것이 나의 삶의 철학`이라고 하신 방지일 목사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답이 되는 것을 새삼 생각한다. 그러기에 마음이 메말라 생각도 말도 먼지를 일으키는 것같이 되어가는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다시 마음을 추스르면서 또 가야할 길을 간다.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 중의 하나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왜 살아가는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정직한 대답도 할 수 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진정 우리의 삶의 중심에 가장 아름답게 남겨질 시간의 자국들은 감사함으로 남겨져야 하는 것이다.편할 때는, 좋을 때는, 넉넉할 때는 하나님을 잘 믿는 일등 신자의 모습이었지만 작은 어려움을 경험하는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제까지 살아온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었고 세상의 것이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슬픈 일들이 너무 많았다. 조그마한 어려움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등졌고, 작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했었다.육신적 손해가 조금만 있어도 불 신앙적 행동을 거침없이 했고,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영광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행동했다. 그 모든 일들은 마음이 건조해 지는 과정이다. 마음이 건조해지면 감사가 없고 마치 마른땅을 거닐 때 먼지가 일어나듯 건조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원망 불평일 수밖에 없다.감사하는 삶은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감사하는 신앙에 이르면 더 없는 지고한 신앙이라고 했다. 감사는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오늘도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우리를 교훈 하신다.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너무 지치면 마음이 건조해 진다. 그것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그래서 주님도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한 주간을 보내고 맞으면서 쉼의 소중함과 함께 기도와 찬양과 말씀으로 마음이 물댄 동산 같을 때, 삶 또한 넉넉해지는 것을 다시금 생각한다.

2013-07-25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 이원락 경주 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매일의 생활은 다람쥐 챗바퀴 돌리듯이 지나간다. 어김없이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고 오전 일을 하고는 점심을 먹는다. 저녁을 먹고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잡담을 한 후에 잠자리에 들면 또 하루는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어떤 뜻 있는 일을 하고 싶으나 살기에 바쁘고 생활이 어려워서 마음에 여유가 없다. 이런 것은 돈 많은 사람도 똑 같은 처지이다. 그 돈을 지키려면 고심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두 쫓기듯이 살아간다.어느 학자는 20세기를 박테리아 시대에서 바이러스 시대로 흘렀다고 했다. 박테리아 시대에는 항생제의 개발로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되찾았고 바이러스 시대에는 면역학이 발달하여 예방으로 극복해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21세기 오늘 이 사회는 알아야 할 것이 넘쳐나서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혼동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를 그는 신경증의 시대라고 불렀다.우울증, 성격장애, 행동장애가 불어나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울증은 자기를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비하하면서 자살 등 스스로를 공격하기도 하고 성격이나 행동 장애는 타인을 괴롭히고`묻지마 살인`을 하려 한다. 이것은 건전한 정신을 갖지 못했거나 영혼을 부정하는 경우의 행위이다.또 생물체에서는 면역적으로 동일하여 위험하지 않는 상대일지라도 낯선 것은 무조건 타자(他者)라는 이유만으로 제거 대상이 된다. 현재 생명체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살면서 우리는 죽고 싶도록 슬플 수도, 아플 수도, 괴로울 수도, 기쁠 수도, 덤덤하거나 화가 날 수도 있다. 이런 감정의 신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행동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살인을 할 수도 용서함으로써 승화 시킬 수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교정하려 애를 쓸 수도 있다. 삶에서는 뭣이든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내용이 전혀 다르게 행동이 나타날 수가 있다. 선(善)과 승화의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넬슨 만델라라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인종차별이 휩쓸던 남아연방에서 만델라는 1964년에 정치범으로 투옥된 후 27년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1990년에 출옥되었다. 그 후 대통령이 된 그는 정적인 백인들과 총칼을 겨누는 전쟁도 가능했으나`화해와 관용`이라는 정신을 기초로 인종 차별을 없애고 국민을 통합하는 정치를 행했다. 보복과 응징을 촉구했으나 그는 흑인들에게 무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외쳤다.6개월에 한번 씩만 편지를 주고받고 어머니 사망 때에도 출감을 못하던 곳인 형무소를 출옥 후에 그는 그곳을 그리워했다. 감옥에서는 인간애, 동지애, 그리고 공부할 시간이 있었고 또 조용히 편지를 쓰거나 묵상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에 감옥 생활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다면 그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때를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본 것이다.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자기의 행동 방향을 정반대 방향으로도 끌고 갈 수가 있다.삶에서는 모든 시간이 자기에게 유용할 수 있다. 부스러기 같은 시간도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일에는 뒷마무리가 좋아야 한다. 사찰에서 예불을 드리는 스님들은 쌀 한 톨도 그냥 버리지 않고 숭늉으로 마신단다. 살면서는 모든 일에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결단의 심정을 가지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러다가 먼 하늘도 가끔 바라보면서 마음을 정리하자. 인생의 목표는 꼭히 커야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대통령이 되어 버리면 시민은 한사람도 없게 된다. 현실에서 남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자기 능력에 맞게 목표를 정하여 나아가야 한다.

2013-07-19

신앙을 가진다는 것

▲ 이관홍 신부·포항죽도성당 부주임 다문화가정 가톨릭 지원 센터 담당한국에는 종교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많은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종교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밤하늘의 붉은 십자가라고 한다. 해가 지고 높은 빌딩이나 산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사실에 동의 할 수 있을 것이다. 밤하늘의 붉은 십자가를 두고, 일부의 사람들은 공해라고 비난도 하고, 에너지 낭비라고도 한다. 실재로 서울의 일부 개신교 교단에서는 십자가에 붉은 불끄기 운동을 전개했다고도 한다.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교회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판에 불과한가? 그리스도교에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의 고통과 죽음과 희생, 그리고 부활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처럼 희생하는 삶, 내어 놓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십자가를 보면서 끊임없이 다짐해야 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드러나는데, 외적인 면에 치중하다보면, 쉽게 내적인 면의 중요성을 잊고 살아가게 된다. 누구나 내적인 면이, 마음이 외적인 면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내가 예수라는 존재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십자가를 내 가슴에 품고, 예수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기업화되고 대형화되면, 그 순수성을 상실하게 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는 박해라는 것이 존재했다.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쳐야 했고, 다락방과 같이 작고 누추한 곳에서 기도를 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켜왔다. 오히려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신앙이 더 순수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지난 7일 죽도성당에서는 50여명의 신자들이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입교 절차가 조금은 부담스럽다고 한다. 적어도 3개월 이상, 기본적인 교리를 공부해야한다. 그리고 세례를 받기 전, 주임신부와 면담을 통해서 교리를 충실히 공부했는지, 세례를 받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지를 확인받아야 한다. 본인 역시도 30여 명의 세례 대상자들에 교리를 가르쳤다. 교리를 가르치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삶의 변화`이다.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도 `삶의 변화`에 대해서 자주 강조하는 편이다. 종교를 가지고 그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던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으로 변화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은 욕심을 버리고 나눌 줄 아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이 가진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더욱 더 철저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사람들은 자신이 변화되기 보다는 자신의 주변사람들이 자신에게 맞게 변화되기를 원한다. 환경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면 자신이 변화되고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는 막연하게 자신이 처한 환경이 변화되기만을 기대한다. 타인이 변화되기를 원하고 자신이 처한 환경이 변화되기만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분열과 갈등,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이다. 종교의 힘은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됨으로서, 이웃들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조금씩 서서히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에서 말하고 있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닐까?인도의 두 성인의 말이 문득 생각난다. 첫 번째 성인은 `간디`이다. 간디는 “나는 예수는 좋아하지만, 예수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번째 성인은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이다. 마더 데레사는 “힌두교인은 더 나은 힌두교도가 돼야 하고, 무슬림은 더 나은 무슬림이 돼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돼야 한다”고 했다.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2013-07-18

미래의 동양 사상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속도 전쟁의 시대이다. 남녀 권리의 문제나 정보 시스템 등의 사회문제는 과도하게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과학도 힉스 입자이론을 만들었고, 우주의 끝을 밝히려고 덤벼든다. 줄기세포로 신경을 재생시키고 달의 뒷면까지도 탐사하려 한다. 그런가 하면 인간 사회도 자본주의 안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큰 폭으로 넣어야 할 정도로 많은 수정을 해 왔다. 온통 스피드가 넘쳐난다.우리는 사회의 여러 요소를 조합하여 역사를 만들어 간다. 그 중에 교육은 모든 지식의 근본이 되는 철학(義)을 기초로 하여 학문이나 분별력(智)을 쌓아서 사리판단력을 키워 왔다. 그래서 지도위에 그려진 국경의 색채는 약해지고 지구의 반대편에도 하루 만에 가 볼 수 있다. 인간끼리 또는 생명체 서로는 사랑을 중심으로(仁) 화합하여 공생하려고 노력한다. 서로 믿고(信) 정을 나누면서 살려고 종교에 의지하거나 안정을 위해 법을 만들기도 한다.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겸손이나 사양, 배려(禮)를 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시나 노래를 만들기도 한다. 동양의 현자는 옛날에 벌써 인간 세상의 영원한 도(道)를 오상(五常)이라고 하여 인의예지신으로 설명했으며 후손인 우리는 그 법칙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하루하루가 단위로 되어, 영원을 향해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간다.근래에는 과학의 힘이 압도적으로 커지고 있다. 그것으로 우주의 나이와 지구의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 세상만사가 과학으로 설명되면서, 종교의 신(神)도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시간이 곧 닿치리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서 종교에서 말하는 기적이란 과학의 법칙에 역행하는 방법이므로 그들은 인정을 하지 않는단다.그러나 과학이외의 인의예신(仁義禮信)은 모두 과학으로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인간의 사랑, 사람 사이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원리(哲學), 미술이나 음악이 인간 심성에 미치는 영향력, 도덕적 감정이나 종교심의 깊은 정도 등은 정확한 수치로 표현할 수 없다. 이런 것은 유교나 불교 등의 의미가 깊은 동양 사상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좀 더 쉽다.인류가 역사에 등장한 후, 서양에서는 과학적인 발전을 지속시켜 왔다. 그래서 중세기나 근대사에서는 서양의 역사나 철학이 인류를 이끌고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근래에는 동양에서도 문화의 꽃이 피어나고 있다. 동양은 서양의 철학을 이제까지 배워 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동양 특유의 문화가 서양의 방식을 소화 흡수하여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미래에는 살아가는데 환경적 요소가 생활에 밀착할 것이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자가 더 돋보이는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 소유욕이 있다고 해도 재물의 다소가 인간 평가에 기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넘쳐나는 정보로 두통을 앓고, 인간관계가 복잡다단하여 심리학책은 매우 두꺼워 질 것이다. 다만 성적 해방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는 지금 이 시대 우리의 관심사이다.이런 시대에 동양사상은 의리, 신망, 푸근함, 슬픔, 기쁨 등으로 인간 사이에 규율을 잡아 주는 통합적 원리가 될 것이다. 관계를 유지 시켜 주고,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 기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분석적인 과학보다는 의미를 인간미에서 찾는 시대가 올 것이다.인간은 많이 아는 척 하지만 머리를 굴리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또 아무리 고도의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해도, 그 마음 안에 윤리나 따뜻한 사랑이 없거나 믿을 수 없다면 과학은 흉기가 될 것이다. 좋은 시 한 수에 눈물을 흘리지 못하거나 감미로운 소리에 심취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그림에서 무표정하다면, 외부로 표현되는 지식은 한 갓 껍질뿐일 것이다.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과학에서보다 인문적인 생각에서 나온다. 앞으로 동양사상은 인간 사회에 훈기를 북돋울 것이다.

2013-07-12

`찌라도`에서 만난 하나님

▲ 서임중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지난달에는 노회 시찰 수련회를 소록도로 다녀왔다. 한국과 세계 기독교회 역사를 해박하게 통달하고 다음 세대에 그 역사를 문건으로 남기는 보배로운 사역을 하시는 김재현 박사가 직접 안내를 해 주시면서 소록도 중앙교회를 제일 먼저 방문했다. 천우열 전도사님의 짧은 말씀과 함께 긴 묵상이 시작됐다. 신학교 재학시절 지역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 방문해 보는 소록도였지만 그 동안 말씀 사역에 쫓기면서 잠간 마음자리에서 비켜 있었던 소록도의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감동과 함께 유구무언의 시간이 이어지면서 고뇌 아픔 통렬 감사가 뒤엉킨 회개가 침묵 가운데 진행됐다.세월이 좋아 소록도에 오기 전에 인터넷과 언론 책자를 통해 소록도의 기본 상식이야 누구나 다 인지하고 오지만 소록도 중앙교회를 담임하시는 천우열 전도사님으로부터 소록도의 고난의 역사를 직접 들으면서 몸이 떨리고 마음이 후들거려 차마 귀로 듣기에는 견뎌내기 힘든 소록도의 처절한 세월이 새삼 온 몸과 마음을 후리는 아픔으로 몸과 마음에 베어들었다.일제시대에 병들어 소록도에 와서 정관수술을 당하고 식량갈취, 강제노동, 신사참배 강요를 당하면서도 초지일관 하나님만 바라보며 죽음의 고비들을 넘겼다.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았지만 자치권요구를 위해 협상단이 구성됐다가 84명이 학살당하는 기막힌 일을 당해야 했고 흉골천자 과정, 1950년 공산주의에 의한 인민재판, 1954년 4·6사건의 환란이 연이어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예배당 전체를 몰수당하는 하늘이 무너지는 큰 고통과 더불어 짐승취급을 겪어야 했던 소록도의 역사는 당하기만 했던 한(恨)을 뛰어넘어 핏빛어린 역사였던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센병(Leprosy)의 시조가 모세라고(출4:6) 자위하는 소록도의 사람들은 원망 불평 비난 하지 않으면서 시5:15, 약5:13, 시40:1~2, 사48:10, 잠17:3, 시119:71, 살전5:16~18, 시48:14을 뼛속까지 새기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이겨냈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인 믿음생활의 메시지가 있었다.소록도의 하나님을 만나려면 소록도에 와야 하지만 소록도를 찾는 전국 세계 방방곡곡의 사람들 모두가 소록도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록도에 와서도 다시 `찌라도`까지 가야 비로소 소록도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여기까지 오시기도 힘든데 다시 저와 함께 `찌라도`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참석자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해 답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나는 이미 그 뜻을 알고 있었기에 앞자리에서 “가야지요”라고 전도사님의 질문에 호응을 했다. 그것은 섬(島)이 아니라 하박국 3:17을 의미하는 것이다.`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록도의 사람들은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원망 불평 없이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이것이 소록도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이다. 즉 `찌라도`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이 `찌라도`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전6:6, 욥23:10, 행14:22, 계7:14, 롬12:12을 날마다 노래 부르면서 그 어떤 `찌라도`의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불평 원망하지 않고 살전 5:16~18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올해도 벌써 한해의 반을 넘기고 하반기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된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어떤 `찌라도`에 있을지라도 소록도의 성도들처럼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2013-07-11

우주와 종교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물과 산소를 사용하여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는 우연히 만들어 졌는가, 또는 신의 작품인가?`는 어쩌면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가 아닐까? 하루도 지겨운데 137±1억년이라는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의 나이는 거의 영원과 같다. 그럼 시간이란 무엇인가? 영원의 끝은 어디인가? 시간 바깥은 어떨까? 우주 생성 이전에는 어떠했을까? 우주가 존재한다면, 반대로 아무것도 없음도 가능할 것인데, 그 곳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그곳은 텅 비었을까, 또는 모두 다 해 버린 상태, 끝 간 곳일까? 우리는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 곧 지구에서 살고 있다. 7차원의 공간과 3차원의 시간은 없을까?비어 있다는 것도 `공간이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비어 있다`의 `있다`가 문제가 된다. 이 말은 `없다는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 없음에서 있음은 가능할까?또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 이외에도 여러 개의 은하가 있단다. 우리의 은하는 지름이 10만 광년이고 천천히 움직여서 약 1억년에 한 바퀴를 돈다고 한다. 거리가 0인 우주가 처음 빅뱅(대폭발)으로 무한히 뜨겁다가 1초 후에야 약 100억도로 줄어들었단다. 상상을 초월하는 폭발이후 우주는 10의 입자로 구성되었고,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 거의 무한 크기의 우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어떻게 밝혀내었는가? 0이라는 것은 `없음`이 아니라, 0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존재방식은 어떤 형태일까?성경에는 지구가 창조되었다고 주창한다. 신의 사랑이 폭발하여 지구가 만들어 졌다고 말하는 것 같다. 불교에서는 하나가 일체이고 모두가 하나와 같다고 한다. 원자의 구성과 우주는 같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도 과학적인 근거가 약한 것 같다. 하기야 과학은 최근에야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니까 종교 탄생 때 과학은 사람의 사고영역 밖이었을 것이다. 종교도 그 탄생 시절의 문화와 인식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빛이란 무엇인가? 이제까지는 빛으로 생성되는 삼라만상 속에서 인간들은 살았고 빛으로 만들어진 것을 찬송, 경외, 숭배했었다. 이제는 그 빛을 분석하여서 이것은 입자와 파동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빛은 중력장이 강하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공 모양의 소위 블랙홀이 된다는 것 까지 알게 되었다.그러나 아직도 대답을 하지 못하는 분야가 너무 많다고 한다. 열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 왜 우주 생성의 초기에는 그렇게 뜨거웠을까? 왜 우주는 균질인데도 지구와 같은 흙덩이가 곳곳에 뭉쳐져 있는가? 왜 우주는 팽창일로에 있는가? 시간과 공간은 끝이 있는가? 왜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면서 미래는 모르는가? 등 우리가 알고 싶은 것도 그만큼 늘어났다.지금은 우주가 팽창하는 기간이다. 그러면 약 100억년 후에 있을 우주가 수축할 때는 우리의 삶은 지금과는 거꾸로 죽고, 늙고, 젊어지고 태어나겠는가? 우주는 잘 정의된 법칙에 따라 진화하는 것으로 언젠가는 우주에 대해서는 완전히 통일된 이론이 만들어 질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설명한다.그렇다면 그 이론은 단순화, 요약화 될 수 있다. 그러면 창조자가 필요 없고 인간이 우주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또`인간은 우주 사건들의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고, 항상 불확정성이 존재한다`고 인간 능력의 한계를 말하기도 한다. 알 듯 말 듯하다.종교는 인간이 죽음이라는 끝을 가진 생명체로서, 미래를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발생한 것 같다. 평범한 시민의 쓸데없는(?) 걱정을 기술해 본다.

2013-07-05

화평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씨를 뿌리면 들풀은 따뜻한 온기로 싹을 틔어 잎이 돋아난다. 그 후 꽃을 피운 후에 열매를 맺는다. 들풀이 자라면서 결실을 이루어 가듯이 살아가면서 우리의 마음도 세상만사와 같이 자꾸만 여물어 간다. 마음도 개인에 따라 방향이 다를 뿐 노력한 만큼 다양하게 성장해 나간다. 풀들은 전부가 잘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열매가 모래위에 떨어지면 생명은 시작부터 불가능하다. 또 심한 비나 바람 등 좋지 않은 환경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하거나 피워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장에는 주위 환경이 중요하다. 우리의 화평과 덕성을 키우는 인성형성에도 성장 환경이 중요하다.노자는 화평스런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인성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숙시켜야 한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단점이 있으므로 `자기를 항상 옳은(정의의) 입장에만 두지 말라`고 했다. 그가 가진 정의는 자기 나름의 개인적인 정의이기에 미성숙한 상태이고 화평의 도구가 될 수 없다고 했다.그는 곧기만 한 것 보다는 스스로 굽힐 줄도 알고 강함보다는 부드럽기를 주장했다. 강하여 세상 잡사 속을 헤매기만 하다보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진리와 참사랑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마음을 비우거나 슬픔을 함께하는 상태가 되면 화평한 마음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의 꽃을 피워 좋은 열매를 만든다고 한다. 그는 깨끗한 마음으로 남의 아픔을 공감한다고 했다.화평한 자는 의로운 일을 만나면 자신의 수준을 넘는 정의감으로 행동을 한다. 이런 행동의 결과로 그의 마음은 깨끗하게 되고, 평정상태에 머무를 수가 있다. 그래서 그의 온화하고 남을 이해하는 마음은 드디어 꽃을 피우게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불교에서도 온유하고 화평스런 마음을 위해서는 내면의 성장을 강조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악을 경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보통은 이 수준에 머무르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더 나아가기 위해서 불교는 덕을 쌓을 것을 주장한다. 그 후 참된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야 화평스런 깨달음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공자는 나이에 따라 인간이 성숙되는 과정이 있다고 하였다. 50에는 사물의 이치를 알 수 있고 60에는 만물에 귀가 열리며 70세에는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해도 막힘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마음의 폭이 넓어진단다. 이때 그는 인(仁)을 마음껏 펼침으로서 삶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했다.정신이나 학문의 세계도 이렇게 익혀가야 한다.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서 구도자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 과정으로는 훌륭한 사람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及門) 배우는 것은 시작 부분이다. 그 다음은 학문이나 정신세계에 더 깊이 들어간 후, 맹진하여 나아가 오묘한 뜻을 터득(入室)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러면 사회에 더 많은 어짐(화평)을 나누어 줄 수 있다.세상살이는 단계적으로 발전한다. 첫번째는 무엇이든 알아가는 단계이다. 그 다음은 정진하여 더 발전해 나가는 단계이다. 이 단계를 지나면 앎의 폭이 넓어진 것에 대해 화평스럽고도 즐거워하는 단계로 들어간다.현실에서 사랑의 온기로 열매 맺는 화평한 마음은 저절로 자라는 게 아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약한 자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의로운 일을 힘써 찾아내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야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화평의 꽃은 피우기 어렵지만 긍휼과 자비로 인간을 대하면 그 꽃을 피워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2013-06-28

윤리적 소비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행복에 대해서 저술된 모든 책에서는 `불행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데서 만들어 진다`고 설명한다. 견주어 보아서 자기가 낮은 위치에 있을 때 느끼는 마음을 말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생계를 꾸려 나가기가 너무 힘들다. 그래서 비교할 만한 꺼리마저 없을 정도로 그들은 불행할 뿐만 아니라 삶이 개선될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듦을 절감한다. 부자 나라의 가난한 사람도 힘들게 살지만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은 더 힘들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가난은 여러 요소가 얽혀 있어서 경제 정책 하나로 해결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시장구조는 소비자보다는 투자자, 노동자보다는 고용주, 농업보다는 서비스 산업과 첨단 산업을 우대하고 또 우리의 현실은 세계시장과 관계가 많기 때문이다.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원자재 공급에서 상품의 생산과 판매까지 지구촌 곳곳의 시장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는 먹고 입는 것 등 살면서 필요한 것 중 대부분을 수입해서 사용한다. 조그마한 매매도 국제적인 거래의 한 부분이 되는 이런 시장에서는 정당치 못한 생산과 거래가 많다.무역에서는 물품이 공정한 거래와 합당한 생산물인지를 소비자가 밝혀내기가 어렵다. 특히 수입물들 중에는 자신들의 이익을 높이기 위해 가난한 나라에서 초과 근무로 가혹하게 일을 시켜서 노동자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저임금으로 혹사하여 생산한 물품들이 많다.결국 다른 사람의 생계와 생존에 폭력적인 영향을 끼쳐서 생산한 결과, 부의 축적을 한 쪽으로 쏠리게 한다. 그러면 가난은 대물림하게 된다. 우리가 이런 물건을 구매한다면 거래에서 평등, 존중, 배려의 평화로운 관계가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래서 공정 무역으로 거래되는 상품을 사는 것도 시장의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된다.또 하청업체를 통한 대기업의 지나친 이익 챙기기나 문어발식 경영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 시장이란 생리적으로 경쟁이 치열한 곳이라고 정당화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심과 도덕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소비자는 소비에 못지않게 생산을 평화롭게 하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이를 위해서는 소비자인 우리는 매일 소비하는 상품들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는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생산과 판매의 전 과정을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얻은 정보를 다른 사람과 공유를 해야 한다.이럴 때 우리는 자신의 욕심 채우기와 정의로운 구매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생산되었다면 분명 정당치 않는 상품이다. 물품이 풍족하지 않아서 선택이 힘들다면 여러 번의 구매 중에 한 번 정도는 정의로운 상품을 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횟수를 늘려 나가려고 애써야 한다.우리는 거래처나 기업, 정부가 좋은 방법으로 일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내어서, 소비를 통해 지지나 반대를 표할 수도 있다. 좋은 소비 방법을 지지할 때 `윤리적 소비`라 한다.평화를 이루면 행복하다. 그뿐만 아니라 평화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당연히 평화로운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알고 있지만, 평소에는 구체적으로 삶과 연결시켜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지금 지구를 휩쓸고 있는 기후변화 등의 환경 문제도 대량 생산과 세계시장의 활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올바른 소비를 함으로서 후손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지구환경을 만들어서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2013-06-21

진심어린 사과가 상대 마음을 여는 열쇠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요즈음 신문 지상에는 사과하는 것에 대한 기사가 줄을 잇고 있다. 기업체 비리, 비행기 승무원 폭행사건, 성추행 사건, 5·18 역사 왜곡 보도 등에서 계속 나타난다. 사회 정보 시스템의 발달로 과거에는 숨길 수 있었던 것도 수면위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활동의 영역도 커지고 삶의 질도 매우 성장했다. 그런데도 가진 자들은 아직 자기들 사고가 시대의 변화를 따르지 못해서 그 간격만큼의 현실감이 떨어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사과하려면 시원하게 상대방 당사자에게 해야 한다. 사과를 후련히 하면 당시에는 비난을 받더라도 조금 지나면 분위기가 곧 숙질 수 있다. 그러나 진실성이 부족하든가 하여 잘못되면 사과하고도 욕을 얻어먹을 수 있다. 그럼 시원스런 사과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무조건 사과`가 제일 좋은 방법이다. `당신이 기분 나쁘면 미안하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언짢으면 사과해 주겠다`는 투의 사과는 사과의 형식만 빌렸을 뿐 오히려 사과를 빙자한 공격에 가깝다. 이럴 때 우리는 `건방진 사과`라고 한다. 사과는 고통을 당하는 상대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자기도 갖겠다는 의미를 가져야 한다.또 우리는 청문회 등에서 여러 번 사과의 표현을 들었지만 그것은공격당할 때 위기를 빠져나가기 위한 단어에 불과한 사과였다. 사과와 많이 닮으나 진심이 빠진 사과를 우리는 `짝퉁 사과`라고 한다.또 하나의 피식 웃어버릴 사과의 형태는 “~~한 실수가 있었던 것을 사과를 합니다”라는 사과이다. 그런 사과는 자기와는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으나 조금 연계됨으로 사과한다는 말투이다. 능동형이 아니고 `수동형의 사과`는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부하가 사과를 할 때, 자기를 임명한 자를 사과의 대상에 포함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청와대에서 성추행 사건에 대해서 “전 국민과 대통령에게 사과를 한다”고 했다. 전 국민은 사과를 해야 할 대상이지만, 대통령에게는 개인적인 일임으로 찾아가서 사과를 해야 한다. 이런 사과는 자기들끼리의 사과로서 속칭 `셀프(自家) 사과`라고 한다.유감을 표명할 수도 있다. 이는 사과의 시작 부분일 뿐으로서 자기는 사과를 했다고 하지만 상대는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진심어린 사과로 보기에는 약하다.어느 대기업은 사건이 일어난 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대 국민 사과를 했다. 타이밍을 놓치고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거래처 주인들 면전에서 사과를 하지 않고 엉뚱하게 국민에게 먼저 사과를 했다. 국민은 속속들이 알고 있고 똑똑하다. 국민 소득 수준이 낮은 시대의 방법으로 어려움을 면피하려 한다면 자신들의 후진성을 들어낼 뿐이다.사과는 좋지만 해명은 짧아야 한다. 명백한 오해가 있으면 해명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때는 해명의 뜻을 명확하고 짧게 해야 한다. `그러나~` 또는 `그리고~` 등등으로 해명이 길어지면 본뜻을 놓치게 되기 쉽다. 그러면 마음속에 찌꺼기를 남겨두게 되어서 또 다른 갈등을 만들 수도 있다. 사과는 확실하고 빠르게 할수록 좋다.그럼 진심어린 사과는 왜 어려운가? 첫째 이유는 완전한 자기 노출이 두렵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기의 잘못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자기를 합리화 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내 탓`이 아니라 `그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사과는 잘못을 지적한 다음에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문제가 커지기 전에 털어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2002년 민주당 김근태 상임 고문은 `최고위원 경선에서 불법 선거자금을 사용했다`고 처벌을 감수하면서 실토를 했다. 이것은 사과를 `용기`로 승화시킨 것이다.

2013-06-14

자녀의 가정 교육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청소년들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학교공부가 지겨워서 몸이 뒤틀린다. 잠에서 덜 깬 학생들은 빨리 아침을 먹고 학교로 가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놓치면 그 여파로 순위에 뒤쳐져 버리기 때문이다.부모는 자녀가 경쟁에서는 항상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해 조금이라도 더 공부할 수 있는 환경에서 키우려고 한다. 그러나 자녀들은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 부담과 자기를 바라보는 주위환경으로 예민해 져서 거의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다.우리나라의 청소년 사망 원인 중 1위는 자살이라고 한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최근 청소년 7천명을 조사해 보니 물질적 행복지수는 세계 4위였으나 실제적 행복 지수는 23위 였다고 한다. 이는 자녀가 먹고 싶은 것 등 원하는 것은 뭣이든지 부모가 다 해 주지만 실제로는 학교에 가기가 싫거나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이다. 초등학생 100명에게 `애국가 1절을 써 보라`고 하니까 거의 반 수가 틀리게 썼다고 한다.미국의 고등학교 청소년들이 범하는 13가지 죄목들은 ◆ 강간 등 성폭력 ◆ 물건 훔치기 ◆ 방화 ◆ 자살 ◆ 총기난사 ◆ 무단결석 ◆ 기물 파괴 ◆ 술 취함(주정) ◆ 임신과 낙태 ◆ 패 싸움 ◆ 성병 ◆ 마약 등 환각제 섭취 등이었다.미국에서는 남녀학생의 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임약을 주자고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 말은 `성관계는 해도 무방하나 성병이나 임신은 막아야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사회는 시끄럽고 부정이 춤을 추고 있다. 교육에도 문제가 많아서 청소년들이 방황을 한다.자녀들의 인생관은 어린 나이에서 성장하는 동안에 골격이 형성된다. 그리고 10세 이후에는 생각의 뼈대가 형성되어져서 그 후에는 새로이 좋은 정신을 갖게 하기는 힘이 든다고 한다. 그 후 나이가 들면 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살아가는 법을 배워 나간다. 그래서 장래의 문제를 풀어나가는데는 어릴 때 만들어지는 인격의 기초가 매우 중요하다.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잘 풀어 가야 한다. 그 방법은 사랑이 충만한 가정에서 부모를 통하여 배우는 가정교육이 가장 효과적이다. 신이 직접 만든 제도인 가정은 자녀에게 미래상을 형성시켜 주는 장소이다. 학교란 가정에서 형성된 인성을 토대로 하여 그 위에서 지식을 연마하고 인격을 더 향상시키는 교육기관을 말한다.우리의 소원은 문제를 잘 풀어나가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성숙에서 답을 구할 수 있다. 생활 중에는 평탄할 때도 있지만 비극적인 상황이 발생하거나 뼈아픈 역경이나 실패 등으로 어렵고도 괴로운 경험을 많이 한다. 이럴 때 인간은 부모의 교육에서 절망과 낭패로 앞이 캄캄한 낙망의 시간을 극복해 나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그래서 가정에서 만들어진 인성이 학교교육과 조화를 이루면 성인 사회에서 시끄러운 상급 기관에 정기적인 상납, 남모르는 예금 사취, 짝퉁 중고품 납품 등 잡스러운 기사들을 많이 줄여줄 것이다. 그러나 부모 역시 완벽하지 못해서 자녀 교육에 절대적인 길을 안내하기에는 능력이 약할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사랑이나 자비 등의 절대적인 종교교리를 기준으로 하여 양육하는 것도 가능하다.오늘날의 시회에는 시끄러운 `소음`만 넘치고 있고 인생을 안내하는 사랑의 `말씀`은 거의 없다. 선생님이 계실 곳에 선생님의 말씀은 적고 부모가 있어야 할 곳에 부모의 말씀이 없는 것 같다. 오직 잔소리, 헛소리, 달달 볶는, 웃기는, 시끄러운 소음 소리만 있을 뿐이다. 좋게 받은 자녀 교육은 일생동안 인생의 항해에서 지도책 역할을 할 것이다.

2013-06-07

성 문제의 관리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점심시간에 여직원이 나에게 “원장님, 점심 잡수러 안 가시겠어요?”라고 가기를 권했다. 아래층 식당으로 가면서 미국에서 있었던 청와대 대변인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농담을 주고받던 중에 나는 농담 삼아 “남성은 성문제에 있어서는 장년이 돼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더니 여직원은 웃으면서 “그 말도 여자가 듣기 싫어한다면 성희롱으로 걸릴 것 같아요”라고 했다. 이전에는 문제시 되지 않던 성에 대한 가벼운 말도 세월에 따라 변하는 모양이다.시대 풍습은 상전벽해로, 온통 딴 세상으로 변했다. 내가 젊었을 때는 남녀가 수줍어하면서 숨다시피 만나던 것이 이제는 공공연히 길에서 끌어안고 걸어가는 정도로 변했다.성 문제는 빈부귀천 없이 모두의 문제이고, 식욕과 같이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다. 식사를 한 끼만 굶어도 배고픈 것과 같이 성 문제도 자주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성 문제는 언제나 은밀하게 이뤄진다. 모두의 관심사이면서도 상대의 동의 없이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산업화 사회에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로 직장 등에서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는 일이 많아져서 점차 성 개방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거기다가 피임기구의 발달로 빠르게 성 해방 시대로 진입하게 됐다. 그뿐인가? 발기 부전 치료제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늙은이도 합세를 해서 이제는 성 폭발 시대로 돌진하고 있다. 근래에는 남녀 문제가 나이를 초월해 버렸다. 성욕은 시도 때도 없이 분출함으로써 관리에 자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청와대 대변인인들 남자가 아니겠는가. 성의 문제는 가까이 하기도, 멀리 하기도 어렵다. 아는체 하기도 곤란하고, 모른 체 하기도 뭣하다. 쉬쉬 하면서 옮겨진다. 모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성은 불과 같다. 불을 잘 관리하면 겨울에 난방도 하고, 밥을 지을 수 있으나 관리를 잘못하면 방이 냉랭해 지거나 타 죽을 수도 있다. 청와대 대변인은 불을 자기 몸에 붙여버린 것이다.법화경에는 지구를 번뇌와 고통의 불이 가득한 속세라고 하여 화택(火宅)이라 했다. 공자도 경계해야 할 3가지(三戒)로, 젊어서는 여색, 장년에는 싸움, 늙어서는 이욕(利慾)을 경계하라고 했다.과거 서양에는 성병이 만연해 많은 사람이 그 병으로 죽어 갔다. 신은 인간의 성행위를 절제시키려고 성병을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항생제로 극복해 버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너무 문란하니까 이제는 에이즈라는 병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에이즈도 곧 처리될 것이다. 그러면 에이즈에 뒤이어 또 다시 더 나쁜 성병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연구를 거듭하여 또 극복할 것이고,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갈 것이다.다윗왕은 이 에너지로 적을 물리치고 통일해 나라를 바로 세웠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루었을 때 그의 에너지는 다른 곳으로 흘러가 버렸다. 처첩에 싸여서 여러 곳에서 자식이 태어나서, 가정은 혼란해지고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 원래 성욕은 창조의 원동력이다. 성력을 정력(精力)으로 표현한다. 이런 넘치는 성 에너지를 그러면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그 방법으로는 결혼을 하는 것이다. 부부간에 성욕을 건전하게 조정하란다. 그래도 남아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으로는 사회를 위하는 일이나 철학 예술 과학 등 학문이나 스포츠 등에 에너지를 쏟으라고 한다. 그러면 건강하고 위대한 업적이 가능하다. 뛰어난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의 정력을 남을 위해 사용했다. 용도가 크고 넓을수록 더 위대한 일을 성취해 낼 수 있다. 정력은 사랑의 기본이고, 생명 에너지이다.

2013-05-31

불행과 우울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두 연인이 속삭이는 시간은 행복이 넘쳐나서 순간같이 흘러가 버린다. 오랫동안 즐겁게 몰두하면 긴 시간도 어느새 지나가 버려서 사람들은 행복을 일시적인 것으로만 여긴다. 사람들은 행복한 시간에 대해서는 항상 아쉽게 생각한다. 짧다고 한탄한다. 인간의 마음은 다양해 꼭 행복과 같이 밝은 마음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반대편의 기분을 나타내는 단어들로는 슬픔, 불쾌, 덧없음, 허무, 우울, 절망, 좌절, 무기력, 지루함, 불만 등이 있고, 이들은 모두 행복의 반대 정서를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불행`이라는 단어는 행복하지 않다(不=아니다)는 뜻이기에, 보통은 -적으로 생각하나 그 단어의 근본은 `+도 -도 아닌, 단지 `~하지 않다`는 중간 수준(0)의 정서(행복하지 않다)를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0의 수준에서도 기쁘거나 행복감이 없으므로, -의 뜻으로 오해를 하여,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0)이라고 생각한다. +의 반대는 0이 아니고, -이다. 불행에서도 생각은 정상적으로 할 수 있다. 그래서 행복+의 진정한 반대말은 침잠하게 되어 생각이 진행되지 않는 `우울-`이라고 생각한다.우울이란 누구나 보편적으로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절망감의 해결책을 스스로 선택하기 어려울 때, `도와 달라`는 소리 없는 호소가 우울이다. 그 중 치료가 요하는 심한 우울을 `우울증`이라고 한다.우울이란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떠나가 버려 홀로된 자기에 대해 고민하면서 생각이 가라앉아 버린 상태를 말한다. `무엇이든 있던 것이 없어져 버리는 상황`으로 될 때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우울한 감정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의 상황에서 그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울은 삶에서 만나야만 하는 고통을 회피하지 못한 정신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역경과 고뇌, 고통은 회피할 수 없기에 극복해야할 대상이다. 그러나 피하고 싶으나 피할 수 없어서 마주보고 있다. 그래서 좌절하고, 그 대가로 앓는 마음 상태가 우울이다.우울이 심한 우울증은 없음의 병이다. 희망이 없고, 의미도, 갈망도, 아픔도, 의욕도, 열정도, 기력도, 기쁨 등의 감정도 없다. 꾸준히 삶의 질만 저하시켜서 사회활동을 멈추게 한다. 유일하게 있는 것은 잠이 없어져서 불면증만 있다.신은 인간에게 역경과 위기를 이기면서 열심히 살아가도록, 괴로움을 선물(?)로 주셨다. 슬기로운 자는 역경 따위가 없는 자가 아니고, 그것을 잘 대처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울한 자는 대비하지 못하거나 피하지 못했다. 또는 피할 능력조차 없다. 우울한 사람은 긴 시간 동안 허공을 멍한 눈으로 말없이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도 없어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행복(+)의 반대말은 불행(0)이 아니고, 우울(-)이다. 행복과 불행은 뭔가가 있어서 생기고, 그것은 쉽게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울하면 텅 비어버린 마음 상태로 심하면 긴 시간, 어쩌면 일생동안 자신를 괴롭힐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쉽게 우울해질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심하게 병적으로 우울한 사람에게는 약물치료를 하는 방법이 있으나 효과를 기대하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완치가 어려우며, 약물의 효과도 서서히 나타난다.이들에게는 “힘을 내!” 하는 격려도 오히려 간섭하는 것 같이 돼 주위의 사람들, 특히 가족들은 모두가 맥이 빠져 가정을 황폐화 시킨다. 이 증상은 우울한 생각이 오래 계속돼 점차로 저 깊은 나락으로 내려가 버려서 생겨난 것이다. 극도로 허무하면 죽음도 생각한다. `나는 희망도, 쓸모도 없어. 세상은 암울해. 그럼 도대체 나는 뭐냐?` 친구도 없다. 그러면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인가, 우울인가? 아니면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2013-05-24

아버지, 할아버지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남자는 장성하면 한 가족을 이루고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란 직장 등에서 세상살이를 꾸려나가기가 힘들어서 육체와 정신의 양면에 멍이든 사람이다. 아버지도 세월이 흐르면 노인이 된다. 그들을 우리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숱한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어도 그들 대부분은 모은 재산도 없고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공원 같은 곳에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많다. 나의 할아버지가 거기에 계신다고 생각해 보자.아버지는 직장에서 일할 때에는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처자식을 위해 마음을 꾹 눌려야 한다. 모든 할아버지도 한 세대 더 일찍, 같은 경험을 해 왔다. 본시 어머니날은 정해져 있었지만 아버지날은 없었다. 조부모의 날은 있으면 큰일 나는 모양이다. 어머니날은 그 후에 어버이 날로 정한 것을 보면 아버지를 조금 배려한 듯하다.노인요양병원을 방문해 보면 입원한 늙으신 어른들이 표정을 잃고 시선을 허공으로 향하면서 써늘하게 침대에 누워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평생 고생으로 늙어 버리신 아버지의 자화상이다. 지금 이 시대는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린 것 같다. 존재이유를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노인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미미하다는 것은 학교에서 선생님의 역할이 거의 없다는 말과 같다.신은 우리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단순하고도 일목요연하게 표현 한다. 그러나 공경의 방법은 말하지 않았다. 이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무조건 공경하라는 말이다. 이런 절대적인 명령에 우리는 응답을 해야 한다. `너는 훌륭하거나, 인자하고 자상한, 또는 돈 많은 부모님만을 공경하라`고 하지 않았다.부모님을 부정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본 자만이 알 수 있다. 이 질문의 답은 `나는 누구의 것인가?`를 말할 수 있으면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어디서 왔는가?`를 알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까지를 알게 된다.늙으신 조부모들 중에는 치매에 걸린 자도 있고 중풍을 앓고 있을 수도 있으며 괴딴 성격, 나에게 잘 해 주지 않았던 어른 등 별의별 모양의 노인들이 계신다. 물론 이들도 공경하라고 했다. 가난한 부모, 나에게 해 준 것 없는, 성격이 괴팍한 부모 등을 섬기라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답은 `아니다`이다. 이런 부모를 공경하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 등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사랑`을 알게 된다.아버지와 풀어야 할 일이 있거든 할아버지가 되시기 전에 용서를 빌고 화해하라. 돌아가셨다면, 천국의 아버지에게 용서와 사죄의 글을 써서 화해하라. 또 부모가 살아 계시면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겨라. 지금 부모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노년 모습일 수 있다. 내가 부모님을 대하는 방법과 같은 식으로, 미래에 나도 똑같은 대접을 자식으로 부터 받을 것이다.약 20년 전 6·25 전쟁으로 다리를 절게 되어 삶을 지겨워하는 노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해서 비몽사몽의 절망적인 상태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여러 번 길에서 쓰러져 잠이 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중년인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집으로 부축하여 씻긴 후 방안으로 모셨다.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었다. 사람들은 그 아들을 효성과 공경심이 있는 `생명이 있는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했다.21세기에도 효성이란 단어는 살아 있다. 그 아들 역시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접근 방법은 부모를 대왕(大王)처럼 대하는 것이었다. 그도 나중에 그의 아들에게서 대왕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다만 그가 다음 세대의 왕인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을 뿐이다.

2013-05-10

청색 경제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불교에서는 생물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서 훼손을 최소화했다.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고, 심지어 무생물인 비가 내려도 “빗님이 오신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지금까지 신이 창조한 이 땅에서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존재로 배워왔다. 인간은 자연보다 우월하고, 동물과 식물은 대상이 될 뿐 주체가 아니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사람들은 자연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스스로가 환경에 적응하면서 종족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이후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인정해 부단하게 개간과 개발에 노력을 쏟아 부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섭리로 자연 속의 동물은 인간이 사용하도록 만들어 졌다”고 했고, 임마누엘 칸트는 “우리가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간접적인 의무”일 뿐이라고 폄하했다.이제까지 우리는 녹색 환경과 녹색 경제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아껴 쓰기`와 같은 절약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대량소비를 강조하는 산업경제활동에 발목을 잡거나 환경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소비자에게는 환경을 위해 더 많은 관심과 지출을 요구했기 때문에, 특히 경기 침체기에는 성가시게 들리기도 했다.현재 인간은 넉넉하게 살기 위해 땅 속에 묻혀 있는 석탄 등 탄소를 지구 곳곳에서 파내어 대량으로 소비하고 있다. 그 결과 4월 말에도 경북지방에 눈이 오고, 가뭄과 홍수 지역이 확연히 구분되는 등 기상이변이 계속 된다. 이제 한반도는 아열대로 들어서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수만 년 이상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지구마저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 근해에서 상어가 해수욕객을 물었다고 한다.환경보호를 위해서는 자연보다 인간이 우월하다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벗어나서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연으로부터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막에서 물을 모을 수 있는 벌레에게서 사막을 푸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낼 수 있단다. 열대 지방의 흰 개미 200만 마리가 함께 살고 있는 진흙덩이의 서늘한 내부에서 공기 정화 방법을 모방하면, 좋은 건축물이 가능하단다.이제는 공학, 로봇 공학, 인공 장기 등에서 생물 몸체로부터 구조를 모방해서 본뜨는 연구가 환경운동에서 선두주자로 나설 때가 됐다. 자연을 선생으로 삼아 지혜를 모아서, 지구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은 석탄, 석유 등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를 오염시키지 않아서 환경보호가 가능하다.이 방면의 과학자들은 생물에서 모방해 응용하거나 해법을 발견하는 것을 `과학기술이 한 단계 상승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자연 생태계가 안전하면서도 발전할 수 있는 `생태시대(Ecological Age)`를 활짝 열어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이런 자연을 이용하는 기술이 산업활동에 적극 활용돼 사회 발전과 환경문제 해결에 보탬이 되려면 `자연 중심의 세계관`이 우리 사회에 널리 확산될 필요가 있다. 2008년에 세계자연 보존연맹은 생물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모방한 `기술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서 이러한 기술은 단순히 환경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환경의 재생마저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환경파괴 없이 자연을 이용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이러한 경제정책을 `청색 경제`라고 했다. 이는 발전을 다소 늦추더라도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이제까지의 `녹색경제`의 주장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환경위기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일어났다. 해결점을 생물이 살아가는 방법에서 찾으려면 `자연과 함께`라는 보호정신으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가능하다.

2013-05-03

결혼이란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남자와 여자는 모두가 자유 의지와 성격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성인이 되면 각자의 부족함을 메우고, 서로 위하면서 살아가려고 결혼을 한다. 모르던 남녀가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사랑으로 자식을 낳는다. 그들이 청년에서 노년, 그리고 무덤 앞까지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함께 인생 여행을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경이롭고, 신비하다. 긴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은 모험을 하게 된다. 남남이던 두 사람이 만나 일생동안 지지고 볶으면서, 때로는 기뻐하거나 슬퍼 울면서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투기적인 투자이다. 이렇게 그들은 이해와 갈등을 반복하면서 공동체인 가정을 꾸려 나간다.두 사람은 어떻게 성장해 왔으며 성격은 어떤지 전혀 몰랐다. 완전히 낯설었고 성격이 다른데도, 어떻든 살아가는 것을 보면 놀라운 것이다. 가정은 혼탁한 현실에서 사랑을 적용해야하는 위태위태한 모험의 실험장이다.삶에서 다툰 횟수를 합하면 벌써 원수가 되었고, 깨어진다면 100번도 더 깨질 듯이 살아 왔는데, 상대의 죽음 앞에서는 남은 자가 “저승에서 다시 보자”고 하면서 운다. 싸웠는데도 헤어짐에서 울다니, 죽음 이후에도 보고 싶다니, 이처럼 가정이란 신성한 곳이다.현대의 결혼 당사자들은 대부분 `잘 살아보려고, 행복하려고, 사랑하기에`등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행복하지 못하면? 사랑이 식어지면 헤어져야 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삶에는 고통이나 괴로움 등을 극복해야 비로소 행복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성찰과 사랑의 태도가 중요하다.살아가는 것은 등산을 하는 것과 같다. 좋은 경치는 잠시뿐 오를수록 주위는 황량하고, 절벽을 만나거나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도 수없이 겪게 된다. 어떤 때는 텐트가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도중에 상대자를 하늘로 보내버릴 수도 있다.성경에는 `결혼 후에는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될지니라`라고 적혀 있다.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이겨 내면서 살아가도록 자식을 떠나보내야 한단다. 이것은 부모의 책임으로서 의지하게 하면 안된단다.결혼하면 정신적으로는 부부간에 마음을 서로 합해야 한다. 돈이나 학벌, 그리고 직업을 보고 결혼하는 경우가 많기에 서로의 마음이 분리되어서 깨어지는 가정을 많이 본다. 부자 일수록 화합하는 정신을 더 많이 갖고 있다고는 할 수 없고, 직업이 좋아 보여도 미래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또 돈이란 한 세대를 지탱하기가 어렵다. 결혼을 하면 돈이나 학벌 등을 사랑으로 변환시켜야 한다.또한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성(性)적인 것이다. 성을 부부라는 테두리에 묶어두었다. 육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라도 절제가 필요하다. 성기는 자기 몸에 있어도 실제 소유권은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이다.남편은 아내의 머리다. 남편을 인정해 줘야 한다. 일일이 간섭하거나 자존심 등을 망가뜨리지 말라. 그리고 아내는 약한 그릇이다. 깨지기 쉬우니 상처 입을까 걱정을 해야 한다. 귀중한 보물과 같이 여겨야 한다.결혼 후에 부부는 서로와 자녀에게는 무능한 존재가 돼야 한다. 부부 서로는 유능한 자기 몫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랑 속에, 무능함 속에 있어야 한다. 남편이 강하면 아내가 죽어나고, 아내가 강하면 남편이 죽어난다. 부모가 강하면 자식이 죽어난다. 부모의 사랑과 무능함에서 각자는 능력을 최대한 나타낼 수 있다.가정이란 인간 무리들 속에서 제일 기초가 되는 공동체로서 신이 주신 가장 큰 축복이다. 삶 전부는 가정에서 이뤄지고, 가정에서 일생을 마무리하면서 인간은 죽어 간다.

2013-04-19

제비가 오는 봄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먹구름 울고 찬 서리 친다 해도, 바람 따라 제비 돌아오는 날, 고운 눈망울 깊이 간직한 채, 당신의 마음 품으렵니다….`제비들이 돌아오는 생명의 힘이 넘치는 봄날이다. 잘 입고 먹고 부유하게 살고 싶어 하는 우리들에게 `겨울 동안에도 안녕하셨습니까?`하면서, 처마 밑에서 `지지배배`로 즐겁게 합창하는 인사말을 듣고 싶다. 많은 종류의 새들이 있지만 민담 등에서 인간의 삶과 관계되는 여러 가지 이야기에서 제비와 같이 자주 등장하는 새는 거의 없다. 제비에 대해서는 많은 속담이나 노래도 있다. 한 예로 `곡식에 제비다`라는 것은 청백리가 재물을 탐내지 않는 것을 말하고,`제비만도 못하다`는 말은 은덕을 입고서도 보답에 무관심한 사람을 의미한다.농사를 지을 때 해충을 잡아먹기에 사람들은 제비를 가까이한다. 심지어는 `제비를 만지면 옴 오른다`고 하면서 절대적으로 보호한다. 여름 동안 많은 해충을 잡아먹어서 날렵한 몸매가 된 후, 새끼와 더불어 가을에는 양자강 남쪽, 강남으로 날아간다.언제나 인간은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아우성이다.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사람은 바깥세상에서 연락이 있으면, 먼저 의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접근하지만 제비는 무조건 사람을 믿는다. 제비는 유달리 인간이 사는 집에서 동거하기를 좋아한다. 참새는 인간을 무서워해 지붕속 깊이 집을 짓지만, 제비는 추녀에 노출시켜 집을 짓는다.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걱정 없이 살아갈 것 같은 제비들도 생존을 위해 투쟁적으로 살아가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70년대 중반에 군대 생활 중에 월남으로 간 적이 있었다. 남지나해를 지날 때였다. 파도가 전혀 없어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던 바다가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에는 4~5m의 파도가 넘실거렸다.그때 젖은 날개로 날던 제비들은 내가 타고 가는 배위에 푹푹 쓰러지면서 쳐 박히는 것이었다. 손으로 잡아도 바르르 떨뿐 꼼짝을 못했다. 내 방으로 가져가서 따뜻하게 하니까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저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우리에게 인사하러 오는 것이 고마웠다. 제비는 한 번에 5~7개의 알을 낳고, 부화 후에는 벌레를 먹인다. 모든 새끼가 벌레를 달라고 큰 주둥이를 벌리고 짹짹 거린다. 먼저 음식을 받은 새끼는 입을 크게 벌리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새끼들에게 골고루 줄 수 있단다. 적절히 분배를 한단다.제비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새이지만 선하게 열심히 살며, 흥부전에서는 은혜를 갚는 새로 나온다. 부러진 다리를 고쳐준 것에 은혜를 갚기 위해 호박씨를 물어다 주는 이야기이다. 제비는 억울함을 당하기도 한다. 남자가 날렵하게 춤을 추면서 여자를 낚으려 할 때, 그를 제비라 한다. 또 그가 입은 윗옷은 날씬하게 내려오고 뒤 끝이 제비의 날개 같아서 우리는 연미복이라고 한다. 춤도 출줄 모르는 제비는 억울하다.제비의 영어단어는 swallow이다. 이 단어는 `삼킨다. 들이킨다`는 뜻도 동시에 있다. 즉 `갈망하는 새`란 의미가 있다. 성경에도 제비는 기도의 상징으로 나온다. `내 눈이 쇠하도록 재비같이 지지배배 하나님께 지저귀며 신을 앙모한다`고 했다. 우체국 표시는 제비이다. 염려와 근심 걱정이 있는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제비가 없다. 제비 먹이인 벌레가 농약으로 깡그리 없어졌고, 모든 곳이 오염되어 있다. 농약이 제비 몸에 쌓이면 알 껍질이 얇아져서 부화를 못한다고 한다.지금은 제비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 제비 같이 착실하고 부지런하게 살면 바보취급 받기 일쑤다. 기회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고 길을 잃은 우리는 방황을 한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제비같이 남을 도우면서 성실하게 살 것을 권한다.

2013-04-12

성공의 요건들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복잡한 현대의 생활양식에서는 사업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 매우 어렵다. 비교적 단순했던 과거에 비해 오늘날은 마음에 작심한 일을 해 나가는 과정과 방향에는 매우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기업들은 경쟁에서 이기려고 고통스런 속도전을 행한다. 옛날 사람들은 100km거리를 3일간 걸어가야 했지만 이제는 한 시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다. 속도의 시대에는 이기려면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업체 보다 더 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생산품을 만들어서 인정받아야 한다. 오늘날은 속도가 매우 중요하다.또 일을 하려면 그 추진방향이 바른 곳으로 향해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여도 방향이 맞지 않으면, 그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출간된 허생전에서는 매점매석이 나온다. 만일 똑똑한 허생이 오늘날 그런 식으로 사업을 하다가는 철창행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르지만 방향에 대해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방향이 잘못되면 빨리 바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노력하면 할수록, 나아갈 방향과는 멀어지기 때문이다. 엉뚱한 곳으로 자꾸만 깊이 들어가기 때문이다.인간관계도 중요하다. 좋은 관계를 가지면 그들은 당신의 일에 도움을 주고 성원할 것이다. 만일 당신의 일에서 방향이나 속도에 문제가 있으면 그들은 진실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다. 또 사업추진에서 같은 목적을 향하여 서로가 혼신의 노력을 함께 하면 불가능하리라 생각되던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사업에서 속도와 방향, 그리고 인간관계가 모두 잘 이루어지면 그 사업은 최고의 품질을 최고의 속도로 웃으면서 생산할 수 있다.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만일 속도와 방향은 좋으나 인간관계가 좋지 않으면, 그는 작은 성공만 가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속도와 인간관계는 좋으나 방향이 바르지 못하면, 목적 수행이 불가능하다. 일이 뒤죽박죽되어 엉망진창으로 꼬이기가 쉽다. 주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나, 성공은 어렵다. 만일 그가 방향을 교정하기만 하면 크게 성공을 할 수 있다.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방향은 좋으나, 속도가 느리면 지루함을 느낀다. 그래서 큰 성공은 어렵고 사업을 그럭저럭 운영해 나갈 뿐이다. 또 속도는 낼 수 있으나 나쁜 인간관계를 가지고 틀린 방향으로 추진하면 서둘러 일을 해도 그는 실패하게 된다. 그 회사는 문을 닫게 된다. 일의 추진에서 방향은 잘 잡았으나 속도나 인간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업이 실패하게 된다. 또 인간관계는 좋으나 속도를 내지 못하고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면, 그는 사업가의 기질이 없다고 봐야한다. 그는 무골호인이며 한없이 착한 자일뿐이다. 속도, 방향, 인간관계 등에서 모든 것이 잘 맞아들지 않으면 그 사업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사업은 나의 능력만큼 잘 될 때도 또는 죽도록 일해도 잘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때 역시 모든 것을 운명에만 맡기지 말고. 항상 속도, 방향 그리고 인간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근래에는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특히 인간관계에 대한 교육을 많이 하고 있다.날씨에는 좋은 날도 있고 비 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폭풍이 부는 날도 있다.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비가 오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날씨라도 잘만 준비한다면, 무사히 그날을 넘길 수 있다. 위험스런 요소는 항상 옆에서 따라 다닌다. 그러나 대비를 잘하면 어떤 역경도 무난히 넘길 수 있다.

2013-04-05

몰입과 삶의 질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유행가 가사 중에는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라는 노래가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튼 밥 먹고 숨 쉬고 일하다보면 인생은 흘러가게 돼 있다. 어떤 인생이든 모두는 죽음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지만 그래도 한 발자국이라도 뜻을 담고서 인생 여행을 떠날 것을 성현들은 권한다. 목표를 지향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은 공통적으로 일에 열심을 내며 인간관계를 잘 맺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쌓일 때 그것을 잘 풀어 나간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자기 스스로가 좋아서 한다. 그 일에서 경험하는 것을 즐겁게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재미와 쾌감과 긍지를 갖게 된다. 그의 마음은 풍족함으로 넉넉하다.자기가 하는 일에 목적과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해도 반드시 거쳐야만 할 관문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목표를 향한 일을 설령 이루어 내지 못해도 노력을 했기에 그만큼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그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한 것이다.니체는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사랑할 줄 알 때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지당한 표현이다. 의무감으로 해야 할 일은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도 있고 또는 툴툴 거리면서 마지못해 하는 수도 있으나 전자가 더 긍정적인 경험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인간관계를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때로는 서로 갈등을 빚을 수도 있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이나 친구 등과 인간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거꾸로 정이 많은 사람은 일을 소홀히 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일은 혼자서 하거나 식구들과 같이 하면 마지못해 하는 경우가 많지만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나 친한 사람끼리 일하면 최선을 다 하고 집중하여 몰입할 수 있다. 그는 점차 낙관적인 견해를 키우게 되고, 실패해도 그 상황을 소화해 내는 능력이 커지게 된다. 몰입의 빈도가 늘어나면 그럴수록 일에 능률이 오르며, 자부심과 기쁨, 집중력과 적극성이 높아진다.그러나 몰입의 경험이 적은 자는 생각의 깊이가 얕고 설득력이 적으며 진정성이 줄어든다. 말 속에서 힘을 느낄 수 없다. 그럼으로 몰입할 가능성이 많은 활동에 정신력을 투입해야만 삶의 질은 향상된다.몰입해서 일하는 것과`일벌레`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일벌레란 직무에 관련된 것에만 열심을 내고 하려는 일과 관련된 기술만을 배우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다른 목표나 책임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그 일에만 몰두하는 자를 말한다. 이럴 필요는 없다. 일에 전념을 하면서도 인생을 다채롭게 꾸려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아무리 몰입하여 일을 한다고 해도 작업장의 분위기가 몰입하기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일의 수행에 부담감이 따른다. 그 외에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위기, 주위의 턱없는 기대, 해결 실마리가 안 보이는 난제 등도 부담을 준다. 이때는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스트레스란 꼭 부정적인 경험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통제하는 힘이다.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나 도전에 나의 관심이 빼앗기기 전에, 스스로가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관심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의 경험을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몰입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으로서 정신력의 원천이 된다. 이로써 삶의 질은 향상된다.

2013-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