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 어느 신문에서는 시골 노부부가 남편은 봇짐을 메고 부인은 머리에 이고 둘이서 시골길을 걷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발표했다. 수상작품이었다. 인생의 고뇌를 등짐으로 또는 머리에 이고 홀홀히 떠나는 부부, 조용하면서도 순진무구한 노부부의 사진은 햇빛으로 꽉 차 있었고, 동시에 하늘의 구름까지 텅 빈 고적한 장면이었다.
인생에서 노인이란 이별을 향한 발걸음의 구간이다. 노부부 둘이서 멀리 나지막한 산으로 뚜벅뚜벅 걷는 것은 영원을 향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비견됐다. 이제까지 그들이 걸어 온 길은 뜨거운 태양과 혹독한 겨울, 건강과 질병, 선과 악 사이를 오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이 노부부가 자기 앞에 놓인 미래로 향한 길을,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양새였다. 인생을 음미하면서 노인으로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50대가 되면 막연하게나마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계절로는 늦여름에 해당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을의 영농과 추수, 그리고 겨울의 갈무리로 들어간다. 늙었다는 것은 겨울에 해당되고 이것은 안식을 의미하며 결실을 저장하는 단계이다. 또 영원이라는 희망의 내년 봄이 대기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가 들풀이나 들꽃과 같은 형태로 소멸의 길을 간다.
그는 과거를 사랑한다. 과거의 희로애락이 현재의 그를 만들었다. 하기 싫은 것을 강요받기도 했고, 아픔과 상처도 많았었다. 그때는 아팠었지만 회고해 보면, 뜬 구름마냥 머리속을 아련하게 지나간다. 아름답게 바뀌어서, 그리움으로 마음 깊은 속에 안착돼 있다.
점점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이제는 육체의 한계로 행동이 느리고, 생각마저 조급함이 사라졌다. 느림의 철학에서 깊은 맛을 느낀다. 느림은 여유이다. 느림 속에서 영원을 생각하고, 나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런 때야 말로 우리가 신과 대화를 하는 절호의 찬스다. 더 이상 허둥대지를 않는다.
이제는 우리를 무겁게 짓눌렀던 것을 내려놓거나,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성공, 자랑, 체력, 영향력, 부귀, 권력, 영화, 명예나 또는 출세 등 젊은 시절에 터질 정도로 가슴을 누르던 것을 풀어버리고, 자유롭게 여유를 붙잡는다. 너그러움 속으로 몰입한다. 인간의 한계점을 알고서, 자기를 그곳에 맡긴다.
너무 아는 체 하지 말라. 집착이나 강요는 노년스럽지 않다. `나도 틀릴 수 있다`고 물러 설 줄도 알아야 한다. 나이가 차면 다른 사람에게 비켜 주기도 해야 한다. 어차피 사라질 인생이고 지워질 인생인데…. 슬쩍 물러나기도 하고, 잊혀져 주기도 해야 한다. 너무 많이 기억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노인들에게 `건망증`을 선물로 줬다. 너무 세세하게 따지지 말아라고….
삶에서 제일 고통을 주는 것은 외로움이다. 그러나 이제는 젊은 시절보다 더 자주 찾아오는 외로움과도 가까워 져야 한다. 외로움은 신을 찾는 원동력이다. 자기 진실을 찾으려 노력할 때 만나는 정서이다. 외로움과 만나는 것이 서투르면, 마음이 들뜨거나 불안해 지고, 허둥지둥 거려서 삶을 파괴할 수 있다.
노년에는 이별의 연습도 중요하다. 노화, 이별, 죽음 등은 그것을 생각하고 고뇌하면 할수록 더 잘 대처할 수 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어머니 뱃속을 이별하기 시작해 생활은 모두가 일종의 이별이었다. 각각의 이별은 우리에게 모두가 어떤 가르침을 준다.
노인은 `모두를 내려놓아라`든가 `버려라`고 한다 해서 삶의 전반을 소극적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이때에도 항상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인생을 마무리해야 한다. 종교에 귀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금 이후 끝없는 시간 속에 있을 때에 대해서는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영원을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정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즉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노인에게는 늙음이 겨울이라지만 지혜로운 노인에게는 수확의 계절, 갈무리의 계절이고 영원한 봄을 기다리는 성스러운 백발의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