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하버드대학교 마이클 센델 교수가 지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 샐러가 됐단다. 필자도 읽어 보았지만 매우 어렵게 표현돼서 난해했다. 그렇게 어려운 책자가 많이 팔렸다면 우리나라에는 정의가 찾기 힘들어서 읽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정의는 불변이다. 그러나 힘 있는 사람이 불리한 입장에 놓이면 자기 합리화에 제일 적합한 단어가 `정의`이다. 그래서 정의라는 단어가 함부로 동원된다. 정당 구호에도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것 슬로건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심지어 `민주 정의당`이라고 정당이름에 남용되기도 했다. 불법으로 탄생되든 말든 집권당이 되면, 정의는 자기 것이 될 수 있었다.
21세기에는 인간의 문화와 문명이 하루가 다르게 진일보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로 발전은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정의의 개념은 복잡하고 난해해서, 중심을 잡기가 힘이 든다. 정의와 부정의가 섞여 있어도, 감별해 내기가 어렵게 돼간다. 이럴 때, 정의다운 정의는 지구위에서 찾을 수 없을까? 종교에 기웃거려 본다.
성경에서 예수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폭력으로 희생을 당한,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는 분이라고 적혀 있다. 약한 자와 고아, 다문화 가정이나 새터민 같은 사람 등 힘없는 사람들의 권리에 관심을 가지고, 또 찾아 줬다.
예수는 그의 시선을 병든 자나 가난한자 또는 사회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뒀다. 그는 가난에 대한 우리의 나쁜 편견을 거두게 하고 사회적 약자 편이 돼 그들에게 힘(empowerment)을 주었다. 이것은 빈곤의 극복을 위해, 복지국가 체계설립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증진시키는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도 희망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는 자기 스스로가 `지극히 작은 자`와 하나 됨을 말하였다. 그리고 정의란 이 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누려야 한다고 했다. 특히 인간은 강자에게 빼앗겨 버렸던 `생명 수준의 권리`를 되찾아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에 정의의 기초를 뒀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권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는 그들과 함께 고난을 받고 같이 싸워 나가는, 그러한 일생을 보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던 사람, 공동체에서 소외된 그룹의 사람, 노예 수준으로 천대 당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 줬다.
성경의 정의는 단순히 선에는 상을 주고, 악에는 벌을 주는 이른바 신상필벌(信賞必罰) 수준을 넘어선다. 선악의 제재를 공평하게 할 뿐만 아니라, 굽은 것을 곧게 하는 적극적인 공의를 정의라고 했다. 즉 정의란 인간의 선악을 단순히 판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사회를 치유시켜서 구원을 하려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정의는 일반 사람들의 관심 바깥에 있는 곳에 오히려 관심을 둔다. 이곳을 소외지역이라 한다. 사회적으로 배제돼 멸시받는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로마 황제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왕권적인 통치를 직접 받는 백성임을 강조하여, 그들의 `생명 권리`를 황제보다 하나님과 직통시켰다.
옛날에는 계급에 따라 식사를 따로 할 수밖에 없는 식탁예절이 있었다. 100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는 백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에는 흑인들의 출입이 봉쇄됐다. 선진국인 미국마저 과거에는 이러한 형편이었다. 우리는 배고픔만을 위해 식사를 하지는 않는다. 식사시간은 인간의 장벽을 없애는 시간 삶을 나누고 새 힘을 얻는 시간이다. 그러나 고급 사람과 빈한한 사람이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것은 잘 보지 못했다.
정의를 좀 더 넓게 해석하면, 같은 상 위에서 함께 밥을 먹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신학자 크로산의 열린 식탁(open table)운동이다. 그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밑바닥 시민들 사이에서 영적 치유와 물질적 음식을 나누는 급진적 평등주의다”라고 했다.
성서에서 정의의 폭은 무한대이지만, 현대 종교인들은 주로 경제정의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경제의 문제가 곧 신앙의 문제이며, 경제적 정의는 `기독교정신에서 우러나오는 정당한 신앙적 관심사`라고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