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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3-03-22 00:03 게재일 2013-03-22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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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

2003년 3월에 제주도를 일주하는 200km 한일 울트라 마라톤 대회가 개최됐다. 새벽5시에 출발해 그 다음날 낮 동안까지 달려야 하는 엄청난 거리였다. 59세의 나이에 참여해 나는 27시간 19분만(다음 날 아침 8시 19분)에 골인하여 3위를 한 적이 있다. 아침 11시경에 한 일본인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넘어져서 부어 있었고, 피가 얼굴에 많이 적셔져 있었다. 어둠속에서 헤매다가 넘어져 버린 것이었다.

나는 손전등을 들고 달려서 다치지 않았다. 이 경우에서와 같이, 앞을 볼 수 있고 없고는 그 결과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어두울 때는 빛을 따라 걸어가면 안전하다. 그러나 빛이 나의 뒤에 있다면 그림자에 가려져서 앞을 볼 수 없다.

진리는 인간에게서 빛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진리를 향하여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 많이 산재해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놓치면서 살아간다. 진리는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다. 무관심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진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것을 빛이라 하고, 모르는 것을 어둠이라 한다면, 우리는 바로 옆에 진리가 있어도 알지 못하면서 흑암 속을 살아간다.

보통 때 인간은 빛의 절대성을 깨닫지 못하여 빛과는 무관하게 살아간다. 오히려 어둠이 인간을 유혹하여 그 속에 빠져 버리게 한다. 방향이 틀려있거나, 스스로가 진선미에 눈을 감아 버리기 때문에 어둠을 더 사랑하게 된다. 쉽게 빠져든다. 그 곳에는 쾌락과 탐닉이 있다. 기쁜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지나보면 그곳은 후회라는 덫에 걸리게 된다. 어둠 속에서는 진리 쪽으로 가고 싶어도 방향을 모른다. 빛이 저 멀리서 우리에게 손짓을 하는데도, 빛을 보지 못한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밝은 길을 가도록 그냥 놔두지 않는다. 곳곳에 웅덩이가 있고, 거기서 쾌락의 간지러운 음률이 들려온다. 그 곳을 벗어나는데 제일 큰 방해꾼은 그 길에 놓인 다른 사람의 족적이다. 왜냐하면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사이에서 만들어진 갈등, 시기, 음모, 방훼 등은 길의 선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빛은 인간이 가야하는 진리를 향하는 길이다. 진리를 등지고 살면 빛이 없어서 어두운 길을 걷게 된다. 성경에서는 “등불을 켜서 `말(斗)`의 밑바닥에 두지 않는다”고 한다. 빛은 생리적으로 위에 두게 된다. 밑에 있으면 어두울 뿐만 아니라 화재를 일으킬 수가 있다.

우주에는 블랙홀이라는 것이 있단다. 그것은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빛이 밖으로 나오다가, 큰 장력의 작용으로 인해 안으로 당겨 들어가서 생기는 현상이라 한다. 그래서 그 안은 밝지만, 밖에서 보면 캄캄하게 보인단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오심을 인간들은 몰랐다고 한다. 빛이 도착했는 데도 인간은 그것을 모르고 무지 속에서 방황했다고 적혀 있다. 악마는 빛 속에서도 어둠만 보게 하고, 예수는 어둠에서 빛을 보게 한다.

빛은 인간에게 미세한 것들도 보여준다. 이제는 시공을 나노수준까지도 볼 수 있다. 미생물에서 분자, 원자, 양성자까지도 보여 준다. 또 아침에 일어나서 문틈사이로 들어오는 빛에서 우리는 방안의 작은 먼지들도 볼 수 있다. 시인 정호승은 그 광경을 보고서,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노래했다.

비온 후에 우리는 하늘에서 빛의 찬란한 웃음인 무지게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희망과 동경, 설레임, 그리고 아득한 그리움을 선사한다. 빛은 인간을 선하고 맑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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