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정의란 개인이나 사회가 바르게 되고, 인간이 바른 행동을 하게 하는 기준, 또는 조건이다. 정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회적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정의`이다. 정의는 단순하지만 사회적 정의는 다양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시대의 가치 기준에 따라, 혹자는 이것이, 혹자는 저것이 정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6·25때 치열한 백마고지 전투와 같은 양상으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프래더릭스버그 전투`라는 것이 있었다. 소강상태일 때, 북군의 한 병사가 물통을 들고, 남군 북군 가릴 것 없이 뛰어다니면서 부상병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 총을 쏘아도 도망치지 않았다. 남군의 장교가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그는 짧게 “기독교 인”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에 감동해 남북군은 1시간 동안 사격을 중지하고, 부상자 후송을 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전쟁이란 서로가 `자기는 정의의 편이다`라고 하면서 서로를 죽이는 과정이다. 전투장의 정의는 적군에게는 물을 줘서는 안 되고, 죽여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도 북군의 한 사병은 그 정의를 부숴 버렸다. 뛰어 넘었다. 그럼 그는 정의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부부싸움도 서로 자기가 옳은 편에 있다고 우기는 과정이다.신의 정의는 항상 슬픔과 사랑과 자비와 인애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사랑하여 안타까운 마음들을 나타낸다. 정의가 살고 있는 집은, 이것들이 기둥이 되고, 지붕이 되며, 이것들로 냉난방 온도를 맞춘다.인간의 정의는 대부분 자신이나 자기 무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의는 불변이나, 인간 중심의 정의는 항상 변할 수 있다. 사회에서 정의가 변할 수 있는 것은 사랑과 슬픔과 구제의 마음, 즉 긍휼(compassion)과 의로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의를 분실해버려서, 찾지 못하는 사회가 됐다.신의 정의는 그 기초를 사람이 사는, 이 사회에 두고 있지 않다. 사랑, 가엾음, 자비에 두기 때문에 신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관계없이 모두에게 햇빛이나 비를 골고루 주신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들과 산을 헤맨다. 그래서 드디어 찾은 양을 어깨에 메고 땀 흘리며 돌아오는 양치기 같은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대자대비`이다.정의가 힘을 못 쓰는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굶주림의 해결이다. 우리는`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먹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만, 세계의 곳곳에서는 아직도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환경이나, 신이 창조하신 생태계의 문제이다. 생태계의 사활은 인간의 사활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곳에 긍휼은 꼭 필요하다.종교 간의 갈등도 큰 문제이다. 혹자는 상대 종교에게 “지옥으로!”라고 소리를 함부로 지른다. 또 한 가지 큰 문제는 과학과 종교 간의 대치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품을 때, 인류의 미래는 밝은 곳으로 향하고 정의는 깃들 곳을 찾아낼 것이다.스스로가 소외당하여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들어 주는 자세를 가져야, 그곳에 정의가 살 수 있다. 가난한 자, 우는 자, 병든 자들에게 먼저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이 긍휼, 즉 신의 정의에 가깝다. 하층의 사람들도 신과 인간의 사랑으로 위로를 받아야 한다. 비교, 차별, 분석, 저울질 등의 좋지 않은 방법은 버려야 한다.
2013-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