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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용서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세상의 모든 일은 여러 사람들이 얽혀서 진행되므로 각자가 그 일에 관여하는 과정이나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견(異見)이 나올 수 있다. 그 중 용서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갈등을 느끼면서 그것을 억누르는 과정을 말한다. 용서는 친밀감을 먹고 자란다. 용서를 주고받을 일은 거의 대부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생겨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부와 가족이다. 그래서 `너의 원수는 너의 집 안에 있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이기심이나 자기중심적인 말에서 상처는 만들어진다. 서로 상처를 준다. 같은 것일지라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더 큰 충격을 느끼게 된다. 나와 먼 거리의 사람과는 문제가 거의 없다. 공통의 관심사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종류의 일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보다, 믿었던 자들로부터 더 큰 상처를 받는다.우리는 공평하거나 평등해야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각자는 자기가 그 입장에 서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서 생각해 보면 자기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사람은 편견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상처의 크기도 다양하다. 가벼운 정도에서부터 제일 심한 것은 가족이 희생당하는 것까지 그 폭은 아주 넓다. 강할수록 충격은 크다. 때로 선한 의도로 행한 것이 악의로 받아질 경우에는 혼동과 아픔 등이 머리를 꽉 매운다.내가 힘이 있을 때 상처나 무시를 당하면 쉽게 소화해 낼 수 있지만, 내가 코너에 몰리거나 약할 때에는 같은 상처도 몇 배나 크게 느낀다. 이때는 증오와 복수심이 달콤하게 나를 유혹한다. 악마는 즐기면서 나를 괴롭힌다.우리는 용서하면 그것이 곧`상대의 악한 행위를 잘 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용서하기가 매우 주저된다. 그러나 그것은 악을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옳았다고 손을 들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용서란 단지 용서하는 자기가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을 좋아하느냐, 화합을 좋아 하느냐`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하는 것을 표시하는 행위이다.용서는 그가 잘못을 인정해야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가해자가 죽어버리면 영원히 용서를 할 수 없게 된다. 내가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용서를 하면 그와는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용서를 해도 나의 아픔은 지속된다. 이 아픔은 계속되어도 그냥 두어버려라. 일부러 없애려 한다면 헛수고이다. 용서는`있었던 사실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의 뇌세포는 기억의 단백질을 벌써 만들어 놓아 버렸다. 노력으로 그것을 분해시켜 버리지 못한다. 용서는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 명령을 지켰을 따름이다.가해자와는 만나기가 싫다. 그를 보면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은 만국 공통의 표정이다. 찡그린 얼굴을 죄스럽게 생각 말라. 복수를 포기했을 뿐이다. 상처가 아무는 데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 어쩌면 일생 동안 걸릴 수도 있다. 단지 분노와 싫음에서 복수심으로 넘어 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용서도 하지 않고, 잊지도 않는다. 현명한 자는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유행가 구절이 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그 일에대한 기억은 뚜렷하게 계속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월이 약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주위에서 격려하면서 “용서해 줘버려” 라면서 위로하는 것은 실례이다. 그와 함께 울어주면 충분하다. 다른 것은 강요 말라.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치료를 요하는 사람도 있다. 상습 범법자, 성급하게 서두르는 자 등은 용서보다 더 시급히 치료가 요하는 중환자이다.

2012-09-14

아버지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60이 넘은 나이에 과거를 회상해 본다. 학생시절 어느 날 거울을 보는 순간, 거울 속의 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이 진하게 풍겨 나왔다. 풋내기 대학생인 나는 30~40대의 아버지는 이해됐으나 50~60대의 아버지의 마음이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그때는 아버지와 대화하거나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나는 어려운 생활 때문에 아버지와 다투기도 했다.`아버지가 사는 모양으로는 살아가지 않겠다. 아버지 보다 성공한 사람으로 살겠다. 나의 자식을 위해,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해 준 것보다 더 많이 해 줄 것이다`고 다짐도 여러 번 했다.여러 번 불만을 표시하면서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절대 권위는 인정했다.그러나 늘 가족들을 위해 힘들어도 주저앉지 않고, 이를 악 물고 일어나야 했기에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던 아버지였음을 이제는 확실하게 절감하고 있다. 그 후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무한히 차 있어도 아버지에게는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다.그 후 세월이 많이 흘러 내가 아버지, 할아버지가 된 지금의 느낌으로는 과거보다 일상 생활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점점 축소돼 버렸고, 예전같이 그리움의 대상으로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다.이제 아버지란 돈이나 벌어다 주는 사람, 얼굴 보기가 어려운 사람, 호통이나 야단만 치는 사람, 별로 인기가 없는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다.점점 더 아버지 없는 가정, 아버지 역할이 줄어든 시대로 변하고 있다.어느 문학가는 “아버지 없는 사회는 남성의 소외나 주도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모두의 위기를 의미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권위가 회복될 때 국가와 가정, 학교의 권위도 회복 된다고 했다.청소년 범죄는 권위가 줄어든 아버지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부권이 약하면 사회가 혼돈되고, 아버지의 그림자가 희미해진 가정은 주춧돌이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이다.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는 군사부일체라는 유교 사상이 깔려 있다. 아버지의 권위는 곧 모든 권위자의 상징이었다.어느 교수는 “아버지의 지위가 흔들리는 사회(fatherless society)는 신이 없는 사회(godless society)로 되어간다”라고 했다.최근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설문에 학생들은 아버지를 어느 정도는 대우를 해 주는 것 같았다.그들은 아버지를 `등대, 등불, 친한 친구, 꼭 필요한 산소, 쓰지만 유익한 한약, 가로등, 피뢰침, 나침반, 멘토, 자신의 살점을 다 떼어 나에게 주는 가시고기, 안경, 아무리 노력해도 아빠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물음표` 라는 등 여러 가지 대답이 있었다.요즈음의 젊은이는 세상일에만 애쓰고 수고하면서, 자식은 마음으로만 사랑하는 아버지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컴퓨터, 스마트폰, 돈과 같은 물질로서 만족을 주는 아버지도 좋지만 친밀감으로 교제할 수 있는 아버지를 더 원하는 것 같다.자식들은 아빠를 통해 뭔가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영국의 시인은 “한 명의 아버지가 백 명의 스승보다 귀중하다”라고 했다. 세상의 그 어떤 스승이나 유명한 사람보다도 가족에게 큰 영향을 주기에 행복한 가정의 결정적 요인이 된다.세상은 살아가기가 어렵다. 자식 키우기는 더욱 어렵다. 아버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수 많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모든 것을 떠나보내면서, 비로소 온전한 아버지로 성숙되어 간다.아버지로서의 권위는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과거에 가족들을 권위로 지배하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가족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애정어린 관심과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것을 권한다.

2012-09-07

내 마음속의 `안동문화`

▲ 남용우창원대 경제학과 겸임교수전 금융결제원 본부장 12년전 나는 다니던 직장의 이동배치로 안동과의 인연을 갖게 되었는데, 도처에 산재한 유·무형의 인문적 자산과 가치는 객지생활의 여백을 넉넉히 채우고도 남을 만큼 내 마음의 정서적 반향을 불러 왔다. 4년 남짓 생활을 마무리할 즈음의 일이다. 내가 안동을 떠나기로 결정된 그날 저녁, 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평소 알고 지냈던 지인과의 송별저녁을 끝내고 막 골목길을 나서는 순간 낯익은 휠체어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의자에 앉은 아버지와 뒤에서 밀면서 따라오는 아들, 이들 부자는 오늘도 하루종일 길안으로, 반변으로 갑갑한 심신을 달래려 산천을 호흡하다가 날이 저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우산도 없이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채 비를 맞으며 어두운 골목을 향해 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조금전 먹었던 저녁식사가 염치없어 보이고 내 자신이 부끄러워 보였다.목격의 주인공인 아들은 언젠가 교통사고 때 입은 다리부상과 후유 장애로 인한 갑갑증으로 방안에 있을 수 없는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서 여명이 밝아오면 집을 나서서 백여리의 길을 걷다가 저녁무렵에 돌아오곤 했는 데, 이 같은 일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5년간이나 계속되고 있었다니….놀라움과 경이로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도처에서 우리의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무너지고, 상하의 질서가 뒤바뀌고, 가정이 붕괴되고 학교가 무너져가는 요즘의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이미 사회적 활동력을 상실하고 지체가 부자유한 아버지를 위해 하루종일 야외나들이하며 섬기기를 5년여, 당시 이런 휠체어의 부자를 보지 못한 안동인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그 아들의 자연발생적 효심과 희생의 뿌리는 무엇이며, 그러한 아들이 있게 한 아버지의 권위와 자애는 또한 무엇일까? 온 종일 그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며 어떤 대화를 나눌까?나는 요즘 세태에서 좀처럼 찾기 어려운 사례여서 매우 궁금했다. 그것은 아마도 오랜 세월 이 땅의 기층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배움과 행동을 일체화시키면서, 그것이 자연스레 그들의 정신적 가치로서 생활속에 그대로 녹았던 영향이 아닐까?무능하고 병약한 아버지를 위해 기나긴`휠체어의 여행`을 쉬지 않았던 그 아들의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어서 마치 깊은 산속에서 산삼을 찾은 것처럼 귀하고도 값지며 생경한 모습이었다.그런 모습이 그래도 안동땅에 남아있다는 것이 `안동`에 대한 고마움으로 다가감을 어찌 막으랴.내가 진실로 고마워하는 것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봉화지역의 `선돌(立石)`에 있는 권씨 종택의 부자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미 고인이 돼 버린 권헌조씨(당시 70세 중반)의 부친이 생존했을 때, 당시 아흔살의 아버지를 일흔살의 아들이 주야로 섬기는 모습은 마치 설화같다고나 할까.이미 퇴락한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된 나머지, 혹 그가 깊은 침중에 들면 아버지의 부르는 소리를 놓칠까봐 아버지의 침소 옆방에서 겉옷을 벗지 않고, 담요도 깔지않고 등짝을 맨바닥에 붙인 채 선잠을 잤다고 한다.어디 이 뿐이랴. 측간(厠間)지 배웅해 용변을 마칠 때까지 측간옆에서 대기했다가 부축한다든가, 바깥나들이 할 땐 복명하기를 빠지지않고, 소용되는 돈은 꼭꼭 타서 쓰고, 저녁이면 사랑방에서 아버지앞에 꿇어앉아 시전(詩傳)을 낭랑하게 읽는다든가…. 마치 꿈속의 얘기를 듣는 듯하는 일화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한때 유학이 이 땅의 모든 정치적, 정신적 가치질서를 지배할 때 그것이 지나칠 정도로 교수화되면서 민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배척되기도 했지만 그 내면의 인본적 가치와 실천학문의 풍조는 숱한 세월과 영욕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이것이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유독 안동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동지역 기층문화의 `불가사의`이고 `저력`이며 `그릇`인 것이다.이런 이유에서 나는 안동을 잊을 수 없고, 현직을 은퇴하자마자 전원에 정착해서 새로운 인생 2막을 일구고 있지만 지금도 소쩍새 우는 밤이면 내 마음은 아련한 추억을 찾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안동땅으로 향한다.

2012-08-31

금메달과 금언(金言)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이번 올림픽 대회 경기를 보면서 운동시합은 인간 세상의 축소판이란 것을 절감했다. 매일 끊임없이 피나는 노력을 했으면서도 1등은 한 명 뿐, 나머지는 2등 이하로 몰려 버린다. 그리고 자기의 등수는 노력의 양에 비례하지 않고 오히려 행운과 불운 등이 얽히고 뒤섞여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변수가 혼재돼 있다. 함정, 그물, 악재, 우연, 올무 등이 우리들 생활 옆에서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 왕기춘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14초를 남겨두고 어깨 부상으로, 이번에는 팔꿈치 부상으로 메달을 놓쳤다. 펜싱의 신아람에게는 1초가 시간이 흘러도 계속 1초가 되는 모순의 희생양이 됐다.아슬아슬하게 1등을 한 선수도 있었다. 기보배의 마지막 화살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상대의 성적이 조금 더 나빠서 금메달을 획득한 경우가 되겠다.김재범은 본시 73kg급의 선수였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81kg급으로 출전했다. 그는 매일 밤 11시11분에 기도를 했다. 1, 1, 1, 1, 이렇게 1등을 바라면서 그 시간에 기도를 했단다. 그러나 잠이 부족해 밤 10시04분으로 시간을 옮겼다. 천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기도를 하고 시합에 나갔는데, 몸이 새털같이 가벼웠다”고 했다.모든 선수들은 쉬지 않고 열심에, 열심에, 열심을 더해 피눈물 나게 연습을 했다. 이는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더 배고픈 놈이 이긴다는 말이나 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절박한 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생활이나 경기에서는 훈련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하다. 훈련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택 받은 자만이 훈련에 들어갈 수 있다. 김재범은 태릉선수촌의 훈련은 지옥훈련이 아니라 천국훈련으로 생각했단다. 그는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죽기 살기`로 싸워서 은메달을 땄고 이번 올림픽에서는 `죽기`를 작정해서 금메달을 땄다고 했다. 또 몸 전체에 상처뿐인 그가 가야할 곳은 `수술대가 아니라 시상대`라고 했다. 이 말은 앞으로 금언(言)으로 회자될 것 같다.송대남 선수는 90kg유도에 출전했다. 그는 본시 81kg급의 선수였으나 한 체급을 올려 출전했다. 그는 메달을 획득한 후 기자에게 제일 하고 싶은 것은 치킨에 맥주 한잔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체중을 높일 때는 아침에 스테이크 13인분을 먹었고, 라면과 햄버거를 많이 먹었다고 했다.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고,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선수들은 군더더기 살을 없애야 한다. 특히 체중으로 급수를 다루는 운동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들은 군살을 `죄 짓기를 유혹하는 마귀`처럼 여긴다. 시합을 망치게 하는 악마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합이 끝나는 그 시간까지 식욕 등 모든 면에서 인내에 인내를 거듭해야 승리로 향할 자격을 갖게 된다. 이렇게 노력을 해도 거의 대부분은 금메달을 놓친다.그렇게 많이 노력하고도 금메달을 놓친다면 처음부터 노력할 필요가 있는가? 있다. 노력해야 한다. 이는 운동에 한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목표가 명확히 눈에 그려질수록 그는 목표에 더 다가갈 것이다.올림픽에서의 승리는 선수뿐만 아니라 그 나라 전체가 기뻐한다. 국가가 연주된다. 운동복에는 국가 이름과 자기 이름이 들어가 있다. 국가란 필요할 때는 자기의 생명마저 바칠 수 있는 조직체다. 어떤 분야이든 모든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는 모두 애국자다.우리에게는 항상 미래가 있다. 이번 올림픽은 우리나라의 앞날을 다시 한 번 더 명확히 생각하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 선수들이 귀국해 더욱 건강하게 생활하길 응원하면서 우리의 후손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할 것을 다짐하는 8월이 되기를 기원한다.

2012-08-17

평화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사려 깊은 생각은 조용한 마음이 지속돼 내면을 안착시킬 때 비로소 가능하다. 평온하게 사람을 대하면 그는 자기 주위마저 평화롭게 만든다. 그러나 일상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다. 조용할 수가 없다. 그로 인해 심란할 때 사람들의 마음은 흔들린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여러 여건들이 우리의 마음에 풍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평화를 바라면서도 마음속에는 탐욕과 증오심, 미움, 시기심 등으로 화평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원한과 대결을 계속 부추긴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하면 영웅시하고, 세상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투사정신을 부추기고 있다. 과격함을 싫어하고, 평화를 지향하면 나약한 사람으로 몰아 부친다.인류사에서 보면 평화를 주창하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거나, 말로가 비참했다. 흑인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링컨, 히틀러 시대에 평화를 위해 노력한 폰 회퍼, 흑인의 비참한 현실의 개선을 위해 노력한 루터 킹 목사 등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평화는 많은 대가를 치루면서 조금씩 자라왔다.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전쟁이 없어도 가난하거나 여러 질병이 퍼져있는 곳, 독재정치를 하는 곳은 평화가 없다. 사상 대결이 있거나, 끝없이 내분이 일어나는 곳이면 평화는 떠나 버린다. 너무 많이 조용한 것도 좋지 않다. 억압된 분위기가 여기에 속한다. 억눌려서 조용하기만 하고 논쟁이 없다면, 그곳은 공동묘지와 같은 곳일 것이다.그럼 평화로운 곳이란 어떤 장소일까? 그곳은 현제명의 노래가사에서 볼 수 있다. 인생의 험한 바다에서 노를 저어 험한 물결을 넘어가서야 비로소 발견하는 산천경개 좋은 언덕이다. 갈등으로 소란을 일으키는 곳이 아니다. 문제점이 있을 때 화합해 공동으로 노력하는 곳이다. 돛단배가 질풍같이 부는 폭풍을 거슬러 삼킬듯한 파도를 넘어 도달한, 자유 평등 행복이 가득한 곳이다. 그곳에 도달하려면 온갖 험난을 이겨 나가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가슴 속에 이런 긍정적인 각오가 넘쳐날 때 바로 거기에 평화가 깃든다.평화는 더 좋고, 더 정의롭고, 더 안전한 삶이 있는 곳에 있다. 단점과 갈등으로 꽉 찬 가슴을 가진 인간이 삶을 지배하면 평화는 없다. 무질서, 질병, 억압, 인권 말살, 사람차별이 있는 곳에는 평화는 깃들지 않는다. 외면해 버린다. 있다면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가짜 평화일 뿐이다. 지상의 평화로운 곳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는 하늘로부터 온다.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평화를 위해서는 평화의 절대 가치를 선포하는 종교 수준의 확신이 필요하다. 종교는 인간의 마지막 보루다. 종교는 인류의 미래를 예시해 준다. 생명을 지키고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종교는 도움이 필요한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가진 자의 논리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종교는 자칫 잘못하면 가진자, 권력자의 성장 지상주의 논리에 함몰돼 버릴 수가 있다. 그러면 평화는 자꾸만 멀어져 버린다. 종교가 세상의 가치를 따라간다면 그것은 존재에서 마침표를 찍는 것과 같다. 지금 종교는 물질축복으로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악행일까, 선행일까?평화를 위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제일 크게 요구되는 것은 가난에서 해방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사회의 모든 조직을 가동해야 한다. 외국인 근로자도 여기에 포함된다.또 한 가지는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탈출시켜야 한다. 그래서 사회의 모든 소식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민주화가 뭔지, 삶의 지향점은 어디인지를 토론해 보아야 한다.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는 자들이다. 즉 남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다. 성실히 일하는 자들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2012-08-10

급변하는 세상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중세에 인간은 생활 전반에 걸쳐서 획기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증기기관의 발명, 프랑스 혁명, 가톨릭교의 변화, 시계의 발명 등으로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됐다. 사리판단을 내리는 새로운 가치는 `나(我)`로부터 출발하기 시작했고 가톨릭 교리의 자리에는 돈과 시간이 들어섰다. 사람은 자기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해서 자율성을 점차 갖게 됐다. 돈은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척도가 됐고 최근에는 거의 모든 기술들이 세계화됐다. 그에 따라 재화의 흐름은 무서울 정도로 빨라졌다. 조금 전 일어난 미국의 사건이 당일, 세계의 곳곳에 영향을 준다. 돈은 규모가 커져서 세계 속으로 아주 잘 흘러 다닌다. 그에 따라 돈을 쓰는 시간단위는 짧아진다.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는 빠른 템포가 제일 중요한 열쇠다.르네상스 시대 이후로는 활발한 교역으로 돈이 모이는 곳에서는 경제 중심지가 만들어 졌다. 따라서 도시의 모형도 빠른 템포로 변해 갔다. 우리가 자랐던 거리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다. 산업화시대로 들어가면서, 우리들은 더 많은 재화를 위해 성과에만 치중한다. 현대는 시간에 쫓기는 `속도 전쟁의 시대`가 돼 버렸다.돈이 들더라도 새로운 것만 찾는 경향은 갈수록 많아진다. 이와 더불어 사회와 문화의 변화는 더욱 심하다. 그 예로 1714년에 처음 만든 타자기의 일반인에게 보급되기 까지는 150년이 걸렸는데 인터넷은 이용자에서 5천만 번째 이용이 4년 정도 짧게 걸릴 뿐이다.계속 시간에 쫓기는 사회에서는 뿌리 깊은 진정한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끝 모를 가속화는 개별기업에 높은 압력을 행사한다. 상대 기업에 뒤쳐저 버리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으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경제`라는 의미의 장기적 전략을 세우는 것은 주저된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면서 계속 혹사시키는 길밖에 없다. 지금과 같이 자원을 무자비하게 다루면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수백만 년간 유지된 기상은 변해 버릴 것이다.정치문제들은 실시간으로 논평을 해야 한다. 차분히 앉아서 평론을 내릴 여유가 없다. 미국의 금융위기에 대한 정부대책은 빠른 시간 내에 여론의 압박아래서 결정해야 한다. 전 세계가 그물같이 얽히면서 빨라지기만 하니까 오늘날은 큰 그림을 그릴 여력이 없다. 그때그때 가장 큰 불길만 꺼가는 형편이다.가정에서도 성과유무로 상대 능력 정도를 판결한다. 성공 여부로 애정의 양을 측정하고 평가한다. 부정적인 결과는 부부관계라도 청산을 모색한다. 현대의 개인은 깊은 불안감에 시달린다. 이런 불안을 없애려고 작업을 더 빠르게 처리하고 쓸모없는 대기 시간을 줄이려 한다.현대로 이어지는 급박한 느낌은 종교의 위안마저 놓쳐버리게 한다. 그래서 영원함에 대해서는 일부러 외면하고 불과 백년 이내라는 우리의 짧은 인생에만 집착한다. 예전에는 세상의 지속을 창조에서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로 보았으나 근래에는 출생에서 죽음까지로 줄어들었다.그러므로 이런 급변하는 시대에서 정치권력이나 종교 등은 사회 구성원을 잡아매는 구속력으로서의 힘은 약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돈과 시간이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 되고 있다. 오직 이성의 힘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종교란 인간이 만든 작품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래서 세상은 세속화로 바뀌고 전통은 개인화를 통해 쪼개져 해체돼 버린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생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치부하거나 성공으로는 그의 전체인생이 좋게 꾸며질 수 없는 것이다. 외형은 좋아도 내부는 허무할 수 있다.그래서 기성종교는 빠른 시대 변화에 대해 가속화를 막는 문화적 걸림돌 노릇을 톡톡히 해 왔다. 종교는 언제나 인간의 가치를 일깨우며 인간이 만든 발전 안에는 항상 위험이 내장돼 있음을 지적해 왔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머물러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2012-08-03

삶을 생각대로 개척하는 교육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학부모는 현재 자기들의 사회적 위치는 젊었을 때의 교육 정도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즉, 부모들은 대학이란 자녀들의 안정된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투자의 큰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대학은 취업을 위한 자격증을 따는 곳이 됐고, 취업학생 수의 다소(多少)가 그 대학의 사회적 평가의 기준이 됐다. 그러나 요즘은 대학도 학생 수가 줄어듦에 따라 그럴 듯한 말로 학생들을 유치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위한 기관이라는 원래의 사명에서 점차 벗어나 일종의 마케팅을 하는 학교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얘기다.교실에서는 전체 학생들을 선생님께 향하게 해 두고 정신없이 일방적으로 주입만 시킨다. 학생들이 알려고 하는 것이 뭔지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시험에 합격하면 교육은 완성되고 교양인의 기초를 다졌다고 생각한다.지금은 컴퓨터가 보편화됐다. 그러나 이것에 숙달되면 학생들의 사고방식은 일정한 틀에 들어가 버릴 수가 있다. 다양한 사고방식은 기대하기가 어려워진다. 가치관의 형성이나 창의적인 사고 활동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컴퓨터란 단지 평면적이고 단순하게 상상의 세계를 그려낼 뿐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마치 현실로 인식케 하는 사고를 주입시켜 버릴 위험성이 있다. 오늘날의 과학은 현실세계를 숫자나 도표, 그림 등으로 설명하지만 그것은 자연과 우주의 일부분만 나타낼 수 있다.또 자연 과학자가 도표나 수치화된 학문만을 다루는 교육에 숙달된다면 나중에는 융통성과 사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미래 사회에서 요구되는 가장 바탕이 되는 분야는 인문학적 교양이다. 그 방향의 교양 교육을 강화해야만 비로소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그 사회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스스로 개선해 나갈 동력을 갖게 된다.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각자가 자기 삶의 방식을 자기의 생각대로 개척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하는 것이다. 교육열이 높다는 것과 참다운 교육을 지향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교육에서는 철학이 중요하다. 교육에 철학이 없다면 학생들은 미래의 삶에서 피해를 당할 수 있다.세상에서는 항상 어떤 종류이든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 변화를 소화시켜 적응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토론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이 필요하다. 생각을 주고받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것은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암기 위주의 교육은 이것과는 멀다.앞으로는 기술을 올바르게 다루는 교육이 중요하다. 기계공학이나 생명공학도 중요하지만 기계 기술 분야가 미학, 인문학, 예술, 철학분야 등과 결합하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더 크게 부여할 수 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 같아서 홀대를 받고 있는 순수 인문학이나 기초 과학 등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기계 기술 속에서도 인문학적인 요소를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디지털 기술에서 실제와 조작된 이미지의 구분이 어려울 때 어떻게 구분을 할 수 있겠는가? 미래에는 컴퓨터가 인류에게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도움을 받겠는가 등 이런 질문에 대해서도 인문학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학생들의 수업이해 능력을 배운 대로만 기술하게 하게 하는 시험은 인간을 기계 취급하는 것이다. 머지 않아 의사, 법률가 등 잘 나가는 직업이 후 순위가 되는 것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이때쯤에는 수능 성적을 달달 외워서 높이는 것이나 IQ, 부모의 연 소득 액수 등은 의미가 없어진다. 밝은 미래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전인적 학교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2012-07-20

신과 같은 돈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어떤 모임에서든지 큰 소리를 치는 사람은 대부분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이 나서 입에 거품을 문다. 그런 사람은 돈을 비교적 많이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남다르게 관심을 가진 결과였다. 재물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재물을 탐한다. 인간의 생리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한다.돈 없이 가난하게 살아보면 많은 불편을 느낀다. 큰 소리를 한 번도 쳐 보지 못한다. 가장은 권위가 서지 않고 부인은 물건을 사려고 시장으로 나가기가 싫다. 아이들은 먹고 싶은 것을 사달라고 보채고 집안 분위기는 짜증으로 가득 찬다.누군가가 그에게 “돈이란 많이 가질 필요는 없다”고 하면 그는 화가 난다. 돈이 없어서 쩔쩔매는데 적당량만 필요할 뿐 많이 가질 필요가 없다니, 돈은 상대적이다. 가난한 사람이 빈촌에 살면 부잣집 옆에서 살기 보다는 절망감이나 박탈감을 덜 느낀다. 비교하는 데서 위축감을 더 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돈은 생활 중에 극히 필요하면서도 사람들은 돈을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 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돈은 만 가지 악의 근원이 아니다. 그냥 돈일뿐이다. 오로지 `돈의 유혹에 넘어 감`이 악의 근원임을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사람들은 최대의 가치를 돈에 둔다. 신과 같이 강력하게 파워가 넘치는 돈. 유혹해 지배하려는 맘몬, 우상이 돼 있다. 그러나 절대 만족을 못하기에 인간은 돈을 더욱 갈망한다. 만일 종교인이 이렇다면 그는 신과 돈을 함께 섬기는 모순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다.종교인 중에는 사업의 성공을 신의 축복으로 여기는 자를 가끔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무실 벽에는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표어를 붙여 둔 자가 있다.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을 신의 축복으로 보는 것이다.그러나 그는 종교를 이용한 `돈 신앙`을 믿고 있는 것이다. 독실한 신앙인도 게으르거나 사업에 실패해 가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종교 생활을 충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자기가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합리화 한다. 착각한다.돈이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되고 싶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자라도 돈 이외의 기타 여건이 부족해서 모든 일들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돈이 있다는 것뿐이다.돈은 그 사람의 신체를 바꿀 수 없다. 돈이 많으면 좋은 음식을 엄청나게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그도 나도 한 끼에 밥 한 그릇일 뿐이다. 최고의 식품은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채식이다.돈은 사람의 본색을 드러나게 한다. 돈을 맡겨 보면, 그의 인격을 알 수 있다. 돈을 잘 활용하는가, 또는 우상으로 여기는가, 돈 있다고 교만하지는 않는가, 또는 돈의 노예는 아닌가 등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는 돈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교양, 지식, 예의바름, 인격 등이 더 필요하다.사람들은 돈으로만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선행은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돈이 많아야 선행이 가능하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사람은 재물을 넉넉히 가지면 교만해 지기 쉽다. 돈 있고 겸손하기는 매우 힘이 들기 때문이다. 돈이 많다고 해서 생각이나 인격의 수준을 더높게 올리지는 못한다. 돈 없다고 기죽지 말라. 턱 없이 부러워 말라. 또한 돈 없는 자를 무시하지 말라. 똑 같은 인간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떠난다. 그러나 오호애재(嗚呼哀哉)라. 이렇게 큰 소리를 치는 나부터도 돈에 초연하기가 힘 드는구나.

2012-07-13

용서

▲ 이원락 경주 청하요양병원장`희생 나눔 봉사`라는 교훈을 가진 어느 장애인 학교. 교회에서 지도층으로 봉사하고 있는 노련한 교장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사건이 영화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십자가 배지를 달고 음흉한 생각을 가진 교장, 그의 악행을 도운 직원들, 뒷돈 받은 경찰, 전관예우의 변호사, 판사의 왜곡된 판결, 이 모두는 함께 어울려서 한 편의 영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냈다. 선(善)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모순과 부조리로 꽉 채워진 영화였다. 애플의 창업주, 세계적인 기업가,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던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는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이다. 그는 시리아 출신의 아버지가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 중에 태어났다. 그리고는 그는 양부모 밑에서 자라나는 모순과 부조리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일생간 이어진다.사춘기에 굶주린 애기의 사진을 잡지에서 본 후 모순되고 불공평한 세상으로 인식해 종교를 버리는 것에서 뒤틀림은 시작된다. 고등학교 때 여학생과 동거해 23세에 애기를 출산했으나 그 애기를 버렸다. 이것은 나중에 친자로 확인됨으로서 밝혀지게 된 것이다. 자기의 성장과정을 자식에게도 똑 같은 형태로 물려준 것이다.그는 장성 후 여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찾았는데 직장 근처의 식당 주인이었다. 아버지임을 확인한 후 그는 다시는 찾지 않았단다.그는 자기들이 경영하는 업체의 정보를 빼 갔다고 생각해 경쟁업체에 대한 복수심으로 꽉 차 있었다. 상표가 깨물려 일부가 떨어져 버린 사과는 무엇을 뜻하는가? 모순과 부조리에 물려버린 자신의 자화상은 아닐까? 이럴 때는 용서가 유일한 해결법이다. 강철로 된 악의 고리를 녹여버리는 용광로이다. 용서를 하면 무엇보다도 자기의 마음이 편해진다. 마음속에 꽉 채워져 있던 복수심이 눈이 녹듯 녹아내린다. 자신이 혜택을 본다. 이로서 자기의 매듭은 풀렸고, 이제는 그 매듭을 상대에게 떠넘기게 된다.세상은 공평해야 된다. 공산당과 같이 획일화된 평등이 아니라 능력에 따른 공평이 있어야 한다. 사회에서 한 쪽으로 쏠림이 있다든지 약육강식, 승자 독식만이 있다면 공평은 꼬리를 감춰 버리고 이기는 자의 전횡이 판을 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지옥 같다`고 한다.우리는 자주 마음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는 등의 살인을 꿈꾼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이 조종하는 데로 몸은 움직인다. 그러나 법은 행동을 다스릴 뿐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 마음으로는 굉장히 흉폭한 살인을 했을지라도 행동화하지 않으면 그는 죄인이 아니다. 이때는 `죽일 놈, 보새끼` 등의 욕을 뱉을 뿐이다.욕은 `화내다`라고도 표현한다. 화는 火자(字)로 표현되며 불을 의미한다. 불꽃과 같이 널름거리면서 상대를 태워 버리려 한다. 이런 것은 지옥에서나 가능하다. 화는 화를 불러내고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들은 잘못된 일이 발생하면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진다. 그리고는 `너 잘못이야`하면서 남의 탓으로 돌린다. 침소봉대, 점점 커진다. 이런 것에 우리 모두는 중독되어 있다.용서는 긴 여행이다. 가슴속에 오해가 부글부글 끓어서 하기 어렵다. 어떤 이는 용서까지 가는데 10년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용서는 자신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소송할 일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 합의하는 것이 옳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은 시련을 받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평범하게 살아간다.그럼 이럴 때에도 용서는 잘 한 것일까?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10년 징역을 받게 됐지만 내가 탄원하여 5년으로 감형됐다. 그는 풀려 난지 2년 만에 살인을 하여 다시 구속됐다. 그럼 나의 탄원서는 범죄를 위한 시간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았는가?

2012-07-06

영원과 시간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우리는 우주를 `무한대로 크다`고 말한다. 우주가 언제 어떻게 생성됐는지를 인간은 모른다. 그들은 작은 머리로 생각해 우주의 시작으로 빅뱅설(big bang theory)을 주장하기도 한다.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커지고 있다고 하나 이것은 유력한 학설 중 하나이다.또 우주에서 시간은 스스로가 우주와 함께 존재할 뿐 인간은 시간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한다. 시간은 원래 태양계에 속한 것이 아니고 무한대의 전체 우주를 이루는 하나의 속성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시간이란 신이 창조한 우주의 특성이며 그 시간은 우주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다.이조시대에 관리이자 지식인이었던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성인 공자가 240년간의 역사를 정리해 이름을 춘추라 했지만, 모든 일은 곧 한 가지(枝)에서 꽃피고 잎 지는 순식간의 광경일 뿐이라고 했다. 그 시대에도 세월을 느끼면서 살았던 모양이다.우리는 태양계의 주기를 중심으로 달력을 만들고 시계를 만들어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둔다. 시계를 만든 이유는 세월의 길이를 측량하지 못해 삶에서 불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인간은 어짜피 수명이 다하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시계의 시, 분, 초를 따라 시점과 속도를 알아낸다. 그 표현으로 우리는 `시간이 빠르다. 또는 길다`라는 등으로 부른다.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피할 수 없다. `태어난다`는 것은 곧 출생 순간부터 한계의 틀 안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시간이라는 환경이 없다면 삶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어떤 우주 설(說)에는 우주의 가장 작은 원소 하나에까지 우주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도 우주의 모든 정보와 방식을 담아낸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늦고 빠름이라는 시간의 속성에 묶여 있는 인간은 우주 전체 원리의 일부분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몸은 소우주(小宇宙)라고 할 수 있다.인간이 소우주라면 무한대의 우주에 포함되는 한 부분이 된다. 그래서 우주는 나의 속성이자, 나 이외의 모든 것의 속성이 된다. 모두가 하나(唯我)가 된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된다.인간은 흙으로 만들어 졌지만 우주의 존재를 고민해 보는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는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 초월된 세상에 이를 수도 있겠다. 노력하면 영적인 세계, 즉 우주적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영생이나 해탈(解脫)이라 할 수 있다.한 원소는 다른 종류의 원소와 각각 상대성 원리에 적용받는다. 즉 원소는 절대적 우주의 하나이면서 상대성도 갖는 완전성을 갖는다. 이러한 절대성과 상대성은 서로 하나로 되어 무수히 굴러간다. 시간을 초월하는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그러나 현실 생활에서 우리는 시간에 포위당해 있다. 자본주의 원리에 에워싸여서 시간은 곧 돈이 되고 힘이 되면서 삶의 수준을 측정하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 내가 물건을 산다면 그 물건을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시장의 매매란 다른 사람의 시간을 사고파는 것이다. 즉 상업이란 시간을 사고파는 것이다. 은행도 시간을 돈으로 환산해 거래를 이루는 곳이다.사회는 시간의 활용능력 정도에 따라 사회계층과 삶의 구역이 나눠지고 시간을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는 소위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초과 근무를 한다든지 투잡을 가져서 살아가는 시간을 벌기도 한다. 어떤 이는 물가조작을 하거나 사기 술수로 남의 시간을 훔치기도 한다.시간은 멈추면 안된다. 그것은 우주와 존재의 없어짐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망자란 시간이 사라진 사람을 말한다.

2012-06-29

사랑과 환멸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남녀 간에는 만나자말자 눈에 또는 서서히 사랑에 빠져 들면 장래의 행복을 생각하게 된다. 둘은 함께 새로운 지평을 향해 박차고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드려 한다. 그 사람들은 늘 기쁘고 명랑하며 행복해 보인다. 웃음 띈 얼굴로 매사에 자신감을 갖는다. 젊은이는 부모를 떠나서 상대자와 함께 살면서 스스로가 만족한다. 때로는 지금까지 사회에서 통용되던 활동 한계를 좋은 기분으로 넘어 서기도 하면서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자기는 그 행동을 용기로 여기지만 주위 사람들은 종종 조금 과격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그들은 살아가면서 상대에게서 어떤 특징을 발견해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상대에게 기쁨과 찬사를 보내고 인정해 줌으로써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서로 사이에는 생각의 방향, 정서, 취미 등이 균형을 이룬다면 두 사람은 자신들의 능력을 펼치는데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런 형평은 관계가 시작될 때부터 죽음이나 두 사람이 헤어지기까지는 잘 유지돼야 한다.그러나 살아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방향 설정이라든지 현실의 이해에서 차이를 소화해 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이때 서로는 상대자에게서 예속이나 방기를 당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또는 서로의 융합은 종속되는 듯해 개인의 정체성이 위협을 당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삶의 자세가 붕괴되는 것 같아서 두 사람의 관계가 점차 와해될 수도 있다. 그들은 서로가 깊이 빠져 들기 전에 먼저 자기보호적인 자세를 갖기도 한다.마주보며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자신의 잠재력을 그들 사이에서 최대한 전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자기중심적인 요구가 되기 쉽고 그래서 결국 난관에 부치는 경우가 많다. 이해관계에 갈등이 생긴 것이다. 차차 그들은 마음에서 점차 멀어지게 된다.또 한 가지는 성적인 문제다. 결혼 관계가 지속될수록 성생활의 만족도는 떨어지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태연히 받아 드린다. 그 결과로 일어나는 바람기는 배우자의 영혼을 파괴시킨다. 헤어진 이유의 제일 큰 것이 `외도`이다. 신뢰를 배반하는 행위로서 공동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힌다. 이것은 심대한 불균형을 만든다.성에만 국한된 일시적 외도는 조금이라도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숨겨둔 사람과 긴밀한 정신적 결합이나 우정의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 이때 공동생활을 하는 두 사람의 사랑은 크게 위협을 당한다. 어느 커플에나 성격차이. 외도, 미래를 바라보는 시야 등의 문제에서 공개적이든 잠재적이든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서로가 상대에게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을 발견한다면 상대자의 발전에 기대를 걸었던 희망이 깨지고 환멸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활동에 긍정적인 관심이 없다고 느낄 때 상대는 격한 모멸감을 느낀다. 이때의 느낌은 고통이며 공생관계를 깨뜨리고 한계를 실감케 하면서 양 파트너를 갈라놓을 수 있다. 그는 그곳에서 빠져 나오려고 한다. 사랑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서 드디어 둘만의 세상에서 밖으로 나와버리게 될 수가 있다.이것이 계속되면 증오로 변한다. 그러다가 사랑의 불꽃이 완전히 꺼지면 증오는 무관심으로 바뀐다. 상대자의 무관심은 그 파트너 없이 지내던 때보다 더 큰 고독을 느끼게 한다. 상황을 바꿀 능력은 있어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나쁜 상황은 계속된다.오늘날 많은 커플에서는 사랑을 위한 싸움을 하는 능력과 의지가 전보다 줄어든 것 같다. 차라리 싸우기보다 일정 거리를 두려고 한다. 둘의 관계는 서먹해지고 황량해 진다. 재시도가 어려우면 차라리 그만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상대를 향해 인내를 가지고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2012-06-22

온유한 자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면 의당 나약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손해를 봐도 웃기만 하는 또는 겸손해 다른 사람에게 굽신거리기를 잘하는 자로 치부해 버린다. 여성이 온유하면 좋은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남자가 온유한 성격이라면 고분고분하고 그냥 착하기만 한 자를 연상한다. 더러는 무능한 자 또는 뼈대 없는 자로 연체동물과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반대로 성공적인 사람은 터프한 성격으로 강인하고 거만한 성품을 가진 자들로 인식한다. 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무자비하거나 폭력이나 복수심도 가지고 있는 자로 여긴다.그래서 현 사회에서는 온유한자란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 무시당하거나 짓밟혀도 저항을 못하는 자로 본다. 그 반대로 성공한자는 자기주장이나 개성이 강한 자들을 연상한다. 이런 사람은 모든 전리품을 독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온유한 마음이란 실제로는 최고급의 정신 상태로서 수양과 노력 없이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배우고 갈고 닦아야 하는 마음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또는 신앙의 깊은 경지를 말한다. 이것은 배워도 배워도 못다 이루는 분야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살아가는 중에 꼭히 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남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기를 잘 파악하는 부드러운 사람을 우리는 `온유한 지혜 자`라고 한다.그런데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풀무에서 쇠가 다루어지듯 연단하여 자아를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힘들다. 수련하다가 대부분은 중도에 포기해 뛰쳐나가 버린다. 견디지 못한다.나는 지나치지 않는지 또는 모자라지나 않는지, 무모한지, 겁 많은 지, 힘이 넘쳐나거나 딱딱하지나 않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비하를 할 필요는 없다. 그는 미래를 잘 볼 수 있는지 지나치게 건방지지나 않는지 과도히 걱정을 하지나 않는지 등을 명상을 통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돼야 중심을 잡을 수 있고 비로소 그는 당당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이런 경지에 도달하면 그에게는 세상의 만사가 그의 것이자 모두의 것이 된다. 한계를 초월한다. 공유의 개념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신이 주신 주위의 환경을 깨끗하게 한다. 그는 나눌 줄 알고 작은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사회에서는 큰 것이라 해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기독교에서는 이런 노력을 하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그 자신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목표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그러나 이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쉽게 시작했으나 많은 시간이 걸려서 수행과정이 삶에 방해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한다.힘을 강하게 하고 싶지만 온유를 위해서는 힘을 줄이거나 빼라고 한다. 힘이 강한 것이 최고의 기준이라면 이 세상은 호랑이나 사자의 천지가 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미물이 지구를 덮고 있음을 매일 본다. 온유란 나약과 같은 여린 종류의 단어가 아니다.온유한 자는 쓸데없는 곳에 함부로 팔을 걷어 부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도 참으면서 어떤 일의 처음과 마지막을 따뜻한 마음으로 한꺼번에 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의 시야에는 훈풍으로 가득해 진다.인류 역사는 사건을 중심으로 `권력자`의 성취를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서는 `온유, 자비, 사랑`을 역사의 중심에 둔다. 이 두 가지는 정 반대의 개념이다. 종교는 우리에게 세계사적인 성공과는 반대의 것을 수행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2012-06-15

행복의 위치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행복해 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기원을 신에게 아뢰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을 침묵 속에 놓아두고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큰 바위 같은 위압적인 형체물에 빌기도 하면서 소원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온갖 곳을 기웃거려 본다. 그러나 우리는 외부의 힘을 빌리기보다는 스스로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또 만들 수 있다. 행복을 위해서는 긍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안과 우려의 마음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면서, 불행을 만드는 대장장이가 돼 버린다.행복은 누구에게나 금방 왔다가 속히 사라지는 특성이 있다. 그럼 누가 더 크고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느낄까? 어떤 사실에서 기쁨 등을 많이 느낄수록 그는 더 크게 행복을 느낄 수 있다.행복의 반대말은 `없음`이다. 사랑 없음, 의미가 없음, 웃음이나 희망이 없음, 친구, 의욕, 이웃 없음, 용서 없음 등 불행이란 모두 `없음`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반대로 행복과 동행하는 단어는 `기쁨, 감사` 등이다.생활 중에서 이런 감사를 오래 지속하려면, 뭣보다도 나뿐 아니라 상대의 평범함을 인정해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려면 사랑을 키우는 가정교육이 아주 큰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행복을 위해 똑똑하고 성공한 자가 되려고 기도나 노력을 하는 것은 환상이다.가정은 행복의 생산 공장이다. 모든 이는 그의 가정이 좀 더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려면 식구들에게 기대를 줄이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긍정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을 받아드리면 기쁨이 가능하다.우리는 가정생활에서 부부가 서로의 평범함을 받아드리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남보다 더 출세하거나 돈을 많이 벌기를 바란다. 이런 곳에는 긍정이란 것이 없다. 자식도 평범하게 받아드려야 한다. 나의 행복은 너의 삶 속에 있다. 아내는 눈물짓는데 남편은 콧노래가 가능할까?때로는 우울이나 좌절, 고뇌 등으로 힘들어서 엉엉 울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는 선택이다. 감사할 일에 원망하기도 하고, 반대로 원망할 일인데도 감사하는 이가 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행복은 감사 그 너머에 있다. `더 이상 못 참겠다`의 너머에, 그리고 `끝장내야 겠다`와 `죽어도 용서를 못하겠다`를 지나가야 행복과 감사가 있다.행복, 절대적 행복은 없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가야만 느낄 수 있다. 세상의 행복은 상대적 행복뿐이다. 기준이 없다. 이런 것에는 종교가 선택의 능력을 키워 준다. 많은 재산으로 불행해 하기도, 적은 재산으로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신비를 느끼는 순간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장작을 쪼개어 보라. 수많은 나이테가 나타나고 거기서 시간의 농축을 느껴 볼 수 있다. 커다란 돌을 들어 보라. 지렁이 등 벌레가 우글거린다. 작은 벌레들의 생존 방법이나 나이테를 보면서 우리는 신비를 느끼고 감사와 행복을 품게 된다.묵상이나 깊은 생각을 하면 그때마다 감사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하루에 머리털이 자라는 것을 모두 이으면 35m, 심장은 쉬지 않고 1년에 270만℃를 뿜어내고 눈꺼풀은 520만번 깜박인다. 그리고 해는 수십억 년을 똑 같이 떠오르는 것 등에서도 생명을 받음에 대한 감사와 신비 그리고 행복감을 갖게 된다.생각이 깨어 있으면 보이는 모든 것이 기적으로 가득 차 있다. 행복의 현주소는 바로 이곳이다. 이 세상이 신비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면 행복을 느낀다. 삶이 기도이고 생각이 기도일 때 그리고 기쁨과 신비를 느낄 때 행복은 그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2012-06-08

노화의 종착점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죽음은 누구에게나 시점은 다르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된다. 이 사실로 볼 때 우리는 인간 모두가 동일한 조건에 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나 같은 곳으로 간다. 장례란 모든 인간이 하나로 되어지는 절차를 말한다. 죽음은 자연스런 것으로 연습할 수 없고 또 피할 수도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죽음과 동반한다. 죽음은 삶 속에 항상 있다. 하루를 살아가면 하루만큼 살 수 있는 기간이 줄어든다. 사람은 자기가 느끼는 고뇌와 아픔, 상황에 대한 무력감, 일상에서 당하는 좌절, 노쇠나 질병에 의한 쇠잔함 등으로 죽음과 이미 접촉하고 있다. 그래서 죽음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만 대면하는 것이 아니다.인생의 높고도 험한 파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고난을 주지만 그것은 반대로 삶의 지혜를 열어주는 좋은 도구역할도 한다. 그것은 망망한 바다에서 나침반 역할을 해서 삶 속에서 생겨나는 혼미와 판단 착오를 피하도록 도움을 준다.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접근하는데 있어서 인생의 짐을 조금씩 풀어내기 위한 신의 배려이다.누구나 좋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한다. 그러려면 사랑의 마음으로, 고난을 극복하면서 지혜롭게 인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노후를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도록 가장 강하게 호소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잘 죽는 죽음이란 남을 의식하면서 살고 죽음을 수용하면서 하나님의 세계에서 일원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헌신과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맞이하는 죽음도 좋은 죽음에 해당된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 것, 나의 모든 것을 주위의 사람에게 넘겨주는 죽음을 말한다. 또는 다른 사람이 나의 죽음에 힘입어 살게 할 때다. 그는 못다 이룬 삶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미련에 울고 절뚝거리면서 따라가지 않는다.죽고 나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산다고 믿는 사람은 죽음이 자기 인생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노인은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죽음을 긍정한다. 그의 영혼은 죽음을 두려움 없이 대면하는데 이것을 일반 사람들은 `바람직하고 건강한 정신'이라고 한다.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결과이다. 얼마나 좋은 삶이었는지는 사랑의 실천 정도에 따른다. 생명의 공통된 언어는 사랑이다. 인간은 신과, 심지어는 짐승과도 사랑을 통해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 사랑은 삶과 죽음을 관통한다. 살아가면서 사랑이신 신을 만나는 것을, 인간은 제일 크게 갈망한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죽음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니까, 죽음은 인간의 제일 큰 갈망을 채워 준다.헌신적인 기독교에서는 죽음이란 평범하게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든든한 결속을 갖게 한다고 한다. 죽음이란 끔찍한 최후나 끝 모를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안에서 새로이 출생하는 것으로 본다. 즉 다른 형태로 새로이 연결되는 순간이 된다.늙음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행복한 여행인 것이다. 죽음을 긍정한다는 것은 마지못해 체념하면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사랑을 주고받는 행위'의 하나로 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늙어지는 것은 사랑의 완성으로 가는 헌신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그러나 많은 노인들은 죽음을 긍정하는 행위인 `사랑과 용서하기'가 어려워서 죽음 앞에서 떨고 있다. 또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것도 불안해한다. 죽음의 시점을 예측하기란 삶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우리는 깨어 있으면서 사랑의 실천을 위해 어느 한 순간도 공허하게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 언제 세상을 떠나도 죽음을 긍정할 수 있는 생활이 필요하다.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

2012-06-01

성당에서 훔친 촛대

▲ 이원락 경주 청하요양병원장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는 성경을 읽기 위해 촛대를 훔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소설에서는 어디까지가 절도행위인지에 대해 기준과 범위가 헷갈릴 때도 있다. 선과 악이 같은 장면에서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훔친 물건은 훔친 것이다. 그것은 장물에 속한다. 경전을 읽기 위해 훔친 절도행위나 굶주린 아이의 배를 채워 주기위해 빵을 훔치거나 사흘 굶어 눈이 뒤집혀서 식빵을 훔치든 정황참작은 될 수 있으나 절도 행위는 틀림없다. 절도 행위는 주로 가난한 자의 행위다. 사회에서 가난함은 약자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의 가난함은 자신들의 능력 부족이 원인일 수 있지만 가진 자들이 행하는 권력의 부당한 행위 때문인 경우도 더러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줄어들고 있지만 그들이 빈한한 자의 노동의 대가를 교묘하게 착취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종류의 부자들의 행위는 절도에 해당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진실이라는 잣대로 볼 때 불공평함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자의 잘못은 눈에 확 띌 수 있지만 부자들의 갈취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은근하다. 사실 세상의 문제란 항상 쉽게 드러나는 것과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뒤섞여있다.이런 혼재를 분류하고 잘라 가르는 일은 언제나 그냥 겉핥기 수준에서 끝나고 만다. 공평성 여부의 분류에서 당하는 자는 대부분 힘이 약한·가난한 자다. 그래서 법이 없으면 공공연히 힘 있는 자가 누르기에 가난한 자는 무정부주의에 대해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그 결과 권력의 하부에서 생활하고 권력은 그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가난한 자에 대한 복리는 항상 선거에서 정견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돼 발표된다.독일에는 `경전을 읽기위해 촛대를 훔치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판결과 격언이 있다고 한다. 촛불을 밝혀두고 경전을 열심히 읽는다면 그 사람을 감화시켜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지고지선의 도구기 때문이라고 한다.경전은 읽기가 매우 어렵고 지루하게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딱딱하고 읽는 맛을 느끼지 못한다. 일부러 `읽어라` 해도 읽지 않을 이 책을 스스로 읽으려고 촛대를 훔친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훔쳤다기보다는 잠시 빌려가는 마음으로 그냥 말없이 가져갔을 것이다. 독일나라는 인간 행위의 한계가 우리보다 폭이 넓은 것 같다.과거에 산골의 꽃동네라는 마을을 피땀 흘려 일궈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계를 유지시켰던 신부가 있었다. 그러던 신부가 운영에서 부정을 저질렀다고 언론의 재판대에 올려지는 것을 보았다. 고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일을 하다가 한계를 조금 넘었을 뿐일 것이다.잘못한 행위에 대해 법이 엄하면 엄할수록 또 법이 허점이나 틈새가 없으면 없을수록 사회는 깨끗하게 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은 그 사회가 복잡할수록 틈새를 막기 위해 완벽을 추구하고 세밀화 돼 간다. 이렇게 보면 조밀하게 따지는 법이 만들어 지는 이 사회는 범죄 많아지고 지능화, 그리고 복잡화돼 가고 있는 모양이다.옛날 중국 고전에는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사는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삶을 사는 국가를 이상적인 것으로 지향했다. 법이 필요치 않는 사회를 이상화했다.경전을 읽기 위해서였다면 촛대를 훔치는 잘못한 행위는 용서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 행위가 법에 저촉이 안 되거나 애써 외면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여유와 멋의 세계가 아닐까? 더 이상적인 나라가 아닐까? 법보다 인정이 더 크게 작용하는 사회가 그립다.

2012-05-18

노인과 지혜

▲ 이원락 경주 청하요양병원장사람들은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생각에 잠겨 걸어가는 노인을 볼 때 지혜 있는 노인이 우아하게 산보하는 것으로 여긴다. 노인은 연령이 깊어 갈수록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된다. 그로인해 개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은 줄어들면서 지혜의 양은 점점 늘어난다. 지혜로운 노인이란 인생에서 겪는 어려움에 잘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방법을 습득한 어른을 말한다. 이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과 인내로서 자기 억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를 의미한다. 또 어떤 일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진행방향을 잘 예견함으로써 항상 마음속에 미소가 넘치는 노인을 말한다. 그들은 매사에 긍정의 힘을 가지고 점점 더 현명해지고 젊을 때보다 나이가 들수록 더 행복해 진다.노화를 사람들은 신체의 퇴화과정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노화는 피해 버리고 싶은 기간이 아니라 자기가 노력만하면 생기 넘치는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포도주는 오래 숙성될수록 고급품이 된다고 한다.노년의 시절을 잘 보내려면 지혜 있게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혜는 많은 경험을 소화한 후에 비로소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때 가능한 것이다. 지혜는 다른 사람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때 차곡차곡 축적되게 된다. 때로 의견의 대립이 있다면 합치점이 있을 때 까지 참을 줄도 알아야 긍정적인 영향이 가능하다.그는 삶에 대해 깊고 넓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모순되거나 아이러니한 일을 만날 때 잠시 머물러 전체를 보려 한다. 그는 자기의 감정과 그것을 통제하는 이성을 잘 활용해 부드럽고 정확한 표현을 할 줄 안다.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는 균형 있는 시각을 갖추고 있다.지혜자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다. 그는 결코 자기중심적인 입장에 서지 않는다. 세상모든일에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고 인생에서 어두운 곳에 대해서도 이해하려 한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서로 연관된 부분을 보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실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측면이나 반대면도 알아보고 싶어 한다.훌륭한 사람, 예를 들면 솔로몬이나 루터 킹, 간디 같은 사람은 젊은 시절에도 지혜가 넘쳐났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그들을 노인의 모습으로 남겨 두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노년에 경륜과 성숙함이 더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지혜의 표현은 동일한 사물을 두고도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 같은 것을 두고도 어떤 경우에는 전혀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하려는 초점은 동일하다.지혜는 책을 통해 넓힐 수 있다. 그러나 꼭 책만으로 지혜를 넓히는 것은 아니다. 지혜로움은 태생적인 요소도 있고 가정교육으로도 넓힐 수 있다. 특히 가정교육은 지혜를 찾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제일 중요한 장소가 된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지혜로운 인격의 기본을 만들기에 가정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것이다.이러한 가정교육에 있어서 노인은 자식의 지혜로움과 훌륭한 인격자로 키움에 큰 역할이 가능하다. 좀 더 이기주의를 버리고 이타주의로 남의 말을 무시하기보다는 귀를 기울리는 자세를 갖게 하는 데는 노년의 지혜가 필요하다.그러나 현재의 노인들은 집안에서 밀려난다. 노인들은 복지시설이나 노인 병원으로 모여 있고 자손들과는 가끔 한번씩 볼 뿐이다. 노년은 몸이 오그라들어 있지만 할 일 없이 벤치에서 낮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기에는 그 경험과 지혜가 아깝다. 지혜를 사회에 쏟아 부을 통로가 필요하다. 더 훈기 있는 사회를 위해.

2012-05-11

참다운 효(孝)

▲ 정석준수필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일이며 그 중에서 가장 긴요한 것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일 것이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천륜이요, 인륜의 대사이며,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 아닐 수 없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새삼 말할 필요가 없지만 예로부터 자식이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불효가 하도 막심하여 성현들의 관심사 가운데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문제가 바로 부모에 대한 효(孝)의 문제였다.불교의 `부모은중경`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여러 스님들과 함께 사위성 밖 남쪽으로 가다가 해골 무더기를 보시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절을 하셨다. 이 모양을 본 아난존자가 “부처님은 삼계(三界)의 큰 스승이시고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데, 어찌하여 해골더미에 예배 하시나이까?”하고 묻자 부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이 한 더미 해골이 나의 전생(前生)의 조상도 되었을 것이요, 또 여러 대에 걸쳐 나의 부모도 되었을 것인즉 내가 예배하는 것이다. 아난아! 이 해골을 가지고 두 몫으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백골이면 희고 무거울 것이오. 여자의 백골이면 검고 가벼울 것이다”이에 아난존자가 “부처님이시여! 사람이 죽은 뒤에는 마찬가지 백골이옵거늘 어떻게 백골이 다르다고 하시나이까?”하고 다시 묻자, 부처님께서는 “여자는 살았을 적에 아들 딸 낳고 아기를 한번 낳을 적마다 서말, 서되의 피를 흘리며 여덟 섬 너말의 젖을 먹어야 하므로 백골이 검고 가벼우니라”하시고, 부모님의 열 가지 큰 은혜(父母十重大恩)-첫째 배 안에서 열 달 동안 길러낸 은혜, 둘째 낳으실 때 고통 받는 은혜, 셋째 젖먹이고 길러준 은혜, 넷째 마른자리 진자리 가려준 은혜, 다섯째 오줌똥 가려 주신 은혜, 여섯째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아 먹인 은혜, 일곱째 생명을 걸고 지켜주신 은혜, 여덟째 자식을 교육하여 사람답게 한 은혜, 아홉째 먼 길 가면 걱정하는 은혜, 열번째 끝까지 사랑으로 보살펴 주신 은혜를 하나하나 말씀 하신 후 “가사 어떤 사람이 왼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 수미산을 백번 천번을 돌아서 가슴이 터져 뼈가 드러나고 뼈가 닳아서 골수가 흐른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은혜를 갚을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는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지중한가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말씀으로써 부모님의 은혜는 실로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하겠으며,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을 것이다.공자님께서도 “효는 백행의 근본이며 참다운 효란 부모의 몸과 입을 잘 받들어야 함은 물론이요, 부모의 마음과 뜻을 잘 받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살아 계시는 동안 음식을 잘 해드리고 용돈을 넉넉히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것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뜻을 잘 살펴서 그 뜻에 맞도록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 효도의 길이라고 본다.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웃어른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경로효친사상을 윤리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웃나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란 칭송을 받았으며, 공자님 같은 분은 “동방의 예의 바른 나라인 동이(東夷)에서 살고 싶다”고 까지 했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미풍양속은 해방 이후 물릴 듯 밀려오는 서구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영향도 없지 않지만,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대가족중심사회에서 핵가족중심사회로 급격하게 이행되는 과정에서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자식은 부모의 행동을 보며 자란다. 그러므로 내가 부모에게 불효하면 내 자식 또한 불효하기 마련이다. 이는 한 치의 착오도 없는 인과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식에게 효도를 바라거든 내가 먼저 부모에게 효의 본(本)을 보여야 한다.

2012-05-09

교육실정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근래에는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소식을 자주 들었다. 그들은 폭행을 당하거나, 또는 많은 학습량에 심리적 압박을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육체는 녹초가 돼 버리고 정신적인 면도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았을 것이다. 지금의 학교에서는 오로지 지식축적만을 강조한다. 달달 많이 외우면 된다. 회사의 직원 채용에도 인격의 성숙도나 인간성, 그리고 학문의 전공분야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현실사회에서는 학벌이 제일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건강하게 커야할 청소년이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혹사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학교에서 놓친 부분은 학원 등 사교육으로 메워 나간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이다. 때로는 고뇌 때문에 폭행으로 빠져 드는 것 같다. 안타깝다.자본주의 경제 논리 속에 빠져든 교육은 산업화되고 있다. 학생들은 획일적인 교육으로 인해 상품화 되고 있다. 학교라는 공장에서는 매우 능률적으로 `생산(배출)`시키려는 것 같다. 그래서 단지 `우수 상품`만을 생산하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생산활동`으로 변질되고 있다.그렇게 되면 학교는 공단이나 거대 시장(市場)이 되고 학생은 모두 판매대에 진열할 상품이 될 것이다. 좋은 상품이란 보다 높은 학점과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다.학생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다. 오로지 공부만 강요당한다. 그들은 삶의 목표와 방향을 모른다. 다만 사회에 이끌리면서 뚜벅뚜벅 따라갈 뿐이다. 때로는 폭행으로 일탈해 버린다. 죽음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무방비 상황인 모양이다.본래 교육이란 인간성을 키우는 전인적인 교육, 즉 지식과 인격을 숙성시키고, 적극적으로 자기 개발을 하도록 도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학교의 존재이유는 `앞날에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갈 인격체로 학생을 훈련시키는 장소`라는 것에 있다. 인간을 물건 다루듯이 한다는 것은 인간을 위한 교육이라 할 수 없다.학교란 자기 주변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생각이나 새로이 발생하는 분야 등을 기꺼이 받아드리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예를 들어 만약 사회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국가적 국제적 그리고 지역적 문제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곳이다.교육 분야는 단순히 사실을 알아가는 것, 또는 그냥 잘 외우기를 익히는 것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모든 현상의 기초를 알게 해 그것이 진행해 가는 방향과 방법을 알 수 있도록 능력을 키우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인간은 컴퓨터와 같은 기계적인 기능이외에도 마음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있고 바로 이 마음이란 것이 그를 인간이게 한다.그러나 학생들은 노예처럼 시키는 대로 배운다. 똑같은 독도인데도 우리나라와 일본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일본)는 자기 것이 아니다. 동일한 사실도 당사국의 입장에 따라 교육 내용이 다르게 나타난다. 진실은 하나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런 교육을 그대로 받아드린다.앞으로는 나만의 이기적인 세계에서는 살 수 없다. 서로를 인정하는 조화된 세상이 될 것이다. 현재의 주변과는 다른 세상일 것이다. 이때 학생들은 복잡하게 얽힌 세상에서 그 구조를 잘 이해해야 비로소 좀 더 성숙하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지식을 가르치는 것만을 교육이라 하지 않는다. 학교생활에서는 학생을 보호하면서 문제에 직면해 결정을 내릴 때, 지혜롭게 통찰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 줘야 한다. 학교에서는 지식의 전달도 중요하지만 인격을 위한 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2012-05-04

환경과 동물

▲ 이원락 경주 청하요양병원장약 30년 전에 강원도 산악지역에서 보이스카웃 잼버리 대회가 있었다. 주위가 절벽인 고지대에 있는 평지에서 언론의 관심 속에서 프로그램이 진행됐고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그러나 환경운동가들은 동물들의 이동 통로를 막고 있었으므로 항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야간에 서울에서 영남지역으로 오는 기차를 타 보면,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다. 불빛이 화려하다. 이런 형태로 생태계가 변해버린 곳에 과연 짐승들이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조국 분단이라는 지극히 불행한 일로 생겨난 DMZ에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동물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다. 통일이 된 후 공업지대에서 만들어진 생산품들의 가치와 자연 보존 어느 것이 미래를 위해 더 효율적일까?인간은 머리가 좋다. 그래서 인망으로 고기를 싹쓸이하고 가을에 산기슭에 그물을 놓아서 뱀을 깡그리 잡는 것, 겨울에는 개울에 있는 개구리 몽땅 잡기 등은 인간이 동물 중에는 최고로 명석한 머리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두뇌회전은 선한 것일까?베트남전쟁에서 귀국해 부산에서 포항으로 귀대할 때, 조국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날리듯이`아름답게 강물이 흘렀다. 저녁 석양아래 먼 산 밑의 마을에서 연기가 오르는 광경은 `한 폭의 동양화`였다. 그러나 지금은 강물로 버려지는 폐수는 물고기 아가미의 기능을 거의 멈추게 할 정도이다.기독교에서는 창세기에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여, 잘 다스리라`고 했다. 지구 전체의 오염을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는 그것은 큰 축복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깔여 넘어져있는 것을 보면 내버려 두지 말고 일으켜 세워라고 했다. 또 염소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도 안 된다고 하며 `소나 양이나 염소는 태어난 후 7일 동안은 제 어미의 품에 둬야 한다. 소나 양을 그 새끼와 함께 같은 날 죽이지 말라. 하나님은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도 사랑하신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스리지 말고 잘 돌봐야 한다.근래에는 TV에서도 동물농장이라는 좋은 프로가 있다. 육식 동물은 먹고 살기 위해 포악하게 동물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육식 동물도 악기(惡氣)는 없다. 살기 위한 것일 뿐, 많이 잡아서 저장해 두지 않는다. 개 등 가축들은 아주 순하다. 새끼나 주인을 잃고서 멍한 자세로 하세월 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속이 아려 온다.뉴스 시간에는 간혹 소가 도축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차에서 뛰어 내려 거리를 헤매다가 잡히는 것을 가끔 본다. 살고 싶은 욕망은 우리와 진배없을 것이다. 낳은 새끼를 핥아 주거나 다른 짐승에게 새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 등은 우리를 감동시킨다.짐승은 인간의 향락을 위해 도마위에서 자신의 근육을 바친다. 혹자는 맛있게 고기를 먹으면서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잘 속일 수 있겠는가?`같은 음흉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간혹 TV에서는 스님과 동물들의 공생을 보기도 한다. 새들이 스님의 어깨에 내려와 앉아서 조잘거린다. 멀리 있다가도 스님이 부르면 다가온다. 한 번은 참새 알을 먹으려고 둥지 속으로 뱀이 들어가는 장면이 있었다. 새는 계속 겁에 질려 재잘거리는 중에 스님은 그 뱀을 잡아서 땅으로 내려 멀리 보냈다. 우리 같으면 잡은 뱀을 죽여 버리겠지만 스님은 그것도 생명이라고 살려 보내는 것을 보고서 불교를 믿고 있지 않는 나도 크게 감동을 받았다. 입에 버글버글 거품을 물면서 전도하는 것보다도 크게 포교하는 효력이 있을 것 같았다. 말없이 행동으로 전도를 하는 것이다.미래 언젠가는 환경문제가 생명체 공통의 절대적 과제가 될 것이다. 생명이라는 점에서 볼 때, 동물의 목숨도 곧 인간의 전체 생명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동시에 함께 죽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생명은 인간과 연결돼 있다.

2012-04-27

젊음의 특권

▲ 이원락 경주 청하요양병원장열정을 가지고 일하는 청년들은 보기에 좋다. 땀으로 적셔진 런닝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은 모습은 젊음의 상징이다. 젊음은 힘을 하늘로 솟구치게 하고, 그 힘을 자기가 추구하는 곳에 오롯이 부어 넣을 수 있는, 인생의 최고봉 시기이다. 젊음의 시절은 삶을 가장 사랑하는 때이다. 사랑하면 즐겁고 근심이 없다. 세상은 사랑하는 자의 것이다. 신록을 사랑하면 그 아름다움은 그의 것이고 산을 사랑하면 그것도 그에게 속한다. 즐거움으로 넘쳐난다. 그는 열정으로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든다. 그래서 삶을 사랑하고 즐기고 긍정하면, 튼튼한 자기 인생이 만들어지게 된다.열정과 고난은 같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영어로는 이 둘을 똑 같이 passion이라고 한다. 일생에는 위기와 고난이 있다. 그것은 우리 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젊음의 끓는 피를 가지고 이들을 박차고 이겨 나가면 우리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인간은 고통이나 고난 없이 성장하는 자가 없다. 젊음의 시절은 이들을 신나게 이겨나갈 힘이 넘치는 때이다. 위기를 극복해 이를 적극적으로 담아내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이다. 악조건을 이겨내어 미래의 에너지로 만들자. 그러면 결국 그는 성공적인 삶을 이룰 수 있다.이러한 인생의 성공은 매화처럼 쉽게 확 피어나서 잠시 아름답다가 저 버리는 형태가 아니다. 짧은 노력으로는 오지 않는다. 성공은 오랜 세월을 무더위와 소낙비, 서리 등에 시달린 끝에, 방긋 웃는 국화꽃과 같이 온다.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어야 했고,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계속 으르렁거려야 했다. 누님이 뒤안길에서 애타게 가슴 조였던 결과이다. 또 무서리가 내린, 잠 못 이룬 밤들의 결과로, 비로소 젊은이의 성공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매화는 반짝 피어버리지만, 국화는 피어나기까지 삼라만상이 몸부림을 처야, 겨우 꽃망울이 만들어 진다. 이와 같이 젊은 시절에는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젊은이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았는 미래에 두자. 지금까지 항해되지 않은 넓은 바다에 처녀 출항하듯, 앞날에 대한 희망이 부풀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 수 없으면서도, 용기를 가지고 떠날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젊은 시절에는 질투, 비난, 깎아내림 등으로 상대를 보지 말라. 만일 그가 뒤따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닮고 싶어 하면서 부럽게 바라보고 인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젊을 때는 밝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 쾌락은 어두운 환상을 따라가게 되지만, 행복은 밝은 진리위에서만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젊은이는 혈기로 일하기를 좋아 한다. 그러나 혈기에는 항상 악이 동반된다. 유혹과 근심, 걱정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시기이다. 대부분 젊은 시절에 한 일들의 소산물은 나이가 들었을 때 그 일의 좋거나 또는 나쁜 결과로 나타난다.불행한 요소는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젊은이가 인생의 좋은 결과를 위해 자기를 단련시키는 방법이 있다. 여행하는 것과 독서를 하는 것이다. 여행은 몸으로 체험함으로써 산교육이 된다. 여행은 그에게 자유란 뭔지를 가르쳐 주고 외로움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외로움은 인성을 키우고 자기의 내면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책은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저자의 경험을 습득케 한다. 때로는 그것이 자신에게 큰 충격을 주어서, 미래에 대한 시야를 넓혀 주기도 한다.젊은이의 장점은 용기가 많다는 것이다. 진리를 그리워하고 아름다움과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아무도 손대지 못할 권리가 그들에게 있다.

2012-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