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일은 여러 사람들이 얽혀서 진행되므로 각자가 그 일에 관여하는 과정이나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견(異見)이 나올 수 있다. 그 중 용서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갈등을 느끼면서 그것을 억누르는 과정을 말한다.
용서는 친밀감을 먹고 자란다. 용서를 주고받을 일은 거의 대부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생겨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부와 가족이다. 그래서 `너의 원수는 너의 집 안에 있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이기심이나 자기중심적인 말에서 상처는 만들어진다. 서로 상처를 준다. 같은 것일지라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더 큰 충격을 느끼게 된다. 나와 먼 거리의 사람과는 문제가 거의 없다. 공통의 관심사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종류의 일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보다, 믿었던 자들로부터 더 큰 상처를 받는다.
우리는 공평하거나 평등해야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각자는 자기가 그 입장에 서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서 생각해 보면 자기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사람은 편견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의 크기도 다양하다. 가벼운 정도에서부터 제일 심한 것은 가족이 희생당하는 것까지 그 폭은 아주 넓다. 강할수록 충격은 크다. 때로 선한 의도로 행한 것이 악의로 받아질 경우에는 혼동과 아픔 등이 머리를 꽉 매운다.
내가 힘이 있을 때 상처나 무시를 당하면 쉽게 소화해 낼 수 있지만, 내가 코너에 몰리거나 약할 때에는 같은 상처도 몇 배나 크게 느낀다. 이때는 증오와 복수심이 달콤하게 나를 유혹한다. 악마는 즐기면서 나를 괴롭힌다.
우리는 용서하면 그것이 곧`상대의 악한 행위를 잘 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용서하기가 매우 주저된다. 그러나 그것은 악을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옳았다고 손을 들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용서란 단지 용서하는 자기가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을 좋아하느냐, 화합을 좋아 하느냐`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하는 것을 표시하는 행위이다.
용서는 그가 잘못을 인정해야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가해자가 죽어버리면 영원히 용서를 할 수 없게 된다. 내가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
용서를 하면 그와는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용서를 해도 나의 아픔은 지속된다. 이 아픔은 계속되어도 그냥 두어버려라. 일부러 없애려 한다면 헛수고이다. 용서는`있었던 사실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의 뇌세포는 기억의 단백질을 벌써 만들어 놓아 버렸다. 노력으로 그것을 분해시켜 버리지 못한다. 용서는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 명령을 지켰을 따름이다.
가해자와는 만나기가 싫다. 그를 보면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은 만국 공통의 표정이다. 찡그린 얼굴을 죄스럽게 생각 말라. 복수를 포기했을 뿐이다. 상처가 아무는 데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 어쩌면 일생 동안 걸릴 수도 있다. 단지 분노와 싫음에서 복수심으로 넘어 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용서도 하지 않고, 잊지도 않는다. 현명한 자는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유행가 구절이 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그 일에대한 기억은 뚜렷하게 계속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월이 약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주위에서 격려하면서 “용서해 줘버려” 라면서 위로하는 것은 실례이다. 그와 함께 울어주면 충분하다. 다른 것은 강요 말라.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치료를 요하는 사람도 있다. 상습 범법자, 성급하게 서두르는 자 등은 용서보다 더 시급히 치료가 요하는 중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