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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는 감정

등록일 2013-02-08 00:40 게재일 2013-02-0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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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락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
▲ 이원락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
사람들은 그가 어떤 일에 관여하고 있으면 항상 그 일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뭔가를 기대한다. 그 일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의 크기에 따라서 기대의 폭도 정해진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상일의 대부분은 그가 바라던 만큼 이뤄지지는 않는다. 이때 우리는 실망을 하면서 그 탓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경우가 많다. 일이 잘못되면 기대가 큰 만큼 화를 내는 정도가 커진다. 이때 분노나 증오가 생긴다. 손해를 입은 만큼, 자기도 응징을 하고 싶어진다. 이런 생각은 마음속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깊이 각인돼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때가 되면 살아나려는 자세를 취한다. 마치 높이뛰기를 하는 자의 웅크린 모양과 같다. 독이 뿌리를 내려서 기회만 있으면 공격적으로 변한다. 기대는 실망을 잉태한다. 때로는 앙심이 없는 척, 상처를 숨기기도 한다. 상처로 생긴 분노 증오 등의 마음을 억누르려고 부인해 보거나 억제를 해도, 그 놈은 틈새를 비집고 자꾸만 생각난다. “복수를 하고 싶으나 내가 약해서 안 돼! 나는 바보야”하면서 속으로 삭이다가 그만 우울증에 걸려 버릴 수도 있다. 상대로부터 보상받지 못하면 마음의 텃밭에 심어 놓은, 손상 받은 `상처나무`에 물을 주어서 키우게 되는 격이다.

때로는 어떤 상황을 잘못 추측하여 내린 판결로 자기를 괴롭힐 때도 있다. 어머니가 남편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니까, 그 딸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계기로 크게 다투었다. “아빠가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울지 말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서 열심히 살아라`고 한 당부를 지키기 위해서 였다”는 어머니의 설명에 딸이 용서를 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좋은 감정을 가진 자의 수는 적다. 오히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월등히 많을 수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적게 주고 적게 받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남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불완전하기에 나의 잘못이 가능하고, 때로는 나의 잘못이 더 클 수도 있다. 상처는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어날 수 있다. 나의 미성숙으로 인해 스스로가 자초한 상처도 많다.

분노의 마음은 억누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분노를 풀기 위해 때로는 화가 나는 대로 자기를 내버려 두어 버린다. 욕설이나 미친 듯한 행동도 가능하다. 화를 모두 표현하면 속이 좀 시원해진다. 역사에서 똑똑하기로 유명한 다윗왕도 화가 났을 때 “떠돌이가 되라! 병에 걸려라! 지팡이 짚는 인간이 되라!”고 욕설을 한 일이 성경에 적혀 있다. 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증오심 등의 감정에서 벗어나야겠군…`하는 생각이 움트기 시작한다.

용서의 감정은 상대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을 때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다. 보상을 기대하는 대신 상대에게 `~하(되)기를 희망`하여라.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할 때, 안타까움, 슬퍼함 등으로 나타난다. 복수심 보다는 위로의 마음이 가능하다. 상처를 주지 않는다. 비로소 상대방을 위한 기도가 가능하다. 특히 자식과의 관계에서는 희망으로 접근해라. 상대에 대한 기대는 잘못되었을 때 상처를 주고받는다. 해 준만큼 받고 싶어진다. “알아서 해 주겠지”라는 마음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기대는 눈물의 씨앗이 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다.

용서는 신과 화해하는 방법이다. 애기는 어머니 품속에서 새록새록 잠이 든다. 어머니는“딴 곳에서 두들겨 맞고, 왜 나에게 화풀이를 해 달라느냐!”고 하지 않는다. 사건은 해결이 되고, 평화가 그들 마음속에 스며든다. 이런 것을 반복하면 세상은 점점 평화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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