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는 성경을 읽기 위해 촛대를 훔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소설에서는 어디까지가 절도행위인지에 대해 기준과 범위가 헷갈릴 때도 있다. 선과 악이 같은 장면에서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훔친 물건은 훔친 것이다. 그것은 장물에 속한다. 경전을 읽기 위해 훔친 절도행위나 굶주린 아이의 배를 채워 주기위해 빵을 훔치거나 사흘 굶어 눈이 뒤집혀서 식빵을 훔치든 정황참작은 될 수 있으나 절도 행위는 틀림없다.
절도 행위는 주로 가난한 자의 행위다. 사회에서 가난함은 약자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의 가난함은 자신들의 능력 부족이 원인일 수 있지만 가진 자들이 행하는 권력의 부당한 행위 때문인 경우도 더러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줄어들고 있지만 그들이 빈한한 자의 노동의 대가를 교묘하게 착취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종류의 부자들의 행위는 절도에 해당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진실이라는 잣대로 볼 때 불공평함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자의 잘못은 눈에 확 띌 수 있지만 부자들의 갈취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은근하다. 사실 세상의 문제란 항상 쉽게 드러나는 것과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뒤섞여있다.
이런 혼재를 분류하고 잘라 가르는 일은 언제나 그냥 겉핥기 수준에서 끝나고 만다. 공평성 여부의 분류에서 당하는 자는 대부분 힘이 약한·가난한 자다. 그래서 법이 없으면 공공연히 힘 있는 자가 누르기에 가난한 자는 무정부주의에 대해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그 결과 권력의 하부에서 생활하고 권력은 그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가난한 자에 대한 복리는 항상 선거에서 정견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돼 발표된다.
독일에는 `경전을 읽기위해 촛대를 훔치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판결과 격언이 있다고 한다. 촛불을 밝혀두고 경전을 열심히 읽는다면 그 사람을 감화시켜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지고지선의 도구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전은 읽기가 매우 어렵고 지루하게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딱딱하고 읽는 맛을 느끼지 못한다. 일부러 `읽어라` 해도 읽지 않을 이 책을 스스로 읽으려고 촛대를 훔친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훔쳤다기보다는 잠시 빌려가는 마음으로 그냥 말없이 가져갔을 것이다. 독일나라는 인간 행위의 한계가 우리보다 폭이 넓은 것 같다.
과거에 산골의 꽃동네라는 마을을 피땀 흘려 일궈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계를 유지시켰던 신부가 있었다. 그러던 신부가 운영에서 부정을 저질렀다고 언론의 재판대에 올려지는 것을 보았다. 고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일을 하다가 한계를 조금 넘었을 뿐일 것이다.
잘못한 행위에 대해 법이 엄하면 엄할수록 또 법이 허점이나 틈새가 없으면 없을수록 사회는 깨끗하게 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은 그 사회가 복잡할수록 틈새를 막기 위해 완벽을 추구하고 세밀화 돼 간다. 이렇게 보면 조밀하게 따지는 법이 만들어 지는 이 사회는 범죄 많아지고 지능화, 그리고 복잡화돼 가고 있는 모양이다.
옛날 중국 고전에는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사는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삶을 사는 국가를 이상적인 것으로 지향했다. 법이 필요치 않는 사회를 이상화했다.
경전을 읽기 위해서였다면 촛대를 훔치는 잘못한 행위는 용서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 행위가 법에 저촉이 안 되거나 애써 외면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여유와 멋의 세계가 아닐까? 더 이상적인 나라가 아닐까? 법보다 인정이 더 크게 작용하는 사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