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할 때 분위기에 맞지 않게 뜬금 없는 말로 웃기려 하는 사람을 우리는 `싱거운 사람` 또는 `맛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런 같잖은 이야기를 들을 때는 `피식` 쓴맛이 나는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그러나 의미가 있어서 맛있는 말이라면, 깊은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음식에서 맛은 파, 고추, 들깨 같은 것을 사용하지만 그 근본은 소금이다. 특히 매운탕이나 설렁탕은 소금을 조금 많이 넣거나 적게 넣으면 맛이 사라져 버린다. 맛에는 염분 조절이 중요하다.
성경에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는 구절이 있다. 이때의 `짜다`라는 것은 `맛을 낸다`는 뜻이다. 맛이 사라진 소금은 `길에 버린다`고 했다. 이것은 암염(巖鹽)일 때 가능하다.
암염은 흙과 섞여 있어서, 비가 오면 소금은 녹아내리더라도 흙이 남겨져서 이른바 소금 기둥이 가능했다. 이때 남은 흙은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냥 길에 버려서 사람들에게 밟혀 버린다고 했다.
또 성경에는 기독교인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다. 이 말은 삶의 장소는 맛이 없는 곳이란 뜻을 강조하면서 맛을 내는 역할을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그렇다. 살아갈수록 맛없는 세상이다. 경쟁에 경쟁을 거듭하고, 취직할 곳이 없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가 힘이 든다. 노년에는 빈궁과 고독으로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서도 작은 돈 한 푼의 사용에 벌벌 떨면서 아끼면 그를 `짠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다른 말로 `자린고비, 구두쇠, 이기주의자, 꽉 막힌 사람` 등으로 부른다. 그렇다고 돈을 헤프게 써 버려도 안 된다. 사람은 짜게 살아도, 싱겁게 살아도 안 되고, 간에 맞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자주 사회와 가정에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를 뒤돌아봐야 한다. 누구든지 만일 자기의 몫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를 `맛을 잃은 사람`이라 한다. 우리들은 생활에서 의미 있고 맛있는 삶을 수행해야한다. `오늘도 직장에서 최선을 다 했는가?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이나 봉사를 했는가?` 또는 `나는 아직도 맛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맛을 내는 자는 세상을 `유별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반 사람과는 다르게 사는 자`를 말한다. 한 인간으로서 자기의 일할 몫을 생각해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성경에는 신자에게 소금이 `되라`고 하지 않고, 너는 소금 `이다`고 했다. 이는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말이다. 이미 소금이 돼 있으니, 세상에 나가서 역할을 맡으라는 말이다.
소금에는 맛을 내는 기능 이외에도 여러 기능이 있다. 첫째는 부패 방지 기능이다. 안동 간고등어가 그 좋은 예다. 둘째는 깨끗하게 하는 역할이다. 옛날 가난한 시절에는 닭의 창자를 씻은 후, 소금을 친 후에 먹었다고 한다. 또 과거에는 칫솔질도 소금으로 했다. 넷째는 폭파하는 기능이 있다. 김에 소금을 묻혀 불에 그을리면 탁탁 튀는 소리가 난다. 폭탄에도 쓰였다고 한다. 다섯째는 녹이는 작용을 한다. 눈이 길에 많이 쌓이면 염화칼슘을 뿌려서 길을 뚫는다.
성경에는 세상에 소금 역할을 하는 자는 반드시 고관대작이라야 하는 것이 아니란다. 오히려 소금은 청결하고, 지위가 낮으며, 마음 좋고, 천하고 주린, 슬퍼하고, 진리를 목말라 하는 평범한 자들을 지칭했다. 평소에 이런 것을 생각지도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켜 주는 말이다. 자기의 욕망이나 편견, 주장 속으로 빠져 버리면, 맛없이 걸림돌과 방해물이 될 뿐이라고 했다.
구석구석에서 최선을 다 하면 그는 맛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는 맛이 있는 사람이 될까요? 또는 아무 맛도 없는 흙 같은 사람이 될까요? `그런 노력을 하느냐 마느냐`는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문제는 현대인은 소금 맛보다 설탕 맛에 길들어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