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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2003년 3월에 제주도를 일주하는 200km 한일 울트라 마라톤 대회가 개최됐다. 새벽5시에 출발해 그 다음날 낮 동안까지 달려야 하는 엄청난 거리였다. 59세의 나이에 참여해 나는 27시간 19분만(다음 날 아침 8시 19분)에 골인하여 3위를 한 적이 있다. 아침 11시경에 한 일본인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넘어져서 부어 있었고, 피가 얼굴에 많이 적셔져 있었다. 어둠속에서 헤매다가 넘어져 버린 것이었다.나는 손전등을 들고 달려서 다치지 않았다. 이 경우에서와 같이, 앞을 볼 수 있고 없고는 그 결과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어두울 때는 빛을 따라 걸어가면 안전하다. 그러나 빛이 나의 뒤에 있다면 그림자에 가려져서 앞을 볼 수 없다.진리는 인간에게서 빛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진리를 향하여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 많이 산재해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놓치면서 살아간다. 진리는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다. 무관심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진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것을 빛이라 하고, 모르는 것을 어둠이라 한다면, 우리는 바로 옆에 진리가 있어도 알지 못하면서 흑암 속을 살아간다.보통 때 인간은 빛의 절대성을 깨닫지 못하여 빛과는 무관하게 살아간다. 오히려 어둠이 인간을 유혹하여 그 속에 빠져 버리게 한다. 방향이 틀려있거나, 스스로가 진선미에 눈을 감아 버리기 때문에 어둠을 더 사랑하게 된다. 쉽게 빠져든다. 그 곳에는 쾌락과 탐닉이 있다. 기쁜 시간을 갖는다.그러나 지나보면 그곳은 후회라는 덫에 걸리게 된다. 어둠 속에서는 진리 쪽으로 가고 싶어도 방향을 모른다. 빛이 저 멀리서 우리에게 손짓을 하는데도, 빛을 보지 못한다.세상의 많은 일들은 밝은 길을 가도록 그냥 놔두지 않는다. 곳곳에 웅덩이가 있고, 거기서 쾌락의 간지러운 음률이 들려온다. 그 곳을 벗어나는데 제일 큰 방해꾼은 그 길에 놓인 다른 사람의 족적이다. 왜냐하면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사이에서 만들어진 갈등, 시기, 음모, 방훼 등은 길의 선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빛은 인간이 가야하는 진리를 향하는 길이다. 진리를 등지고 살면 빛이 없어서 어두운 길을 걷게 된다. 성경에서는 “등불을 켜서 `말(斗)`의 밑바닥에 두지 않는다”고 한다. 빛은 생리적으로 위에 두게 된다. 밑에 있으면 어두울 뿐만 아니라 화재를 일으킬 수가 있다.우주에는 블랙홀이라는 것이 있단다. 그것은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빛이 밖으로 나오다가, 큰 장력의 작용으로 인해 안으로 당겨 들어가서 생기는 현상이라 한다. 그래서 그 안은 밝지만, 밖에서 보면 캄캄하게 보인단다.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오심을 인간들은 몰랐다고 한다. 빛이 도착했는 데도 인간은 그것을 모르고 무지 속에서 방황했다고 적혀 있다. 악마는 빛 속에서도 어둠만 보게 하고, 예수는 어둠에서 빛을 보게 한다.빛은 인간에게 미세한 것들도 보여준다. 이제는 시공을 나노수준까지도 볼 수 있다. 미생물에서 분자, 원자, 양성자까지도 보여 준다. 또 아침에 일어나서 문틈사이로 들어오는 빛에서 우리는 방안의 작은 먼지들도 볼 수 있다. 시인 정호승은 그 광경을 보고서,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노래했다.비온 후에 우리는 하늘에서 빛의 찬란한 웃음인 무지게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희망과 동경, 설레임, 그리고 아득한 그리움을 선사한다. 빛은 인간을 선하고 맑게 해 준다.

2013-03-22

죄인과 악인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우리의 생활 주변에는 가짜가 넘쳐난다. 돈깨나 나가는 것은 진짜를 모방하여 짝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역설적으로는 가짜가 많은 것이야말로 진짜 물건은 고가의 좋은 것일 것이다. 구별이 쉽지 않아서 때로는 진짜를 포기할 때도 있다. 이런 것은 사람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사람을 성서에서는 `양의 탈을 쓴`사람이라고 한다. 양을 몰 때, 양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양가죽으로 된 옷을 입은 목동을 말한다.선거철이 되면 선량이 돼 시민에게 봉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이들이나 시민들에 앞장서서 일하려는 자는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싶다고 한다. 그들의 이력서는 황홀하다. 혹시 속마음에는 자기 출세욕심만 있을지라도 외견으로는 알 수 없다. 어찌됐든 겉보기에는 훤한 사람이다. 일하는 과정에서는 이들의 일 수행 방향이나 능력 정도의 차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이 끝날 때쯤에는 시민 위주냐 자기위주냐에 따라, 결과가 근본 마음의 차이만큼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마치 논에서 벼와 피는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구분해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근본의 틀림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구하지 못하고, 엉겅퀴에서 딸기를 따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말을 잘한다.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보인다. 이런 지도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자기를 따르게 만든다. 그들은 수 억원의 돈을 자기는 손도 대지 못했고, 비서가 받았다고 한다. 때로는 대가성이 없었다고도 한다. 한 쪽에선 확실히 줬다고 하고, 다른 쪽은 죽어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악인이 따로 없다. 이런 자가 악인에 속한다.악인은 위선을 부린다. 그들은 자기의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가면을 쓰고 있다. 이런 부류의 악인들은 선출직에 출마하는 등 사회에서 혜택을 많이 받은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정의를 위해서 일했다고 한다. 그들은 좋은 가면을 늘 쓰고 다니기에, 드디어는 그 가면이 자기 얼굴인 양 착각에 빠지고, 그것을 당연히 자기 얼굴로 행세를 한다. 선한 척, 의로운 척, 진실한 척, 유식한 척, 그래서 끝내는 완전한 악인으로 추락해 버린다. 이 길은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넓은 길이다.죄인은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죄인은 자기의 잘못을 알고, 사찰이나 교당에서 적나라하게 자기를 보이면서 후회, 통탄하는 자를 말한다. 죄인끼리는 서로 위로하나, 악인은 다른 악인을 매우 싫어한다. 그 이유는 다른 악인이 자기의 악한 행위를 비춰 보여 주는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세상 살기가 힘들고, 어렵고, 혼란스러운 것은 죄인이 많아서가 아니고, 악인이 많아서 그렇다. 악인은 죄인임을 모르기에, 고통을 모르는 정의의 투사인양 행사한다. 죄인은 이와 다르다. 자기의 죄에 대해 죄책감으로 고통을 받는다.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회개하고, 교당에서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어리광 부리듯 신에게 매달린다. 죄인은 잘못된 점을 꼬집어 내기가 쉽다. 분노하여 추궁하면 당장 죄를 자백한다. 죄인은 감옥 안에 많다.사회에서는 악을 퇴치하려는 지도자가 더 악한 경우를 많이 본다. 그는 썩은 사회를 바로 잡으려고 한단다. 사람들은 이런 자를 추종한다. 그들은 백성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악인은 죄인과 같이 낙인이 찍혀진 사람이 아니다. 교양도 있고 좋은 학벌에, 지적인 인상을 가졌다. 위장의 천재로서 양의 옷을 입고 있다. 이런 사람은 감옥 밖, 사회에 많이 있다. 모두는 쉽고 넓은 길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하기 전에 먼저 수양과 연마로 인격을 가다듬어야 한다.

2013-03-15

인생과 사랑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사랑이란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하고 오래 남는 경험이며, 위대하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사랑은 우리들 삶의 모든 아름다운 경험 속, 때로는 비극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은 순수한 재료가 되어서 삶에 깊은 의미를 불어넣는다. 사랑은 신의 속성이며, 신성함에 대한 경험이다. 사랑은 재물이나 지식, 학벌, 권력과는 전혀 별개이다. 두려움의 반대말이고, 관계의 본질이며, 행복의 근원이다. 우리가 당신에게 진정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유일한 부분이다. 세상은 흘러가 버린다. 환상이나 꿈같이 허무한 곳이고, 공허와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이런 세상에서 사랑만은 생명의 근원이 된다.우리는 모두가 사랑이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영원히 행복해 하는 것`이라고 낭만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 부정적인 상황을 만나면 따뜻한 사랑도 조건적인 것으로 차갑게 느껴서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사랑에 대한 실망은 상대에게 기대나 요구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만 갈등이 일어나고, 불화의 씨를 만든다. 그래서 자기와 뜻이 맞는 사람만을 사랑하려 한다.그러나 결국에는 사랑 없는 관계 속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는 현실의 사랑에서 씁쓸한 마음을 갖게 된다. 사랑이 가지는 강한 힘과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어렵다.사랑하고 싶다면 상대에게 기대를 버려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엄격한 조건을 제시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다툴 때는 상대방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마음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현실을 다른 각도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닫힌 문은 마음을 편협하게 만들어 버린다.삶에서 사랑은 절대 놓치지 말라. 살아가는 동안에는 누군가를 사랑해야 된다. 누구를 언제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해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사랑이라는 모험을 할 수 있는 마음이 깊게 뿌리내려 있다.삶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모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으나 현실은 그것을 시도할 수 없는 여러 이유들로만 차 있다. 또 삶에서 사랑할 수 있는 기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다. 그러므로 사랑은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한다.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옳지 못한 것으로 배웠고, 자기도취나 이기주의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자신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주위에 늘상 보이는 사랑을 그대로 수용해서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 줄 수 있다.사랑에 대한 배움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이든, 모든 종류의 사람과 상황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상대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등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누구든지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다른 사람 곁에 있어 줄 수도 있고, 주위를 향하여 마음을 열 수도 있다. 부부 간의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 에로스에서 아가페로 승화한다.삶에는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는 없어도 그냥 옆에 있어 줄 수는 있다. 절망으로 외롭거나 괴로울 때, 옆에 있다는 것은 가장 강한 사랑의 표현이다. 누군가의 옆에 있어 준다는 것은 삶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삶을 여행하는 동안, 인간은 사랑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배운다. 그 사랑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당신은 먼저 당신의 생활 중에 스스로 만들어 버린 사랑의 방해물을 찾아내어서, 애써서 제거해야 한다.

2013-03-08

삶의 방법 선택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우리들 매일의 생활은 희로애락이 반복되면서 이어져 나간다. 매일매일 화가 난다든지 슬프거나 괴로운 일에 연속적으로 시달리다가 저녁에는 파김치가 돼버린 육체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간다. 어떻게 하면 이런 세상이 더 좋은 환경으로 되어 스트레스를 줄일 수 없을까 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심을 한다.어떤 이는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미신이라고 불릴지 모르지만 자기 나름의 종교를 만들기도 한다. 현자들도 세상에서 잘 사는 방법을 제시하지만, 그대로 따라하기에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양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모두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기는 너무 힘들다. 애써 찾은 방법에도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그렇더라도 종교나 선현들의 권하는 방법을 분석해 보자. 그 해결법에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첫째는 자기가 바라는 것은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객관성을 띄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갈등은 자기중심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자기의 주장, 희망, 방향이 다른 이의 것과 배치되면, 서로가 얽혀서 꼼짝도 못하게 된다. 둘째는 눈으로 찾고, 손으로 두드리며 마음으로 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갈망하면서 노력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자기의 내면세계를 다듬어 나가기 위해, 간절히 기다리며 몸과 마음을 다하는 자세를 말한다. 셋째는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나도 다른 사람에게 해 줄 것을 권한다. 이것은 남을 잘 대접히라는 말과 같다. 우리는 상대를 다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하기 싫으면 상대도 그러려니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성경에서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구할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낙타를 끄는 자가 우물에서 마실 물을 요청할 때, 한 처녀는 그에게는 물론 낙타에게도 물을 먹였다. 사람이 목마르면 짐승도 목마르다. 그 여자는 자동적으로 한 행동이지만, 갸륵한 행위이다. 그 처녀는 인류가 읽는 성경에 이름을 올려 만세 후손들에게까지 칭송을 받는다. 마음 씀씀이는 곧 사람 됨됨이다. 행동으로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그 지식과 재산은 버려진 쓰레기와 같은 것이 된다. 사랑은 아름다운 삶의 기본이 되는 원리이다. 넷째로 성현들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넓은 길 대신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권한다. 행복의, 승리의, 아름다운 삶의 길은 좁은 길이다. 인생에는 지름길이 없단다. 그 곳은 시련과 고난을 거쳐야만 지나갈 수 있다.프로스트는 그의 시(詩)에서 자기 앞에 놓인 두 갈래 길에서 선택의 어려움을 표현했다. 두 길을 동시에 선택할 수는 없어서 그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길을 택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바뀌고, 운명이 달라졌다고 했다. 어느 길을 들어서는가에 따라 그의 인생의 방향과 삶의 형태는 정해져 버린다. 그의 모든 것이 그 길의 선택에서 바뀌어 버린다고 했다.우리는 누구나 삶에서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는 삶의 소소한 부분까지도 같이한다. 함께 살고 있는 부부와 자식, 즉 가족을 말한다. 가정은 삶의 기본이다. 가정은 소홀히 하면서 대인 관계를 잘하려는 것은, 의무를 다 하지 않으면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자신만의 걸음걸이와 속도로 살아간다. 그 길이 어떤 방향이든, 자랑스런 길이든 어리석은 곳으로든, 원하던 길이든 마지못해 선택한 방향이든, 터벅터벅 그 외길을 걸어간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살아간다. 그 길에 따라 운명은 결정된다. 자기의 꿈과 희망과 소원은 길의 방향에 따라 맞출 수밖에 없다. 단 종교인이란 자기의 현재를 긍정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

2013-02-22

극복해 내는 한 해를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금년 달력의 1월을 펼칠 때만 해도 왠지 새해 기분이 들지 않았으나 음력 설날을 맞으니 이제야 새로운 결심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서양은 태양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기간을 나누었으나 동양에서는 1년이라는 단위를 달의 순환에 맞추어서 정했다. 서아시아 지방의 이스라엘도 오순절 등의 절기를 음력에 맞추었다. 그래서 그 날이 달력에서는 매년 다른 날에 정해진다. 독재 정권 시절을 거치면서 음력설은 정치적으로 강력한 제거 대상이었지만, 수천 년을 이어온 이 절기는 지금도 꿋꿋이 우리 문화에 존재하고 있다. 새해는 뱀의 해이다. 뱀은 혀를 날름거리면서 소리 없이 접근하며, 독이 있기 때문에 징그럽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구렁이는 집을 지키는 존재로, 또 뱀은 매년 허물을 벗기 때문에 변화와 재생을 의미해 왔다. 또 뱀은 다산이나 재물의 풍부함을 대표하는 동물로 여겼다. 성경에서는 `뱀처럼 지혜로워라`라고 했다.서양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스클레피우스는 `치유의 신`이고, 그의 지팡이에는 뱀 두 마리가 서로 감고 기어오르는 형상이 있는 데, 이것은 현재 의사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이제 어느 정도 살아보니까 삶이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와 같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게 된다. 바다 저 건너편에 도달해야 하는데, 갈 길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피곤해도 멈출 수가 없다. 앞으로 항해에서 실패하거나 괴로울 때에는 신이든 뭣이든, 보이지 않는 것에라도 매달려야겠다.그러나 경험상으로 볼 때 그렇게 노력해도 일은 잘 풀리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게 유리한 조건들은 한 밤중에 깊이 잠들었을 때, 소리 없이 나를 비껴 지나간다. 정신 차리고 눈을 부비면서 행운을 기다리지만, 하필 졸음이 퍼부을 때에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금년 한 해도 다른 해와 똑 같을 것이다. 좋은 일은 적게 나타나고, 좋지 않는 뉴스가 넘쳐날 것이다. 온갖 인간의 갈등과 국제 분쟁이 신문을 꽉 메울 것이다. 극복할 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성실하게 항해하면서도 인생의 한 복판에서 재산을 날린다든지,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이유도 모르게 고난과 풍랑을 만나기도 한다. 때로는 억울하게 당하기도 하고, 여러 요소들이 합쳐진 설명할 수 없는 역경을 수없이 많이 맞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모여서 인생이 된다.고난이나 불행을 잘 이겨낸 자가 10명 중 8~9명이라면, 이상하게도 성공과 번영을 잘 이겨낸 사람은 10명 중 1~2명뿐이라고 한다. 그만큼 성공과 번영은 이겨내기가 고난보다도 어렵다. 자기만족과 기뻐서 교만한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인기 있을 때, 건강할 때, 부유할 때, 우리는 오히려 자숙하면서 홀로 조용히 스스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척추 병, 폐질환, 직장암을 앓았던 `빙점`의 저자, 미우라 아야코는 삶에서 병들고 불행해 져야 겨우 알 수 있는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병들어야 드릴 수 있는 기도가 따로 있고 /병들어야 들을 수 있는 말씀이 따로 있고, /병들어야 감사할 수 있는 감사가 따로 있고,/병들어 보아야 겨우 인간이 될, 싹이 노란 인생도 있다.`질퍽한 인생길을 질병과 장애를 겪으면서 살아온 사람의 비장함과 극복의 아픔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했다. 그녀는 정상인보다 더 긍정의 노래를 부르면서 삶의 항해를 했었다.금년에 당신은 어디로 누구와 함께 항해를 떠나려는가? 만일 항해를 중단한다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려는가? 순풍, 역풍, 맞바람, 폭풍, 해일 등의 여러 가지 난관에 대비하는 자세를 가졌는가? 2013년은 소리 없이 시작됐다. 부디 항해를 하는 중에 정지하지는 말라.

2013-02-15

용서라는 감정

▲ 이원락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 이원락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 사람들은 그가 어떤 일에 관여하고 있으면 항상 그 일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뭔가를 기대한다. 그 일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의 크기에 따라서 기대의 폭도 정해진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상일의 대부분은 그가 바라던 만큼 이뤄지지는 않는다. 이때 우리는 실망을 하면서 그 탓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경우가 많다. 일이 잘못되면 기대가 큰 만큼 화를 내는 정도가 커진다. 이때 분노나 증오가 생긴다. 손해를 입은 만큼, 자기도 응징을 하고 싶어진다. 이런 생각은 마음속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깊이 각인돼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때가 되면 살아나려는 자세를 취한다. 마치 높이뛰기를 하는 자의 웅크린 모양과 같다. 독이 뿌리를 내려서 기회만 있으면 공격적으로 변한다. 기대는 실망을 잉태한다. 때로는 앙심이 없는 척, 상처를 숨기기도 한다. 상처로 생긴 분노 증오 등의 마음을 억누르려고 부인해 보거나 억제를 해도, 그 놈은 틈새를 비집고 자꾸만 생각난다. “복수를 하고 싶으나 내가 약해서 안 돼! 나는 바보야”하면서 속으로 삭이다가 그만 우울증에 걸려 버릴 수도 있다. 상대로부터 보상받지 못하면 마음의 텃밭에 심어 놓은, 손상 받은 `상처나무`에 물을 주어서 키우게 되는 격이다. 때로는 어떤 상황을 잘못 추측하여 내린 판결로 자기를 괴롭힐 때도 있다. 어머니가 남편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니까, 그 딸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계기로 크게 다투었다. “아빠가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울지 말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서 열심히 살아라`고 한 당부를 지키기 위해서 였다”는 어머니의 설명에 딸이 용서를 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좋은 감정을 가진 자의 수는 적다. 오히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월등히 많을 수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적게 주고 적게 받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남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불완전하기에 나의 잘못이 가능하고, 때로는 나의 잘못이 더 클 수도 있다. 상처는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어날 수 있다. 나의 미성숙으로 인해 스스로가 자초한 상처도 많다.분노의 마음은 억누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분노를 풀기 위해 때로는 화가 나는 대로 자기를 내버려 두어 버린다. 욕설이나 미친 듯한 행동도 가능하다. 화를 모두 표현하면 속이 좀 시원해진다. 역사에서 똑똑하기로 유명한 다윗왕도 화가 났을 때 “떠돌이가 되라! 병에 걸려라! 지팡이 짚는 인간이 되라!”고 욕설을 한 일이 성경에 적혀 있다. 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증오심 등의 감정에서 벗어나야겠군…`하는 생각이 움트기 시작한다.용서의 감정은 상대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을 때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다. 보상을 기대하는 대신 상대에게 `~하(되)기를 희망`하여라.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할 때, 안타까움, 슬퍼함 등으로 나타난다. 복수심 보다는 위로의 마음이 가능하다. 상처를 주지 않는다. 비로소 상대방을 위한 기도가 가능하다. 특히 자식과의 관계에서는 희망으로 접근해라. 상대에 대한 기대는 잘못되었을 때 상처를 주고받는다. 해 준만큼 받고 싶어진다. “알아서 해 주겠지”라는 마음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기대는 눈물의 씨앗이 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다.용서는 신과 화해하는 방법이다. 애기는 어머니 품속에서 새록새록 잠이 든다. 어머니는“딴 곳에서 두들겨 맞고, 왜 나에게 화풀이를 해 달라느냐!”고 하지 않는다. 사건은 해결이 되고, 평화가 그들 마음속에 스며든다. 이런 것을 반복하면 세상은 점점 평화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2013-02-08

돈에 대한 교육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가정이나 학교 등 어디서나 학생들에게는 국어, 수학 등의 교과 분야를 공부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일상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돈 문제는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사회에 나오면, 그들은 돈을 인간의 생명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시해 돈때문에 직장생활에 꽁꽁 얽매여 살게 된다.학교는 학문적 혹은 직업적 지식만 강조하고 투자 등의 금융지식은 등한시한다. 제도 교육에서는 진정한 삶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순응하면서 모범적인 삶을 추구할 것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성인이 되면 자본주의 사회의 한 복판에서 젊은이들은 당황하게 된다.미래를 준비하여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에 대해 다소간의 교육과 지혜가 필요하다. `착실하고 안전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에서 지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처신하면서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이후의 생활에도 필요한 것이다.돈에 대해서는 학교 교육 이외에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 돈 교육을 해 인생 기초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것은 돈이 필요할 때 조달하는 방법과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가정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재무 교육은 장성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좋다. 누구나 여유있게 살고 싶다. 그것을 위해 넉넉지 못한 가정의 아버지와 잘 사는 집의 아버지의 충고 내용을 비교해 보자. 그 내용은 같을 때도 있지만, 다를 때가 더 많이 있다.넉넉지 못한 가정에서는 자식이 좋은 직장을 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자식들에게 강조한다. 취업을 하면 기업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이는 똑똑한 사람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대체로 돈은 악의 근원이라고 믿으며, 위험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력서를 잘 쓸 수 있도록, 좋은 성적과 실적을 모으라고 한다. 공부만을 강조한다.그러나 부자들은 자식에게 공부를 크게 강요하지 않는다. 직원들과 지(知)적인 대화에서 밀리지만 않으면 된다. 똑똑한 사람이 필요할 때는 채용하면 된다. 스스로 기업체를 잘 운영하면 된다. 돈의 부족은 기업을 망칠 수 있으므로, 돈이 없는 것을 악의 근원으로 본다. 위험은 피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만 잘하면 된다고 한다. 이력서 내용은 신경 쓰지 않는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사업계획서를 잘 쓸 수 있게, 능력을 개발하면 좋겠단다.부자는 그들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 기업체를 잘 경영하면 자기 스스로를 위하는 것이 된다. 즉 그들은 남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일을 한다. 그러나 중산층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한평생 돈을 쫓아서 사업주를 위해서 살아가게 된다.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들의 생각은 대부분 고착돼 있다. 어려운 가정의 부모의 말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소심, 두려움, 냉소주의, 게으름 등 부자가 되지 못하는 근본원인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자식의 생각하는 범위가 부모의 것과 같은 크기의 틀 속에서는 더 큰 발전이 어렵다. 부자가 아닌 사람은 상대방은 변하기를 원하면서 자신은 변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짙다. 스스로도 변하고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여서 소화시켜라. 돈은 일종의 힘이다.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배우는 자세가 중요하다.배움에는 불타는 갈구, 또는 열정이 필요하다. 열정은 현실에 대한 분노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뭉쳐진 응어리이다. 열정이 식어버리면 우리의 정신세계는 생기(生氣)를 잃게 된다.

2013-02-01

긍휼=종교의 정의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정의란 개인이나 사회가 바르게 되고, 인간이 바른 행동을 하게 하는 기준, 또는 조건이다. 정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회적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정의`이다. 정의는 단순하지만 사회적 정의는 다양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시대의 가치 기준에 따라, 혹자는 이것이, 혹자는 저것이 정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6·25때 치열한 백마고지 전투와 같은 양상으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프래더릭스버그 전투`라는 것이 있었다. 소강상태일 때, 북군의 한 병사가 물통을 들고, 남군 북군 가릴 것 없이 뛰어다니면서 부상병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 총을 쏘아도 도망치지 않았다. 남군의 장교가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그는 짧게 “기독교 인”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에 감동해 남북군은 1시간 동안 사격을 중지하고, 부상자 후송을 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전쟁이란 서로가 `자기는 정의의 편이다`라고 하면서 서로를 죽이는 과정이다. 전투장의 정의는 적군에게는 물을 줘서는 안 되고, 죽여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도 북군의 한 사병은 그 정의를 부숴 버렸다. 뛰어 넘었다. 그럼 그는 정의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부부싸움도 서로 자기가 옳은 편에 있다고 우기는 과정이다.신의 정의는 항상 슬픔과 사랑과 자비와 인애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사랑하여 안타까운 마음들을 나타낸다. 정의가 살고 있는 집은, 이것들이 기둥이 되고, 지붕이 되며, 이것들로 냉난방 온도를 맞춘다.인간의 정의는 대부분 자신이나 자기 무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의는 불변이나, 인간 중심의 정의는 항상 변할 수 있다. 사회에서 정의가 변할 수 있는 것은 사랑과 슬픔과 구제의 마음, 즉 긍휼(compassion)과 의로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의를 분실해버려서, 찾지 못하는 사회가 됐다.신의 정의는 그 기초를 사람이 사는, 이 사회에 두고 있지 않다. 사랑, 가엾음, 자비에 두기 때문에 신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관계없이 모두에게 햇빛이나 비를 골고루 주신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들과 산을 헤맨다. 그래서 드디어 찾은 양을 어깨에 메고 땀 흘리며 돌아오는 양치기 같은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대자대비`이다.정의가 힘을 못 쓰는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굶주림의 해결이다. 우리는`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먹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만, 세계의 곳곳에서는 아직도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환경이나, 신이 창조하신 생태계의 문제이다. 생태계의 사활은 인간의 사활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곳에 긍휼은 꼭 필요하다.종교 간의 갈등도 큰 문제이다. 혹자는 상대 종교에게 “지옥으로!”라고 소리를 함부로 지른다. 또 한 가지 큰 문제는 과학과 종교 간의 대치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품을 때, 인류의 미래는 밝은 곳으로 향하고 정의는 깃들 곳을 찾아낼 것이다.스스로가 소외당하여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들어 주는 자세를 가져야, 그곳에 정의가 살 수 있다. 가난한 자, 우는 자, 병든 자들에게 먼저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이 긍휼, 즉 신의 정의에 가깝다. 하층의 사람들도 신과 인간의 사랑으로 위로를 받아야 한다. 비교, 차별, 분석, 저울질 등의 좋지 않은 방법은 버려야 한다.

2013-01-25

생산성 있는 삶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자기 자신을 사회에서 좀 더 뚜렷한 존재로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된 마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직업적 안정, 지위의 획득과 유지 등 그가 추구하는 분야의 일과 연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자기를 채찍질해 휘몰아치는 삶이 된다. 그러나 40대 이후에는 출신학교나 지능지수 등은 점차 영향력이 줄어들게 된다. 오히려 개인의 인내심, 유모어, 친화력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꿈의 크기가 중요하다. 50대가 되어도 젊은 시절의 혈기는 타는 목마름으로 계속된다. 표정이 살아 있고, 눈은 초점이 뚜렷하다.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대화도 재미있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그 후 중년에서 노년으로 감에 따라 그는 자기가 가진 장점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이때는`자신을 발전시켜 왔다`는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또 타인에게 용기를 불어 넣는 일도 그들이 할 일이다. 이 나이가 되면 그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성은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비로소 동료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인다. 남의 입장을 많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이전과 같이,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생산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살면서 의도하던 과업을 잘 달성해 나갈 수 있다면 70대 이후에도 여전히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만족스런 노후를 위한 좋은 버팀목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면서 산다면 멋진 삶이 될 것이다. 자기주위에 관심을 보이고 여유로워 진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나이에`잘 늙는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변을 더 많이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한다.인생의 모든 면에서 생산성 증가는 마음이 안착돼야 가능하다. 생산성은 단지 대외적인 활동뿐만이 아니고, 결혼 생활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원만한 결혼 생활은 헌신과 인내, 유머감각 등이 합해져서 이루어진다. 가정이란 그의 심성을 조율하고 훈련시키는 장엄한 궁전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생산성은 잘 자라난다. 생산적인 사람이 되려고 가정과 직업 활동의 만족을 뒤로 미룰 필요는 없다. 이것들은 동시에 할 수 있다.자식들도 생산성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는 자녀교육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밥을 떠서 입에 넣어 주는 과보호로는 자식들이 잘 될 수 없다.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한다. 또 자식들에게 전통, 사회 문화, 환경 등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전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생산성을 위하여서는 자신의 노하우를 물려 줄 사람이 필요하다. 생산성은 다음 세대를 돌보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자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젊은이를 따뜻하게 보살핀 결과, 마침내 생산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을 우리는 적지 않게 보아 왔다. 만일 그가 노력하였음에도 젊은이에게 자기의 뜻을 전달하지 못해도 후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인생을 그렇게 애쓰면서 성실히 노력한다면, 그것도 생산적 활동으로서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좋은 대학을 나온다든지 IQ가 높아야만 공동체 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어떤 방면에서 노력을 많이 하면 그 만큼, 출신의 한계를 딛고서 생산적인 존재로 변할 가능성은 더 많아진다. 생산성의 개인적인 목표는`더 좋은 미래`이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삶을 긍정하면서, 삶에 자신의 능력을 쏟아 부어 넣어야 한다. 그러나 생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2013-01-18

과거 동양의 정의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정의(正義)에서 의(義)자는 양(羊)과 나(我)를 합한 글자로서, 공동체에서 양고기, 즉 먹을 거리를 고르게(正) 나누어 갖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에서는 정의(正義)란 `올바른 논의`라고 했다. 이는 `균등한 분배와 합리적인 업무`를 강조하는 말이다. 서양에서는 정의(justice)를, `자기에게 분배될 수 있는 몫을 그 자신이 가지게 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동양철학에서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사랑과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기의 몫이란다. 이는 우리 마음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옳지 못함을 부끄러워 함)으로 나타나며, 자기의 잘못여부에 대해 양심껏 성찰한 결과이다. 이를 사람다움의 가장 큰 요소로 보았다.고대 동양에서는 인간의 마음에 정의심을 가질 때, 정의는 자율적, 그리고 자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했다. 정의는 정치를 효율성이나 경제성만을 위해 운영되지 않게 한다. 정의란 균형이 공동체 정신에 기초가 된다. 정의가 부족한 사회일수록 그것에 대한 요구는 더욱 거세진다. 양고기를 일부가 독차지함으로서 구성원이 제 몫을 가지지 못할 때, 백성은 배고픔과 부족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고르고 바른 분배, 합리적인 일 처리 등에서 정의가 크게 작용하기를 갈망했다.공자의 국가 경영 목적은 더 많은 생산에 두지 않고 재화가 고르게 분배되는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뒀다. 즉 공자의 정치 목표는 재화의 축적에 목적이 있는 경제성장에 두지 않았다. 실제로 백성은 현실이 불의할 때 원망과 억울함을 느끼고, 그것은 분노로 변한다. 공자는 권력자의 이익 추구는 힘 있는 자의 이기심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이러한 분노는 타인의 처지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해 재화 등을 독점할 때 발생한다고 했다. 이를 공동체가 붕괴되는 통로로 보았다. 유교의 경제사상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기획하는 자유시장 경제가 아니고, 분배와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체제를 강조했다.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영역과 정의를 중시하는 공공영역을 구분했다. 그래서 공평성과 공정성이 이뤄지는 사회 건설을 바랐다. 즉, 유교에서 국가 경영자는 모자람보다는 고르지 않음을, 가난을 근심하기보다는 평안하지 않음을 걱정하라고 했다. 고르면 가난하지 않고, 화목하면 모자라지 않고, 평안하면 근심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불의한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려는 생각과 실천은 유교의 핵심주제가 됐다. 공공 영역의 핵심은 `정의`이다. 부정의에 대해서는 합당한 복수를 하지 않으면, 그 조직은 흔들린다고 했다. 정치가는 정의에 밝아야 한다고 했다. 모두가 정의를 공유하는 정치, 국민과 함께 하는 정치, 너와 나가 우리가 돼 함께하는 `여민정치`를 지향했다.정의란 개인적으로는 자기 행동에 대한 수오지심 여부에서 시작하고, 사회적으로는 증오심으로 표현된다고 했다. 증오심이란 공동체적인 부끄러움, 즉 공공적 수치심을 말한다. 일반 수치심이 개인적인 덕성이라면, 증오심은 공적인 덕목이 된다. 그러므로 폭정에 저항할 수 있다. 반파쇼 반독재를 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한다. 심지어 폭정으로 인의를 해치는 왕은 쫓아내는 것이 자연권으로서 합당하다고 했다. 그런 자들이 공직에 취임해 공적 지위를 사적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삼을 때, 정의가 정치 분야에서 부각되기 시작한다. 제 몫을 챙기면서 남의 사정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동료에 대한 미움, 제가 저지른 불법을 합법화하는 정치가에 대한 분노,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또 죽이는 권력자에 대한 증오심은 정의감을 태동시킨다. 공자는 `정당한 복수는 옳다`고 했다. 권력을 사익 추구에 사용하는 군주는 일부(一夫·한 사람의 남자일 뿐)로서 역성혁명의 대상이 된다고 했다.

2013-01-11

삶의 질 향상 방향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오늘날의 인류는 지금까지 선조들이 삶을 위해 애써 노력한 결과 육체적 고달픔으로부터 다소간 해방되고 있다. 가능한 물질을 양적으로 확보한 상태이다. 그래서 이제는 여유를 부리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사람들은 그냥 하루하루를 뜻 없이 보내기에는 인생 전체가 아깝다고 여긴다. 단순히 숨쉬고, 밥 먹으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생물학적 삶, 동물적인 삶일 뿐이다. 인간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것을 삶의 질이라고 하며, 이제는 그것을 높이는 문제가 항상 사회적인 과제가 되고 있다. 삶의 질 향상에는 경제와 기술의 관계가 밀접히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삶의 전반적 형태 변화는 기술과 경제의 발전 속도에 비례해 개선돼 왔다. 또 앞으로도 그것에 맞게 여러 국면의 변화를 겪으면서 발전할 것이다.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과거에는 물건을 만드는 기술은 당사자 자기들에게만 유용하게, 그들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보급이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기술은 서로 연결성이 없이 파편화되었고, 삶의 질에 대해서는 생각이 강하게 미치지 못했다. 근래에 와서야 많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고, 점차 발전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미래는 무한 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기에 기술의 발전 속도가 급격히 빨라질 것이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나아가기 때문에 이기적인 행위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로써 대량 생산의 획일화에서 다양화와 특성화로 발전할 것이고, 파편화돼있는 문화와 기술들은 융합해 생산에 의미를 더할 것이다. 즉 미래에는 기술의 가치를 중요시할 뿐만 아니라 제품에 자연성을 살려내는 기술과 디자인의 조화를 강조할 것이다. 그래서 제품 생산에서 기계적 기술은 인간 지성을 닮아가는 스마트 기술로 나타날 것이다. 그 예로 지금 대두되는 IT산업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상품의 물리적 기능을 중심으로 해왔던 생산과 소비가 앞으로는 미학적, 상징적, 소통적 가치 등 인문적 가치를 중심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는 디자인 산업, SNS, 게임 산업 등의 발전을 말한다. 이러한 심미화 등의 가치 중심적인 향상요인에는 정신적 평화, 여유, 다양화, 조화, 통합적 상생정신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그래서 상품은 반복해서 만들어 내는 메커니즘에 따라 물리적으로 생산되는 제품이 아니라 비물리적 의미로서 미적 공간에서 창조되는 작품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즉 기술이란 동일한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작품을 창조하는 과정으로 변할 것이다. 이러한 창의성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소수 영웅적 천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한 사람이 똑똑하여 창의성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창의성을 가지고 있다. 서로의 창의성을 주고받아서 융합하면, 소위 상호 창의성의 힘은 더 커진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서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작용하는 상호 창의적 성취가 중요하다. 그래서 미래에는 그것을 기초로 하여 경제나 기술이 발전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또 사회에서도 이것을 제공할 수 있게 인재가 모이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사회와 국가만이 좋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인간의 상호 창의성을 증진시키는 것은 삶의 본질을 높이는 것이며, 기술과 경제를 문화화하는 과정이다. 삶은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을 창조하고 성취하는 과정 속을 걸어갈 것이다. 그냥 생존 본능 수준에서는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2013-01-04

새해엔 나눔문화의 행복을 누리자

▲ 박선진한국폴리텍대학 영주캠퍼스 학장 지난해에는 국내외에서 사회공헌에 관한 화두가 많은 관심을 끌었다. 돌아보면 자선적 기부, 나눔의 문화, 공공기관의 사회적 책임 등 사회공헌과 관련된 단어들이 유난히 많이 사용된 한 해였다. 하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기 침체와 양극화 문제, 청년실업 등의 많은 문제들이 불황에 더 추운 사회복지시설과 단체들을 더욱 한숨짓게 하고 있다.사회복지시설은 개인이나 기업에서 직접 후원을 받기도 하지만 사회복지 재단 등 단체를 거쳐 받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회복지 재단 등 단체에서 들어오는 후원금은 물론이고 개인과 기업이 일선 복지시설에 직접 내는 후원금도 부쩍 줄었다. 뿐만 아니라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정기 후원을 중단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어 경기불황에 지원의 손길마저 끊기는 이중고를 겪는 복지시설이 어느 해 보다 더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이런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아쉬움이 남는 건 한국의 기부문화는 점차 확산하고 있고, 일상생활에 정착되고는 있으나 아직은 제대로 정착화 단계에 있지 않고 남을 돕는 것에 인색하다는 것이다.카네기와 록펠러, 빌 게이츠는 잘 알려진 미국의 재력가들이다. 존경받는 부자의 효시이자 강철 왕인 앤드류 카네기, 미국에서 세 번째 가는 자선재단으로 기록돼 있는 록펠러 재단의 석유왕 록펠러. 이들은 부의 경쟁에서도 자웅을 겨루지만 놀라운 것은 기부에서도 경쟁하고 있다는 것이다.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의하면 `지구 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 서열 4위인 빌 게이츠는 지금까지 280억 달러를 기부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부자 친구들도 개인재산을 털어 이러한 기부문화에 참여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름다운 일이다.나눔, 기부의 문화는 무엇인가.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발전에 걸맞는 국격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이며, 품위 있는 국민, 품격 높은 선진 한국으로의 길은 또 어디서 시작되는가.서로를 배려하는 `나눔의 문화`. 바로 그 속에 답이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일상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고, 정착되는 것 또한 지속적 나눔을 위해 필요한 것들과 같은 맥락이다.`여유 있는 사람만이 나누고 기부를 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부를 고액의 물질적인 것 내지 일회성으로 생각하고, 꽤나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또 기부의 첫 시도가 어색해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많다.그러한 선입견을 고치려는 개개인의 노력과 함께 다양한 방식의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타인을 배려하는 문화,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등 나눔의 문화에 힘을 보태는 어린 고사리 손들이 있다. 이들이 `나눔의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등불이 될 수 있다.“기쁜 일은 서로의 나눔을 통해 두 배로 늘어나고, 힘든 일은 함께 주고받음으로써 반으로 줄어든다” 존 포웰의 말이다. 아무쪼록 2013년 올해에는 개인과 기업가, 사회지도층의 진정성 있는 사회공헌 활동으로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고유의 따뜻한 체온이 나눔 문화의 전통에 정착되기를 기대한다.

2013-01-02

자기 수행(修行)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옛부터 사람들의 성취목표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서양 사람들은 주로 출세를 하거나 재물을 모으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과거 동양에서는 개인의 영달보다는 인격완성에 목표를 두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불교나 유교, 또는 노장사상의 영향으로 `나는 과연 누구인가?`를 밝히는 수행 문화가 사회를 이끌어 왔다 . 어느 사상이든 그 근본에는 자기의 수양에서 시작했다. 우리 속에는 거짓된 자아가 있단다. 그것은 게으르고, 어리석고, 교만하고, 비겁하고, 탐욕으로 가득하게 채워져 있는 원래의 내(我)가 있는데, 동양사상은 주로 이런 마음을 이겨 나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공자는`자기를 강하게 훈련하는 데는 쉬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약간 은근하고, 갸륵하며, 스스로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약간 고되고도, 조금은 슬픈 빛의 사랑을 뜻하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모자람을 이해하고, 다독이며, 자신을 긍정하고, 자기 잘못을 용서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운명적인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거기서 자기 성취를 위해 수행하기를 권했다.이런 목표에 도달하는 제일 기본 방법은 먼저`자기를 사랑(愛己)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한 후, 비로소 자신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상대에게 표현하고 싶은 것이 뭔지를 알게 된다. 자기사랑은 하기가 매우 어렵다. 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남녀 간의 사랑과 같이 단순히 즐거운 감정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착오이다.자기 사랑에는 살면서 만들어진 편견이나 견해 등을 수행(修行)을 통하여 극복해 넘어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도덕경에는 `자기를 아끼면서도 스스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自愛不自貴)`고 했다.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 마치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어느 순간 흘러내리면서 다른 물방울도 흐름을 시작케 하는 것과 같이, 자기 스스로에서 타오르는 열정과 사랑은 또 다른 사랑과 열정을 낳는 좋은 불씨가 되도록 한다.자기 사랑 그 다음 단계로는 자기의 뜻을 성실히 수행하는 자기수양(修己)에 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은 지루하고도 험난한 과정이 될 수 있다. 학문에 접근할 때에도 학문자체를 닦는 것보다는, 먼저 수양으로 몸을 닦는 것을 더 크게 생각한 것과 같다. 수행에는 오로지 자기를 그곳에 던져 버리는 방법(盡己)을 택한다. 이것은 충성된 마음(忠), 곧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마음이라고 했다. 속에서 우러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려 알게 하는 단계이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마음과 같다.`나(我)라는 에고`조차 없이 자식의 마음속에 쏙 들어갔다가 나오는, 자기를 다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노력의 마지막은 자기를 떠나는 것이다.`자기의 없음(無化)`이다.공자는 이 과정을 통과해야 제 몸 닦기, 집안 단속, 나라경영, 천하의 태평성대를 이룩한다고 했다. 그리고 노자는 자신을 다(盡)한 상태에서는 `밤이면 별을 보고 놀다 자고, 낮이면 밭에서 일을 하며 산천과 더불어 산다`고 했다(無爲自然).이러한 세상의 모든 면을 이겨 나가면 그는 자기를 극복한 경지(克己)에 도달한다. 세상의 여러 일에서 느끼는 객기(客氣)를 물리치는 방법은 극기 외에는 없다. 노여움과 두려움은 다스리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도 수양을 많이 해 스스로를 이길 수 있으면 자기가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이러한 과정을 통해 드디어 자기완성을 이뤄냈을 때(成己), 그는 조용하고 잔잔한 사랑, 인(仁)을 이룬 것이다. 이것은 만물을 이룩케 하는 지식이 된다. 인(仁)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과 자기의 완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의 인격과 도덕을 완성시켜 나가고, 자기 수행이 이뤄진다.

2012-12-28

좋은 가정이란

▲ 이원락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 세상살이에서 성공하려면 가족 모두가 한 곳으로 엄청난 정력을 지속적으로 쏟아 부어야 한다고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가족관계는 자연스런 것으로서 공동 노력의 목표가 있지 않다. 합심하여 일부러 정신적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각자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 될 뿐이다.역사에서 보면 사회에 여러 사회제도를 도입해 보았으나 어느 나라도 가족제도를 다른 제도로 대체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왠지 가족이 속수무책으로 해체돼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미국에는 이혼율이 50%가 넘고 상당수의 아이들이 편모슬하나 입양아로, 또는 사회 조직에서 자란다고 한다. 그곳에는 이런 현실을 비극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걸맞게 새로운 형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가정은 무용지물이고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나, 가족상은 아무리 사회가 변해도 고정불변이라는 주장은 둘 다 모두 모순이 있는 것 같다.가정은 성이 다른 두 어른이 결합해 서로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자식에 대한 책임을 함께 나누는 곳이다. 정이 메마르고 경쟁이 계속되는 세상에서 따사롭고 포근한 위로의 안식처가 바로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가정이란 사람들이 하루 중에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잘 조절하는 안전판 역할을 하는 곳이다. 가정은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구성됐으므로 물질적 욕구만 충족시키면 저절로 굴러 갈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가정에서는 사랑이 공통분모가 돼있고 방어의식이나 경쟁심 같은 것도 없이 편안하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경우에는 친구들과 어울릴 때처럼 즐겁지는 않지만 혼자 때처럼 정서가 가라앉거나 죽을 맛도 아니다. 가정이란 자신의 감정을 이렇다 할 부담 없이 표현할 수 있는 곳이다. 의외로 가정에서 학대나 폭력이 많은 것도 감정 표출에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가정은 따뜻한 음식, 신체적 보살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의 확보, 상호간의 삶의 목표에 관심을 가져주는 정신적 힘 등으로 결속돼 있다. 직장 등 밖에서 행하는 활동에 대해서는 우리가 특별한 노력을 해서 집중하지만 가정에 오면 반대로 편안하여 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 간에는 충분히 물질을 갖추고 있어도 사고방식, 가치관, 꿈 등을 서로 공유하지 못하면 가정의 가치는 명목상으로만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이때에는 정신적 공감대는 아주 낮은 수준에 놓여 있는 상태다.그러나 가정에서도 예를 들어 부부 모두 문학을 사랑한다든지, 같이 마라톤을 하는 것, 정원 가꾸기, 개 키우기 등으로 함께 몰입하는 경험이 가능할 때, 즉 서로의 관심을 모을 때 쉽게 집중할 수 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 또 집중은 어머니가 육아에 정성을 쏟을 때도 가능하다. 자식과 함께 공부할 때, 같이 쿠키를 만들거나 책을 읽을 때 등에서도 깊이 빠져들 수 있다. 자녀의 관심이 있는 곳이나 자식이 무슨 일을 좋아 하는가 등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할 때에는 집중이 가능하다.미국에서는 독립성을 일찍부터 훈련시킨다. 그러나 너무 일찍 독립을 하면 심리적으로 불안해 방어적으로 변한다. 인생살이가 복잡할수록 가정에 의존하는 시간은 많아야 한다. 가정은 보호막도 되고, 또 적절한 자극을 주는 세밀하고도 따뜻한 관계로 되어 있어야 한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성을 기울여야 가정이라는 틀을 좋게 유지할 수 있다.

2012-12-21

욕망 유한(慾望 有限)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어느 서양 영화에는 한 변호사가 인생에서 대 변화를 겪는 이야기가 나온다.`핸리`라는 변호사는 소송에서 지는 게 뻔한 불리한 사건도 그가 맡으면 뒤집어서 언제나 승리했다. 뛰어난 변호사로서 엄청난 부와 명성을 누리면서, 최상류 사회에 속해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담배를 사러 가게에 갔다가 강도의 총격으로 쓰러졌다. 병원으로 급히 이송돼 목숨은 건졌으나, 기억력이 저하되고 몸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는 마비 증세를 보였다. 그는 가족의 극진한 보살핌과 본인의 피눈물 나는 재활 노력으로 기억이 상당히 많이 회복됐고, 불편하지만 걸을 수 있었다. 그는 아픈 몸과 좌절감 속에서 숱하게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샌 후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점차 변해 갔다. 변호사를 하면서 수없이 많이 양심을 속인 것과 불의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우쳤다. 그래서 그는 거짓변호로 피해당한 자에게 용서를 구했고,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을 맞이했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인간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돈을, 명예를, 출세를 싫어하는 자는 없다. 절대 다수 사람들은 이것을 위해 자기의 일생을 소비한다. 특히 삶의 기준과 내용이 완전히 바뀐 이 시대의 사람들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짜릿한 쾌락과 한계 없는 남녀 간의 사랑을 바라고, 그리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 세상에는 위에 예를 든 변호사와 같이 선하고 밝은 곳을 향하는 자는 거의 없다. 다만 `그곳으로 향하는 것이 좋다`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이 시대 우리는 3가지 간절하나마 변질되어버린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구속 받지 않는 사랑을 원한다. 나는 마음껏 사랑하고 한껏 재미를 보아도 구속받기는 싫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구속당한다고 생각하면 사랑은 깨져 버린다. 요즈음 들리기 시작하는 계약 결혼이 이것이다. 서로 구속을 시키지 않는 결혼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의 제일 큰 특성은 서로를 예속 시키는 것이다. 서로에게 기꺼이 종이 되어 주는 것이다. 종이 되어 봉사를 할 때 진정한 사랑은 싹을 피우게 된다. 계약 결혼은 사랑을 상점에서 팔고 있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수준이다. 둘째는 후회 없는 쾌락을 원한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누리고도 후회하지 않을 쾌락은 없다. 쾌락은 앞도 뒤도 없는 순간적인 것이다. 구속도 의무도 없고 경계를 뛰어 넘으며, 책임도 잊어버린다. 쾌락 뒤에는 언제나`잘못했었다`는 기분이 뒤따른다. 셋째는 고통 없는 죽음을 원한다. 그러나 죽을 때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요양병원에 근무하면서 죽음을 늘 보는 나는 죽음을 `끔찍하다``머리가 절레절레 흔들린다`는 등의 감정을 느낀다. 죽은 자의 눈동자를 후래쉬로 들여다보면 수천수만 길의 깊은 심연을 그 속에서 볼 수 있다. 시간이 그 안에서 녹아버린 것 같다. 죽음이란 길지 않는 삶에서 영원으로 가는 출발점인데, 천근만근 누르는 고통이 없을 수 없다. 고통이란 영원 행 열차를 타기위한 티켓이다. 예외가 없다. 공짜가 없다. 우리는 죽음의 고통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 모두가 같은 조건로 태어나서 살다가 똑 같이 죽음으로 끝난다. 삶의 과정에서 고통, 고난, 슬픔, 좌절을 겪다가 빨대에 빨려들 듯이 존재는 없음으로 변하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종교에서만 이러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아무도 후회 없는 쾌락과 구속받지 않는 사랑은 할 수 없다. 모두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죽어 간다. 이런 인생이지만 영원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쾌락을 줄이고 사랑의 노예 되기를 자원하며, 인생의 고통을 감수하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2012-12-14

숲길

▲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누구나 살면서 행복한 미래를 원하지만 세월은 우리를 끊임없이 옆길로 안내하고 있다. 삶에 부대끼면서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다가 허탈과 좌절, 그리고 공허 속을 헤매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때로는 처음부터 능력이 모자라서 스스로 포기하여 씁쓸하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서럽고 우울한 날이 연속된다.이렇게 울적할 때 숲 속을 걸으면 주변은 우리를 안아 준다. 정화된 공기와 물은 생명을 키우고, 고요 속에서 들리는 새들의 합창은 신비감을 준다. 숲에서 만물은 분해되고, 생명으로 재생된다.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있다`고 했다.숲은 답답함을 느끼는 가슴이나 상처 받은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준다. 걸으면서 우리는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풍경, 들꽃, 길가의 풀과 작은 벌레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말을 걸어본다. 때로는 사물의 소리를 듣는다. 자기를 비우고 자연과 대화한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창조자의 음성을 듣게 된다. 삶에서 멍든 자, 마음이 아픈 자는 호젓한 숲길을 걸어라. 스스로를 가두는 자 섭섭하거나 안타까울 때 실망하거나 우울한 기분이 들면 나가서 하늘을 보고 지칠 만큼 걸어라. 밤 잠 못 이루는 자, 외로운 자, 복잡한 자, 마음이 답답한 사람은 나가서 걸어라. 나를 자연 속으로 던져보라.절대적으로 외로우면 그것은 고독이다. 숲은 위대한 고독의 공급처이다. 고독으로 잠 못 이룰 수 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자지 않아도 좋다. 위대한 자는 외로움에 뛰어들어 고독하게 삶을 살았다. 불면의 밤을 무수히 보낸 사람들이다. 지금 마음이 아픈 것은 별 것 아니다. 어설프게 아프면 힘이 든다. 인생을 진짜 아파해 보자.걷기는 마음을 다스려 준다. 머리속에 흐트러져 있는 잡생각을 텅 비우는 과정이다. 우리 마음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로 가득 찬 쓰레기통과 같다. 고민이나 고뇌는 무겁다. 넘쳐나면 그 무게 때문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게 된다. 삶은 온갖 잡스런 갈등으로 얽혀서 마음을 여러 갈래로 찢어 둔다. 이럴 때는 지칠 정도로 걸으면서 비워 나가자.고통 속의 분노, 질투, 오염 물질 등은 걸으면 자동으로 내 버려진다. 아니 스스로 빠져 나간다. 꽉 찬 내 마음 누그러진다. 수그러든다. 내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나는 극히 작은 한 점이구나. 시멘트 덩이 뿐인 도시란 악마가 만들었고, 호젓한 숲길이 있는 시골은 천사가 만든 곳이구나. 많은 이가 방황하면서 해법을 찾아 길을 나선다. 진리를 찾는 자는 숲속을 걸으면서, 인생의 참된 의미와 숨겨진 우주의 원리를 찾아본다. 갇혀있는 나에게서 나오라. 마음은 점차 정리되면서, 구도자는 폭 좁은 나를 버리고 진정한 나를 찾아 길을 나선다.현명한 사람은 숲길의 사색을 통해 여러 가지 해결법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느릿느릿 걸으면서 진리를 발견하려 했다. 이들을 소요학파라고 부른다. 그들은 진리를 찾아 깨달아서 제자를 가르치곤 했다. 푸쉬킨은 “현재의 슬픔은 다시 그리움으로 된다”고 말했다. “마음은 미래에 살기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괴로워 말라”고 했다.걷는 것은 하늘을 향해 마음여행을 하는 것이다. 내면으로 여행을 하면 저 멀리서 진실된 자기를 발견한다. 나의 참모습을 발견한다. 걸으면서 저절로 신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 저절로 내 삶의 문제를 간절히 기도한다. 저절로 코에서 찬양이 흥얼거리며 나온다. 믿음의 길을 걷는 자를 신앙인이라 한다. 신앙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도(道), 곧 길이란 말이다. 우리는 끝없이 걷는 자이다. 그래서 머무르거나 집착하면 신앙의 삶은 끝난다. 계속 길을 걸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2-12-07

장애인을 품은 문화콘텐츠 산업의 가공할 힘

▲ 김준한 경북도문화컨텐츠진흥원장세기 말과 세기 초를 넘나들며 새 밀레니엄 시대에 새로운 신조어가 생겨남에 그것이 바로 `문화 콘텐츠`라는 용어이다. 이 문화 콘텐츠라는 용어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들지만 모든 문화적 요소들이 창의력, 상상력과 결합해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내는 문화상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무한한 것이기에 문화 콘텐츠 역시 무궁무진한 재화의 시장이라고 말 할 수 있다.이 문화 콘텐츠의 영역은 영화나 드라마, 다큐,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대중음악,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의 영상물과 공연물을 비롯해 PC와 모바일에서의 게임까지도 포용하는 광범위한 문화 신상품이다.각설하고 모 지방의 글쟁이와 민완기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후배 같고 동생 같은 지인이 품은 뜻이 있어 장애인 관련 시설에 늦깎이로 입사해 3년여 생활한 결과를 사석에서 들은 적이 있다.그는 장애인들이 가장 바라는 일은 우리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의식주 문제라고 했다. 그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장애인 일자리 창출이라는 범국가적 문제점이 도출 되지만, 요즘처럼 경기불황과 청년 실업이 도를 넘어서고 있는 시점에 일반인들조차 넘기 힘든 취업이라는 장벽을 어찌 장애인들이 넘어설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틈새시장과 기회라는 단어는 그냥 우연히 생겨난 단어가 절대 아니란 사실을 장애인들은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며 애석해 했다.장애인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일반인들에 비해 신체 기능들은 다소 뒤떨어질지언정 감각이나 아이디어 면에서 월등한 경우가 많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문화 콘텐츠야 말로 장애인들에게 있어 틈새시장이요, 기회인 것이다. 문화 콘텐츠에 대해 전자에서도 밝혔듯이 그 장르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보물창고요, 아무리 퍼내도 줄지 않는 전설 속의 화수분 항아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장애인 본인들은 문화 쪽에 눈을 돌리지 않고있어 애가 탄다고 했다.정책이 많이 바뀌었다. 국가에서 장애인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더 진보된 업그레이드를 위해 나름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 같다.국가차원에서 장애인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장애인을 대상으로 문화·예술, 콘텐츠의 많은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장애인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팁을 잘 활용하라는 이야기를 감히 드리고 싶다. 물론 이미 문화, 예술, 콘텐츠 분야에 독보적인 기린아가 되어있는 장애인들 가운데는 그들의 의식주는 물론이거니와 그들만의 정신적 고양과 해방감, 카타르시스까지 함께 해결하는 분들도 계시긴 하지만, 모든 장애인들의 숨겨진 재능을 밖으로 과감히 끄집어내어 활용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조금만 눈을 돌리면 우리 사회는 장애인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당장 눈앞의 자그마한 이익에만 급급해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며 먼 미래에 대한 투자를 문화 콘덴츠라는 매개체에 걸어 볼만하지 않은가? 빛나는 미래는 바로 여러분들의 것이다. 미래의 문화 콘텐츠라는 밭을 여러분들의 아이디어와 숨겨진 재능으로 경작해 옥토로 만들어 나가는 일도 의미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12-12-05

상상력(想像力)

▲ 정석준 수필가우리는 우리가 체험해 보지 않은 세계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갈릴레오가 “지구는 돈다”는 학설을 발표했다가 머리가 돈 사람 취급을 받기까지 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내세를 믿는가”하고 질문을 던져보면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헛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틀림없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내세를 믿는 사람은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란 공통점이 있다.미국 성공동기(成功動機)연구소에서 봉급이 5만달러 이상 되는 사람과 미만인 사람과의 차이점에 대하여 조사한 일이 있다.학력이나 근무시간 일하는 태도에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단 한 가지 상상력의 문제로 나타났던 것이다. 수입이 많은 사람일수록 풍부한 상상력이 있다고 이 조사보고서는 말하고 있다.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본다.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늘의 직경이 1m 30cm구나”하고 생각한다.망원경으로 보면 멀리 있는 물체도 가까이 보이지만 같은 망원경이라도 반대쪽으로 들여다보면 가까운 것도 멀리 보이는 것이다.우리에게는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설령 존재한다 해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이다.중동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눈 이야기를 해도 실감나게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눈이 희다고 하면 당신의 얼굴처럼 희냐고 묻는다. 눈은 차가운 것이라고 하면 차가운 것이 어떤 것이냐고 되묻는다. 뜨거운 것의 반대라고 하면 알았다는 듯이 얼굴에 물을 바르고 부채질을 하면서 “이 정도의 온도가 되겠군?”하면서 끄덕이는 것이다. 이쯤 되면 말이 통할 리가 없다.60년대 중반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인데, 여름 방학이 끝나고 첫 번째 지리시간 이었다. 선생님이 방학 때 미국을 다녀왔다면서 “글쎄 미국에 갔더니 텔레비전 버턴을 눌러서 화면을 바꾸지 않고도 자리에 앉은 채로 성냥갑 같은 것을 꾹꾹 누르니까 화면이 바뀌어 지더군”이 말을 들은 우리는 선생님이 허풍을 떠는 줄 알고 한바탕 웃고 말았다. 그런데 80년대에 들어와 우리나라에도 컬러텔레비젼이 나왔고, 리모트 콘트롤(리모콘) 이라는 것이 선을 보였다. 조그만 갑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화면이 바뀌고, 소리도 키울 수 있고 줄일 수도 있는 것이다.몇 년 전에는 음성인식 텔레비전이 등장했는데 “켜져라”하면 켜지고 “꺼져라”하면 저절로 꺼지고, 내가 원하는 방송을 부르면 그쪽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한다면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서울에 있는 어느 금은방에 도둑이 들어 금은보석을 쓸어 담다가 현장에 있는 순경에게 붙잡혀 갔다.“내가 그 자리에 있는데도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느냐”“제 눈에는 보석만 보였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여기에서 우리는 일면적인 사고방식의 약점을 보게 된다. “내세가 어디 있어? 있으면 내 앞에 나타나 보라고. 그러면 내가 믿어주지”나라는 존재는 우주적인 눈으로 보면 모래알만도 못한 존재인데 스스로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돈 몇 푼 소매치기 당하고는 속이 쓰려 하지만 자기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2012-12-04

출산 장려 정책과 노인 복지

대부분의 노년들은 퇴직 등으로 소득이 줄어들어 가난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비생산적인 존재로 낙인이 찍혀 있다. 노인 인구의 증가로 생산성의 저하를 우려해 근래에는 정부가 출산 장려 정책에 대해 고심을 하고 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경제 불확실한 여건으로 출산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 거기에다가 초혼 연령이 높아지고, 이혼율의 증가 등도 출산율을 낮추는 큰 요인이 된다.그 결과 2016년부터는 학령인구가 급격히 줄어든다고 한다. 또 정부는 노년 부양비(2000년에 10.1%, 2005년에 12.6%, 2020년에는 21.8%)가 늘어나기 때문에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고 보고있다. 그래서 경제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구들이 필요해서 출산율을 높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인구 2천500만명이던 1961년에 알맞게 낳아서 훌륭하게 잘 키우자, 1966년에는 3자녀 3살 터울로 낳아서 35세에 단산하자, 인구 3천300만명이던 1971년에는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78년에는 하루 앞선 가족계획, 10년 앞선 생활 안정, 인구가 4천만명이던 1982년에는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둘도 많다는 등 인구정책의 구호는 계속 바뀌어 왔다.그러던 것이 근래에는 `많이 낳기`라는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출산 장려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그러나 △노년 부양비 감소를 위한 방안으로 고출산이 유일한 대안인가 △ 지금의 우리나라 인구수는 적은가. 많은가. △우리나라의 적정인구는 얼마인가. △ 인위적, 정책적으로 적정인구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등의 다양한 관점에서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노인 기간은 상실과 쇠퇴로 볼 수 있으나 다른 면으로 볼 때는 점차 성숙하는 기간으로도 볼 수 있다.노인들은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에 퇴직을 당한다. 일이나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은 휴식이 아니다. 파스칼이 “만일 병사나 노동자들이`일이 고되다`고 불평한다면,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 벌을 주어라”고 한 말은 직업이 없는 것을 큰 고통과 끔찍한 형벌로 보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대다수의 일은 최대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거리는 많이 있다.1992년 고령자 고용 촉진법으로 55세 이상의 고령자를 직원의 3%를 뽑도록 했고, 그 후 고령자 인재 은행, 노인 취업 알선 센터, 노인 공동 작업장 등 여러 조치가 있었다. 2008년에는 고용상 연령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 촉진에 관한 법률도 제정했지만, 그 효과는 아직 미미하다.55세의 조기정년제도는 큰 손실이므로 정년 연장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 전체에 파급효과가 너무 커서, 청년 실업을 줄이면서 점차적으로 해야 한다. 노인의 취업에는 정년 후 재고용 및 시간제 고용(시간제 근로, 촉탁직, 계약직 등의 형태), 또는 임금 피크제(이는 기업의 자율적으로 결정할 분야이다.)등이 있다.어떤 보고서에는 저출산이 장차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려서 국가를 존폐 위기로 몰아넣는다고 했다. 그러나 `출산 장려 정책이 유일한 수단인가, 출산할 수 있는 여건이 돼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양적으로 많이 낳기도 중요하지만 아기들을 훌륭히 잘 키우는, 질적인 문제도 중요하다. 출산 장려도 중요하지만, 임금 피크제 등으로 정년 연장과 결합하면 탈출구가 더 크게 보일 수도 있다는 보고도 있다.

2012-11-30

매니페스토, 그 `셋`과 `넷`의 차이

▲ 김정순경주시선거관리위원회 지도홍보주임 요즘 네 살짜리 아이가 한창 숫자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나, 둘, 셋….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아무리 `셋` 다음이 `넷`이라고 알려주어도 항상 `셋`을 세고 난 뒤에는 고민 끝에 `여섯`을 외치고, 그 뒤는 벼락같이 열을 세어 버린다. 그리고는 `엄마, 나 잘했지?`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그래…. 셋 다음에 넷이든 여섯이든 그게 뭐가 중요할까? 니가 좋으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피식 웃음이 나곤 한다. 그래도 언젠가는 `셋` 다음이 `넷`이라는 규칙을 스스로 터득하는 날이 오겠지.오는 12월19일은 제18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는 날이다. 최근 언론에는 대통령 예비후보자들의 모든 행보가 보도되고, 무슨 모임이든 모였다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젯거리는 단연 대통령선거이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선거의 투표율이 다른 지방선거나 국회의원선거보다 평균 10% 이상을 웃도는 것만 보아도 대통령선거에 대한 국민의 지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그 선거에 대한 관심이 후보자가 펼칠 정책에 대한 진정한 관심보다는 후보자 개인사나 측근의 비리 등의 가십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우리는 12월에 18대 대통령을 뽑는다. 비록 18대까지 오는 동안 많은 선택의 역사를 겪어왔지만, 아직도 우리는 아직도 `셋` 다음이 `넷`이라는 아주 당연한 규칙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선거에 대한 일차적 관심이 `하나`라면, 우리나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둘`이고, 출마한 후보자에 대한 관심이 `셋`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후보자에 대한 관심, 그다음 단계는 무엇이어야 할까? 당연히 후보자가 펼칠 정책에 대한 검증이 `넷`이 되어야 한다.그러나 현재 우리가 선거를 대하는 자세는 `셋`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후보자에 대한 관상학적 풀이에 재밌어 하고, 후보자의 과거행적을 뒤지는데 열을 올리며, 또 그런 구태를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그 가십을 즐기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최고 권력인 대통령, 그 권력을 뽑는 대통령선거, 그리고 그 선거의 주인인 국민, 바로 우리는, 후보자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의 단계를 뛰어넘어 그 후보자가 펼칠 정책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하고, 그 정책이 실현되었을 때 우리 국민이 직접적으로 받을 혜택과 우리나라 미래의 모습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보는 이성적 고뇌의 시간인 `넷`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후보자의 공약을 꼼꼼히 따져보고 투표하고, 당선이 된 후에 그 후보자가 그 공약을 어떻게 지키는지 감시하고 평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넷`의 단계이며 `매니페스토`이다. `셋`과 `넷`의 차이가 `매니페스토`라는 다소 낯설고 어려운 이름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이미 우리가 모두 알고 있으며, 공감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네 살짜리 아이의 숫자공부가 `하나`부터 시작해 많은 연습과 시행착오를 거쳐 `열`에 이르듯, 우리도 수많은 선거를 거치면서 겪은 시행착오와 경험으로 `셋`의 단계에 올라왔다. 이제 우리는 그 시행착오를 단단히 밟고 서서 아랫배에 힘을 주고 다 같이 `넷`의 단계로 뛰어올라 그다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그 다음 `다섯`과 `여섯`의 발판이 `넷(매니페스토)`임을…. 그것을 마련해 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12-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