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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등록일 2013-07-26 00:47 게재일 2013-07-2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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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락 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필가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엄청나게 큰 결단을 했을 때,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 내는 순간,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기고 살아났을 때에는 결단이나 성공으로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별이나 상실이 안타깝고 슬퍼서 상대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길 때, 사태가 자꾸만 꼬이면서 진행될 때, 격한 흥분이나 분노가 밀어 닥칠 때, 애타게 호소하고 기도할 때 등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이는 정서나 경험을 표현하는데 꼭 필요한 방법이다.

슬픔은 누구나 갖고 있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슬프면 마음이 아프고 가라앉아서, 사소한 일에도 눈물이 난다. 슬픔에서 회복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별 같은 큰 상실의 회복에는 2년이 걸린단다.

슬픔은 파도같이 밀려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울기, 털어놓기, 기도하기를 반복하다보면 슬픔은 줄어들게 된다. 슬픔은 또 대화를 하면 마음의 부담이 적어지면서 훨씬 편해진다.

인생에는 자연스러운 이별이나 상실이 있는가 하면 엄청나게 크게 또 부자연스럽게 갑자기 찾아오는 상실도 있다. 상실은 어떤 것이나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때로는 깊은 슬픔으로 나약함에 빠지고 때로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제방 둑이 무너져서 거리로 넘쳐흐르는 수해를 당할 때와 같은 무력감을 갖기도 한다.

슬픔은 그 대상이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때 느끼는 마음이다. 슬픔은 사랑하던 사람, 천진무구함, 마음의 평화, 경제적 안정, 신체적 건강 등 과거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과 이별을 의미한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모두는 동정하고 공감을 보낸다.

슬픔이 그에게 도움을 줄 때도 있다. 그것은 단순한`극복하기`를 넘어서`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결심을 하도록 마음을 열어 줄 때`이다. 그는 슬퍼하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상실로 인한 슬픔은 보통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지만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도 필요 이상의 괴로움이나 상실감을 안기게 된다. 슬퍼하면서 외로움을 느낄 때 그는 무력해 진다. 슬플 때는 우울하거나 당황, 불안, 좌절을 느낄 수도 있다. 그는 스스로에게 상실감을 갖도록 한 상대방을 비난할 수 있다. 상대가 하지 않았던 일, 했어야 했다고 여기는 일 등을 들먹이며 비난하기도 한다.

특히 퀴블러 로스는 대체로 죽음을 선고받은 자의 슬픈 마음은 부정, 분노, 타협, 좌절, 우울, 수용(받아드리기)으로 단계별 이동과정을 거쳐서 상실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러나 심한 슬픔의 덫에 걸려버리면 슬픔의 마지막 과정인 수용단계를 거부한다고 했다.

우리가 크나큰 슬픔을 이겨나가려면 영혼에 울면서 호소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면서 자신과의 대면을 각오해야 한다. 홀로 고독 속에서 슬픈 마음으로 있는 시간은 좋은 성찰의 기회가 된다. 그러나 이때 외로움을 느껴서 불안하다면 자신이 세상에서 동떨어진 존재로 여겨지는 때이다. 이때는 친한 친구나 가족 또는 상담자와 같이 있는 것이 좋다. 외로움의 반대말은 단순히`옆에 있음`이 아니라 마음을 주고받는 `친밀함`이기 때문이다.

상실을 있는 그대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슬픔에서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때 뻥 뚫린 가슴의 빈자리는 치유되어 메워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죽음을 경험해야 부활이 가능한 종교적 원리와 동일하다.

상실의 슬픔과 대면하다 보면 자기의 인간관계를 평가해 볼 기회가 나타난다. 그 경험을 잘 이겨 낸다면 그는 인간관계를 더 성숙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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