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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원은 영원의 표식이다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바다의 수평선은 끝없이 둥글다. 하늘도 사방으로 무한히 뻗어서 영원과 둥글게 맞닿아 있고 해와 달도 원형이다. 신(神)의 형상도 각이 없어서 끝도 시작도 없이 둥근 형태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둥글다는 것은 완전성을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 마음속에 녹아들어 있다.생명을 잉태해 배출시키는 열매는 하나님을 닮아서 둥글다. 과일 열매도 둥글고 어머니 뱃속의 태아는 둥근 자궁 속에서 생명의 시초를 키운다. 탱자나무도 가시는 사납게 보이지만, 씨앗은 촉감 좋은 탱자로 동그랗게 열매를 맺는다.봄여름 동안 결실의 열매를 맺기 위해 비바람을 이겨내는 인고의 세월을 보낸 결실로 식물은 예쁜 열매를 맺는다. 노랗게 익은 열매는 여러 계절을 거치는 동안 뿌리에서 빨아올린 수분과 영양물질 중에서 최고품을 농축해, 식물이 만든 최선의 작품이다. 그 속에는 한 해 동안 우주의 열기가 차곡차곡 쌓여 녹아든 기록이 켜켜이 들어 있다. 앵두, 능금, 감, 배 등은 하나같이 보기 좋다. 동그란 것은 마음을 차분히 안착시키는, 부드러운 모양이다. 한 입을 씹으면 단 맛이 상큼 혀끝을 녹인다.그러나 세상의 물건들에서는 원형을 거의 볼 수 없고 대부분은 직선이나 여러 형태의 굽은 선으로 만들어져서 각이 져 있다(天圓地方). 이런 선(線)들이 모이면 형태를 이루고 거기에 생명이 붙으면 움직이는 생물체가 된다. 생명체는 모두 여러 각도로 굽혀진 부위로 먹이를 취하고 서로는 각을 세워서 서로 찌르듯이 일생을 살아간다.모가 난 것을 사람들은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인생살이에서 각진 마음을 겉으로는 둥근 척 하며 숨기거나 호도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상대와 구분하기 위하여 불쑥 대립각을 세운다. 삶이란 살아가기 위해 모난 곳을 무기로 하여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과정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면서 가시로 만들어진 옷으로 무장해 서로 찌르려고 애를 쓴다.원만한 성격이면 좋겠지만 누구나 성장한 환경 소산으로 인해 각이 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를 편견 또는 성격이라 한다. 이런 것으로 우리는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자기를 스스로 좀먹게 하는 일을 많이 할 때도 있다. 둥글고 향기 나는 과일을 맛보면서도 우리는 가시가 들어 있는 말을 던지면서 오늘도 모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우리는 길가에 버려질 열매마냥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할 뿐, 별 것 아니면서도 뿌리처럼 파고들거나, 가지처럼 하늘로 나를 과시하려 하면서 조화롭지 못하게 살아온 것을 늦게나마 반성한다. 어떻게 하면 향기 나는 열매로 재생할 수 있을까? 너무 늦은 후회인가?그러나 때로는 모서리를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가 지(負)는 쪽을 택해 상대를 감동시키기도 한다. 예수는 사랑하는 나머지 지는 쪽을 과감하게 선택했고, 이태석 신부도 모서리 사용을 거부한 현대인이다. 스스로 밥이 돼 상대에게 먹혀주는 이들의 행동은 바보일까?내 생각으로 이들은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가 넘쳐나서 어리석은 길로 자원해 기꺼이 들어간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감격해 동그란 눈물방울이 맺힌다.`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오세영 시 `열매`의 일부)가지는 뾰족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려 하고 뿌리는 물을 찾아 땅을 깊이 어둠을 헤집지만 스스로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왜 둥글고 부드러울까? 인간의 마음도 노력하면 우주처럼 온전히 둥글어 질 수는 없을까? 지금이라도 지나온 세월이 향기롭게 익어서 둥글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14-07-24

행복한 세상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어느 날 운동을 한 후 땀도 씻을 겸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 3형제와 같이 목욕을 하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 하나하나씩 아버지가 때를 밀어 줬다. 때를 미는 동안 남아 있는 아이 둘은 장난을 치면서 즐겁게 목욕을 했다. 또 어느 날에는 목욕탕에서 50대 아들이 80대 아버지를 목욕시켜 드리는 것을 봤다. 아버지가 때를 밀기에는 힘이 부쳐서 아들이 씻어 드리는 것 같았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뭔가를 웃으면서 대화하는 장면은 보기에 좋았다.나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가정에서는 젊거나 힘이 있는 자가 약한 가족을 돕는 것이 사랑임을 알았다. 이런 사랑 속에서 행복이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남편이 아무리 유능해도 집에서는 어린 자식과 아내보다 더 약한 사람이 되고 힘없이 늙어버린 아버지에게 우람한 아들이 정성껏 돕는 것을 사랑으로 생각했다.행복에 대한 교육은 최소 단위인 가정에서 이뤄진다. 태어나자말자 사람은 사랑이 물씬 녹아 있는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자란다. 유아기와 학생 시절을 거치면서 성공과 좌절을 맞보기도 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을 극복해 나가면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제일 행복할 지를 배운다. 가정교육이 미래의 행복에 제일 기초가 된다.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이런 고난은 나누고 쪼갤수록 더 많은 행복의 향기를 내뿜는다. 괴로움을 이겨야 행복이 샘솟는 것은 흙탕물에서 우아하게 연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다. 진정한 섬김과 배려란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임금이 신하를, 주인이 종을,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의 행동을 말하는 것 같다.우리 사회에서는 생명과 자유는 어느 정도 보장돼 있다. 그러나 행복할 권리는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훌륭한 저택 등과 같은 외적 요소보다는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정서 같은 내적 요소, 출세나 부자 등 세상적인 요소보다는 정신적, 영적인 요소가 더 크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외적, 세상적 요소는 이기심을 발동시켜서 만사를 자기 뜻대로 하면서 남을 섬기는 자세 대신에 모든 것을 그의 노예로 만들어 군림하려고 한다. 한 번 노예 신분이 되면 그는 일생 끝까지 거의 일생 동안 그렇게 살아야 한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만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있다. 서양의 흑인영가도 모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기 원해 빨리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는 처절한 노래들이다.이러한 처지에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타인의 소유물이 될 뿐이다. 살아가는 과정은 평탄하지 않다.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얽힘과 고난, 고뇌가 질펀하게 깔려 있다. 진흙탕 같은 사회를 구두를 더럽히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동양에는 삼강오륜이 있다. 그것에는 임금과 아버지와 남편이 신하와 아들과 아내를 배려하기 보다는 섬김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절대 군주제, 가부장제, 남존여비 사상이 태동했다. 오륜도 모두 인간사회를 상하관계로 규정하는 원칙이어서 신분의 차이를 명시해 준다. 과거 선조들이 살던 시대의 기준이었다.이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먼저 돌보는 배려와 섬김의 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도 이런 것이 준비가 덜된 상태다. 과거의 후유증으로 남아 있는 노폐물이 사회에 널리 깔려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이나 자기의 텃세를 지키려는 정신이 활개치고 있어서, 다가올 사회에서 생활의 기준이 될 `배려와 섬김`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행복하려면 강자가 겸손을 습관화해야 한다. 즉 상대의 인격을 존중해 줘야 한다. 이럴 때 비로소 행복은 그의 가슴에 둥지를 틀 것이다.

2014-07-17

역시 방학은 없다!

▲ 이주형 시인·산자연학교 교사장마라고는 하지만 비다운 비를 아직 보지 못했다. 장마가 실종됐다는 기사처럼 마른 장마에 대지는 타들어가고 있다. 뉴스는 비 소식보단 폭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열대야 소식도 들린다. 강력한 엘니뇨가 발생할 거라는 보도와 함께 초강력 태풍을 걱정한 이들이 많다. 분명 지구는 우리에게 어떤 큰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만, 바쁜 지구인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메시지의 끝은 무엇일지? 뜨거운 지구만큼 중·고등학교도 뜨겁다. 아니 뜨거웠다.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학기말 시험이 지난 주 전국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있었다. 독서실은 초만원이었으며, 독서실 주변 편의점들도 기말고사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이 나라엔 아이들이 시험을 치면 어른들도 같이 시험을 치는 이상한 시스템이 있다. 그 이상한 시스템 덕분에 시험 기간만 되면 독서실 앞 도로는 차들로 넘친다. 정말 난리도 이런 난리는 없다 싶다.불야성을 이루던 독서실이 진정을 찾으면서 독서실 주변 편의점들도, 독서실 앞 도로도 모두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뜨겁던 시험 열기가 벼락치기 시험만큼 금세 식어버렸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대한민국의 냄비 근성을 학교 시험을 통해 배우는지도 모르겠다. 벼락치기 시험 앞에 “은근과 끈기, 인내”는 모두 틀린 말이 돼 버렸다. 이 나라 학교 시험이야 말로 국가와 국민성 개조에 일등 공신이라 하겠다.혹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기억하시는지. 답답한 교육 현실 앞에 필자는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찾아 읽어 보았다. 그러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라는 부분에서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교육계 화두들이 모두 이 안에 있다고. 또 `인성교육`, `특기적성교육`, `수준별 교육`, `융합교육`, `창의성 교육` 등 최근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교육정책들보다 국민교육헌장의 내용이 훨씬 더 구체적이라고. 그리고 지금의 교육정책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이 추상적인 용어들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예로 `특기적성교육`보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라는 문구가 분명 더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쉽다. 어려운 말장난에 갇혀 뜻을 잃어버리고 있지나 않는지 교육정책 입안자들은 충분히 고민해야 할 것이다.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필자는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보았다.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교육인지?”, “교육 목표는 무엇인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과 같은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학생들의 전인적 성장을 위해”, 아니면 “학생들의 잠재적 소질 계발 위해”, 이것도 아니면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꿈을 찾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등 하기 좋은 말로 얼버무릴 수도 있지만, 마안하게도 정말 잘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한 건 이 나라에선 교육 이론과 교육 현실이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교육 이론은 이론대로, 교육 현실은 현실대로 정말 따로 국밥도 이런 따로 국밥은 없다.이제 곧 방학이다. 하지만 교육이 실종된 이 나라에서는 방학도 실종 된지 오래다. 오히려 우리 학생들은 방학이 더 바쁘다. `선행학습 금지법`은 학교에는 왜 적용이 안 되는지 정말 궁금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처럼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 넘치면 아쉬움을 모르고, 아쉬움이 없으면 간절함이 없고, 간절함이 없으면 진실함은 당연히 없다. 우리 학생들에게 지금 공부가 넘치고 있다. 그러니 공부에 대한 진실함은 당연히 없다. 제발 이번 방학만큼은 보충수업도 하지 말고, 더더군다나 학원도 보내지 말고 아이들 스스로 공부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 학생들이 공부를 스스로 찾아서 하지 않을까. 마른 장마만큼 교육계에도 가뭄이 심하다.

2014-07-15

성공하고 싶다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아옹다옹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생존 경쟁`이라고 한다. 산다는 것은 곧 경쟁이라는 것이다. 그 경쟁에서 이기려고 또는 지지 않으려고 우리는 공부를 한다든지 운동을 한다든지 또는 돈을 많이 벌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출세를 하거나 부자가 되면 그를 인생살이에서 성공한 자로 부른다. 성공한 사람은 의기양양하다. 노력의 결과가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고 어깨를 쫙 편다. 신문에 이름이 크게 실릴 수도 있다.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서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청한다. 그 부모들도 즐겁다. “나의 자식이 이렇게 크게 이루다니!”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자식을 잘 둬서 좋겠다고 한다.노력한다고 해도,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한다. 성공한다는 것은 많은 실패자가 있어야 한다. 그들은 실패를 딛고 그 위에서 이뤄 낸 것이다. 라디오를 만든 사람은 그 사람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연구해 전기를 발견하고 그 후에 또 많은 사람이 노력해 전기를 소리로 바꿔 낸다. 후에 그런 논문이 쌓이고 쌓인 것을 읽고서 그가 발명해 낸 것이다. 많은 사람의 연구와 노력에 힘입어서 자기가 발견한 것이다.한 사람이 성공했다면 그는 주위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곳에는 친구, 선생님, 보조원, 가족, 주위의 사람들 등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어떤 이는 시간적으로 또 어떤 이는 경제적으로 혹은 연구 자체에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때로는 실패해 침울할 때는 격려의 술잔을 나누면서 많이 도와줬기 때문에 성공을 한 것이다.꼭히 세상적인 성공만이 성공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안동에는 `원이 엄마`라는 분이 계셨다. 그 분은 시골의 한 사람의 아낙네로 평범하게 살았었다. 남편이 일찍 죽어서 시부모를 모시는 등 가사를 책임져야 했다. 애절한 글을 남편의 주검 옆에 묻어뒀는데 얼마 전에 이장하려다가 발견해 현 시대의 사람들에게 애절한 부부애를 남겼다.그 분의 편지는 영구 보관하게 됐고 원이 엄마는 후대의 국민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는, 부부 사랑의 표상이 됐다. 이제 그 분은 유명 인사가 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선 시대에 청나라에 사신의 부관으로 따라갔던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내 놓았다. 그 당시에는 그 저술에 대해 왕에게 반성문을 제출했지만 지금은 유명 인사로 역사에서 학생들은 그의 이름을 외운다.성공한 사람이란 그 시대에는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링컨 대통령도 그 시대에는 여러 번 선거에서 낙선했다. 겨우 대통령이 되자 남북전쟁이 끝날 때쯤 권총으로 사살 당했다. 그러나 역사가 흐른 후에는 그의 이름이 지구를 덮을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됐다.“나는 성공한 사람이 돼야지!”라는 생각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당대에 성공해 빛을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수는 처절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수십억명의 인구들이 그를 추앙한다. 왕관을 버리고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린 석가모니는 지금도 동서양의 철학을 쥐락펴락해 오고 있다. 그럼 석가모니는 실패한 분인가?부자가 되는 것은 성공한 것일까? 어떤 면으로 보면 성공자 일 수 있다. 그러나 지구위의 재물을 공평하게 갖지 않고 자기가 많이 가진 것으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성공한 사람의 계열에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태석 신부 같은 분은 소유를 멀리 하고 사랑을 나눴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일 것이다.세상의 재물은 공평한 분배가 이상적이다. 살면서 재물을 더 많이 모았다는 것은 성공으로 볼 수 없다. 부자가 되는 것은 삶에 편리한 도구를 더 갖고 있을 뿐이다. 성공의 기준은 정신세계에 있다.

2014-07-10

비목

국군 초병은 그의 소지품을 조사해 보았다. 그의 인적사항을 발견하여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다. 헐레벌떡 도착해 보니 아들은“엄마!”라는 인사도 없이 꺼적대기에 덮혀서 차갑게 식어 있었다. 30대 중반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체 앞에서 고꾸라져 혼절하였다. 시계는 멈춘 듯하고 햇빛이 쨍쨍 내려 쪼이는 속에서도 컴컴하여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광야에서 외톨이가 된 듯이 세상은 아들과 자신을 내팽개 쳐 버린 것 같았다. 한참을 지난 후에 어머니는 겨우 일어나 아들의 시신을 말끔히 닦아서 깨끗한 무명포에 쌌다. 근처에 흙을 파고 아들을 묻었다. 괭이나 호미가 없어서 손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돌만 있는 곳이라서 그 무덤은 돌무덤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자기의 혼을 아들과 함께 합장해 묻고 난 후 허둥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통으로 가득한 암갈색 마음은 기약 없이 온 하늘을 방황하고 있었다.그 근처 양지바른 곳에는 또 하나의 무덤이 있다. 그 무덤의 주인공은 진해 근처에서 수년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만을 모시고 살던 학생이었다. 군대에 입대하기 전 날, 담을 사이에 두고 애인과 만나 눈물을 훔치면서 이별을 했다. 그 당시에는 공개적으로 남녀가 만날 수가 없었다. 어떤 남녀가 웃으면서 자주 만나면 사람들은 연애한다고 수군대던 때였으니까.전방 초소 배치를 받고서 근무하던 중에 그는 공산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게 됐다. 애인의 낭낭한 음성은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그 아들이 자기의 전부이다. 어머니가 아들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고 그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애인의 아름다움을 뒤에 남겨두고 엄마의 따뜻함도 멀리한 채 그는 어머니의 눈물을 베개 삼아 땅에 묻혔다. 영원을 향해 기러기마냥 훨훨 날아가 버렸다. 그 무덤은 이북에서 넘어오다 사살된 강원도 총각의 돌무덤 근처에 있다.동료들은 무덤 앞에 십자가 표식의 나무를 꽂아 두었다. 귀가 찢어질 정도로 고요가 시끄럽다. 이것을 알고서, 시인은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이라는 `비목`가사를 만들었다고 한다.그것은 곧 노래가 돼 우리의 마음을 애절함, 안타까움, 허무함, 방향 잃음, 끝없는 미로, 절벽 끝으로 몰아넣는다. 밀어 넣는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자원해 들어가려 한다.일반 사회 상식으로는 진해에서 자란 청년의 죽음은 애통해하고, 강원도의 총각에 대해서는 범법자가 됨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사라져 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두 어머니는 모두 눈물을 흘린다. 한 사람은 남한의 남편을, 또 한 사람은 북한 남자의 자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임신 방법도 전혀 다른 형태로 이뤄졌다. 그런데도 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똑같이 무한대이다.두 아버지는 모두 우리 동포이다. 그런데 국군은 공산군의 아들을, 공산군은 국군 측의 아들을 총살한 것이다. 사상적으로 이들은 다른 부류의 집단에 소속돼 있지만 모자지간이라는 기본적인 인간관계만은 갈라뜨리지 못한다.두 어머니는 공산주의는 뭣이고 민주주의는 뭣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냥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도 두 가정의 아들은 반대편 사상의 군인으로부터 총살을 당했다. 사상이란 게 도대체 뭔지…. 이렇게도 철저히 인간을 편가를 수 있는가?사상이란 역사의 흐름 중에서 이 시대의 특별한 산물인가? 사상은 생명을 초월하는가? 천년 후에도 이런 사상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을까? 사랑과 사상은 반대되는 개념인가?

2014-07-03

비목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수년전 친구부부들과 강원도로 단체여행을 떠났던 것은 매우 뜻깊은 여행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방 근처의 여행은 우리 일행에게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조국분단을 확인했고 현실에서는 아직도 이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나는 안내자의 설명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현실을 잠시 잊어버리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돌무더기가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그림을 그리듯이 소상하게 설명을 해 줬다. 6·25 사변 당시 강원도 시골의 어느 마을에는 홀어머니와 나이가 18세 되는 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연탄은 물론 전기마저 없는 골짜기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고 호롱불로 밤을 겨우 넘기는 정도로 가난으로 찌든 집안이었다. 간혹 들리는 바람 소리나 까마귀 소리가 유일하게 고막을 울릴 뿐이었다.이북의 공산 군대는 어김없이 첩첩산중에 있는 이 집을 찾아와서 숙식을 강요했다. 그 집에 머무는 동안 공산군인 한 사람은 이 순진한 처녀의 몸을 수차례나 짓밟았다. 그 후 남쪽으로 진격하던 그들은 수개월 후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공산군인은 퇴각 도중에 이 집에 이틀간 머물렀다.그는 예쁜 처녀의 배가 볼록한 것을 보았다. 그녀가 귀엽고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그와 그 처녀 사이에는 영원이란 것이 있는 듯이 느껴졌다. 딱 꼬집어서 지적하기에는 명확치 않는 그리움이랄까? 뭔가가 보일 듯 했다.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꿈을 꾸듯이 시간이 흘러갔다. 처녀와의 미래를 이곳에 묶어 두면 좋으련만…. 잡히면 총살감이라서 아리아리한 마음을 가지고 흐느끼면서 이북으로 도망치듯 가 버렸다.어머니가 조력해 산통 끝에 옥동자를 낳았다. 그러나 애기는 아버지가 있으면서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운명이다. 영원한 이별이란 게 이렇게 간단하게 만들어 지는가!시간은 조금도 느리게도 빠르게도 흐르지 않는다. 매정할 정도로 차갑고도 냉정하게 초침은 정확히 돌아간다.세월이 흘러 아들은 16세가 됐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녀는 자초지종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줬다. 물론 헤어진 이후에도 과거에 공산군이 적어 준 아버지의 주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북 측과 연락이 가능하면 간첩으로 총살 감이었다.아버지의 한 이야기를 들어 본 그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매우 보고 싶었다. 늘 북쪽으로 아버지 얼굴을 멍하니 그려 보면서 그리움으로 가슴을 적셨다. 18세 때 어느 날 단단한 결심을 했다. 아버지를 만나보러 남모르게 휴전선을 넘어가려고 작전을 짰다.요리조리 국군을 피해가면서 그는 이북으로 넘어갔다. 남모르게 아버지를 만나서 엉엉 울면서 품에 안겼다. 아버지 역시 언제나 남한의 애기가 얼마나 컸을까를 가슴에 묻어 두고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얼마나 그립던 아버지였던가! 밤새도록 뜬눈으로 이야기를 한 후 영원한 이별일지도 모르는 작별을 해야 했다. 그에게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모르고 오직 그리움만 가슴을 저미는 것이었다. 그에게 사상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38선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요리조리 숨을 죽이면서 남모르게 숨어서 내려오다가 그만 국군에게 들켜버렸다. `탕탕!` 하면서 불을 뿜는 총격에 그는 그 자리에서 영혼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아버지를 겨우 만났을 뿐 야속하게도 그리운 어머니와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됐다. 눈동자에만 어머니의 잔영이 깊이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2014-06-26

희망, 행복의 관문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사람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행복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기웃거려보지만 노력에 비해 소득은 너무나 적다. 사람들은 주로 행복은 돈, 명예, 권력, 학연과 지연 등의 인맥, 호화 주택, 고급 자동차 등에 있다고 생각한다. 뭣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행복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출세를 하거나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닌듯하다. 생활수준이 중산층 이상이 되면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진 것에 대한 부러움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한다. 돈이 더 이상 희망을 갖게 해 주는 좋은 도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은 개인이 속한 사회적 관계에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직장 생활이 어렵거나 기업이나 조직의 문화에서 모순점이 나타나면 희망이 사라지고 행복감이 줄어든다.세상에는 자기 이익만 밝히는 개인이나 자기 패거리의 이익을 좇는 집단 등 이기주의가 횡행한다. 또 이 사회에는 좌절이나 슬픔, 어두움, 실패, 불행, 고통 등 절망적이고도 부정적인 생각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적은 양이지만 기쁨, 밝음, 성공, 극복 등 긍정적인 해답을 나에게 주는 희망도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살아갈 용기를 갖게 된다.희망이 있어야 비로소 행복은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만사에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그는 그만 스스로를 왜소하게 생각하게 된다. 또 추운 날 고독하게 혼자 방에 누워 있으면 갑자기 초라하게 생각 될 때도 있다. 이럴 때는 그에게서 희망이 멀리 달아나 버려서 불행 속에 휩싸여 있다고 여기게 된다.그런데도 우리는 왜 살아가느냐? 그 이유는 그래도 나에게는 `내일`이라는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주위에 있는 사람도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간다. 이렇게 매일을 성실히 사는 사람이 여럿이면 훈훈한 열기가 주위를 따뜻이 감싸줄 것이다.희망을 가지면 즐거움으로 가슴이 가득 하고 적극적으로 일하며 피곤하여 쉴 때에는 깊은 휴식을 가질 수 있다. 희망이 있다면 우리 마음속에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의욕이 넘쳐나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역사를 움직였던 훌륭한 인물들은 모두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지구 위를 살기 좋게 만들어 줬다.그들은 간혹 실패했더라도 부끄러워서 주눅이 들지 않았다. 대범한 용기로 자신의 약점이나 콤플렉스를 이겨내면서 미래를 향한 희망의 불씨를 살리려고 노력했다.희망이 있는 자는 그늘진 곳, 암담한 곳, 슬퍼하는 곳, 절망으로 몸서리치는 곳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다. 그는 우울한 마음을 노력하여 날려버리고 따뜻하고도 밝은 내일을 향하여 생명이 있는 곳,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전진한다.행복한 사람은 웃음 띤 얼굴로 겸손하게 주위와 기쁨을 나누며 희망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이렇게 볼 때 행복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생정류장에서 꼭히 `희망 버스`를 탑승해야만 하는가 보다.희망을 가지려면 갈등, 탓, 분노, 좌절, 미움 등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기쁨, 흥, 신명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책에도 훌륭한 사람들의 인생을 담아두고 있기 때문에 읽어보면 모두 나의 앞날에 희망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행복은 열린 마음으로 희망을 받아들여야 한다. 희망은 가슴속에 아무리 많이 품어도 다 채울 수 없다.이런 비워진 마음을 가지고 현재를 긍정하면서 준비할 때 비로소 미래에는 희망의 터전위에서 행복의 궁전을 지을 수 있다.

2014-06-19

노인의 역할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노(老)자는 원래 상대를 존경할 때 사용하는 존칭글자이다. 백전노장은 百戰將으로, 노련은 鍊, 노숙은 熟으로 표시한다. 이렇게 노자(字)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끔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생활태도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질병에 시달리는 등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죽음을 향해 점점 다가간다. 과거부터 현명한 분들은 사람들에게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권했다. 특히 노인들이 병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과 어떻게 늙어 가는 것이 좋은 방법인지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젊은이에게 `잘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해 줄 수도 있다.이런 노인들은 젊은이에게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해 준다. 인생을 고뇌해 보면서 죽음을 생각해 보는 사람은 누구나 지금 이 순간의 중요함을 알게 되면서 열심히 살아가려는 의욕을 갖게 될 것이다.또 누구든지 이렇게 산다면 삶 속에서 언젠가 마주치게 되는 `늙어 감`, `죽어 감`에 대해 더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이런 사람은 죽음을 맞이할 때 전력을 다해 살아온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남기면서 웃으며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노화에 완강히 저항만 하지 말고 변화를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노년을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가려면 자신의 노화를 마음으로 인정하여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 한 가지 방법으로는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노인의 역할`중에서 자기 능력에 맞는 한 부문을 맡아서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을 수행하면 육체는 늙어가더라도 마음만은 젊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런 삶은 결심만 한다면 누구든지 어느 나이에서나 살아갈 수 있다. 활동하여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에는 다소간 욕심을 부려도 다른 사람들이 눈감아 준다. 그래서 나는 특히 노인들에게는 매 순간의 삶을 긍정하면서 자신과 사회를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가기를 권한다. 이런 기회가 있다면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냥 단순히 밥만 먹고 숨만 쉬면서 살아가는 인생으로는 끝내고 싶지 않아야 한다.노인들은 누구나 젊은이에게 `열심히 살아라`고 충고한다. 열심히 살면 부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들에게 부자 되기에 몰두하라는 것이 아니다. 노인이 원하는 방법으로 살면 오히려 돈과는 점차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다. 이 말은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열심히 노력해야 노인이 된 후에 후회할 일이 줄어든다는 말이다.노화현상은 생리적으로 불가피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노령에 따라오는 여러 변화는 모두 언제나 누구에게나 뒤따라오는 현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가 지금 노화의 시간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심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살아온 세월을 후회하거나 아쉬워해 보아도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긍정적으로 수긍하여 소화하는 자세가 제일 좋은 생활법이다.살면서 노화에 대한 준비를 해 왔다면 그 만큼 긍정의 양은 많아진다. 그런 만큼 필요이상으로 부정적인 느낌에 매몰되지 않게 된다.준비하기에는 벌써 늙어버려서 후회할 때라고 생각되어도 그래도 아직 늦지 않다. 지금이라도 이루지 못한 과거의 것에 미련을 갖기 보다는 인생을 긍정하면서 앞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2014-06-12

노인의 역할 (상)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60대 이후에는 인생을 둘러싼 여러 가지 양상이 젊었을 때보다 다르게 나타난다. 이때부터는 외적 조건 보다는 본인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내적인 것이 점점 크게 문제로 대두된다. 그래서 노년으로 들어감에 따라 그의 삶은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생활하기 보다는 자기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이제까지의 삶은 누구나 살아가듯 많은 사회적인 제약과 의무와 기존의 생활방법의 틀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노후가 되면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늙는다는 것은 삶이 성숙해 지는 것이고 그래서 옳고 그름을 자연스럽게 주위 사람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가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노인들은 대부분 이제까지의 관습 등에 습관화 되어 있어서 마음가짐까지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위축되어 있다. 그러면 노인들이 흔히 갖는 융통성의 결여나 완고함이 점점 심해져서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고독으로 쓸쓸한 노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근래의 젊은이들은 대체로 물질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젊은이는 많은 정보를 소화해 내야 하므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하는 힘이 과거보다 약한 편이다. 이때 젊은 사람들에게 바른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노인들 밖에 없다. 경륜이 많은 노인들은 칭찬도 아끼지 말아야 하지만 나쁜 것은 나쁘다고 부드럽게 지적하여 설득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이 말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는 악역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치기 위해 젊은이들과 지혜도 나누고 지금 당장 고칠 수 없으면 적어도 나쁜 것이 밖으로 새나가서 악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노령에서 하기 싫어도 의당 해야 할 역할이자 필요한 윤리적 행위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 싫은 내색을 하겠지만 노인들은 언제든지 자원하여 역행을 시행할 마음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예를 들어 건강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노인들은 전후(戰後)에 가난하여 영양가가 적고 거친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현재는 비교적 좋은 음식을 먹어서 비만이 많으므로 건강을 위해 식욕을 자제하기를 권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심장병 등 생활 습관 병을 고치는데 도움이 된다. 포식하면 젊은이는 건강과 장수에 적신호가 켜지기 때문이다.또 한 가지는 물질을 함부로 사용해 버리기 보다는 아껴 쓰고 나눠 써서 절약함으로써 환경을 깨끗하게 지키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편리하고 풍요로운 것만이 꼭히 좋은 것은 아니다. 풍요는 생활에는 많은 편익을 주지만 절약하지 않으면 오염으로 지구의 미래를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즉 기업가들은 최선을 다하여 편리와 풍요를 위해서 자기들이 생산한 물품들을 대량으로 소비하도록 선전하고 있지만 소비가 많다면 그것은 자연을 더 빨리 파괴시켜 버리게 된다. 또 정권 유지를 위해 정치가는 `풍요`를 외치면서 시민의 환심 사기에 바쁘다. 이럴 때 노인은 반대로 정치 분야나 사회를 향해 인간의 욕심이 이끄는 대로 행하기보다 자제하기를 호소해야 한다.노인의 할 일은 다른 분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역사회에서 향토의 좋은 문화나 습관을 찾아서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고 지킬 것은 잘 지켜 나가도록 독려해야 한다. 또 좋은 내용이 있다면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 그 지역의 특성을 살리는 것은 곧 세계화를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014-06-05

인생의 동행자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의 고향은 학교에서 16㎞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방학 때는 골짝의 고향 집에 가서 한 달 이상 지냈다. 버스도 다니지 않아서 걸어 다녔다. 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라디오도 없이 지샜다. 겨울에는 문풍지가 추위에 떨던 긴긴 밤을, 여름 낮에는 매미소리에, 밤엔 모기떼에 시달리면서 친구 없이 혼자 어두운 방에 있으면 학교의 친구들이 매우 그리웠다. 산골의 집 몇 채만 있는 곳에서는 꿈에도 친구들이 종종 보였다.그 후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생 시절에도 부모보다는 친구들이 주로 대화의 상대였다. 이때의 친구들은 앞에서 나를 이끌어 주거나 뒤에서 밀어주지 않고 옆에서 같이 헤쳐 나가는 동반자, 한 몸같이 되는 것이었다.그 후 성인이 되어서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부부가 동행자로 되었다. 친구 간에는 말 못할 내용도 있었지만 부부간에는 모든 것을 서로가 알게 됐다. 드물게는 나의 생각과 맞아떨어졌지만 대부분은 부부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드러났다. 이런 과정에서 생각을 맞추다보니 벌써 노인으로 진입하게 되었다.인간은 계속 성장해 간다. 키 크는 것은 멈추지만 정신적인 성장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 같다. 복잡한 사회생활은 나를 지치게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기회가 됐다. 이럴 때는 친구와 앉아서 대화를 하면 서로에게 위로가 됐다. 친구에게서 격려를 받거나 방향 설정에 자문을 받으면서 나이는 점차 늘어나게 됐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늘어나는 정보량을 잘 소화시켜 나갔다.과거에 사농공상 등 직업의 다양성이 적을 때에는 친구나 다른 상대자와는 이해하기 쉬웠고 또 친구들의 도움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지식이 세분돼 넘쳐나고 살아가는 방법에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적당하고 확실한 위로나 격려, 추진할 방향 등을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단순한 위로 정도만 가능하다. 거대한 세계가 지구촌이 된 오늘날은 인생을 동행할 정도의 친구는 만들어지기가 어려운 것 같다.우리 인생이란 매일 누군가와 함께 자연 속을 동행하여 걸어가는 길로 비유할 수 있다. 그들은 가면서 사랑과 기쁨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으로 다투기도 한다. 때로는 홀로 거닐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나 혼자의 길은 외로워서 누군가와 같이 가기를 원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제일 긴 시간을 동행하는 자는 어떻든 부부사이이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은 늙어지고 육체의 힘이 줄어든다. 점차 접하는 사람 수도 적어지고 동행자 대신 지팡이에 의지하여 인생을 헤쳐 나가야 한다. 이제는 나의 모든 것을 맡길 곳은 하나님 밖에 없다. 그가 동행자가 된다. 장수할수록 종교의 역할은 커지게 된다.살면서는 계속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세상은 연속적으로 우리를 속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행복에 대한 바람을 접지 않는다. 마음은 미래의 희망을 갈구한다. 그래서 현재는 우울하고 서러운 날이 계속되지만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리움의 대상으로 변화됨으로 푸쉬킨은 `슬퍼하지 말라`고 우리를 위로했다.행복함에 대해 매일 속임을 당하는 현실에서도 동행자는 위로를 주고 슬플 때는 등을 토닥여 준다. 어느 교수는 사별이 아닌데도 동행자가 없는 인생을 `미완의 삶`이라고 했다. 비록 그가 세속적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완성하지 못한 인생이라고 했다.동행자와는 서로 공감 일치를 위해 애를 쓴다고 해도 대부분의 세상사는 이뤄내기가 어렵다. 오히려 성취하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다. 이뤄내지 못해도 좋다. 노력한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삶은 노력하는 과정이기에!

2014-05-29

사랑의 크기·높이·길이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인간은 시간, 공간, 주위의 환경이라는 3차원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주어진 시간 안에서 주위를 밝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사랑이란 것이다. 그래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기회를 만나게 되는데, 이 `때`를 사랑으로 잘 보내면 그는 좋은 삶을 산 것이 된다. 사랑에는 아가페 사랑과 애정이란 것이 있다. 애정은 남녀 간의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꽃미남 청년이 비싸 보이고 좋은 옷을 입었으나 인물이 못난 여성과 선을 보면, 사람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재벌인 줄 알아요. 또 어느 늘씬한 미녀가 촌스런 청년과 선을 보면, 아마도 그 남자는 최고의 직업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결혼상담소 여직원의 말이다.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남녀끼리 만나면 사람들은 그제야 “저들 둘은 사랑하는가봐…”라고 한단다. 여건으로 보아 조건이 맞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하려는 사람은 좀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고르고 싶어 한다.살아갈 때 우리는 많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가페 사랑, `참 사랑`을 모른다. 왜냐하면 종교에서 말하는 인류와 만물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나를 희생하는 참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랑은 흔해 빠졌고, 타락했고, 가짜도 많으며, 상품화 돼 버렸다.그래서 현재의 사랑은 정상적인 사랑을 모르고 조건적인 사랑, 불구의 사랑, `내 말을 들어주면…`등 조건이 붙은 사랑, 수선이 필요한 사랑, 귀찮거나 조건이 맞지 않게 변하면 끝장내버리는 사랑 등 상처투성이의 사랑으로 변했다. 바로 이때야 말로 참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인간은 배워야 할 때이다. 그러나 부모에게서도 배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도 참 사랑을 배우는 기회를 놓쳐 버린 존재들이다. 시간은 흘러 지나가 버린다. 때를 놓치지 말라.우리는 세상의 모순 속에서 말썽을 부리고 불완전하게 이기적으로 시간을 허비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참 사랑을 확대하는 운동을 시작하자. 시작이나 중간 부분은 잘 해 나가다가, 끝부분에는 엉망으로 마무리하는 우둔한 사람이 되지 말자. 과정에는 어려움과 갈등이 있어도 끝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참 사랑의 크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의 넓이는 우주만큼 너르고, 길이는 과거부터 영원까지이다. 높이는 속세에서 천당까지이고, 깊이는 나에게 대적하고 배반한 자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기까지이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완벽하며 무제한 적인 크기이다. 사랑의 기간은 `끝까지, 마지막까지`이다.세상에서 가장 `참 사랑`에 가까운 사랑은 종교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마음속에 있는 `나(我)`라는 자아가 이기심으로 `참 사랑`을 방해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아를 버리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무차별적인 사랑을 권한다.세상에서 그래도 가장 `참 사랑`에 가까운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다. 옛날 일본 노래에서는 부모의 사랑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버지 사랑은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이 뜨거운 사람, 바위를 부수는 파도 같은 아버지 사랑`이라 했고, 또 어머니 사랑은 `겨울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 흰 눈을 녹이는 햇빛 같은 어머니 사랑`으로 노래했다.시간과 공간, 그리고 환경의 3요소의 압박을 견디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세월 속에서 나타나고, 시간을 따라 흘러 가다가 종국에는 사라진다. 이와 같이 내가 하고 싶은 사랑도 때가 지나면 끝이 난다. 우리는 시간을 요리할 수 없다.그래서 노년이 된 나의 삶의 결과물은 `나에게 허락된 때에 좀 더 세상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014-05-22

두려움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삶에서 두려움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살아서 뭣 하나!`하는 무의미한 삶에 대한 두려움, `아무도 없이 혼자이구나`라는 외톨이가 되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라는 죽음에 대한 등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생의 마지막에는 어디로 가야할지, 인생의 길을 잃을 두려움 등이 삶을 압박한다. 누구나 두려움을 느낀다면 어떤 일에든지 집중할 수 없고, 몸과 마음이 매우 고통스러워 진다. 두려운 마음속에 잠겨버리면`싸우기와 도망치기`라는 반응이 번갈아 일어나서 일을 계속 진행시킬 수 없다. 웹스터사전에는 `두려움이란, 실제적 혹은 상상 속의 고통, 위험, 악행 등이 임박했을 때나 안전이 위협 받는다고 느낄 때 일어나는 괴로운 감정반응`이라고 했다.두려움은 그 크기와는 관계없이 항상 우리 옆에 존재한다. 두려움은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히 조절되지 못하면 때로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두려움에 잠기면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만일 불안이 심하여 정신을 압도하면 의욕이 사라져서 노력하기를 포기하여 체념해 버린다. 두려움으로 절망적일 때 사람들은 그 상태에 묶여 버리고 이전처럼 회복될 수 없다고 탈기해 버린다.두려울 때는 안전하게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고, 이를 침범한 자와는 싸우기를 각오한다. 그러나 힘이 없다면 마음속으로 비난만 하거나 스스로의 탓으로 돌려서 마음고생을 한다. 이때 자책하는 것은 점점 마음을 위축시킬 뿐 해결점을 찾으려고 방황해 버리기에 해결점과는 자꾸만 멀어진다. 선입감에 압도돼서 주눅 들어 버린다.두려움은 미신을 탄생시키고 때때로 두려움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보호한다면서 상대에게 끔직한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혹독할 수도 있다. 나치스는 유대인을 위협이 된다고 두려워해 죽였다. 그러나 상처 준 상대를 괴롭혔다고 해도 이기거나, 무승부가 되지 않는다. 두려움은 위험할 때 `조심하라`고 신호를 보내어 경고하는 심리적 반응이다. 그래서 또다시 같은 상황에 처해지지 않도록 하고, 피해나 상처를 입지 않게 해 주는 길잡이가 된다. 어느 곳에서든 현명한 사람은 인생에서 두려움 등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다.만일 당신이 두려워하거나 떨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라. 때로는 집단 상담, 무료 전화 상담 등을 이용해도 좋다. 두려움에 완전한 해결책은 없지만, 좋은 완화제는 있다. 그들은 두려움을 줄여 줄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그것을 `용기`라 한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용기`이다.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가 아니고 어리석음이다. 용기란 두려움에 저항하려는 정신력을 말한다. 영웅이 평범한 사람보다 더 용감하지 않다. 다만 5분 더 용감할 뿐이다. 용기 있는 사람은 상담 전문가, 친구, 종교인 등 독려하고 도와주는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두려움은 잊혀져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래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재 기분을 파악하고, 마음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다. 그래서 내가 잘못한 범위와 상대가 책임져야할 내용을 결정한다. 내가 책임질 범위가 있다면 이를 인정한다. 그래서 내가 안전지역에 있는 것은 두려움을 통제하는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내 책임 문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이 힘을 회복할 수 있다.이렇게 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두려움을 통제하고 자신을 방어하여 보호할 수 있다. 그러면 두려움은 더 이상 끔찍한 감정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데 고마운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인간관계는 상호작용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기분 좋게 완승할 수는 없다.

2014-05-15

부끄러움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나 일이 잘못된 길로 진행됐을 때에는 떳떳하지 못하고 양심에 거리끼어 마음속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있어야 할 것을 준비하지 않아서 생기는 부족함에 대한 겸손한 느낌이다.부끄러움을 한자로는 수치로 표현하지만 그 뜻에는 차이가 있다. 수치는 모욕을 당하거나 합당한 취급을 받지 못할 때 느끼는 것으로서 겸손과는 무관하게 창피를 당할 때를 말한다.사람들은 부끄러우면 얼굴이 붉어지면서 그 자리를 피하려 한다. 이것에는 약간 미안한 마음에서 부터 심히 자책하면서 어쩔 줄 모르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자기가 해 버린 잘못에 대해 상대방의 이해를 구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생활 중에서 자주 나타날 수 있다. 부끄러움은 자기의 모자라는 부분을 아직도 채워 넣지 못한 아쉬운 마음에서 일어난다.일반적으로 부끄러움은 상대방에게서 느끼는 것이지만 사상이나 신앙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 부끄러움이란 일을 하다가 목표로부터 어긋나 있을 때 스스로의 위치를 생각해 봐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계면쩍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이 부족함을 받아들일 때의 태도이다.인간은 누구나 이상(理想)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존재이다. 행한 것의 결과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면 기분이 뿌듯하지만 현실은 이상보다는 더 낮은 수준일 수밖에 없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때로 더 큰 수치와 창피를 느낀다면 그 속에 침몰해 재기하기가 힘들 때도 있다. 그러나 “아니야, 할 수 있어!”라는 의지만 있으면 대부분 극복할 수 있다.이상을 향해 전진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채찍질하여 나아간다. 그는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 수많은 실패로 좌절이나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고 전진을 거듭한다. 큰 이상을 향할 때는 전진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걸 수도 있다.훌륭한 사람들은 경험으로 얻은 여러 생각들을 쌓아나가다가 그것을 자기의 사상으로 만들어서 삶의 기준을 만든다. 그래서 그것으로 살아갈 방향과 지향점을 설정한 생각과 행동을 연마해 나간다. 그래서 목표점과 자기가 이뤄 놓은 현실을 비교해 본다.윤동주는 조국의 독립과 인간애를 이상으로 하는 시인이었다. 그는 자기의 이상과 현실을 접목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기의 기여 정도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부끄러움의 정도`에 두고서 자기의 노력을 성찰하였다. 그는 잎새를 스치는 바람같이 미미한 문제점을 발견했을 때도 부끄러움으로 스스로를 반성했다.자기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부끄러움을 반성의 도구로 받아들이면 바르게 행동하여 목표에 점점 다가갈 수 있다. 이렇게 사고의 폭을 키워나가면 그는 역사나 세상일에 대한 사상에 체계를 갖춘 인생관을 정립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준이 너무 엄격하면, 생각을 옭아매어서 멈추어 버리게 할 수도 있다.부끄러움의 반대말은 만족감이나 성취감 등이다. 그러나 만족이나 자랑 속에서는 자아가 성장하지 않는다. 만일 부족한 것을 스스로 달래어서 적당 적당히 만족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을 없애버리는 결과를 가져 온다. 경우에 따라 입장을 이렇게도 또는 저렇게도 바꿀 수 있다면, 부끄러워 할 상황을 적당히 넘겨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이때 우리는 그의 얼굴이 두껍다고 말한다.인간에게는 자기를 위한 이기심은 넘쳐나고, 이타심에는 무관심한 속성이 있다. 이때 이기로 향하는 자기를 탓하고 견제하는 마음이 부끄러움이다.

2014-05-09

돈 벌기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소유욕이 없다면 이 세상의 범죄는 거의 사라질 것이다. 태어날 때 우리는 모든 면에서 빈 손으로 공평하게 태어났지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빈부의 차이가 드러나 버린다. 사회적으로 똑같은 조건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소유를 하려면, 사람은 남의 분량을 합법적으로 자기 쪽으로 모아야 한다. 이렇게 많이 모으면 우리는 그를 부자라고 하고 제일 많이 모은 사람을 재벌이라고 한다.자본주의에서는 돈이야 말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이 돈의 추구가 인생경영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그러나 간혹 사람에 따라서는 돈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 살면서도 이것을 수용하려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영혼마저 자본주의에 팔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차라리 가난한 아빠로 남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한다.이들 중에 소유하고 싶지만 능력이 없어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무능력일 뿐이다. 그러나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소유하지 않는 자는 참된 무소유 주의자이다. 그들 모두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자본제일주의에 역행하는 사람들이다.과거에 우리나라에서는 돈에 대한 기준이 있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써라`라는 것으로 돈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다. 돈벌이란 개 수준에서나 할 수 있는 짓일 정도로 본 것이다. 청빈 자를 칭송했고 황금을 두고 서로 갖기 위해 싸울까봐 형제는 그것을 물속으로 던져 버린 이야기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돈이 있다고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하면서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자이면서 행복한 자도 역시 있다. 그러나 이런 부자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부자이면서도 불행한 사람이 있나하면, 가난하면서도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불행한 사람도 있다. 세상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허다하다. 제일 좋은 것은 많은 돈을 가진 행복한 사람일 것이고, 가난하면서도 불행한 사람은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일 것이다.또 부자가 되고 싶으나 돈을 많이 모으지 못하면 “그까짓 것, 돈! 더러운 것! 적게 가진 나는 오히려 깨끗하다”고 하면서 돈을 따먹지 못하는 신 포도로 치부함으로써 합리화시켜 위안을 받기도 한다.돈은 생활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우리는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좋은 시절은 돈을 위해 허둥대며 세월을 보낸다. 돈은 쫓으면 쫓을수록 더 빨리 도망가 버린다. 그래서 인간에게 탐욕의 대상이 되는 돈을 충족하지 못하면, 이를 해소하려고 범죄가 그를 유혹한다. 돈에 몰입하면서도 “당신은 왜 살아가느냐?”를 그에게 물어 보면 사회적 안정, 인류 봉사, 자아실현 등을 이유로 설명한다. 아무도 돈을 위해 살아간다고는 하지 않는다.넉넉지 못한 자가 회사에서 월급을 받으면 그것은 자신의 생활을 남에게 맡기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부자는 생활을 스스로 해결해 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는 것은 돈이 자기를 위해 일하도록 하는 노력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돈을 충분히 이용하려면 많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돈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돈에 대해서는 누구나 마음속에 두려움과 욕심이라는, 좋지 않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억제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 많이 벌고 싶은 탐욕도 있지만 우선 “돈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를 열심히 일하게 만든다.돈을 많이 갖든 적게 갖든, 유혹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돈을 악의 근원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돈은 교환의 도구일 뿐, 악 그 자체는 아니다. 다만 돈을 효용성 있게 사용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러기에 돈을 건전하게 벌어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려면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2014-05-02

청결한 마음, 맑음과 느림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사람의 마음은 칭찬하고 싶은 마음, 감격, 고뇌, 질투, 사랑, 지겨움 등 수많은 종류를 모두 담아낼 수 있다. 비좁은 마음은 스스로 좁혔을 뿐 무한히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는 행동하지만, 그것이 향하는 방향은 제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사회의 법들은 행동으로 드러난 것만을 따지지만 종교는 마음의 움직임부터 판결의 대상이 된다. 사회에서는 지식인, 부자, 미녀 등이 환영을 받지만, 종교에서는 맑은, 청결한 마음을 가져야 칭찬의 대상이 된다.마음의 내용물에 따라 그는 남에게 선한 행동으로 칭송을 받거나 정을 베푸는 착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악한 마음으로 행동을 하여 죄를 짓거나, 분노나 저주 등을 품게 되기도 한다. 마음은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빌미, 씨앗의 역할을 한다. 마음이라는 씨는 기름진 옥토에 떨어져야, 여러 좋은 행동을 하게 한다. 마음이 맑으면 모든 것이 맑아진다.마음은 바로 나의 `내적 자아'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행동을 이끄는 마음이 청결하게 되어 질까? 청결은 물이 섞이지 않은 포도주, 순 금, 깨끗한 옷을 말하며, 인간의 본래적인 마음을 뜻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깨끗하게 하려는 부단한 노력, 수련이 필요하다.마음이 청결해지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스스로 자기 자신과 마음속에서 만나야 한다. 자신을 조용한 곳에서 홀로 두어 보아야 한다. 이때 내 마음에는 교활, 음흉, 위선, 사악, 비열, 속임, 증오, 등이 혼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 마음을 공부하고 스스로를 검토하며, 시험도 치러 보아야 한다. 이를 종교에서는 수양과정, 또는 득도 훈련이라고 말한다.다음으로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 함께 있어봐야 한다. 그래서 소통을 통해, 서로 용서와 이해, 화해 등으로 화목해 지도록 노력해 본다. 서로 마주보면서 이야기해 보면 남의 마음을 보게 되고, 그것은 자기에게 성찰의 거울 역할을 해 준다.또 한 가지는 세상의 일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알고 고난과 고통, 그리고 아픔은 항상 그리고 의당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패나 낭패 등과 같은 연단 속을 지나가야 정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패도 어떤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종교를 믿는 자는 이때 절대자와 마주보고 앉아서 대면해 나의 모든 것을 들어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절대자에게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포기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지금은 빠른 속도의 시대이지만 느림도 마음을 맑게 해 줄 수 있다. 근래에는 걷기가 유행을 하고 있다. 걷기에는 평보, 속보, 조깅, 명상걷기 등이 있다. 일반인은 걷기가 효율성이 떨어지고 어슬렁어슬렁 걷는다면 게으름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적인 구도자나 철학자가 숲속을 명상하면서 걷는다면 속도가 매우 느릴 수밖에 없다. 걷기는 마음을 달래는 좋은 방법이다. 움직이면서 사색하는 것이 영혼과 정신의 성장에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걷기는 세상만사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바뀌게 해 준다. 분노, 시샘, 갈등 등, 꽉 찬 마음속의 쓰레기통을 조금씩 비워 준다. 빗 속, 산들 바람, 찬 공기, 안개 속 등을 걸으면 결국에는 밝고, 단순하고, 향기 나는 삶을 만나게 된다. 걸으면 내가 작은 존재인 것을 알게 되고, 이때는 들풀의 소리도 아름답게 들릴 수 있다.마음이 청결하면 만물과 대화가 가능하다. 꽃도 나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자기 내면의 소리가 아름답게 들린다.`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자신과 화해한다. 스스로를 다독거려 격려해 준다. 우리는 세상사로 점령된 마음을 비워 볼 필요가 있다.

2014-04-25

적극성과 삶의 질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의학적으로 볼 때 삶이란 우리 몸의 각 장기에서 일어나는 대사활동과, 허파, 위장 등 장기들 사이의 상호 작용, 두뇌에서 일어나는 뇌파, 그리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이나 환경, 문화 등이 정신에 영향을 미쳐서 만들어진다. 원자나 분자가 모여서 유기체로 변하여 일으키는 결과이다. 이런 몸에서 인간은 더 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일어난다.성공적인 미래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삶의 질을 더 좋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현재를 열심히 살아간다. 삶의 질은 사는 동안 무엇을 생각해 왔고 어떤 종류의 일을 자기의 특성을 살려서 했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래서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사물을 접할 때나 일할 때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를 알고서 나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인간은 한 가지 행동에서도 좋은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또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다 보면 점점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누구나 좋은 삶의 목표를 갖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먼저 자기가 무엇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지를 이해하고, 편견이나 단점은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목표를 정한다.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돈벌이를 위해서 하고 일 자체에 관심이 많아서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만일 그가 관심을 가지고 일을 열심히 한다면 자기가 하는 일의 목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일에서도 정력을 쏟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현재를 적극적으로 잘 받아들이며 비교적 편견이 없다.적극적으로 삶에 임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목표를 완성하려고 노력한다. 만일 일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그의 가슴에는 해결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게 된다. 이렇게 초지일관 목표를 수행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삶의 질은 점점 향상될 수 있다.더 좋은 삶을 위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일하는 중간에도 삶을 즐길 수 있는 여가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여유시간이 필요하다. 비운 후에 새로이 계획을 세워 일을 수행하면 뜻밖에 일어나는 자극이나 도전에 나의 관심이 빼앗기는 것을 막아준다.목표를 가지고 정력을 기울리다보면 그 일에 점차 하나의 형태와 질서가 만들어 진다. 자기에게 맞는 활동 방법을 선택해 일하다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때로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는 최선을 했음으로 후회는 없다. 결과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의미 있는 일은 추구하지 않고 즐거움만 생각하는 삶은 낮은 수준의 인생이다. 꿈이 없거나 다소간 위험이 따르지 않는 생활은 폭이 좁은 삶이다. 정력적으로 최선을 다 하지 못하면 삶의 질을 높였을 때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한 잔 마시면서 친구나 이웃 사람들과 잡다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면 시간도 때우고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데는 도움을 준다. 그러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화를 통해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수준 높은 사람도 만날 것을 권한다.부단한 노력으로 자기 생각이 흐르는 곳으로 계속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면 그는 마음을 통제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일할 때나 대인관계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그는 지금 삶의 질을 끌어 올리고 있는 중이다.

2014-04-18

상황에 적합한 생각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아름다운 꽃을 선물할 때 우리는 바구니에 담는다. 우리가 선물하려는 꽃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꽃을 운반하기 위하여 필요한 바구니도 같은 값이면 좋은 것이어야 한다. 세상만사는 일정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여러 가지 내용물로 가득 채워진다. 꽃이 내용물이라면 바구니는 외형이다.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인격은 오랜 경험으로 형성된 마음과 정신, 그리고 체질과 영혼 등 내용물이 섞이고 혼융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총합적 외형이다. 우리 인생에서 외형과 내용물은 모두 중요하다. 성격이란 마음의 표현 방향이다.외형인 인격은 정보를 채집하고 경험하며 그것을 이용하여 판단을 내리는 능력과 수신(修身) 정도에 따라 여러 형태의 골격이 만들어 진다. 즉 같은 부류의 인격이라도 커 나온 사회 환경이나 자기 인격의 성숙도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형태의 인격이 만들어 질 수 있다.또 내용물은 내향성과 외향성, 진지성과 피상성, 또는 소극성과 적극성 등으로, 그가 나아갈 미래를 개척하는 방향의 깊이와 넓이를 결정짓는다. 좋은 내용물로 만들어진 훌륭한 인격은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마음속에 사랑 등의 기본적인 내용이 부실하거나 감정 전달력 등 정신적인 능력이 부족하면 사람들은 낮은 수준의 인격자로 본다. 그래서 변변치 못한 인품으로 여겨 버린다.이런 사람은 정서가 짧고 영혼이 바로서지 않아서 삶에서 쉽게 지쳐 버린다. 인간 사이에는 진정성이 부족하고, 정신은 통제가 부족한 것 같아 보인다. 갖고 싶은 것을 가져보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 보아도 마음의 빈 칸을 메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이나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성경의 구절을 떠 올리게 한다.인격은 비슷할지라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표현되는 것이나 어떤 일에 적응하는 방법 등에서 때로는 개인적으로 행동에 큰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느낌을 강조하는 방법이나 좋아하는 부분이 다르다든지 소화할 수 있는 탄력성이나 마음이 평온해 지는 회복성 정도의 차이 등에 따라 성격은 다양할 수 있다.점점 연륜이 깊어지면 그의 인격은 점차 외형으로 굳어지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 판단의 흔들림이 줄어든다. 그는 이제까지의 경험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해 져서 자기의 생각을 편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연령이 늘어날수록 변화는 줄어들어, 생각의 파동이 안정화 되어 간다.지금은 지구가 한 마을이 되고 있다. 그래서 전 세계인의 사조(思潮)가 시대적 조류로 되어 흘러가고 있다. 사람은 시대의 흐름이나 시각의 차이에 따라 그에 맞도록 내용이나 형식을 바꿔야 할 때가 있다. 이 조류 때문에 같은 사실을 두고도 이전과는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지금은 급변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것이 인격의 세대차이로 나타나 사회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다.인간 마음의 제일 근본은 사랑이다. 외형인 인격도 사랑을 기초로 하여 형성되고, 세대차이의 극복도 이것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지속성을 가지고 이겨나갈 수 있다. 이런 인격 형성에는 사랑을 강조하는 가정교육과 정신을 강화하는 학교 교육이 지대한 영향을 준다.우리는 아름다운 꽃이 가득 들어있는 좋은 바구니를 선물로 받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모두는 좋은 인격을 가지고 상황에 적합한 생각을 하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한다.

2014-04-11

행복의 현 주소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하루의 생활을 뒤돌아보면 매일의 삶은 괴로움과 고뇌의 연속이다. 짧은 행복과 지루한 불행은 서로 교차하면서 인생을 이어 나간다.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 도전하여 성취해 내는 시간이나 가족과 오순도순 모여서 즐겁게 보내는 시간은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가족과의 대화에서도 가정의 심각한 문제일 때는 그 시간에도 우리는 괴로움을 느낀다. 행복은 헌법에서도 시민들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했고 미국의 제퍼슨도 시민들에게 생명권, 자유권에 더하여 행복추구권이 있음을 밝혔다. 행복한 시간에는 기쁨만을 느낀다.기쁨에는 여러 수준이 있다. 낮은 단계의 기쁨에는 단순히 즐거웠거나, 의도하던 작은 것이 이뤄졌을 때에 가능하다. 그 다음 윗 단계로는 시간이 어느 정도 걸려서 전체적으로 이뤄졌을 때 느끼는 기쁨이다. 그는 만족한다. 그러나 이 기쁨은 장기적으로 영속되지 않는다. 제일 수준이 높은 기쁨은 가장 보람이 있다고 생각해 왔던 사실을 해 내었을 때이다. 인생에서 삶의 원칙을 발견하거나 자기의 잠재력을 가지고 사명을 실현했을 때 또는 종교의 깊은 경지를 어렴풋이나마 느껴 질 때 그는 최고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이런 기쁨에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거나 재벌이 되려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대통령이나 재벌도 자기 나름의 고뇌가 있다. 그들은 우리가 느끼는 것 보다 더 많이 행복을 느끼지는 않는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큰 걱정이 있을 수 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시대에 같은 지구에서, 삶에 부담을 느끼면서 버겁게 살아가기 때문이다.행복은 부자로 산다고 하여 질병이 없다고 하여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외부의 일에서 만들어 지기보다는 인간 내부의 마음에서 생겨난다. 고뇌에 차거나 우울함 등 부정적인 생각으로는 행복과 기쁨을 만날 수 없다. 마음은 바꿀 수 있다. 처음부터 “나는 능력이 없어! 해 봤자 안될 거야” 보다는 “능력이 없으나 최선을 다해 보자”는 긍정적인 자세가 중요하다. 이와 같이 행복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행복은 우선 내가 안정돼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밝게 보이고,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뭣보다 주위를 잘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능력을 개발하고, 목표삼아 해야 할 일을 확정해 매진해야 한다. 나타나는 일들을 하나하나씩 풀어나갈 때 그는 조그마한 기쁨을 자주 느끼게 된다. 또 그것들이 모이면 하나의 큰 기쁨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때 기쁨이 곧 행복이다.반복되는 숱한 괴로운 일이나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스스로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처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고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절차를 통해 자기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발견하면 점차 스스로를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행복해 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는 주위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접어두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고용일 뿐이다. 이런 정신은 지우려고 애를 써야 한다.행복을 위하여 애를 쓰다보면 그 과정에서 많은 실패와 실수를 경험하게 된다. 혹자는 길을 잃어버리고 헤맬 수도 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의 마음은 서서히 긍정적으로 변해 나간다. 점차 사랑과 인내, 그리고 존경과 감사의 마음, 즉 행복감을 갖게 된다. 어떤 이는 중년기 이후에야 비로소 어렵게 그 길을 발견하기도 한다.

2014-04-04

위안부 문제, 일본 여성단체는 왜 조용할까?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나이가 60세 이상이 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참상을 느껴보지 않고서는 하루도 흘려보낸 적이 없다. 일본이 자꾸만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심정일 것이다. 일본과 자상하고 너그러운 이웃으로 편안하게 정을 나누는 장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국가적으로 피해를 당한 우리들 마음이 협소해서 그런가? 아니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그러면 일본 사람들의 친절하면서도 그 이면에 숨어있는 교만 또는 교활 때문일까? 한 번도 아름다운 교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수 년 전에 일본에서 전철에 치일 사람을 구출하다가 죽어간 한국의 청년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약 15년 전에 내가 속한 클럽과 자매관계에 있는 일본의 클럽 회원이 대구를 방문했었다. 일본어를 아는 내가 안내하면서 대구시의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 동산병원 내의 선교 박물관을 방문했다.우리 역사라면 의당 일본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이웃나라이기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가 없는 역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일본이라면 의당 우리민족을 침범이나 가해하는 역사로 이어진다.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에서도 일본인이 우리를 괴롭히는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 신자여서 그런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부를 자세히 보았다.왜정시대의 제일 큰 피해자는 위안부(comfort girls) 할머니들이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를 부인하고 있지만 미군 동남아 번역 심문소(1945.4.28)의 브룬다 중령은 미얀마에서 체포된 일본군을 심문해 문서번호 OSS confidential C.I.D. XL8505 보고서를 작성했단다. 거기서는 위안부 당사자의 의지에 반한 강제성의 문제가 있다고 했다.그들은 끌려가서 청춘을 짓밟혀 버리고 남편에게만 바칠 순정과 미래의 희망은 집단 성폭행을 당하면서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러고는 그렇게 하고도 가해자인 일본군의 자식들인 지금의 일본 정객들은 부당한 성관계를 합리화, 또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전 세계를 향해 떠들어대고 있다.더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여성들이다. 인간은 입으로 밥을 먹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여성은 밥만 먹을 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말 한 마디도 없다.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것 같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조용히 침묵하는 것은 남편들의 말에 순종하기 때문일까?우리나라에는 논개라는 조국애가 가득한 의기(義妓)가 있었다. 그녀는 왜국 장군과 춤을 추다가 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서 함께 자결했다. 그럼 그녀는 살인을 한 것일까? 또는 조국을 위해 자기 몸을 던져버린 것일까? 유 관순 누나는 반일 운동을 하여서 감옥에 갇혀서 순교했다. 누나는 공부나 할 것이지, 왜 쓸데없이 밖에 나가서 반일 운동을 했는가? 아니다. 그녀들의 마음에는 민족정신이 살아 있었고, 그래서 영원히 우리민족의 누나가 되었다.위안부 할머니 문제에 대해 애써 소리를 내지 않는 일본 여성들의 정조관은 정상일까? 성적인 집단적 악행을 묵인하는 것도 내조인가? 자국의 수많은 남성이 외국의 많은 여성을 집단 성폭행을 한 것을 일본 여성이라면, 한 마디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본 여성 단체가 이 문제를 끝까지 외면하는지, 또는 사죄할지 등 태도를 우리는 지켜보겠다.옆집에 판단력이 부족한 자가 살고 있으면 대단히 신경 쓰이고 불안할 것이다. 이웃나라와 서로 도우면서 잘 살아가는 국가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일본은 지금 문명 문화가 조금 앞섰다고 하지만, 우리보다 일찍 외국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 따라잡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 우리는 공부도, 일도 열심히 하고 있다.

2014-03-28

다문화 사회

▲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6·25 사변으로 한국에 미군이 주둔한 후 많은 푸른 눈의 아기들이 태어났다. 생계가 어려운 여성들은 미군들과 살면서 삶을 이어갔기에 미군의 아이들을 출산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회 환경에서는 그 아이들과 어머니들에게 나쁜 편견을 가지고 홀대하면서 접촉을 꺼려했다. 그 아이들은 우리들과는 떨어져서 외롭게 놀고 있는 것을 자주 봤다. 그 중에는 지금 미국에서 유명한 인사도 더러 있다.그 당시에는 학교에서 우리민족을 두루마기 등 흰옷을 입는 `백의민족`, 또는 순수 혈통으로 단군의 후손이라고 하여 `단일 민족`임을 강조했다. 학교에서도 그런 식의 교육을 받아서 생활에서 익숙하지 않은 다른 피부나 옷의 색깔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심했다.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까지는 동서양의 왕래가 없어서 세계 곳곳은 그 곳의 민족 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 후에 세계적인 교류가 일어났고 동양에서는 일본이 서양문화를 제일 먼저 받아들였다. 그 후에 청나라에도 외국 문물이 강요된 상태로 밀려들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외국과는 문물 교류를 차단하는 최악의 쇄국정책을 취하면서 문을 닫아 버렸다.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거쳐서 할 수 없이 문을 조금씩 열어갔다.근래 한국도 많이 변했다. 동남아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함께 살게 됐다. 어떤 자는 노동자로, 어떤 자는 한국인과 결혼을 해 갑자기 그 수가 늘어났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다문화 사회`라고 부르게 됐다.20세기 중반까지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어느 국가에서나 국경을 열면 처음에는 주저하게 돼 외국인에게 거리감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 후 왕래자의 수가 많아지면서 정책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지금은 외국을 이웃집에 놀러 가듯이 가서 볼 일을 본다. 21세기는 그야말로 지구 전체가 한 마을이 됐다.서양의 정책을 보면 캐나다는 1970년대에 `모자이크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이주민과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보호해 공존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미국은 1960년대부터 미국의 시민권을 얻고 난 후에는 이주민 나라의 문화, 언어, 전통 등을 수용하는 소위 `용광로 정책`이라는 다문화 정책을 시행했다. 백호주의로 유명한 호주마저도 지금은 문화의 분리보다도 사회를 통합하는 동화주의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부모 중 한 사람이 우리 민족이 아닐 때는 본인은 물론 그 자식들도 자기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한국의 구성원 중 한 사람이다. 그들의 자녀들도 나중에 한국을 이끌고 갈 사람이 돼야 한다. 이런 일에는 시민들의 관심과 위로가 필요하다.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현재 생활이 어렵다. 언어소통과 문화 이해의 애로뿐만 아니라 경제적 빈곤의 해결, 자녀 교육 문제의 해소, 취직자리의 알선, 살 집 장만하기 등 여러 가지의 어려움으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때로는 이런 문제로 흩어지는 것을 보기도 한다.이런 시대에 제일 좋지 않는 태도는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그것은 고립을 자초한다. 얽히고설킨 사회에서 고립은 죽음이나 다름이 없다. 과거 교육정책에서는 `백의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다가. 근래에는 `다문화 사회`를 강조하는 것 같이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육 정책도 그 시대 상황의 반영인 모양이다.다문화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것을 `다른 문화`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로 생각해야 한다. 다르다는 것은 차별과 거부의 뜻이 내포돼 있다. 그러나 `새롭다`는 것은 같은 수준에 두고서 긍정하면서 접근할 때 쓰는 단어이다. 지구촌시대에는 준비를 잘 해야 미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2014-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