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동을 떠나기로 결정된 그날 저녁, 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평소 알고 지냈던 지인과의 송별저녁을 끝내고 막 골목길을 나서는 순간 낯익은 휠체어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의자에 앉은 아버지와 뒤에서 밀면서 따라오는 아들, 이들 부자는 오늘도 하루종일 길안으로, 반변으로 갑갑한 심신을 달래려 산천을 호흡하다가 날이 저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산도 없이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채 비를 맞으며 어두운 골목을 향해 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조금전 먹었던 저녁식사가 염치없어 보이고 내 자신이 부끄러워 보였다.
목격의 주인공인 아들은 언젠가 교통사고 때 입은 다리부상과 후유 장애로 인한 갑갑증으로 방안에 있을 수 없는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서 여명이 밝아오면 집을 나서서 백여리의 길을 걷다가 저녁무렵에 돌아오곤 했는 데, 이 같은 일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5년간이나 계속되고 있었다니….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도처에서 우리의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무너지고, 상하의 질서가 뒤바뀌고, 가정이 붕괴되고 학교가 무너져가는 요즘의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미 사회적 활동력을 상실하고 지체가 부자유한 아버지를 위해 하루종일 야외나들이하며 섬기기를 5년여, 당시 이런 휠체어의 부자를 보지 못한 안동인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 아들의 자연발생적 효심과 희생의 뿌리는 무엇이며, 그러한 아들이 있게 한 아버지의 권위와 자애는 또한 무엇일까? 온 종일 그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며 어떤 대화를 나눌까?
나는 요즘 세태에서 좀처럼 찾기 어려운 사례여서 매우 궁금했다. 그것은 아마도 오랜 세월 이 땅의 기층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배움과 행동을 일체화시키면서, 그것이 자연스레 그들의 정신적 가치로서 생활속에 그대로 녹았던 영향이 아닐까?
무능하고 병약한 아버지를 위해 기나긴`휠체어의 여행`을 쉬지 않았던 그 아들의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어서 마치 깊은 산속에서 산삼을 찾은 것처럼 귀하고도 값지며 생경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이 그래도 안동땅에 남아있다는 것이 `안동`에 대한 고마움으로 다가감을 어찌 막으랴.
내가 진실로 고마워하는 것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봉화지역의 `선돌(立石)`에 있는 권씨 종택의 부자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미 고인이 돼 버린 권헌조씨(당시 70세 중반)의 부친이 생존했을 때, 당시 아흔살의 아버지를 일흔살의 아들이 주야로 섬기는 모습은 마치 설화같다고나 할까.
이미 퇴락한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된 나머지, 혹 그가 깊은 침중에 들면 아버지의 부르는 소리를 놓칠까봐 아버지의 침소 옆방에서 겉옷을 벗지 않고, 담요도 깔지않고 등짝을 맨바닥에 붙인 채 선잠을 잤다고 한다.
어디 이 뿐이랴. 측간(厠間)지 배웅해 용변을 마칠 때까지 측간옆에서 대기했다가 부축한다든가, 바깥나들이 할 땐 복명하기를 빠지지않고, 소용되는 돈은 꼭꼭 타서 쓰고, 저녁이면 사랑방에서 아버지앞에 꿇어앉아 시전(詩傳)을 낭랑하게 읽는다든가…. 마치 꿈속의 얘기를 듣는 듯하는 일화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한때 유학이 이 땅의 모든 정치적, 정신적 가치질서를 지배할 때 그것이 지나칠 정도로 교수화되면서 민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배척되기도 했지만 그 내면의 인본적 가치와 실천학문의 풍조는 숱한 세월과 영욕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이것이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유독 안동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동지역 기층문화의 `불가사의`이고 `저력`이며 `그릇`인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안동을 잊을 수 없고, 현직을 은퇴하자마자 전원에 정착해서 새로운 인생 2막을 일구고 있지만 지금도 소쩍새 우는 밤이면 내 마음은 아련한 추억을 찾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안동땅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