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엽까지도 우리나라는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저항이 많았던 것 같다. 전에는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서 읽지 못하던 중에 최근에 번역된 책으로 통독을 해 봤다. 박지원은 1780년(44세)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수행원으로서 중국에서 본 것을 기술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천주교에 대한 글을 독후감 형식으로 써 보겠다.
`그가 북경에서 들은 바로는, 야소(예수)는 로마 제국에서 태어나서 서해 밖을 다니면서, 교리를 전했다고 한다. 야소는 하나님을 성심껏 공경하고 팔방에 교리를 세웠으나, 30세에 처형을 당했다. 그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야소회를 설립하고, 그의 신을 천주(天主)라고 했다.
천주는 어릴 때부터 4가지 ◆ 생념을 끊을 것. ◆ 벼슬을 생각 하지말 것. ◆ 사방으로 선교하되 다시 고국으로 오지 말 것. ◆ 헛된 이름을 꿈꾸지 말 것 등을 서약했다.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온 이래 그들의 교리는 일을 밝힘을 종지로 삼고, 몸 닦기를 요체로 삼는다. 충효와 자애로 공부를 삼고, 개과천선으로 입문을 삼는다. 그리고 죽고 사는 것과 같은 일을 예비해 걱정 없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과장스럽고 허황돼 중국인은 믿는 이가 없다.
학설은 부귀영화와 거짓을 버리고 성실을 귀하게 여긴다. 하나님을 밝게 섬기는 것을 으뜸으로 생각한다.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는 것으로 입문하며 큰일을 예비해 걱정을 없애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다. 그들은 학문의 근본 이치를 찾아냈다 하나, 고답적으로 뜻을 세우고 이론이 교묘해 하늘을 빙자해 사람을 속이는 죄를 범하고 있다. 자신이 저절로 의리에 배반해 윤리를 해치며 구렁이로 빠져 들고 있다.
윤회설을 믿으면서도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면서 불교를 비방하는데, 마치 원수 같았다. 불교의 학문에서 형체는 환상이고, 모든 백성에게는 사물과 법칙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야소교는 이(理)를 기(氣)라고도 했으니, 두 종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으냐?
불교에는 비유가 많아서 돌아갈 곳이 없다가 겨우 깨달아도 결국 환(幻)만이 남는 결점이 있다. 야소교는 처음부터 불교의 찌꺼기만을 얻어 가지고 중국에 왔다가, 중국 책을 보고서야 배불 정책을 알았다. 그들은 `중국을 본받아 배불정책을 가지고, 상제(上帝), 또는 주제(主帝)라 하니, 중국의 유학에 아부한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음악에서 풍금의 묘사가 재미있다. `귀로 소리를 밝게 들었고, 눈으로 그 솜씨를 살폈지만, 오묘한 부분을 글로 서술할 수가 없다. 서까래 통 같은 것이 총총히 서 있는데, 한 쪽 가에는 수 없이 구멍을 뚫었다.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후 천주당이 헐렸으므로 풍금은 남아 있지 못했다`라고 했다.
선교사는 달력도 잘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건축에 대해서는 `나보다 먼저 건물을 본 사람도 있으나, 매우 황홀하고, 헤아리기 어렵다. 천주당의 높이는 일곱 길이 되고, 무려 수 백 칸인데, 쇠로 부어 만들거나 흙으로 구워 만들었다. 지붕 머리가 종처럼 생겨 여염(시민의 주택)위로 우뚝 솟아 보이는 것이 바로 천주당이다. 천주라는 것은 반고씨니 천황씨니 하는 말과 같다`고 했다.
그림에 대해서는 `천장에 그려진 그림은 헤아릴 수 없고, 언어로 형용을 못 하겠다. 그려진 사람들이 내가 숨긴 것을 알아차릴까봐 싫었다. 귀, 눈, 코, 입 등의 짜임새와 터럭, 수염 살결 등은 희미하게 갈랐다.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어우러져서 저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냈다. 여자가 6세쯤 되는 아기를 무릎에 앉혔는데, 병든 얼굴로 보자, 고개를 돌려 버린다.
사람의 머리와 몸뚱이에 날개가 돋아난 자도 있다. 기괴망측해 구분을 못하겠다. 천장에는 어린 애가 5색 구름이 있는 허공에서 노는데 팔목이나 종아리가 포동포동하여 따뜻할 것 같다. 벽의 그림은 한 여름의 대낮 풍경, 또는 비가 갓 갠 바다 같다. 산골에 날이 새는 듯, 구름이 계속 피어오르고, 햇살에 비쳐 무지개가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