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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놓아 버리기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수년전 어느 신문에서는 시골 노부부가 남편은 봇짐을 메고 부인은 머리에 이고 둘이서 시골길을 걷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발표했다. 수상작품이었다. 인생의 고뇌를 등짐으로 또는 머리에 이고 홀홀히 떠나는 부부, 조용하면서도 순진무구한 노부부의 사진은 햇빛으로 꽉 차 있었고, 동시에 하늘의 구름까지 텅 빈 고적한 장면이었다. 인생에서 노인이란 이별을 향한 발걸음의 구간이다. 노부부 둘이서 멀리 나지막한 산으로 뚜벅뚜벅 걷는 것은 영원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비견됐다. 이제까지 그들이 걸어 온 길은 뜨거운 태양과 혹독한 겨울, 건강과 질병, 선과 악 사이를 오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이 노부부가 자기 앞에 놓인 미래로 향한 길을,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양새였다. 인생을 음미하면서 노인으로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느낌이 들었다.50대가 되면 막연하게나마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계절로는 늦여름에 해당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을의 영농과 추수, 그리고 겨울의 갈무리로 들어간다. 늙었다는 것은 겨울에 해당되고 이것은 안식을 의미하며 결실을 저장하는 단계이다. 또 영원이라는 희망의 내년 봄이 대기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가 들풀이나 들꽃과 같은 형태로 소멸의 길을 간다.그는 과거를 사랑한다. 과거의 희로애락이 현재의 그를 만들었다. 하기 싫은 것을 강요받기도 했고, 아픔과 상처도 많았었다. 그때는 아팠었지만 회고해 보면, 뜬 구름마냥 머리속을 아련하게 지나간다. 아름답게 바뀌어서, 그리움으로 마음 깊은 속에 안착돼 있다.점점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이제는 육체의 한계로 행동이 느리고, 생각마저 조급함이 사라졌다. 느림의 철학에서 깊은 맛을 느낀다. 느림은 여유이다. 느림 속에서 영원을 생각하고, 나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런 때야 말로 우리가 신과 대화를 하는 절호의 찬스다. 더 이상 허둥대지를 않는다.이제는 우리를 무겁게 짓눌렀던 것을 내려놓거나,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성공, 자랑, 체력, 영향력, 부귀, 권력, 영화, 명예나 또는 출세 등 젊은 시절에 터질 정도로 가슴을 누르던 것을 풀어버리고, 자유롭게 여유를 붙잡는다. 너그러움 속으로 몰입한다. 인간의 한계점을 알고서, 자기를 그곳에 맡긴다.너무 아는 체 하지 말라. 집착이나 강요는 노년스럽지 않다. `나도 틀릴 수 있다`고 물러 설 줄도 알아야 한다. 나이가 차면 다른 사람에게 비켜 주기도 해야 한다. 어차피 사라질 인생이고 지워질 인생인데…. 슬쩍 물러나기도 하고, 잊혀져 주기도 해야 한다. 너무 많이 기억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노인들에게 `건망증`을 선물로 줬다. 너무 세세하게 따지지 말아라고….삶에서 제일 고통을 주는 것은 외로움이다. 그러나 이제는 젊은 시절보다 더 자주 찾아오는 외로움과도 가까워 져야 한다. 외로움은 신을 찾는 원동력이다. 자기 진실을 찾으려 노력할 때 만나는 정서이다. 외로움과 만나는 것이 서투르면, 마음이 들뜨거나 불안해 지고, 허둥지둥 거려서 삶을 파괴할 수 있다.노년에는 이별의 연습도 중요하다. 노화, 이별, 죽음 등은 그것을 생각하고 고뇌하면 할수록 더 잘 대처할 수 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어머니 뱃속을 이별하기 시작해 생활은 모두가 일종의 이별이었다. 각각의 이별은 우리에게 모두가 어떤 가르침을 준다.노인은 `모두를 내려놓아라`든가 `버려라`고 한다 해서 삶의 전반을 소극적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이때에도 항상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인생을 마무리해야 한다. 종교에 귀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금 이후 끝없는 시간 속에 있을 때에 대해서는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영원을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정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즉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는 것이다.어리석은 노인에게는 늙음이 겨울이라지만 지혜로운 노인에게는 수확의 계절, 갈무리의 계절이고 영원한 봄을 기다리는 성스러운 백발의 시기이다.

2011-09-30

관상수인가, 과실수인가?

윤석안포항중앙교회 부목사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가을이다. 한 낮에는 제법 햇볕이 따갑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곡식과 과일이 결실하는데 너무도 좋은 날씨이기 때문이다. 풍성한 결실은 농부들의 한결같은 마음이다. 성경에도 하나님은 농부로 비유된다. 요한복음 15장에서 하나님은 농부이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 인생은 가지라고 말한다. 왜 하필 포도나무일까? 포도나무는 재목으로도 쓸 수 없다. 꽃으로나, 향기로나 관상용으로나, 약용으로나, 심지어 화목으로도 쓸 수 없는 나무다. 포도나무는 오직 하나, 열매로만 그 가치가 존재할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열매라는 사실이다. 농부의 마음은 똑 같이 많은 결실을 얻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든 인생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상수가 아니라 열매를 얻기 위한 과실수로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이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예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천사 셋이 `하나님은 무슨 재미로 살까?` 궁금해서 하나님께 물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가장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찾아 가져오라고 숙제를 냈다. 각각 사진을 한 장씩 가지고 왔는데, 첫 번째 천사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들판을 바라보며 만족해하는 농부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가져왔다. 두 번째 천사는 10년 만에 얻은 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하는 어떤 여인의 얼굴을 내밀었다. 세 번째 천사는 큰 작품을 완성하고 자신의 그림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화가의 미소를 드렸다.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수고했다고 칭찬하시면서 “사람은 그가 맺은 열매로 산다”고 하시면서, 하나님도 인생들의 열매를 보는 재미로 사신다고 하셨다고 한다.사실 열매를 거두는 일이 쉽지는 않다.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마무리 되었다. 기대를 모았던 선수들이 수고의 열매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사인 볼트는 아쉽게도 100m에서 실격하고 말았다. 장대높이뛰기의 이신바예바도 결국 자신의 기록을 달성하지 못하고 6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우리교회 부활동산에 벌초하러 갔다가 2개월 만에 자란 풀을 보고 놀랐다. 심지도 않고 뿌리지도 않았는데 가라지는 잘도 자란다. 반면에 열매를 기대했던 매실나무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 최근 부산저축은행 사건의 로비스트 박 모씨가 모 교회 집사라고 언론이 혹평을 한다.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도 엄청난 조롱을 당한다.오늘 우리는 어떤 열매를 내고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 사도 바울도 두 종류의 열매를 이야기 한다.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이다. 육체의 열매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이라고 나열하고 있고,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고 말한다. 오늘 나는 어떤 삶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가, 이 가을에 내가 맺고 있는 열매는 어떤 것인가 돌아보게 된다. 나의 열매로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활짝 웃음이 피어나는가. 시인 윤동주는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인생의 가을에 맺을 열매들을 이야기 한다. 사람들에 대한 사랑, 최선을 다함, 상처주지 않는 말과 행동, 좋은 생각과 좋은 말과 좋은 행동…. 좋은 열매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하는 바이다.우리 삶의 자리에는 씁쓸한 삶의 열매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350억을 카이스트에 기증하고 자신은 26평 실버타운으로 들어간 노부부의 참 상큼하고 맛나는 열매 이야기들도 있다. 이 가을에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인생이 되길 조용히 기도한다.

2011-09-26

삶의 목적을 물고기에서 사람으로…

윤석안포항중앙교회 부목사삶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방향이 잘못되면 가면 갈수록 손해이기 때문이다. 애쓰고 힘쓰는데 결과가 없다. 포항~대구 고속도로로 가다가, 서울을 가야 하는데 부산방향으로 가면 어떻게 될까? 가면 갈수록 멀어진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유태인이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가티마지 마을까지는 여기서 얼마나 될까요?” “예, 한 반 시간쯤 가면 됩니다” “미안하지만, 좀 함께 타고 가면 안 될까요?” “예, 타십시오” 그로부터 반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가티마지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유태인은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한 시간쯤 가면 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반 시간 거리를 반 시간 동안 왔는데, 어떻게 아직도 한 시간이나 걸린다 말인가요” “예, 이 마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함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아프리카 선교와 탐험의 대업을 성취한 리빙스턴은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생명이 있는 자는 사명이 있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하버드대 24대 총장(1953~1971)이었던 나단 푸시(Nathan Pusey)는 말하기를, “흔들 수 있는 깃발, 믿을 수 있는 신조,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 고 했다. 이것이 목적 있는 삶이다.마가복음 1장 17절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첫 제자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은 모두 어부였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하루하루 살았다. 아침 동이 틀 때면 호수로 나가 그물을 깁고 손질하여 호수로 나갔다. “오늘은 고기를 많이 잡아야 할 텐데” 어떤 날은 한 가득 채워 돌아오기도 하였지만, 또 어떤 날은 고기들이 다 소풍을 갔는지 한 마리도 못 잡을 때도 있었다. 광풍을 만나 고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 그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다.어쩌면 오늘 우리의 삶도 이들과 비슷하다. 어떻게 하면 “물고기”를 많이 잡을까 하는 생각이다. 달리 말하면,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좋은 자동차, 좋은 집, 좋은 직장, 명예와 권세를 얻을까, 이것이 목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고기”에 목적을 두고 살아간다. 물고기는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배를 채워 주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목적이 달라진다. 목적이 분명해진다. 물고기에 온통 삶을 던져 넣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제 너희들의 삶의 목적을 물고기에서 사람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관심이었다.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목적이 바뀐 사람들이어야 한다. 물질과 명예와 권세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목적도 분명하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 목적을 찾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천국 열쇠도 없이 인생의 마지막 지점을 향해 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찾아가고, 만나고, 회복시키는데 있다.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삶의 목적을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에게 두는 새로운 가치의 삶이되길 기대한다.

2011-07-25

200㎞ 울트라마라톤 (2)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아침을 먹은 학생들이 학교에 간다. 제주 시내에는 시끌벅적하기 시작한다. 도로에 표시한 달리기 코스를 따라서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27시간 19분(휴식 및 식사 시간 포함) 만에 도착을 겨우 해 내었으나 그곳은 썰렁했다. 결승선을 지키는 몇 사람이 앉아서 졸고 있었다. 그래서 “나, 왔어요!”라고 소리 지르니 도착시간을 알려 주면서 다시 들어오라고 했다. 왜냐하면 완주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도착 2분 쯤 후에 한사람이 골인을 하는데, 그를 보니 아까 나를 추월했던 분이었다. 다른 길로 잘못 들어서 나보다 늦어져 버렸다. 나는 진행자에게 “그가 코스를 잘못 들어서 늦어 졌으니 그를 3위로 하고, 나를 4위로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는 여기서 본 대로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내가 늙어 보였는지 “나이가 어떻습니까?”라고 하기에 59세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들은 “아! 할아버지네요!”하면서 놀라는 표정이었다. 골인하는 순간에는 감동의 파도가 온 몸을 적실 것 같을 줄 알았는데, 사실은 평소와 같이 무덤덤하였다. 고통과 잠자고 싶은 맘뿐이었다.본래는 37시간 이내에 들어와야 순위를 인정하는데 약 10시간 빨리 들어왔다. 명단을 보니 일본인도 있었다. 108명이 달리는데 60대는 한국 7명, 일본 1명, 여자는 한국 3명(평균 40세), 일본 9명(평균 50세)이었다. 아마도 어마어마한 고통을 이겨 낸 우리들은, 찔러도 피가 나지 않을 독종의 인간인 것 같았다.일본인 한 명이 골인을 하는데, 온통 얼굴이 상처투성이다. 그는 달리다가 헛짚어서 어두움 속에서 넘어져서 상처를 입었다. 또 한 사람은 기진맥진해 주위의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겨우 골인을 한 후 쓰러져 버렸다. 나는 그것을 보고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완주 후에 몸을 씻으러 목욕탕에 갔다. 수돗물을 받으려고 해도 막무가내로 잠이 쏟아져서 대충 물을 끼얹고는 나와 버렸다. 심히 배가 고프다. 식당으로 갔으나 모두 닫혀 있거나 청소 중이었다. 한 곳에 가서 음식이 되느냐고 물으니 해 주겠다고 했다. 식사 후에 밖에 나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점심때가 아니고, 아침 청소시간인 것을 알지 못했다. 아침과 점심시간을 혼돈해 버렸기 때문이다.비행장에 가서 겨우 비행기에 올라타자 깊은 잠에 빠졌다. 뭔가 월컹거려서 눈을 뜨니, 대구에 도착하였다. 왼쪽 발이 퉁퉁 부어있었다. 6주간의 치료가 요하는 상처를 입었다. 내가 정형외과 의사이니까 치료는 자신이 있다. 비행기를 내리는데, 통증으로 겨우겨우 내렸다. 걸을 때마다 고통은 말 할 수없이 크다. 사지와 온몸이 아프고 쓰리다. 장애인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도 생각해 봤다.그 다음날에는 온 몸이 조여 오는 느낌, 즉 몸살 끼가 들었다. 물 끼가 빠져서 바싹 말라드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사람이 죽어 갈 때도 이러하리라. `천당이나 지옥 등 어디로든, 죽어 갈 때는 이렇게 바싹바싹 몸이 조여서 줄어드는 느낌이 들겠구나` 라는 것을 생각했다.며칠이 지나니까,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느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용기`라는 것이었다. 자기와의 투쟁에서 극기를 한 증명으로 `마음속의 용기`라는 자격증을 내가 받은 것이다.마라톤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나는 마라톤을 하면서 경쟁의 게임을 단념했다. 게임에는 지고, 이기는 편이 생긴다. 다 같이 이길 수 없다. 장기나 바둑도 뜨지 못할 것 같다. 무엇에든지 이긴다는 것은 지는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기는 사람은 기쁘겠지만 지는 사람은 어떤 심정이 될까?200km경기는 평범한 인간인 나에게 과분하다. 이번 도전으로 극기 능력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다. 인생의 목표도 그렇다. 한 단계를 높이려면 그만큼 힘이 더 든다.

2011-06-03

200㎞ 울트라 마라톤(1)

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지난밤에는 오늘 있을 경기 관계로 흥분한 때문인지, 3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제주도 일주 200km 울트라 마라톤(이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려고 제주 공항에 내리는 순간 천둥 벼락을 치는 날씨여서, 다음날 경기가 무사히 치러질지에 대해 걱정을 했으나, 오늘은 경기하기에 상쾌한 날씨다. 음식은 보통 시합 2~3시간 전에 먹으므로 새벽 3시에 일어나 음식을 간단히 먹고,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대소변을 보았다. 5시에 출발선에 서서, 앞으로 달릴 500리 길을 상상해 본다. 과연 이 두 다리로 그 먼 거리를 달릴 수 있을까! 10km쯤 달려갔을 때, 나는 1위로 달리고 있었다. 진행요원이 나에게 “나이도 드셨는데 무리하면서 달리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3위로 달려갔다. 산방사굴이 있는 70km까지는 달리기에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고되다.100km지점인 서귀포에 오후 2시에 도착하여 약 한 시간동안 점심을 사 먹으면서, 밤새도록 달릴 준비를 했다. 배낭 속에 광부들의 해드렌턴과 땀에 젖지 않도록 비닐로 감아 둔 돈, 다칠 때를 위해 준비한 지팡이와 약품, 종이와 볼펜, 추울 때 낄 장갑과 토시, 긴 상하의 한 벌을 배낭에 넣어서 메고, 또다시 남은 100km를 허둥지둥 달려 나갔다. 마치 고행자가 자기 수련을 위해 몸을 던지는 것처럼. 간혹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 길에서는, 정신이 압도되고 질려서, 매우 지루하게 느꼈다.밤 9시께에 한 식당을 찾아서 저녁을 먹으면서 추운 야간에 달릴 준비를 했다. 변소에 가서보니 항문이 밖으로 밀려 나 있다. 손으로 밀어 넣어도 효과가 없다. 그냥 달릴 수밖에….야간이어서 옷에 형광을 붙이고, 헤드랜턴을 켜고, 고구마 장갑을 끼고, 사막을 걸어가는 나그네 같은 심정으로 끝이 없어 보이는 어둠을 헤쳐 간다. 쌍갈래 길에는 땅에 화살표가 그려져서 방향을 잡는데 도움을 준다. 동네의 개들은 낯선 사람이 뛰고 있으니까, 모두가 합창으로 짖어댄다. 파도소리가 철썩이는 것도 몇 시간이나 들으니 이제는 시끄럽고 귀찮아 진다. 잠시 뛰지 않고, 걸으니 땀으로 젖은 옷이 섬뜩하게 차갑다.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이 뛸 수밖에 없다. 밤새도록 고독하게, 절절한 피로 속에서 섬뜩함을 느끼는 이 운동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짓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밤새도록 달려야 하는 이 경기에 출전하려고, 어떤 때는 새벽 3시께에, 때로는 밤 1시께에도 연습을 했다. 연습 때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개들의 공격을 받는 것이었다.만일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는 `이 밤에!, 저 사람 돌았나!` 하거나, 또는 동네 개들이 덤빌 때의 난처함에 항상 신경이 쓰였다. 이 시간에는 도사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과 같았다. 밤 11시45분께에 성산 일출봉 입구에 도달했다. 3/4거리를 달려 왔다. 준비된 간단한 음식을 먹은 후에 또다시 어둠 속을 거의 헤매듯이, 흐느적거리면서 달려 나간다. 고요가 귀를 시끄럽게 한다. 이런 고요는 무섭다. 어쩌면 신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 적막하다. 고독하다. 이것은 조용한 고독이 아니라 펄펄 뛰는 가슴과 땀을 철철 흘리는 고독이다.다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등산용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면서 걷는 시간이 많아진다. 이제는 마구 퍼부어 지는 졸음을 이겨야 한다. 사부작사부작 달린다. 비틀거린다. 170km지점에서는 팔, 다리, 허리, 특히 발목이 많이 아프다. 3명이 나를 지나갔으니 나는 지금 6위를 하는가 보다. 머리가 핑핑 돈다. 새벽 5시경에 길옆에 서 있는 차량을 이용하여 잠시 눈을 붙였다. 그렇게 고단하고 피로했으나 약 15분 쯤 자고는 깨어 일어났다. 졸음이 퍼붓는데도 완주라는 사명감이 잠을 밀어내었는가 보다. 3명을 재치고 앞으로 달려 나간다. 해가 다시 뜨고 사람들이 듬성듬성 보이기 시작한다. 발목이 많이 아프다. 목적지를 3km남겨두고 한 사람이 내 앞으로 달려 나간다. 나는 지금 4위이다.

2011-05-27

노인의 날에

이원락 장성요양병원장근래에 이 사회에는 모든 면에서 과학발달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특히 의약 부문의 발전과 사람들의 영양상태가 좋아짐에 따라 시민의 건강 수준이 향상됨으로써, 노년층의 인구 증가로 노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1900년 유럽은 의료기술로 45세가 평균수명이었으나, 그 당시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은 남자 23세, 여자 24세로 30세도 넘기지 못하였다. 노인을 우리나라와 UN에서는 65세, 노동부에서는 55세, 연금법에서는 60세로 그 기준이 다르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노인성 만성 질환을 갖고 있으며 그중에서는 움직임 제한(mobility), 대소변 이상(micturition), 치매와 같은 정신 질환(mentation) 등을 앓고 있는 분이 많다. 사람들은 노인 시기란 문제가 많고 쇠퇴의 시기이며, 문화적으로 황무지의 인생기간으로 여긴다. 그들은 또 질병, 소외, 빈곤, 역할 상실이라는 속칭, 노인의 4중고(重苦)로 어렵게 사는데도, 젊은이는 노인들을 `할 일도 없고 만날 사람도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서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다. 그러나 노인들은 아직도 인생의 1/4 정도가 남아 있어서, 그들을 보살피기 위해 근래에는 가정과 국가가 공동으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노인들의 유형에는 자기의 인생을 그런대로 잘 살았다는 성숙형, 무거운 짐을 벗고 조용히 지내게 됨을 다행으로 여기는 은둔형, 늙음의 불안을 해소하려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무장형, 이루어 놓은 것이 없음을 원통해 하는 분노 형, 실패의 원인을 자기에게 돌리는 자학형, 모든 일에 흥미가 없는 무관심 형 등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이들 노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나타내려는 표현 욕구, 쓸모 있는 사람으로 타인을 돕고 싶다는 공헌 욕구, 지역사회에 대한 영향력 욕구, 종교 등에서 인생의 본질적 의미를 찾으려는 초월적 욕구 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방관자, 주변인으로 여길 뿐, 역할을 잘 주려 하지 않는다. 영국의 사회 철학자 라스렛은 `60(또는 65세)~건강하게 늙는 시기`를 제3기, 그 후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기를 제4기 인생으로 하고, 특히 3기 인생을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제는 노년기의 연장, 세대 간의 갈등 확대, 가치관의 급격한 변화와 학습사회 출현, 생활수준의 상승 등으로 노인교육이 필요하도록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공동으로 느끼는 것은 고독이다. 특히 요양시설에 있거나 입원한 노인들은 가족과의 동거가 어려워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불안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고독으로 우울증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도 더 섬세하고, 때가 없고, 정직한 경우를 자주 본다. 이런 노인 고독의 특효약이야말로 보살핌이요, 사랑이요, 관심이며, 마음의 교류다. 노인들의 특성에 따라 노인병원은 완치(cure) 보다는 따뜻하게 돌보는(care)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즉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사랑의 핵이자 삶의 기둥인 가정과 같은 분위기 조성을 위해 애쓰고 있다. 노화는 개인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늦출 수 있다. 그것은 ▲교육 등으로 지적인 노력과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등의 몸을 젊게 가짐 ▲생활 습관 교정과 정기 건강 검진 ▲음식 조절 등으로 병에 안 걸리기 ▲다른 사람과 가깝게 지내고 사회에 필요한 역할(예, 봉사)을 수행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 노인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나 죽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며,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고, 아무도 대신할 수가 없다. 그러나 노력하면 죽음은 숙명이 아니라 스스로 준비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준비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잘 죽는 죽음은 좋은 삶을 살게 한다. 근래에는 재가 요양, 방문 간호, 요양시설, 요양병원 등 건강하지 않은 노인을 위한 시설이 많이 있으므로 이것들을 이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노인들은 일제시대와 농경시대로부터 6·25 전쟁, 민주화를 거쳐서 컴퓨터 시대까지 수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젊은이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젊은이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지고 갈 역군이다. 노인들은 젊은이를 따뜻한 이해로 인생 경험을 설명해 주고, 젊은이는 노인들에 대해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위로를 해 줄 필요가 있다. 서로 이해할 때 조국은 더 빛나게 발전할 것이다.

2009-09-22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 김종기 대구결핵요양원 원장 신부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인 풍경을 연상케 하는 겨울이 깊어가는 계절입니다. 이 계절은 가을의 모든 결실을 수확한 연후 다음 한 해를 준비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다음 한 해를 준비하는 시기라는 의미겠지요. 이러한 계절에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성탄절은 세상 사람들이 공자님, 부처님, 마호메트와 더불어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분인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매년 이 성탄절을 기념하면서 세상에 탄생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강생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그리고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매년 현재 진행형으로 탄생을 기념합니다. 다시 말해 이천년 전 태어나셨던 예수님이 아니라 올 해에도 태어나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면서 오늘날 누가 성탄을 제일 기다릴까 생각해봅니다. 아마 상인들이 아닐까 합니다. 12월이 접어들자마자 들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은 레코드 가게에서 제일 먼저, 그리고 라디오 광고에서 제일 먼저 들리는 까닭입니다. 이천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또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신앙은 과거에 모세가 이집트에서 자신의 백성을 구해주었듯이 메시아가 탄생해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그 메시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이제 성탄은 그리스도교 신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이 기다리는 축제가 된 듯합니다. 그러면 현대인들은 무엇을 위해 성탄절을 기다릴까요?사실 무엇인가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탄을 현재진행형으로 기다리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자칫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 있다면 찾아 반성하고 회개하고, 신자다운 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축복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기다리는 하느님의 축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행복, 영원한 행복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는 날까지 살아가는 삶의 연속이기에 늘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다림 또한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연속되는 현재진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나은 내일을 기다리는···. 그리고 이 기다림은 준비한다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보다 나은 내일을 살기위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준비 말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이즈음, 국가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기도 합니다. 성탄을 잘 준비하면서, 새로운 지도자를 잘 준비하면서 보다 나은 내일이 되도록 함께 기다립니다. 준비가 잘 되었다면 우리의 기다림도 그 열매를 잘 맺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새롭게 탄생하시는 예수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2007-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