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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생 목표 달성

▲ 이원락 경주 청하요양병원장 인간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기의 삶에 대한 자세를 바꿔나간다. 어릴 때는 완전히 자기중심적이다가 그 다음에는 점차 자기의 주위를 의식한다. 학생 때는 클럽 생활로, 직장에서는 팀원이 돼 조직 활동의 기본을 경험하면서 이타의 정신을 조금씩 배워나간다. 사랑을 주고받고, 서로를 인정하면서 각자는 미래를 준비한다. 그런 중에 그들은 서로 인간관계의 그물을 형성하면서 점차 경쟁사회로 뛰어든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을 나타내는 한자의 인(人)은 두 개의 나무가 서로 버티어야 넘어지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인이 돼도 자기중심적이면, 주위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한다. 꿀벌은 자기를 위해 꿀을 먹으면서도, 식물에게는 종자를 맺히도록 한다. 인간도 자기뿐만 아니라, 남을 의식하면서, 그리고 위하면서 살아야 한다.사람은 하는 일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비교적 단순한 직업도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여러 사람으로 조직된 기업 등에서는, 일이란 전문적인 소질과 경험을 이용해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장도 내부 직원끼리, 또는 다른 직장과 경쟁 상태에 놓여 있다.경쟁사회에서는 반드시 이기는 것이 미덕이다. 비교에서 지는 것은 당사자에게 큰 타격을 준다. 학교에서 성적순위도 그 반에서 비교를 나타낸다. 다만 스포츠에서는 승리보다는 참여에 더 큰 뜻이 있다고 하나 그것은 비교하위자를 격려하는 단어일 뿐이다.목표를 이뤄 내기 위해서는 철저히 그리고 분별력 있게 준비해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일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는 집착을 하지 않고 집중 하면서도 중간 중간 휴식으로 뒤돌아 볼 여유를 가져야 한다. 집착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함으로, 그것을 버리기는 매우 어렵다. 이것이 클수록 많을수록 실패할 때, 그의 괴로움은 더 깊어지고 비참함을 느끼게 된다.욕망만을 가지고 몰입하는 자는 집착을 하기 때문에 성취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나 경쟁에서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우리는 집착을 하기 마련이다. 집착으로 그는 그 일에 묶여 버리게 된다. 그래서 성취하지 못했을 때는 마음이 심란해 지고 몸살로 피로를 느낀다. 이루지 못 하면 분하고 풀이 죽고 기가 가라앉는다.그러나 욕망과 집착을 없앨 수는 없다. 없앨 수 없으면, 줄이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이뤄 내지 못해도 `좋은 경험을 하였다`고 생각하여 만들어진 결과에 긍정의 시선을 보낼 필요가 있다.또 한 가지는 `앞으로는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과거의 실패보다는 미래 지향적이어야 한다. 실패의 이유보다는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기죽지 말아야 한다. 승리해도 담담하고 지고 있어도 태연한 자세를 가진 자가 제일 두려운 사람이다. 흔들리지 말라.욕망과 반대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욕망은 미래에 대한 성공여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여기면서 추구하려는 자세이다. 욕망이 있으면, 일을 해 나가는 과정이 모두 즐겁고, 관심을 온전히 쏟을 수 있다. 목표에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그는 비교하지 않는다.욕망과 희망은 이렇게 차이가 많다. 그러나 그 둘은 비슷한 과정을 밟아서 실행된다. 처음에는 구별이 안 된다. 그래서 이때에 욕망을 희망으로 바꾸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욕망으로 시작하였더라도 집착을 줄이고,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 다시 시작하고, 그것을 반복해 욕(慾)이라는 글자를 희(希)로 바꾸는 훈련을 할 것을 권한다.이것은 매우 어렵지만 노력하면 마음속의 분위기를 기쁜 쪽으로 돌릴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알력을 줄이는 역할도 할 수 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긍정하고 자기가 능동적으로 변할 준비를 하며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다시서기를 시도하면 이것은 경쟁과 비교가 많은 사회에서 잘 살아가는 방법이 된다.

2012-04-06

부부로 살아가기

▲ 이원락 경주 청하요양병원장결혼 전에 사랑으로 마주 보던 눈길을 먼 미래로 방향을 바꾸면서 부부 생활은 시작된다. 처음에는 넘쳐흐르는 사랑으로 아기자기하지만, 주택을 장만하고 자식과 가족을 이루는 과정 등에서 과도한 일과로 피로가 누적된다. 점차 생활과 사랑은 타협의 길로 들어간다. 서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서 맺은 부부는 점차 그 값어치를 회의하면서 인생의 험한 바다를 노저어 간다. 질병, 가족의 사망, 뜻밖의 사고, 외도, 다른 사람과의 송사 등은 높은 파도에 해당된다. 이때는 온 몸이 따갑도록 괴롭다. 그런데 이런 시간은 대부분 영속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끔은 서로 해야 할 일을 분담해 일해 나가는 과정에서 성취감과 기쁨을 공유하기도 한다.생활에서 남자들은 무엇인가 혼자 일을 해 내었을 때 부인에게 뿌듯함을 갖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거나, 운동 등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해결책을 혼자서만 모색할 뿐 다른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부인은 둘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관심을 보여 주기를 바라고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자기의 말이 실제에 적용돼 좋은 결론이 날 때, 사랑과 행복감을 느낀다. 부인은 거절을 당하거나 홀로 남겨지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한다.이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 자발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상대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독려와 긍정적인 반응, 참여적 지지, 정확한 비판 등은 적게 교환한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인생을 보는 시각의 차이로 갈등이 점차 커져서 긴장관계가 늘 팽팽하게 있다.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은 나와는 다르므로, 그의 뜻을 신중히 생각해 보느냐의 유무다. 대화란 `두 사람 사이의 차이나 거리에 대한 협상`으로서 가까이 하느냐 멀리 하느냐의 기준점이 된다.부부가 상대를 비난할 때, 그 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맞아들 때가 많다. 그때 둘은 서로에 대한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바른 말을 이야기 한다. 그들이 하는 말 속에는 자신이 하기 불가능한 일이나, 상대가 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도 많다.요구에 대해 거절이나 무시를 당하면, 절망적인 환멸을 느낀다. 사랑 없는 상태, 즉 공허와 배반을 느끼고, 이때 그들은 더 높은 강도로 감정을 섞은 비난을 하게 된다.이제 해결책은 싸워서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자기의 생각을 서로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므로, 해결법을 상대에게서 얻으려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서로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건설적인 해답이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면도 역시 가지고 있다.상대의 말에 책임감이 없다고 느끼면 무시당한다고 생각한다. 또 비난을 존중하는 것은 상대가 맞다는 것을 인정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비난은 참기 힘들다. 비중이 상대에게 기우려져 균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내사 당신이 말한 바로 그 수준밖에 안되잖아! 나는 그 정도의 낮은 수준이야!”라고 함으로서 자기를 정당화 시킬 수도 있다.그들의 비난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면 둘 다 맞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변증법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묄러는 `한 사람은 항상 그르다. 그러나 둘로부터 진실은 나온다`고 했고, 프랑스 시인 꼴라르도는 `의견이 충돌하는 곳에서 진실이 나타난다`고 했다.부부 서로의 비판은 개인적인 발전을 자극하거나 더 좋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난과 상대의 합리화 또 이런 반격을 반복하다 보면 파괴적인 말들이 오갈 수 있다. 서로 의견 차이를 조정하고, 인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유능한 비판자이자, 가장 무너뜨리기 어려운 도전자이기 때문이다.

2012-03-23

노인과 지혜

▲ 이원락 경주 청하요양병원장사람들은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사색을 하며 걸어가는 노인들을 볼 때, 지혜있는 노인이 우아하게 걸어가는 것으로 여긴다. 노년이 깊어 갈수록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된다. 그로인해 개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은 줄어들면서 지혜의 양이 늘어난다. 지혜 있는 노인이란 인생에서 겪는 어려움에 잘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방법이 습득된 어른을 말한다. 이것에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과, 인내로서 자기 억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를 의미한다. 또 어떤 일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진행방향을 잘 예견함으로써 항상 마음속에 미소가 넘치는 상태를 말한다.그들은 매사에 긍정의 힘을 가지고, 점점 현명하게 된다. 그래서 젊을 때 보다 나이가 들수록 더 행복해 진다.노화를 사람들은 신체의 퇴화과정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노화는 피해 버리고 싶은 기간이 아니라 자기가 노력만하면 생기 넘치는 삶의 연속을 만들 수 있다.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고급품이 된다고 한다.노년의 시절을 잘 보내려면 지혜 있게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혜 있는 자들은 폭 넓은 사고방식을 갖으며, 분별력 있는 판단과 도덕 규율에도 저항 없이 무난해야 한다. 이들은 어떤 사실에서, 그것의 과거와 미래의 변화 등을 짐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짐작할 수 있다.지혜는 많은 경험을 소화한 후에 비로소 만들어 지는 것이다. 또 그것을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때 가능한 것이다. 지혜는 다른 사람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때 차곡차곡 축적되게 된다. 때로 의견의 대립이 있다면, 합치점이 있을 때까지 참을 줄도 알아야 긍정적인 영향이 가능하다.지혜자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다. 그는 결코 자기중심적인 입장에 서지 않는다. 세상만사에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고, 인생에서 어두운 곳에 대해서도 이해하려 한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서로 연관된 부분을 보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실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측면이나 반대면도 알아보고 싶어 한다.훌륭한 사람, 예를 들면 솔로몬이나 루터 킹, 간디 같은 사람은 젊은 시절에도 지혜가 넘쳐났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그들을 노인의 모습으로 남겨 두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노년에 경륜과 성숙함이 더해지고, 그래서 지혜로워 지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지혜의 표현은 동일한 사물을 두고도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 같은 것을 두고도 어떤 경우에는 전혀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하려는 초점은 동일하다.지혜는 책을 통해 넓힐 수 있다. 그러나 꼭히 책만으로 지혜를 넓히는 것은 아니다. 지혜로움은 태생적인 요소도 있고, 가정교육으로도 넓힐 수 있다. 특히 가정교육은 지혜를 찾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제일 중요한 장소가 된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지혜로운 인격의 기본을 만들기에, 가정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것이다.이러한 가정교육에 있어서 노인은 자식의 지혜로움과 훌륭한 인격자로 키움에 큰 역할이 가능하다. 좀 더 이기주의를 버리고 이타주의로, 남의 말을 무시하기 보다는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갖게 하는 데는 노년의 지혜가 꼭 필요하다.그러나 현재의 노인들은 집안에서 밀려난다. 노인들은 복지시설이나 노인 병원으로 모여 있고, 자손들과는 가끔 한번 씩 볼 뿐이다. 노년은 몸이 오그라들고, 할 일 없이 벤치에서 낮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기에는 그 경험과 지혜가 아깝다. 지혜를 사회에 쏟아 부을 통로가 필요하다. 더 훈기 있는 사회를 위하여.

2012-03-16

소가 웃는다

▲ 이동옥전 포항교육장 소가 웃는다.집에서 길러지고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동물들을 가축이라고 하는바 여러 종이 있겠으나 그 가운데 인간생활과 가장 밀접한 세 가지를 들라고 하면 단연 닭과 개 그리고 소가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세 종과 관련된 사자성어나 속담들이 많다.예를 들면 `닭 쫓던 개 지붕 처다 본다`는 말은 열심히 쫓던 목표물이 갑자기 잡을 수 없는 자기능력 밖으로 사라지는 황당한 상황을 두고 표현하는 말이다.또한 어떤 일을 두고 서로 상반된 의견으로 아주 격하게 다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대방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필요 없이 무시하면서 더욱 화를 돋우고자 할 때 시치미를 떼면서 `왠 개가 짖노?`라고 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간혹 상황을 유리하게 반전시키기도 했었지만 십중팔구는 싸움을 더욱 격하게 하는 촉매가 됐는데 당해 보기도 했고 또 써먹기도 해서 어떤 상황에서 쓰는지를 잘 알고 있다.그런데 `소가 웃는다`는 말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사용해야 되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소 먹이로 갔을 때 간혹 황소가 암소의 소변냄새를 맞고 입을 하늘로 치켜들면서 취하는 제스처를 두고 우리는 `소가 웃는다`고 했었는데 그런 내용은 아닌 것 같고 또 우이독경과는 사뭇 다른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오랜 혼란과 진통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한미 FTA가 비준이 됐고 대통령의 서명까지 끝났건만 아직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시비가 잦아들지를 않고 있다. 이유인 즉 농민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고 그 가운데 축산농가도 포함이 돼있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그 여파인지는 몰라도 FTA가 발효되기도 전에 벌써 송아지 한 마리의 가격이 단돈 만원이라는 기사와 지금껏 짠 밥 먹이던 군인들에게도 한우를 먹인다는 기사가 대서특필 된 것을 보면 사태가 심상치는 않게 돌아가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숫제 말로 소 값이 똥값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우 쇠고기 한 근 값은 몇 만원씩 한다니 이해가 잘 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도 쇠고기 한 근이 채 안 나온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송아지를 잡으면 쇠고기이지 식당에서 판매하는 소고기는 아니라는 말인가? 도대체가 말이 안 된다. 어떻게 설명을 해도 이빨이 맞지 않고 논리적이지 못하다. 이때가 바로 우공의 염화시중의 미소가 아닐까?아산 정주영 회장님이 소 101마리를 실고 휴전선을 넘던 때의 뭉클한 가슴이 사그라진 지도 추억이 됐고 장본인인 회장님마저 고인이 된지도 기억에 아련하다.그런데 이번에는 전국의 축산 농가들이 소 천 마리를 실고 땅에 떨어진 소 값을 보상하라는 시위를 하려고 상경을 시도했단다. 경찰은 축산 농가들의 고충과 아픔을 이해는 하면서도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지라 원천봉쇄를 한답시고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서로 대치를 하는데 그 광경이 가관이었다.선동적인 문구의 붉은 머리띠를 한 축산농민과 검은색 제복에 방패를 든 전경들, 양측은 소를 태운 차량을 사이에 두고 격한 말투로는 안 되겠던지 이윽고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벌어졌다. 양 진영의 다툼을 트럭 위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는 우공의 미소가 있었으니 바로 영락없는 `소가 웃는다` 였다.`코를 꿰어 고비를 다잡아 맨 체 트럭에다 실어놓고 네 놈들끼리 싸우는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다`

2012-03-12

애통해 하는 자

▲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나를 포함한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 남모르는 사건을 계속 만난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는 그 일에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그럭저럭 살아간다. 하루라도 낙담하지 않거나, 울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다. 그런 중에 슬픔은 우리를 상심케 한다. 슬픔에는 통탄, 개탄, 한탄, 애통 등 여러 감정이 있다. 그 중에서 애통은 가슴이 따갑게 아프면서, 슬퍼할 때를 말한다. 나에게 슬픔이 있다면 그 이유가 있다. 그리고 자기에게 중요한 것일수록 슬픔은 더욱 가슴에 아린다. 그는 소중한 것을 잃고서 괴로울 때, `눈물아 왜 왔니? 슬픔아, 너가 찾아온 이유는 뭔가? 아픔아, 내게 뭘 주려 하니?` 라고 스스로가 슬픔에게 물어 보기도 한다.언제 가장 슬퍼할까? 가까울수록, 소중할수록 슬픔의 양은 많아진다. 가족과의 이별이나, 집에 불난 것 등이 제일 가슴을 아프게 한다. 또 가정의 깨어짐도 슬프고 아프다. 아주 귀한 것을 잃었을 때, 우리는 뼈저리게 애통해 한다.또 나 자신이 멸시나 버림을 받을 때, 그때도 매우 슬프다.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자아이기 때문이다. 재산, 명예, 이름 등 엄청나게 중요한 가치가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자존심이 짓밟혀지고, 조롱을 당하며, 사방에서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애통은 슬픔 중에 가장 강열한 표현이다. 그러나 애통해 하면서 흐느껴 우는 자는 행복하게 된다. 통곡하는 자, 가슴을 치며 우는 자도 평안을 얻게 된다. 신음하면서 속으로 흐느끼며 우는 자는 물론 창자를 짜르는 듯한 아픔으로 슬픔을 겪는 자, 마저 평안하게 된다. 신의 축복은 애통을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슬플 때 울지 않으면 위장 등 장기가 대신에 운다. 속병이 된다.나는 눈물을 안 흘려! 하면서 슬픔과 싸우지 말라. 그렇게 하면 나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돼 버린다. 슬퍼하라. 울어라. 기도하는 심정이 되라. 신에께 슬픔을 바쳐라. `오늘 제가 바치는 제물은 나의 눈물, 슬픔입니다. 그냥 의미없이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고하라. 우리의 고난, 역경, 슬픔, 등으로 인한 눈물은 `사랑을 위한 제물`이 돼야 한다. 그렇지 않은 분노나 복수의 눈물은 독약이 되기 때문이다.애통으로 흘리는 눈물 중 제일 강한 것은, 이웃을 위한 `사랑의 눈물`이다. 보통 우리는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엉뚱한 짓을 하면 분노한다. 탄식한다. 저주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국가, 사회, 이웃 또는 가정의 친자식이 될 수도 있다.이때는 `이럴 수가! 세상은 망해야 해!` 라고 하는 비난, 코웃음, 욕, 분노 등을 자동으로 내 뱉게 된다. 내 맘에 들지 않는 자에게나 이웃에게는 험한 말을 함부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마음이 아니다. 눈물을 흘리며 분노하는 성인보다, 슬퍼하는 보통 사람이 되라. 화를 내는 의인이 되지 말고, 눈물을 흘리는 아픔의 사람이 되라.분노 대신 그를 위해 슬퍼하면, 그것은 자동으로 기도가 된다. 그 이유는 그를 위한 애통은, `~위한 눈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느 유행가에서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했다. 이것은 일반 세상의 가치이다. 종교는 반대로 `눈물은 사랑의 씨앗`이라고 주장한다. 눈물은 상대를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하는 시발점이 된다.우리는 고통을 잊으면 기쁨을 잃게 된다. 실패를 잊으면 성공도 사라지고, 상처를 잊으면 사랑도 없어지게 된다. 그 결과로 애통으로 우는 자는 웃고, 웃는 자는 울게 된다. 과거의 눈물을 진정한 기쁨, 사랑으로 바꾸어야 한다.얼굴은 의료기술로 바꿀 수 있으나, 화나거나 무표정한 얼굴은, 인위적으로는 웃는 얼굴로 바꾸지 못한다. 내 눈물을 신의 제물로 바치는 자가 진심으로 우는 자이다. 악한 자들은 그렇게 온 몸으로 울 수 없기 때문이다.

2012-03-09

세상의 소금

▲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대화를 할 때 분위기에 맞지 않게 뜬금 없는 말로 웃기려 하는 사람을 우리는 `싱거운 사람` 또는 `맛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런 같잖은 이야기를 들을 때는 `피식` 쓴맛이 나는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그러나 의미가 있어서 맛있는 말이라면, 깊은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음식에서 맛은 파, 고추, 들깨 같은 것을 사용하지만 그 근본은 소금이다. 특히 매운탕이나 설렁탕은 소금을 조금 많이 넣거나 적게 넣으면 맛이 사라져 버린다. 맛에는 염분 조절이 중요하다.성경에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는 구절이 있다. 이때의 `짜다`라는 것은 `맛을 낸다`는 뜻이다. 맛이 사라진 소금은 `길에 버린다`고 했다. 이것은 암염(巖鹽)일 때 가능하다.암염은 흙과 섞여 있어서, 비가 오면 소금은 녹아내리더라도 흙이 남겨져서 이른바 소금 기둥이 가능했다. 이때 남은 흙은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냥 길에 버려서 사람들에게 밟혀 버린다고 했다.또 성경에는 기독교인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다. 이 말은 삶의 장소는 맛이 없는 곳이란 뜻을 강조하면서 맛을 내는 역할을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그렇다. 살아갈수록 맛없는 세상이다. 경쟁에 경쟁을 거듭하고, 취직할 곳이 없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가 힘이 든다. 노년에는 빈궁과 고독으로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사람들은 돈이 많으면서도 작은 돈 한 푼의 사용에 벌벌 떨면서 아끼면 그를 `짠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다른 말로 `자린고비, 구두쇠, 이기주의자, 꽉 막힌 사람` 등으로 부른다. 그렇다고 돈을 헤프게 써 버려도 안 된다. 사람은 짜게 살아도, 싱겁게 살아도 안 되고, 간에 맞게 살아야 한다.우리는 자주 사회와 가정에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를 뒤돌아봐야 한다. 누구든지 만일 자기의 몫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를 `맛을 잃은 사람`이라 한다. 우리들은 생활에서 의미 있고 맛있는 삶을 수행해야한다. `오늘도 직장에서 최선을 다 했는가?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이나 봉사를 했는가?` 또는 `나는 아직도 맛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맛을 내는 자는 세상을 `유별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반 사람과는 다르게 사는 자`를 말한다. 한 인간으로서 자기의 일할 몫을 생각해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성경에는 신자에게 소금이 `되라`고 하지 않고, 너는 소금 `이다`고 했다. 이는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말이다. 이미 소금이 돼 있으니, 세상에 나가서 역할을 맡으라는 말이다.소금에는 맛을 내는 기능 이외에도 여러 기능이 있다. 첫째는 부패 방지 기능이다. 안동 간고등어가 그 좋은 예다. 둘째는 깨끗하게 하는 역할이다. 옛날 가난한 시절에는 닭의 창자를 씻은 후, 소금을 친 후에 먹었다고 한다. 또 과거에는 칫솔질도 소금으로 했다. 넷째는 폭파하는 기능이 있다. 김에 소금을 묻혀 불에 그을리면 탁탁 튀는 소리가 난다. 폭탄에도 쓰였다고 한다. 다섯째는 녹이는 작용을 한다. 눈이 길에 많이 쌓이면 염화칼슘을 뿌려서 길을 뚫는다.성경에는 세상에 소금 역할을 하는 자는 반드시 고관대작이라야 하는 것이 아니란다. 오히려 소금은 청결하고, 지위가 낮으며, 마음 좋고, 천하고 주린, 슬퍼하고, 진리를 목말라 하는 평범한 자들을 지칭했다. 평소에 이런 것을 생각지도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켜 주는 말이다. 자기의 욕망이나 편견, 주장 속으로 빠져 버리면, 맛없이 걸림돌과 방해물이 될 뿐이라고 했다.구석구석에서 최선을 다 하면 그는 맛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는 맛이 있는 사람이 될까요? 또는 아무 맛도 없는 흙 같은 사람이 될까요? `그런 노력을 하느냐 마느냐`는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문제는 현대인은 소금 맛보다 설탕 맛에 길들어져 버린 것이다.

2012-03-02

`열하일기`와 천주당

▲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18세기 중엽까지도 우리나라는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저항이 많았던 것 같다. 전에는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서 읽지 못하던 중에 최근에 번역된 책으로 통독을 해 봤다. 박지원은 1780년(44세)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수행원으로서 중국에서 본 것을 기술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천주교에 대한 글을 독후감 형식으로 써 보겠다. `그가 북경에서 들은 바로는, 야소(예수)는 로마 제국에서 태어나서 서해 밖을 다니면서, 교리를 전했다고 한다. 야소는 하나님을 성심껏 공경하고 팔방에 교리를 세웠으나, 30세에 처형을 당했다. 그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야소회를 설립하고, 그의 신을 천주(天主)라고 했다.천주는 어릴 때부터 4가지 ◆ 생념을 끊을 것. ◆ 벼슬을 생각 하지말 것. ◆ 사방으로 선교하되 다시 고국으로 오지 말 것. ◆ 헛된 이름을 꿈꾸지 말 것 등을 서약했다.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온 이래 그들의 교리는 일을 밝힘을 종지로 삼고, 몸 닦기를 요체로 삼는다. 충효와 자애로 공부를 삼고, 개과천선으로 입문을 삼는다. 그리고 죽고 사는 것과 같은 일을 예비해 걱정 없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과장스럽고 허황돼 중국인은 믿는 이가 없다.학설은 부귀영화와 거짓을 버리고 성실을 귀하게 여긴다. 하나님을 밝게 섬기는 것을 으뜸으로 생각한다.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는 것으로 입문하며 큰일을 예비해 걱정을 없애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다. 그들은 학문의 근본 이치를 찾아냈다 하나, 고답적으로 뜻을 세우고 이론이 교묘해 하늘을 빙자해 사람을 속이는 죄를 범하고 있다. 자신이 저절로 의리에 배반해 윤리를 해치며 구렁이로 빠져 들고 있다.윤회설을 믿으면서도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면서 불교를 비방하는데, 마치 원수 같았다. 불교의 학문에서 형체는 환상이고, 모든 백성에게는 사물과 법칙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야소교는 이(理)를 기(氣)라고도 했으니, 두 종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으냐?불교에는 비유가 많아서 돌아갈 곳이 없다가 겨우 깨달아도 결국 환(幻)만이 남는 결점이 있다. 야소교는 처음부터 불교의 찌꺼기만을 얻어 가지고 중국에 왔다가, 중국 책을 보고서야 배불 정책을 알았다. 그들은 `중국을 본받아 배불정책을 가지고, 상제(上帝), 또는 주제(主帝)라 하니, 중국의 유학에 아부한 것이다`라고 기술했다.음악에서 풍금의 묘사가 재미있다. `귀로 소리를 밝게 들었고, 눈으로 그 솜씨를 살폈지만, 오묘한 부분을 글로 서술할 수가 없다. 서까래 통 같은 것이 총총히 서 있는데, 한 쪽 가에는 수 없이 구멍을 뚫었다.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후 천주당이 헐렸으므로 풍금은 남아 있지 못했다`라고 했다.선교사는 달력도 잘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건축에 대해서는 `나보다 먼저 건물을 본 사람도 있으나, 매우 황홀하고, 헤아리기 어렵다. 천주당의 높이는 일곱 길이 되고, 무려 수 백 칸인데, 쇠로 부어 만들거나 흙으로 구워 만들었다. 지붕 머리가 종처럼 생겨 여염(시민의 주택)위로 우뚝 솟아 보이는 것이 바로 천주당이다. 천주라는 것은 반고씨니 천황씨니 하는 말과 같다`고 했다.그림에 대해서는 `천장에 그려진 그림은 헤아릴 수 없고, 언어로 형용을 못 하겠다. 그려진 사람들이 내가 숨긴 것을 알아차릴까봐 싫었다. 귀, 눈, 코, 입 등의 짜임새와 터럭, 수염 살결 등은 희미하게 갈랐다.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어우러져서 저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냈다. 여자가 6세쯤 되는 아기를 무릎에 앉혔는데, 병든 얼굴로 보자, 고개를 돌려 버린다.사람의 머리와 몸뚱이에 날개가 돋아난 자도 있다. 기괴망측해 구분을 못하겠다. 천장에는 어린 애가 5색 구름이 있는 허공에서 노는데 팔목이나 종아리가 포동포동하여 따뜻할 것 같다. 벽의 그림은 한 여름의 대낮 풍경, 또는 비가 갓 갠 바다 같다. 산골에 날이 새는 듯, 구름이 계속 피어오르고, 햇살에 비쳐 무지개가 떴다.

2012-02-24

세계의 환경

환경운동은 가정 차원에서 시작되는 가정경제학 수준의 환경 보전 운동이 기초가 된다. 이것이 지방 자치단체 크기로 가면, 강물과 공기의 정화, 폐기물 처리 등 환경공학의 문제가 대상이 된다. 더 크게 국가 단위에서는 각 지방에 따른 환경 분쟁, 즉 사회학적인 문제로 변하고, 또 지구 차원에서는 기후 변화와 같은 기상학이 주 의제가 된다. 지금 한반도의 온난화 속도가 전 세계 평균보다 두배 이상 빠르게 진행돼서 이곳의 기후가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고 있다. 대구 사과는 강원도로 상륙 중이다. 삼한사온이라는 단어는 이미 사라져 버렸고 수온의 상승으로 어종도 변하고 있다.기후란 지구 에너지가 평형을 이루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바람의 이동현상이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기후변화 혹은 `기후붕괴`를 경험하고 있다. 몇몇 환경학자들은 2010년을 이미 `기후붕괴의 원년`으로 선포했다. 18세기 중엽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지구의 평균 기온을 약 0.8도 상승시켰다.왜냐하면 산업혁명으로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해온 경제성장 전략은 에너지, 특히 화석연료의 소비와 직접 연동되어 이산화탄소를 대량 방출했고, 이것이 바로 기후변화의 원인이 됐다.경제 성장 정도는 20세기 100년 동안의 총생산량이, 예수 탄생 때부터 1900년까지의 전체량보다 많았고, 지금의 세계경제규모는 100년 전보다 50배 증가했다고 한다. 또 2050년까지는 현재 경제규모보다 10배 늘어난다고 했다. 현재속도로 열대림이 소실되면, 20년 후에는 20% 감소된다고 한다. 또 2050년에는 지구의 자원이 고갈된다고 했다.그러나 지구위의 인간은 개발에 정신없다. 20년 전 중국 연길 주변의 강물도 매우 오염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공장은 일본에서 한국, 그리고 중국으로 이전해 갔다. 앞으로는 아프리카로 이전될 가능성이 많다. 열대 사막의 확대, 해수면의 상승, 남북극에서 오존층 파괴 등으로 삶의 터전이 줄어든다. 그러나 인간은 방향도 없이 함부로 경제발전을 위한 노력만 한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 시민 환경운동이 필요하나마, 영국은 시민의 10%, 미국은 4%인데, 한국은 0.1%가 환경운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우리나라는 세계 9위의 탄소 배출국이다. 1990년에 비해 2005년까지 한국은 ※배출량은 98% 증가했고, 온실가스 배출 세계 10위, 에너지 소비 세계 10위, 석유 소비 세계 7위, 경제규모 13위, 인구는 25위라고 한다. 지난 30년간 우리나라온도는 세계 평균 보다도 2배 많은 1.5도가 상승했다.4억만년 간 항상성(280㎏)을 유지하던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산업혁명 이래 380㎏에 이르렀고, 향후 50년안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 함유량이 550㎏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 때가 되면 지구의 평균온도가 3도 이상 상승해 인류가 감당키 어려운 지경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2도 상승 이하로 기후변화의 폭을 제한하는 것이 생존의 마지노선인데도 말이다.과학자들은 앞으로 2015년까지 인류가 삶의 방식에 있어서 어떤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기후변화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고 경고한다. 2015년까지는 이제 겨우 3년 남았다. 우리의 행동과 실천은 느리기만 하다.1978년 영국의 러브록은 지구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하나의 범지구적인 유기체로 보았다. 즉 지구에서는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생명체로서, 이들은 모두 공통의 운명을 겪게 된다고 했다. 이를 가이아이론(Gaia theory)이라고 한다. 현재 이 이론은 지구상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간의 환경파괴문제, 및 지구 온난화 현상 등 인류의 생존에 직면한 환경문제에 대한 이론이다.신생대부터 지탱돼 온 자연을 착취하는 기술대에서 빨리 보호하는 생태대로 전환시켜야 한다.

2012-02-17

가난으로부터 탈출

▲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배고픔을 참는 것은 많은 고통이 따른다. 주린 배를 가진 사람이 느끼는 느낌을 다른 사람은 짐작할 수 없다. 당사자는 본능을 침범 당하는데, 주위의 사람은 본능이 해결됐기 때문이다. 6·25 사변 직후 그때는 길거리에 거지들이 자주 보였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서 깡통을 들고 동냥을 하는데 구성진 기락의 노래를 곁들여 했다. 그 노래가 요사이는 `품바`라고 하고, 거지를 `노숙자`라고 바꿔 표현한다. 단 노숙자는 과거와 같이 심하게 배를 곯지 않고 교육을 받았거나 유식한 자가 많은 것이 차이점이다.과거에는 끼니를 걱정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나 그것을 운명으로 생각했고 열심히 일하면 탈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요즈음에는 가난에도 개념이 바뀌고 있다. 전보다 GNP도 상승하고 교육수준이 많이 향상됐다. 그러면서도 이리저리 생활에 쫓기는 형편은 이전보다도 많이 열악한 상태다. 인구전체 평균 소득의 절반보다 더 적게 버는(예를 들어 전체 연 평균 소득이 4천만원이면, 연 2천만원 미만의 수입) 사람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상대적 빈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이 그룹에 속한 사람은 약 16%가 된다고 한다. 이러면 약 850만명이 여기에 속한다.우리나라의 빈곤 양상의 특징은 빈곤의 범위가 매우 넓게 확장됐다는 것이다. 근로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난하게 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이제는 능력이 있어도 쉽게 가난 속으로 빠져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낮은 보수 때문에, 열심히 일할 의지가 있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가 많아졌다.또 우리나라는 전세금 등 주거에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곳에는 많은 목돈이 필요하다. 의료에도 돈이 들어가지만, 특히 교육이 젊은 부부에게 허리를 휠 정도로 많이 들어간다. 옆집에서 교육투자를 많이 하는데 부모로서 자기 아이를 방치할 수는 없다.이 시대의 가난과 과거의 것을 비교해 보면, 근래에는 `밥은 먹고 사는데,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가 힘 드는 경우`다. 과거의 `생존`차원의 빈곤에서 요사이는 `삶다운 삶`으로 빈곤을 결정하는 영역이 바뀌었다.고급 차를 타는 사람은 좋은 TV와 호화 저택에 살고, 고급 운동을 즐기지만 차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헐한 가전제품으로 열악한 전셋집을 전전한다.생활은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곱의 철학`이 적용된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는 모든 가정에 필수소비제이다. 그러나 그것의 구입은 빈곤층에게 큰 부담을 준다. 그러면 정보 격차가 더욱 커지게 되고, 이러한 박탈감은 빈곤층을 코너로 몰아 부치게 된다.또 이들에게는 `사회적 소외`가 문제로 된다. 과거에는 속칭 판자촌에서도 이웃과 함께 기쁨과 걱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대화도 없고, 끼리끼리 모여 산다. 특히 자력으로 상층부에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다. 심지어 가난하면 가족마저 해체돼 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빈곤층은 자신감을 잃게 되고, 무기력하게 탈진해 버린다.이에 따라 더욱 더 가난에서 탈출은 점점 어렵게 된다. 빈곤의 대물림은 자꾸만 현실화된다. 자녀의 성장이 곧 빈곤에서 해방되는 시점이 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 희망도 사라지게 됐다. 아이들은 벌써 부모의 경제력이 곧, 자신의 미래에 있을 사회적 위치를 만든다고 여기고 있다.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부익부 빈익빈의 현실을 더 크게 확대시켰다고 생각된다. 이제는 삶에서 이긴 자와 패배자를 갈라놓은 상태로 되어 있다. 이런 갈라놓은 것을 재 봉합하려는 사업계획이 있어야 한다. 그것의 한 부분이 복지 정책이다. 경제의 성장에 동반해 모두가 과일을 적절히, 합당하게 나눠 갖는 정책을 잘 운용해야 한다.

2012-02-10

성취

▲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삶이란 목표점을 성취하기 위해 살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죽음이란 성취한 정도를 판결받는 순간이다. 또 삶이란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공부하는 시간이고, 죽음이란 시험 성적표를 받는 날이다. 시험공부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뜻있게 살아가기 위한 공부는 적게 하면서도, 좋은 성적을 원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실패를 거듭한다. `또 실패해 버렸군`이라는 말이 입에서 떠날 시간이 없다. 그리고 일이 잘되지 않으면 자기 탓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는다.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주위의 삶들은 잘도 이뤄져 가는데 나는 왜 이럴까? `하며 비교하는 마음에 괴로움을 느낀다.삶에서 남과 비교하는 것은 자기를 제일 큰 어려움에 처하도록 한다. 이런 비교는 그가 집착이나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부족한 점은 숨기고 장점만 노출시켜서 목적하는 일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현황을 잘 파악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잘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때는 자기비판을 너무 많이 함으로서 자기에게 상처를 남기지 말라. 누구나 자신의 문제점은 두려워해 계속 도망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을 찾아 재도전하든지, 방향을 바꿔서 해 봐야 한다.일을 시도하면 시간이 갈수록 그 일이 자기에게는 숙달된다. 계속 시도를 해 보면 그는 위대한 도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수없이 많은 실패를 통해 이뤄졌다. 에디슨은 수백 회의 실패 끝에 전기를 발명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실패하면 그만 실패한 자신이 싫어져서 괴로움에 빠지기 때문에 쉽게 포기해 버린다.실패를 당하면 그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낫게 돼 있다. 기죽을 필요가 없다. 긍정적인 마음은 상처를 줄여 준다. 일시적인 충동으로 추구하면 그것은 금방 흔들린다. 그러나 무리하지 않고 끈기 있게 다시 시작할 마음을 가지면 그는 못할 것이 없다.성취하는 사람은 시련이나 상처를 입는 동안에도 문제의 해결 방법을 알아낸 사람이다. 작은 실패를 거듭했을 때 좌절하지만 않는다면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을 격려하고 지난 일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감을 찾아야 한다.목표는 클수록 오르기가 어렵다. 너무 큰 목표를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경험한다.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허둥대는 것은 시간 낭비다. 모두가 대통령이나 재벌이 될 수 없다. 큰 목표란 꼭 출세나 부자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슈바이처나 킹 목사는 그 이외의 길에서도 목표를 이뤘다.큰 목표라면 중간 단계의 작은 목표를 설정해 둔다. 작고 사소한 목표를 하나씩 쌓으면 그만큼 좋은 인생을 만든다. 무리하지 않는 것이 일을 계속 수행하는 데 아주 중요한 비결이기 때문이다.이럴 때에 우리는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이 여유는 사람들에게 친절할 수 있고 그러면 그들에게서도 사랑을 받게 된다. 집을 지을 때에도 큰 기둥 하나보다는 작은 여러 개의 기둥이 더 유효할 수 있다.직업 세계는 경쟁의 사회이다. 그곳에서는 서로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캐내려 한다. 그러나 성취를 하고 싶다면 대화에서도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보다는 상대의 우수한 부분, 충분한 부분, 좋은 부분을 언급할 것을 권하고 싶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부족한 부분으로 생각을 옮겨도 좋을 것 같다.굵고 튼튼한 불행이라는 밧줄과 작고 가느다란 행복의 줄로 꼬여서 인생은 이뤄진다. 그래서 삶에서는 지루한 번뇌, 실패감, 좌절감 다음에야 비로소, 성취라는 만족과 기쁨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2012-02-03

현대 사회에서 정의란

▲ 이원락정의의 뜻을 묻는다면 사람들은 `옳은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옳은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윤리의 영역에 속해 있다. 그리스 철학에서 윤리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 등 4가지 덕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중 정의는 나머지 세 가지 덕목에 골고루 포함돼 이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고 했다. 인간에 있어서 정의란 신 또는 자연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받은 것이다. 정의는 사람에게 부당하게 행해지는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고 저항함을 말한다. 정의는 사회제도의 제일 큰 덕목이다. 근래에 이런 정의에 관한 사회적 기준을 미국의 롤스가 정리해 발표했다.롤스는 사람마다 재화나 권리, 기회나 자유 등이 평등하지 않아서 어떤 기준으로 분배를 해야 공정한 결과가 되는지를 `정의론`으로 설명했다. 롤스의 정의는 `한 사회제도 안에서 모든 개인은 완전하게 평등할 수 없다`는 것에 생각의 기초를 둔다.사회구조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이 상호협동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소득 및 가치의 분배과정에서는 서로간의 이해충돌로 갈등이 발생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동시에 발생한다고 했다. 이때 정의란 사회 구성원간에 충돌이 있을 때 사회 제도의 절차를 통해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조정해 줄 원칙이 바로 `정의의 원칙`이다.우선 정의가 필요한 이유는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났고 자연과 관계하며 자연이 제공하는 자원의 `제약`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필요한 재화를 무제한적으로 공급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기 위한 이기적인 경쟁과 노력을 계속하기 때문에 사회는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이 사회에서 서로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회에서 공정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그는 막스가 꿈꾸었던 유토피아, 즉 `능력에 따라 충분히 생산하고, 필요 따라 소비가 가능한 사회`는 재화의 부족으로 인해 신기루 같은 것일 뿐이라고 했다. 롤스는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면서 복잡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복잡한 모든 요인들로부터 자유로울 때 각자는 `자기가 가장 불우한 계층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가장 크게 불안해한다고 했다.모든 사람들은 이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본적인 자유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것이 삶에서 `평등한 자유의 원칙`으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 능력과 노력에 따라 대가를 얻고 그 대가를 누려야 한다고 했다.그리고 롤스는 적법하고 공정한 절차에 의해 합의된 것이면 곧 그것은 정의가 된다는 `절차적 정의관`을 내세웠다. 결과로서의 평등이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는 절차와 형식에 초점을 맞췄다. 부당한 불평등은 안 되지만 정당한 불평등은 수용했다.인간 사회에서 분배의 대상은 재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리와 자유, 기회와 권한, 소득과 자존감 등도 포함시키고 있다. 소수의 부자들에게만 유리한 교육제도 때문에 부잣집 아이들이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또 다수가 보다 더 큰 이득을 누리기 위해,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불의라고 했다. 즉 사회적으로 소외돼 수혜를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공정한 기회를 주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롤스의 정의론은 개인주의를 기초로 하는 미국의 자유주의의 전형이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고 가난하거나 능력 없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 사회가 정의로운 곳이란다.이명박 정부가 주장하는 공정사회, 공생발전, 윤리경영, 이익 공유제 등이야말로 이런 정의의 의미를 표현한 셈이다. 이 사상의 배경은 신자유주의의 후기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사회안전망의 필요성, 즉 복지국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것이다. 기독교사상 책에서는 우리(we)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경제(economy)를 weconomy라는 한 단어로 표현했다. 공생이나 이익 공유제 등도 이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2012-01-27

영원과 시간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우리는 우주를 `무한대로 크다`고 말한다. 우주가 언제 어떻게 생성됐는지를 인간은 모른다. 그들은 작은 머리로 생각해 우주의 시작으로 빅뱅설(big bang theory)을 주장하기도 한다.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커지고 있다고 하나, 이것은 학설 중 하나다. 또 우주에서 시간은 스스로가 우주와 함께 존재할 뿐 인간은 시간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한다. 시간은 원래 태양계에 속한 것이 아니고, 무한대의 전체 우주를 이루는 하나의 속성이다.우리는 태양계의 주기를 중심으로 달력을 만들고, 시계를 만들어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둔다. 시계를 만든 이유는 세월의 길이를 측량하지 못해 삶에서 불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만일 인간이 추위나 더위도 없이 그리고 언제나 배부르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다면 일부러 시간을 토막 내는 시계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없었다면 문화도 문명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란 단어가 없었을 것이다.인간은 어짜피 수명이 다 하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시계의 시, 분, 초를 따라, 시점과 속도를 알아낸다. 그 표현으로 우리는 `시간이 빠르다. 또는 길다`라는 등으로 부른다.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피할 수 없다. `태어난다`는 것은 곧 출생 순간부터 한계의 틀 안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시간이라는 환경이 없다면, 삶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어떤 우주 설(說)에는 우주의 가장 작은 원소 하나에 까지, 우주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도 우주의 모든 정보와 방식을 담아낸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늦고 빠름이라는 시간의 속성에 묶여 있는 인간은, 우주 전체 원리의 일부분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몸은 소우주(小宇宙)라고 할 수 있다.인간이 소우주라면 무한대의 우주에 포함되는 한 부분이 된다. 그래서 우주는 나의 속성이자 나 이외의 모든 것의 속성이 된다. 모두가 하나(唯我)가 된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된다.인간은 흙으로 만들어 졌지만 우주의 존재를 고민해 보는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럼으로 그는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 초월된 세상에 이를 수도 있겠다. 노력하면 영적인 세계 즉 우주적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영생이나 해탈이라 할 수 있다.한 원소는 다른 종류의 원소와 각각 상대성 원리에 적용받는다. 즉 원소는 절대적 우주의 하나이면서, 상대성도 갖는 완전성을 갖는다. 이러한 절대성과 상대성은 서로 하나로 돼 무수히 굴러간다. 시간을 초월하는 이것을 윤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그러나 현실 생활에서 우리는 시간에 포위당해 있다. 자본주의 원리에 에워싸여서 시간은 곧 돈이 되고, 힘이 되면서 삶의 수준을 측정하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 내가 물건을 산다면 그 물건을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시장의 매매란 다른 사람의 시간을 사고파는 것이다. 즉 상업이란 시간을 사고파는 것이다. 은행도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여 거래를 이루는 곳이다.사회는 시간의 활용능력 정도에 따라 사회계층과 삶의 구역이 나눠지고 시간을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는 소위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초과 근무를 한다든지 투잡을 가져서 살아가는 시간을 벌기도 한다. 어떤 이는 물가조작을 하거나 사기 술수로 남의 시간을 훔치기도 한다.가난해 시간을 벌지 못한 자와 풍부해 여유가 있는 자와는 같은 행위라도 수행하는 속도가 다르다. 부자가 비행기로 시간을 아끼면서 중국 북경을 갈 때 가난한 자는 배와 버스를 타고 많은 시간을 들여서 그곳으로 간다.시간은 멈추면 안 된다. 그것은 우주와 존재의 없어짐을 의미하는 말이다.

2012-01-20

신년 위로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역사에서 2011년의 잎은 말라 고개를 숙여 버렸고, 화려했던 꽃도 시들어 사라졌다. 북풍한설 속으로 금년이던 것이 지난해로 바뀌었다. 그럼 신년, 2012년에는 무슨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아마도 풀지 못하고 넘겨받았기에, 지난해와 똑같이 복잡한 문제로 얽히고 설킬것 같다.금년의 큰 문제는 유로존의 해체 위기로 인한 글로벌 경기 침체, 물가 불안, 가계부채의 증가, 중소기업 자금난, 총선 대선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 남북 관계 등의 변수가 많다.이런 것을 극복하고 승화하느냐? 또는 침식당해 자멸하느냐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이때 우리는 역사가 바른 길로 가도록 낮은 곳을 높이고, 험한 곳은 평탄케 하고, 굽은 곳은 바르게 해야 한다. 승화하는 한 해가 되도록 모두가 노력하는 한 해이기를 기원한다.신년 인사를 겸하면서, 사랑이 넘치는 한 사람을 소개하겠다.그의 이름은 강영우이다.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 3학년에 축구를 하다가 두 눈을 실명했다.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서 8시간 만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신 후, 누나는 평화시장에서 봉제 공장 직공으로 일하다가 과로로 숨졌다. 그리고 12세 동생은 철물점에서 일하게 됐고, 9세인 어린 동생은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맹인 재활 센터에서 일을 하게 됐다.보이지 않은 눈인데도 고통 중에 살면서 그는 유일신을 봤다. 오고 있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장애인으로서 피츠버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65세에 백악관에서 차관보로 은퇴를 했다. 그의 자식 중 한사람은 미국에서 유명한 의사가 됐고, 또 한 아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선임 법률 고문이 돼 있다.지금은 췌장암으로 죽음을 앞둔 68세 노인인 그는 `삶과 죽음은 신만이 아신다.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다.`고 했다.그는 절망케 하는 단어를 no where(돌파구가 없고, 가야할 길, 희망, 갈 곳 등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을 달려가야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w자가 자리를 옮겨서, no가 now로 되어서 now here가 된다는 것이다.바로 이곳(now here) 여기는, 머무를 수 있는 장소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는 그 바뀐 장소를 하나님, 신이 계신 곳이라고 했다. 사랑의 불덩이인 그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했다.그는 강대국이나 큰 부자 또는 하늘을 찌르는 권세 등 모든 것은, 물통 속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그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과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지난 한 해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가 버렸다. 올해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디로 날아갈지 알 수 없는 `용의 해`가 됐다.과거는 바꿀 수 없다.그러나 모든 면에서 과거를 새롭게 해석을 해 보면, 우리에게는 밝은 앞날이 계속될 수 있다. 새로운 일을 행할 수 있다.서로를 위로하자. 큰 것을 꿈꾸면서, 열심히 그리고 뜻있게 하루하루를 보내자.

2012-01-13

시간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해거름에 만나자`라든가 `점심 먹고 한참 쉬다가 일하자`는 등은 시계가 없었을 때의 약속 방법이었다. 과거에는 시간이란 그저 소리 없는 흐름일 뿐이었다. 분이나 초 단위로 정확하게 왔다가는 사라지며, 돌이킬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이 흐름에 맞춰 유연하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았었다. 그 후 시간이 흘러오면서 점차 인간은 시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회가 발달하고 복잡해질수록 그 시간 리듬은 그만큼 더 냉혹하게 되고 마음을 옥죄며 단위가 조밀해 졌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발표한 이래 사회생활에서 시간 개념은 점점 중요한 단위로 발전돼 갔다. 천주교는 드디어 천문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교회의 캘린더를 수정했다.시계의 발전은 놀라웠다. 2차 대전에서 한 독일 병사는 손목에 시계를 찬 상태로 물에 잠겨 죽어 있었다. 그의 시계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방수가 돼 있는 것을 발견한 세상 사람들은 스위스 시계를 최상의 상품으로 값을 매겼다. 그러나 그 후 전자시계가 나왔으나 스위스는 이 제품을 가볍게 여김으로서, 시계 산업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교통이 발전함에 따라서 시간의 통일이 필요했다. 드디어 1884년에는 국제 본초 자오선 회의에서 지구를 24개의 시간대로 나눠서, 표준시를 만들었다. 인간이 시간을 요리하던 것이 이제는 거꾸로 시계가 인간에게 박자를 지시하게 됐다. 시계의 알림에 따라 사람들은 일에 바빠지고, 그래서 평안을 모르는 사람들은 갈수록 시간 부족에 허덕이게 됐다.이런 면에서 볼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경쟁을 벌여야만 하는 상대는 곧`시간`이다. 모방하는 후발업체가 더 새로운 상품을 시장에 내 놓는다. 한시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이러한 경쟁논리가 인생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만연돼 있다.디지털 정보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더욱 가속화에 시달리고 있다. 시간, 정보, 돈, 질병 등도 압축돼 있다. 공간도 동일조건이다. 주가 등은 시차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지구 위를 날뛴다. 인간은 풍요로운 인생을 위한 노력을 포기할 줄 모른다.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제일 큰 원인은 언제나 더 편한 세상을 찾아 헤매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의 이런 모든 수고와 최선을 다해 이룬 성공이라도, 언젠가는 완전히 허물어 질 것 같은 막연한 예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를 고뇌케 한다. 간혹 이런 느낌이 돌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면 우리는 멍한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빠른 접속을 할 수 있으면 그만큼 인생이 다채로워 진다고 믿는다. 집약하고 압축하면 그만큼 더 풍요로워 진단다.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될 수 있는 한 많이 채워 넣으려 시도한다. 정체나 허비하는 그 시간은 `멈춰 버린, 죽어 버린 상태`를 나타낸다.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 가를 알아보려면, 먼저 시간을 벗어나야 한다. 복잡한 현실과는 분리된 단절상태 속에 있어 봐야 한다.자신의 페이스를 찾기 위한 심적 여유를 갖기 위해서는 휴식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져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휴식을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무시한다.휴식이란 시간의 압박감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그것을 요리하는 법을 알려고 노력하는 시간이 된다.살아가기 위해 시간을 난도질해 버렸지만 자기의 몫을 찾기 위해서는 조용한 명상, 휴식이 필요하다.우리가 무엇을 해야 저 끝없는 가속화로부터 탈피할 수가 있을까를 쉼을 통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때는 또한 영혼의 세계를 마주할 가능성도 있다.

2012-01-06

삶과 꿈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우리가 살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삶에서 목표를 갖는 것이다. 목표가 뚜렷하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어떤 환경에서도 버텨 나갈 수 있다. 목표를 갖으려면 세상의 흐름을 밝게 봐야 한다. 또는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최선을 다하면서도 배우는 심정으로 임해야 한다. 이럴 때 그 목표가 결국 그의 꿈이 돼 실현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목표를 정해 그 방향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은 자기가 가진 꿈을 이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삶 그 자체가 수련장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생활에서 작은 일에도 반복적으로 노력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불행히도 그 열매는 당장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꿈을 향해 나아간다고 해서 자기의 직업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직업은 생활해 가는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인성을 연마하는 좋은 장소이다. 게으르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꿈을 이루겠다는 것은 산에서 바다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과 진배없다.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자기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생각해 본다. 이때는 좀 막연할 수도 있다. 그 중에서 뜻과 의미가 있으며,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나의 능력과 현재 상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걸어온 길을 면밀히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오랜 기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점차 확실하게 나타나게 된다.목표가 정해지면 그 일에 집중해야 한다. 능력껏 수단과 자질을 활용해 몰입해야 한다. 매일 하나씩 배워 나간다는 심정으로 생활자체를 배우는 터전으로 만들어야 한다.윗층으로 올라가려면 여러 계단을 거쳐야 하듯이 꿈을 향한 전진에도 작은 많은 목표를 거쳐가야 한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조그마한 성취의 반복으로 작은 기쁨이 가능하다. 이런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는 일생에 걸쳐서 노력해야 할 수도 있다.목표를 향해 도전해 나갈 때, 그에게는 그 과정 전부가 자신과의 싸움이 된다. 누구든지 성공자는 항상 이기면서 이루는 것은 아니다. 무수한 실패를 딛고서 이루어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실패 과정을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을 잘 통제했기 때문이다.실패를 하면서도 극복할 의지가 넘쳐나면 그는 실패를 성공의 동기로 만들어 낼 수 있다.여한이 없을 정도로 노력했다면, 그것은 성공을 위한 씨앗을 심은 것이다. 노력의 과정에서 삶의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세상은 그의 책상이 되고, 그 경험은 이후로 좋은 토대를 만든다.그러나 그가 만일 좌절하여 꿈을 이루기를 포기하면, 우울해 지거나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고, 허무와 공허를 느낀다. 그래서 멈추지 말고 계속적으로 재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작은 걸림돌은 밀고 나가야 한다.성공한 사람은 천재적인 소질의 덕분이라기보다는 선택을 잘 하는 지혜가 있고 끈기가 있는 사람들이다.혼자서 이룰 수 없는 꿈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공유하게 한다. 중국의 모택동은 자기의 꿈을 이해하는 몇 사람의 동지들을 규합해 뜻을 이뤄 냈다. 그러나 꿈을 갖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방향을 모르고, 남의 뒷부분에 있기만 한다. 그들은 꿈의 위치가 도저히 이뤄 질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산을 오를 때, 산을 보고서 지례 먼저 겁을 먹는 것은 어리석다 하겠다.꿈은 거창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TV에는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가 있다. 그들도 한 분야에서는 꿈을 이룬 자들이다. TV프로에는 그 외에도 자주 꿈을 이룬 자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인내로서 헤쳐 나온 자들로서, 즐거운 하루하루가 될 것이다.꿈은 다른 사람을 위하고, 이웃을 향할 때, 상대자에게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행복감을 듬뿍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종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고 말한다.

2011-12-30

교육·계몽적 차원의 클래식 방향

우주호성악가음악은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삶과 자연을 노래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런 행위에서 만들어진 최고의 작품인 것이다. 음악의 창시자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타고라스는 1대2의 수학적 비율로 음악의 8음계의 기초이론을 제시했다. 즉 도 음정위의 1:1인 위 도 음정사이가 옥타브이고, 옥타브의 반인 음정을 솔이라 했다. 이렇게 1:2의 비율을 계속 따져 피아노 건반의 88개 음정이 탄생했다. 피타고라스의 정의는 음악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이다.플라톤의 철학은 음악의 내면적, 윤리적인 면을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을 바탕으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했다.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구분하는 이성적 음악을 제시했고, 슬픈 음악과 기쁜 음악을 통해 인간의 감성교육을 추구했다. 또한 인간사의 권선징악을 제시하여 인간의 도덕적, 감성적 계몽을 목표하여 보다나은 삶의 가치를 이야기한 것이다.음악은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 했지만, 클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음악은 중세 문화에서 유래된다. 그 당시 초기 지도자들은 예술분야에 대해 상당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그때의 음악은 인간과 신에 대한 관계를 얘기하는 것으로만 생각했고,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클래식은 세속음악으로 구분돼 그 자체를 이교도적인 행위라고 규정지었다. 화성적인 음악을 사용하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한다하여 반신적인 행위라 규정했고, 단선율과 오르간의 교회선법만 사용하게 했다. 이렇듯 그때의 음악은 모든 것이 종교적인 음악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구는 종교음악을 탈피해 세속음악을 추구하게 됐고, 초기 지도자는 세속음악에 교육과 도덕성을 접목한 음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00년에 시작된 피타고라스의 음악의 논리가 19세기 초기 다성 음악과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 고전과 낭만을 지나 지금의 현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꽃 피웠다. 이것이 지금의 클래식음악이다. 많은 문화가 지구상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가장 쉽고 재미있는 예술은 음악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중세시대부터 초기지도자들은 시민들을 가르치기 위해 계몽적·교육적·감성적 효과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있는 음악은 감성적 효과만 강조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 필자는 교육적·계몽적 차원을 강조하는 클래식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술을 모르면 무식한 것이 아니다! 보고 들음으로써 감성을 자극하고 그 자극을 통해 계몽을 촉구하여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다.예술의 대중성은 이런 교육적 방향을 추구하는 예술성에 상당한 부적합적인 요소가 된다. 감상하고 흘려듣는 것이 아니고 들음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낳는것이 클래식의 목적이다. 다양화 된 문화가 급변하는 시대 이념적인 논쟁이 팽배한 이 현실에서 사람의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감성적인 도구는 클래식 음악이다. 이를 토대로 계몽과 교육을 강조한다면 클래식의 대중성과 고유성을 다 가질 수 있다.음악이 세계 공통 언어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구 몰려오는 다문화의 문제와 초를 다퉈 변하는 경제성장에서 오는 인간성의 고립, 분단된 우리의 정서, 아직도 사대근성의 습관을 갖고 있는 어두운 우리의 현실, 양극화된 사회! 이런 문제는 클래식의 교육적 방향으로 사회적 역할을 분명히 해낼 것이다.계몽과 교육에 목적을 둔 음악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좋은 꿈과 생각을 하게하고, 서로 인정하며, 약자와 강자가 상생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할 음악의 방향이다. 음악을 단순히 감상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계몽과 교육의 음악을 기억 할 때 센스 있는 선진대한민국이다.

2011-12-26

소외 지역과 정의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최근에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센델 교수가 지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 샐러가 됐단다. 필자도 읽어 보았지만 매우 어렵게 표현돼서 난해했다. 그렇게 어려운 책자가 많이 팔렸다면 우리나라에는 정의가 찾기 힘들어서 읽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정의는 불변이다. 그러나 힘 있는 사람이 불리한 입장에 놓이면 자기 합리화에 제일 적합한 단어가 `정의`이다. 그래서 정의라는 단어가 함부로 동원된다. 정당 구호에도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것 슬로건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심지어 `민주 정의당`이라고 정당이름에 남용되기도 했다. 불법으로 탄생되든 말든 집권당이 되면, 정의는 자기 것이 될 수 있었다.21세기에는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 하루가 다르게 진일보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로 발전은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정의의 개념은 복잡하고 난해해서, 중심을 잡기가 힘이 든다. 정의와 부정의가 섞여 있어도, 감별해 내기가 어렵게 돼간다. 이럴 때, 정의다운 정의는 지구위에서 찾을 수 없을까? 종교에 기웃거려 본다.성경에서 예수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폭력으로 희생을 당한,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는 분이라고 적혀 있다. 약한 자와 고아, 다문화 가정이나 새터민 같은 사람 등 힘없는 사람들의 권리에 관심을 가지고, 또 찾아 줬다.예수는 그의 시선을 병든 자나 가난한자 또는 사회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뒀다. 그는 가난에 대한 우리의 나쁜 편견을 거두게 하고 사회적 약자 편이 돼 그들에게 힘(empowerment)을 주었다. 이것은 빈곤의 극복을 위해, 복지국가 체계설립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증진시키는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도 희망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성경에서 예수는 자기 스스로가 `지극히 작은 자`와 하나 됨을 말하였다. 그리고 정의란 이 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누려야 한다고 했다. 특히 인간은 강자에게 빼앗겨 버렸던 `생명 수준의 권리`를 되찾아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에 정의의 기초를 뒀다.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권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는 그들과 함께 고난을 받고 같이 싸워 나가는, 그러한 일생을 보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던 사람, 공동체에서 소외된 그룹의 사람, 노예 수준으로 천대 당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 줬다.성경의 정의는 단순히 선에는 상을 주고, 악에는 벌을 주는 이른바 신상필벌(信賞必罰) 수준을 넘어선다. 선악의 제재를 공평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굽은 것을 곧게 하는 적극적인 공의를 정의라고 했다. 즉 정의란 인간의 선악을 단순히 판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사회를 치유시켜서 구원을 하려는 것을 말한다.예수의 정의는 일반 사람들의 관심 바깥에 있는 곳에 오히려 관심을 둔다. 이곳을 소외지역이라 한다. 사회적으로 배제돼 멸시받는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로마 황제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왕권적인 통치를 직접 받는 백성임을 강조하여, 그들의 `생명 권리`를 황제보다 하나님과 직통시켰다.옛날에는 계급에 따라 식사를 따로 할 수밖에 없는 식탁예절이 있었다. 100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는 백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에는 흑인들의 출입이 봉쇄됐다. 선진국인 미국마저 과거에는 이러한 형편이었다. 우리는 배고픔만을 위해 식사를 하지는 않는다. 식사시간은 인간의 장벽을 없애는 시간 삶을 나누고 새 힘을 얻는 시간이다. 그러나 고급 사람과 빈한한 사람이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것은 잘 보지 못했다.정의를 좀 더 넓게 해석하면, 같은 상 위에서 함께 밥을 먹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신학자 크로산의 열린 식탁(open table)운동이다. 그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밑바닥 시민들 사이에서 영적 치유와 물질적 음식을 나누는 급진적 평등주의다”라고 했다.성서에서 정의의 폭은 무한대이지만, 현대 종교인들은 주로 경제정의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경제의 문제가 곧 신앙의 문제이며, 경제적 정의는 `기독교정신에서 우러나오는 정당한 신앙적 관심사`라고 표현했다.

2011-12-23

바쁜 일상과 쉬는 여유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우리들은 매일 시간을 잘게 나눠 사용하면서 살아간다. 과거에 사람들이 살던 때 보다, 월등히 빠른 템포의 삶이다. 과거에는 시간을 일, 월, 년으로 나눴으나, 지금은 분, 초, 몇 1/10초 등으로 숨 쉴 틈이 없을 정도로 쫓기면서 생활을 이어간다. 시간은 우리의 어깨를 계속 누르고 있다. 우리는 숨 가쁜 변화를 따라 잡으려고 헐떡이면서 신음한다. 여가 시간을 가질 수 있어도 초조함속에서 일의 능률에 쫓겨서 그 시간을 포기해 버린다. `자유 시간`이란 사전에서 지워진 단어인 것 같다. 스트레스로 인해 긴장 속에 있어서 즐거운 기분을 느낄 수 없다. 중압, 불안, 노심초사 속에서 하루 온 종일을 보낸다. 정보와 시간은 돈과 직결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정보는 그것의 경중과 선후좌우를 놓치게 한다. 그래서 경쟁에서 나 혼자 뒤쳐지지나 않을까 불안하다.과학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시간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비단을 짤 때 과거에는 아주 긴 시일이 필요했으나 지금은 섬유산업의 발달로 단위시간에 해결되듯이 만사는 큰 힘이 거의 들지 않는다. 밥을 짓는데는 전기밥솥으로, 물가에서 여러 시간동안 하던 빨래는 집안에서 세탁기로 짧은 시간에 해 치운다. 솥에 쌀을 넣어 불을 지피고, 호미로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던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여유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그 많아진 남은 시간은 어디로 갔나? 왜 휴식을 위한 시간은 이전보다도 더 적은 것 같은가? 왜 자꾸 업무는 과중해 가는가? 왜 휴식을 취할 여유가 전혀 없는가? 그 이유는 정보는 쏟아지고 있지만 그것의 분석과 이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알아서 목적하는 일을 학습하고 연습해 숙달시키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기술을 발달시켜서 신속히 일을 처리하는 것만큼 우리의 생활수준이 올라 있다. 그래서 수준을 지키기 위한 일의 양이 많아져 버렸다. 깔끔한 거실, 보기 좋게 차린 음식, 깨끗하고 세련미 나는 옷 등의 과거 지나친 사치였던 것이 지금은 일상화됐다. 조선시대에 먹던 음식은 이제는 웰빙 음식으로 변해 버렸다.지금은 이메일이 우리의 생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컴퓨터를 떠나 있으면 불안을 느낄 정도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이메일 소식에 눈을 떼지 못한다.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잘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찾아본다. 그러나 거기서는 시간을 더 잘게 쪼개서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법을 말할 뿐, 여유시간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가는 언급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인간의 마음을 쉼 없이 몰아붙이는 것만을 가르친다.휴식을 위해서는 각자가 계획을 많이 줄이고 단순하게 살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하게 살고 싶어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 전체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그 안에서 극히 작은 한 사람일 뿐이다.쉬고 싶어 하면 빈둥거린다고 빈정거린다. 사회에서는 매사를 `더 빨리` 할 것을 주장하면서, 속도를 가속화 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효율성과 시간 이끼기를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시간의 부족을 더 느낀다. 노력할수록 해야 할 일은 그만큼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크나큰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늘상 새로운 욕구와 그 성취를 바란다. 이런 더 나아지려는 소원은 생리적인 욕구로서 인간의 `욕망 무한`에서부터 자라난다. 그러나 이런 욕구때문에 오히려 더 시간에 쫓기게 된다. 욕구를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해 생긴 것이다.머물러 쉬는 휴식을 해야 비로소 강박, 압박, 스트레스 등에서 해방되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다. 욕심을 어느 정도 자제해야 비로소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때 우리는 행복감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2011-12-16

교육·계몽적 차원의 클래식 방향

우주호성악가음악은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삶과 자연을 노래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런 행위에서 만들어진 최고의 작품인 것이다. 음악의 창시자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타고라스는 1대2의 수학적 비율로 음악의 8음계의 기초이론을 제시했다. 즉, 도 음정위의 1:1인 위 도 음정사이가 옥타브이고, 옥타브의 반인 음정을 솔이라 했다. 이렇게 1:2의 비율을 계속 따지어 피아노 건반의 88개 음정이 탄생됐다. 피타고라스의 정의는 음악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이다.플라톤의 철학은 음악의 내면적, 윤리적인 면을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을 바탕으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했다.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구분하는 이성적 음악을 제시했고, 슬픈 음악과 기쁜 음악을 통해 인간의 감성교육을 추구했다. 또한 인간사의 권선징악을 제시해 인간의 도덕적, 감성적 계몽을 목표로 보다나은 삶의 가치를 이야기한 것이다.음악은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됐지만, 클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음악은 중세 문화에서 유래된다. 그 당시 초기 지도자들은 예술분야에 대해 상당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그때의 음악은 인간과 신에 대한 관계를 얘기하는 것으로만 생각했고,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클래식은 세속음악으로 구분돼 그 자체를 이교도적인 행위라고 규정지었다. 화성적인 음악을 사용하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한다하여 반신적인 행위라 규정했고, 단선율과 오르간의 교회선법만 사용하게 했다. 이렇듯 그때의 음악은 모든 것이 종교적인 음악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구는 종교음악을 탈피해 세속음악을 추구하게 됐고, 초기 지도자는 세속음악에 교육과 도덕성을 접목한 음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00년에 시작된 피타고라스의 음악의 논리가 19세기 초기 다성 음악과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 고전과 낭만을 지나 지금의 현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꽃을 피웠다. 이것이 지금의 클래식음악이다.많은 문화가 지구상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가장 쉽고 재미있는 예술은 음악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중세시대부터 초기지도자들은 시민들을 가르치기 위해 계몽적·교육적·감성적 효과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있는 음악은 감성적 효과만 강조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 필자는 교육적·계몽적 차원을 강조하는 클래식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술을 모르면 무식한 것이 아니다! 보고 들음으로써 감성을 자극하고 그 자극을 통해 계몽을 촉구해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다.예술의 대중성은 이런 교육적 방향을 추구하는 예술성에 상당한 부적합적인 요소가 된다. 감상하고 흘려듣는 것이 아니고 들음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낳는것이 클래식의 목적인데 지금 클래식의 문화가 마케팅이라는 시장성 논리에 이용되어 교육적인 본질을 잊은 채 감성의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다. 계몽과 교육을 목표로 둔 예술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클래식의 방향이다. 다양화된 문화가 급변하는 시대 그리고 이념적인 논쟁이 팽배한 이 현실에서 사람의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감성적인 도구는 클래식 음악이다. 이를 토대로 계몽과 교육을 강조한다면 클래식의 대중성과 고유성을 다 가질 수 있다.음악이 세계 공통 언어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구 몰려오는 다문화의 문제와 초를 다퉈 변하는 경제성장에서 오는 인간성의 고립, 분단된 우리의 정서, 아직도 사대근성의 습관을 갖고 있는 어두운 우리의 현실, 양극화된 사회! 이런 문제는 클래식의 교육적 방향으로 사회적 역할을 분명히 해낼 것이다.계몽과 교육에 목적을 둔 음악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좋은 꿈과 생각을 하게하고, 서로 인정하며 약자와 강자가 상생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할 음악의 방향이다. 음악을 단순히 감상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계몽과 교육의 음악을 기억 할 때 센스있는 선진대한민국이다.

2011-12-12

종교간 충돌은 얕은 믿음때문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종교는 그들만의 독특한 교리와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그 내용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절대적인 도그마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들만의 독백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 더 많은 이익을 주고, 희망을 가지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가 함께 모여서 진지한 토론을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들끼리만 사랑, 자비, 어짐 등을 다짐을 할 뿐이다. 종교는 인류애와 동시에 배타성을 가지는 이율배반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제까지 종교 간의 관계는 전쟁, 적대, 무관심 등이 주류를 이뤄왔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는 서로 무관해 보이던 각 종교 간에 서로 접촉을 시작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사회가 급속히 도시화하기 때문에 믿는 종교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대중 전달매체를 통해 다른 종교의 신조, 의식, 활동 등을 자주 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이런 잦은 접촉은 때로는 상대를 이해하고 수용하기도 하지만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밝은 면보다도 어둡고 심지어는 추하게 보이는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상대 종교의 성전에 들어가서 방해를 한다든지, 페인트로 색칠을 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런 독백적 행동은 종교 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입으로는 선을 행하라고 외치면서 행동은 악을 행한 것이다.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는 어느 한 종교가 사회의 복잡하고 험난한 문제를 모두 처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자기만 옳고, 참되다는 주장은 예리해 질대로 예리해 진 현대인의 머리를 더 혼미 시킨다. 종교란 시류를 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지구촌 시대에는 교리의 근본을 재해석도 해볼 필요가 있다.자기중심주의의 사고에서 상대를 인정하는 대화의 시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늘에 있는 신은 인간이 종교를 이유로 대치하는 것을 좋아 하실까, 아니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과 서로 사랑 나누기를 원하실까? `지옥 간다`는 등의 처벌은 죽고 난 후의 문제이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사랑하라`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고 생각한다.사랑과 자비 등을 주장하는 종교 정신은 적대관계보다는 대화와 협력관계를 가지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 경쟁적인 또는 위협적인 관계로 보지 말아야 한다. 서로가 보완하는 관계로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는 다른 생활과 생각 형태 속으로, 서로가 들어가 이해해 보아야 한다. 새로운 안목으로 자신의 생활이나 문화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서로에게 이런 유익하고도 생산적인 관계를 가지면, 윤리적 차원을 더 높여서 좀 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함께 일하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제일 빠른 길이 된다.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일에도 종교 간의 협력은 최고의 효력을 가질 것이다.동산같이 아름다운 지구에서 인간은 바다를 막고 산을 깔아 뭉게는 것을 다반사로 한다. 이러한 자연파괴에서 종교인의 자연에 대한 책임은 막중하다. 도시화, 산업화, 상업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에서도, 함께 노력하면 최고의 효력이 나타날 것이다.각 종교에서 처음으로 입문할 때는 신앙의 깊이가 얕다. 그 후 정진할수록 그 깊이는 점점 깊어진다. 이는 자기중심에서 시작해 다른 사람을 점점 폭넓게 받아드림을 의미한다. 또 초기에는 무조건 믿음을 강조하지만, 세월과 함께 깨침과 회개의 자세는 더 넓은 마음을 갖게 한다.종교가 충돌하는 것은 얕은 수준의 믿음으로서, 일종의 종교적 발달 장애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지만 비교적 조용하다. 이것은 서로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일 수 있다. 무관심도 분쟁만큼 좋은 것이 아니다. 상호간의 대화는 종교계뿐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정신계와 사상계 전체를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된다.

2011-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