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그들만의 독특한 교리와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그 내용은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절대적인 도그마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들만의 독백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 더 많은 이익을 주고, 희망을 가지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가 함께 모여서 진지한 토론을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들끼리만 사랑, 자비, 어짐 등을 다짐을 할 뿐이다. 종교는 인류애와 동시에 배타성을 가지는 이율배반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제까지 종교 간의 관계는 전쟁, 적대, 무관심 등이 주류를 이뤄왔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는 서로 무관해 보이던 각 종교 간에 서로 접촉을 시작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사회가 급속히 도시화하기 때문에 믿는 종교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대중 전달매체를 통해 다른 종교의 신조, 의식, 활동 등을 자주 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잦은 접촉은 때로는 상대를 이해하고 수용하기도 하지만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밝은 면보다도 어둡고 심지어는 추하게 보이는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상대 종교의 성전에 들어가서 방해를 한다든지, 페인트로 색칠을 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런 독백적 행동은 종교 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입으로는 선을 행하라고 외치면서 행동은 악을 행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는 어느 한 종교가 사회의 복잡하고 험난한 문제를 모두 처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자기만 옳고, 참되다는 주장은 예리해 질대로 예리해 진 현대인의 머리를 더 혼미 시킨다. 종교란 시류를 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지구촌 시대에는 교리의 근본을 재해석도 해볼 필요가 있다.
자기중심주의의 사고에서 상대를 인정하는 대화의 시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늘에 있는 신은 인간이 종교를 이유로 대치하는 것을 좋아 하실까, 아니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과 서로 사랑 나누기를 원하실까? `지옥 간다`는 등의 처벌은 죽고 난 후의 문제이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사랑하라`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사랑과 자비 등을 주장하는 종교 정신은 적대관계보다는 대화와 협력관계를 가지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 경쟁적인 또는 위협적인 관계로 보지 말아야 한다. 서로가 보완하는 관계로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 나와는 다른 생활과 생각 형태 속으로, 서로가 들어가 이해해 보아야 한다. 새로운 안목으로 자신의 생활이나 문화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서로에게 이런 유익하고도 생산적인 관계를 가지면, 윤리적 차원을 더 높여서 좀 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함께 일하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제일 빠른 길이 된다.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일에도 종교 간의 협력은 최고의 효력을 가질 것이다.
동산같이 아름다운 지구에서 인간은 바다를 막고 산을 깔아 뭉게는 것을 다반사로 한다. 이러한 자연파괴에서 종교인의 자연에 대한 책임은 막중하다. 도시화, 산업화, 상업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에서도, 함께 노력하면 최고의 효력이 나타날 것이다.
각 종교에서 처음으로 입문할 때는 신앙의 깊이가 얕다. 그 후 정진할수록 그 깊이는 점점 깊어진다. 이는 자기중심에서 시작해 다른 사람을 점점 폭넓게 받아드림을 의미한다. 또 초기에는 무조건 믿음을 강조하지만, 세월과 함께 깨침과 회개의 자세는 더 넓은 마음을 갖게 한다.
종교가 충돌하는 것은 얕은 수준의 믿음으로서, 일종의 종교적 발달 장애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지만 비교적 조용하다. 이것은 서로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일 수 있다. 무관심도 분쟁만큼 좋은 것이 아니다. 상호간의 대화는 종교계뿐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정신계와 사상계 전체를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