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0년 전에 강원도 산악지역에서 보이스카웃 잼버리 대회가 있었다. 주위가 절벽인 고지대에 있는 평지에서 언론의 관심 속에서 프로그램이 진행됐고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그러나 환경운동가들은 동물들의 이동 통로를 막고 있었으므로 항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야간에 서울에서 영남지역으로 오는 기차를 타 보면,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다. 불빛이 화려하다. 이런 형태로 생태계가 변해버린 곳에 과연 짐승들이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조국 분단이라는 지극히 불행한 일로 생겨난 DMZ에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동물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다. 통일이 된 후 공업지대에서 만들어진 생산품들의 가치와 자연 보존 어느 것이 미래를 위해 더 효율적일까?
인간은 머리가 좋다. 그래서 인망으로 고기를 싹쓸이하고 가을에 산기슭에 그물을 놓아서 뱀을 깡그리 잡는 것, 겨울에는 개울에 있는 개구리 몽땅 잡기 등은 인간이 동물 중에는 최고로 명석한 머리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두뇌회전은 선한 것일까?
베트남전쟁에서 귀국해 부산에서 포항으로 귀대할 때, 조국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날리듯이`아름답게 강물이 흘렀다. 저녁 석양아래 먼 산 밑의 마을에서 연기가 오르는 광경은 `한 폭의 동양화`였다. 그러나 지금은 강물로 버려지는 폐수는 물고기 아가미의 기능을 거의 멈추게 할 정도이다.
기독교에서는 창세기에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여, 잘 다스리라`고 했다. 지구 전체의 오염을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는 그것은 큰 축복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깔여 넘어져있는 것을 보면 내버려 두지 말고 일으켜 세워라고 했다. 또 염소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도 안 된다고 하며 `소나 양이나 염소는 태어난 후 7일 동안은 제 어미의 품에 둬야 한다. 소나 양을 그 새끼와 함께 같은 날 죽이지 말라. 하나님은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도 사랑하신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스리지 말고 잘 돌봐야 한다.
근래에는 TV에서도 동물농장이라는 좋은 프로가 있다. 육식 동물은 먹고 살기 위해 포악하게 동물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육식 동물도 악기(惡氣)는 없다. 살기 위한 것일 뿐, 많이 잡아서 저장해 두지 않는다. 개 등 가축들은 아주 순하다. 새끼나 주인을 잃고서 멍한 자세로 하세월 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속이 아려 온다.
뉴스 시간에는 간혹 소가 도축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차에서 뛰어 내려 거리를 헤매다가 잡히는 것을 가끔 본다. 살고 싶은 욕망은 우리와 진배없을 것이다. 낳은 새끼를 핥아 주거나 다른 짐승에게 새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 등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짐승은 인간의 향락을 위해 도마위에서 자신의 근육을 바친다. 혹자는 맛있게 고기를 먹으면서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잘 속일 수 있겠는가?`같은 음흉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간혹 TV에서는 스님과 동물들의 공생을 보기도 한다. 새들이 스님의 어깨에 내려와 앉아서 조잘거린다. 멀리 있다가도 스님이 부르면 다가온다. 한 번은 참새 알을 먹으려고 둥지 속으로 뱀이 들어가는 장면이 있었다. 새는 계속 겁에 질려 재잘거리는 중에 스님은 그 뱀을 잡아서 땅으로 내려 멀리 보냈다. 우리 같으면 잡은 뱀을 죽여 버리겠지만 스님은 그것도 생명이라고 살려 보내는 것을 보고서 불교를 믿고 있지 않는 나도 크게 감동을 받았다. 입에 버글버글 거품을 물면서 전도하는 것보다도 크게 포교하는 효력이 있을 것 같았다. 말없이 행동으로 전도를 하는 것이다.
미래 언젠가는 환경문제가 생명체 공통의 절대적 과제가 될 것이다. 생명이라는 점에서 볼 때, 동물의 목숨도 곧 인간의 전체 생명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동시에 함께 죽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생명은 인간과 연결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