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행복한 미래를 원하지만 세월은 우리를 끊임없이 옆길로 안내하고 있다. 삶에 부대끼면서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다가 허탈과 좌절, 그리고 공허 속을 헤매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때로는 처음부터 능력이 모자라서 스스로 포기하여 씁쓸하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서럽고 우울한 날이 연속된다.
이렇게 울적할 때 숲 속을 걸으면 주변은 우리를 안아 준다. 정화된 공기와 물은 생명을 키우고, 고요 속에서 들리는 새들의 합창은 신비감을 준다. 숲에서 만물은 분해되고, 생명으로 재생된다.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있다`고 했다.
숲은 답답함을 느끼는 가슴이나 상처 받은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준다. 걸으면서 우리는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풍경, 들꽃, 길가의 풀과 작은 벌레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말을 걸어본다. 때로는 사물의 소리를 듣는다. 자기를 비우고 자연과 대화한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창조자의 음성을 듣게 된다. 삶에서 멍든 자, 마음이 아픈 자는 호젓한 숲길을 걸어라. 스스로를 가두는 자 섭섭하거나 안타까울 때 실망하거나 우울한 기분이 들면 나가서 하늘을 보고 지칠 만큼 걸어라. 밤 잠 못 이루는 자, 외로운 자, 복잡한 자, 마음이 답답한 사람은 나가서 걸어라. 나를 자연 속으로 던져보라.
절대적으로 외로우면 그것은 고독이다. 숲은 위대한 고독의 공급처이다. 고독으로 잠 못 이룰 수 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자지 않아도 좋다. 위대한 자는 외로움에 뛰어들어 고독하게 삶을 살았다. 불면의 밤을 무수히 보낸 사람들이다. 지금 마음이 아픈 것은 별 것 아니다. 어설프게 아프면 힘이 든다. 인생을 진짜 아파해 보자.
걷기는 마음을 다스려 준다. 머리속에 흐트러져 있는 잡생각을 텅 비우는 과정이다. 우리 마음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로 가득 찬 쓰레기통과 같다. 고민이나 고뇌는 무겁다. 넘쳐나면 그 무게 때문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게 된다. 삶은 온갖 잡스런 갈등으로 얽혀서 마음을 여러 갈래로 찢어 둔다. 이럴 때는 지칠 정도로 걸으면서 비워 나가자.
고통 속의 분노, 질투, 오염 물질 등은 걸으면 자동으로 내 버려진다. 아니 스스로 빠져 나간다. 꽉 찬 내 마음 누그러진다. 수그러든다. 내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나는 극히 작은 한 점이구나. 시멘트 덩이 뿐인 도시란 악마가 만들었고, 호젓한 숲길이 있는 시골은 천사가 만든 곳이구나. 많은 이가 방황하면서 해법을 찾아 길을 나선다. 진리를 찾는 자는 숲속을 걸으면서, 인생의 참된 의미와 숨겨진 우주의 원리를 찾아본다. 갇혀있는 나에게서 나오라. 마음은 점차 정리되면서, 구도자는 폭 좁은 나를 버리고 진정한 나를 찾아 길을 나선다.
현명한 사람은 숲길의 사색을 통해 여러 가지 해결법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느릿느릿 걸으면서 진리를 발견하려 했다. 이들을 소요학파라고 부른다. 그들은 진리를 찾아 깨달아서 제자를 가르치곤 했다. 푸쉬킨은 “현재의 슬픔은 다시 그리움으로 된다”고 말했다. “마음은 미래에 살기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괴로워 말라”고 했다.
걷는 것은 하늘을 향해 마음여행을 하는 것이다. 내면으로 여행을 하면 저 멀리서 진실된 자기를 발견한다. 나의 참모습을 발견한다. 걸으면서 저절로 신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 저절로 내 삶의 문제를 간절히 기도한다. 저절로 코에서 찬양이 흥얼거리며 나온다. 믿음의 길을 걷는 자를 신앙인이라 한다. 신앙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도(道), 곧 길이란 말이다. 우리는 끝없이 걷는 자이다. 그래서 머무르거나 집착하면 신앙의 삶은 끝난다. 계속 길을 걸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