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장성하면 한 가족을 이루고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란 직장 등에서 세상살이를 꾸려나가기가 힘들어서 육체와 정신의 양면에 멍이든 사람이다. 아버지도 세월이 흐르면 노인이 된다. 그들을 우리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숱한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어도 그들 대부분은 모은 재산도 없고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공원 같은 곳에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많다. 나의 할아버지가 거기에 계신다고 생각해 보자.
아버지는 직장에서 일할 때에는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처자식을 위해 마음을 꾹 눌려야 한다. 모든 할아버지도 한 세대 더 일찍, 같은 경험을 해 왔다. 본시 어머니날은 정해져 있었지만 아버지날은 없었다. 조부모의 날은 있으면 큰일 나는 모양이다. 어머니날은 그 후에 어버이 날로 정한 것을 보면 아버지를 조금 배려한 듯하다.
노인요양병원을 방문해 보면 입원한 늙으신 어른들이 표정을 잃고 시선을 허공으로 향하면서 써늘하게 침대에 누워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평생 고생으로 늙어 버리신 아버지의 자화상이다. 지금 이 시대는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린 것 같다. 존재이유를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노인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미미하다는 것은 학교에서 선생님의 역할이 거의 없다는 말과 같다.
신은 우리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단순하고도 일목요연하게 표현 한다. 그러나 공경의 방법은 말하지 않았다. 이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무조건 공경하라는 말이다. 이런 절대적인 명령에 우리는 응답을 해야 한다. `너는 훌륭하거나, 인자하고 자상한, 또는 돈 많은 부모님만을 공경하라`고 하지 않았다.
부모님을 부정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본 자만이 알 수 있다. 이 질문의 답은 `나는 누구의 것인가?`를 말할 수 있으면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어디서 왔는가?`를 알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까지를 알게 된다.
늙으신 조부모들 중에는 치매에 걸린 자도 있고 중풍을 앓고 있을 수도 있으며 괴딴 성격, 나에게 잘 해 주지 않았던 어른 등 별의별 모양의 노인들이 계신다. 물론 이들도 공경하라고 했다. 가난한 부모, 나에게 해 준 것 없는, 성격이 괴팍한 부모 등을 섬기라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답은 `아니다`이다. 이런 부모를 공경하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 등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사랑`을 알게 된다.
아버지와 풀어야 할 일이 있거든 할아버지가 되시기 전에 용서를 빌고 화해하라. 돌아가셨다면, 천국의 아버지에게 용서와 사죄의 글을 써서 화해하라. 또 부모가 살아 계시면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겨라. 지금 부모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노년 모습일 수 있다. 내가 부모님을 대하는 방법과 같은 식으로, 미래에 나도 똑같은 대접을 자식으로 부터 받을 것이다.
약 20년 전 6·25 전쟁으로 다리를 절게 되어 삶을 지겨워하는 노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해서 비몽사몽의 절망적인 상태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여러 번 길에서 쓰러져 잠이 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중년인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집으로 부축하여 씻긴 후 방안으로 모셨다.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었다. 사람들은 그 아들을 효성과 공경심이 있는 `생명이 있는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했다.
21세기에도 효성이란 단어는 살아 있다. 그 아들 역시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접근 방법은 부모를 대왕(大王)처럼 대하는 것이었다. 그도 나중에 그의 아들에게서 대왕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다만 그가 다음 세대의 왕인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