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애통해 하는 자

등록일 2012-03-09 21:55 게재일 2012-03-09 22면
스크랩버튼
▲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

나를 포함한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 남모르는 사건을 계속 만난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는 그 일에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그럭저럭 살아간다. 하루라도 낙담하지 않거나, 울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다. 그런 중에 슬픔은 우리를 상심케 한다. 슬픔에는 통탄, 개탄, 한탄, 애통 등 여러 감정이 있다. 그 중에서 애통은 가슴이 따갑게 아프면서, 슬퍼할 때를 말한다.

나에게 슬픔이 있다면 그 이유가 있다. 그리고 자기에게 중요한 것일수록 슬픔은 더욱 가슴에 아린다. 그는 소중한 것을 잃고서 괴로울 때, `눈물아 왜 왔니? 슬픔아, 너가 찾아온 이유는 뭔가? 아픔아, 내게 뭘 주려 하니?` 라고 스스로가 슬픔에게 물어 보기도 한다.

언제 가장 슬퍼할까? 가까울수록, 소중할수록 슬픔의 양은 많아진다. 가족과의 이별이나, 집에 불난 것 등이 제일 가슴을 아프게 한다. 또 가정의 깨어짐도 슬프고 아프다. 아주 귀한 것을 잃었을 때, 우리는 뼈저리게 애통해 한다.

또 나 자신이 멸시나 버림을 받을 때, 그때도 매우 슬프다.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자아이기 때문이다. 재산, 명예, 이름 등 엄청나게 중요한 가치가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자존심이 짓밟혀지고, 조롱을 당하며, 사방에서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애통은 슬픔 중에 가장 강열한 표현이다. 그러나 애통해 하면서 흐느껴 우는 자는 행복하게 된다. 통곡하는 자, 가슴을 치며 우는 자도 평안을 얻게 된다. 신음하면서 속으로 흐느끼며 우는 자는 물론 창자를 짜르는 듯한 아픔으로 슬픔을 겪는 자, 마저 평안하게 된다. 신의 축복은 애통을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슬플 때 울지 않으면 위장 등 장기가 대신에 운다. 속병이 된다.

나는 눈물을 안 흘려! 하면서 슬픔과 싸우지 말라. 그렇게 하면 나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돼 버린다. 슬퍼하라. 울어라. 기도하는 심정이 되라. 신에께 슬픔을 바쳐라. `오늘 제가 바치는 제물은 나의 눈물, 슬픔입니다. 그냥 의미없이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고하라. 우리의 고난, 역경, 슬픔, 등으로 인한 눈물은 `사랑을 위한 제물`이 돼야 한다. 그렇지 않은 분노나 복수의 눈물은 독약이 되기 때문이다.

애통으로 흘리는 눈물 중 제일 강한 것은, 이웃을 위한 `사랑의 눈물`이다. 보통 우리는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엉뚱한 짓을 하면 분노한다. 탄식한다. 저주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국가, 사회, 이웃 또는 가정의 친자식이 될 수도 있다.

이때는 `이럴 수가! 세상은 망해야 해!` 라고 하는 비난, 코웃음, 욕, 분노 등을 자동으로 내 뱉게 된다. 내 맘에 들지 않는 자에게나 이웃에게는 험한 말을 함부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마음이 아니다. 눈물을 흘리며 분노하는 성인보다, 슬퍼하는 보통 사람이 되라. 화를 내는 의인이 되지 말고, 눈물을 흘리는 아픔의 사람이 되라.

분노 대신 그를 위해 슬퍼하면, 그것은 자동으로 기도가 된다. 그 이유는 그를 위한 애통은, `~위한 눈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느 유행가에서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했다. 이것은 일반 세상의 가치이다. 종교는 반대로 `눈물은 사랑의 씨앗`이라고 주장한다. 눈물은 상대를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하는 시발점이 된다.

우리는 고통을 잊으면 기쁨을 잃게 된다. 실패를 잊으면 성공도 사라지고, 상처를 잊으면 사랑도 없어지게 된다. 그 결과로 애통으로 우는 자는 웃고, 웃는 자는 울게 된다. 과거의 눈물을 진정한 기쁨, 사랑으로 바꾸어야 한다.

얼굴은 의료기술로 바꿀 수 있으나, 화나거나 무표정한 얼굴은, 인위적으로는 웃는 얼굴로 바꾸지 못한다. 내 눈물을 신의 제물로 바치는 자가 진심으로 우는 자이다. 악한 자들은 그렇게 온 몸으로 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산책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