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수평선은 끝없이 둥글다. 하늘도 사방으로 무한히 뻗어서 영원과 둥글게 맞닿아 있고 해와 달도 원형이다. 신(神)의 형상도 각이 없어서 끝도 시작도 없이 둥근 형태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둥글다는 것은 완전성을 표현한 것`으로 우리들 마음속에 녹아들어 있다.
생명을 잉태해 배출시키는 열매는 하나님을 닮아서 둥글다. 과일 열매도 둥글고 어머니 뱃속의 태아는 둥근 자궁 속에서 생명의 시초를 키운다. 탱자나무도 가시는 사납게 보이지만, 씨앗은 촉감 좋은 탱자로 동그랗게 열매를 맺는다.
봄여름 동안 결실의 열매를 맺기 위해 비바람을 이겨내는 인고의 세월을 보낸 결실로 식물은 예쁜 열매를 맺는다. 노랗게 익은 열매는 여러 계절을 거치는 동안 뿌리에서 빨아올린 수분과 영양물질 중에서 최고품을 농축해, 식물이 만든 최선의 작품이다. 그 속에는 한 해 동안 우주의 열기가 차곡차곡 쌓여 녹아든 기록이 켜켜이 들어 있다. 앵두, 능금, 감, 배 등은 하나같이 보기 좋다. 동그란 것은 마음을 차분히 안착시키는, 부드러운 모양이다. 한 입을 씹으면 단 맛이 상큼 혀끝을 녹인다.
그러나 세상의 물건들에서는 원형을 거의 볼 수 없고 대부분은 직선이나 여러 형태의 굽은 선으로 만들어져서 각이 져 있다(天圓地方). 이런 선(線)들이 모이면 형태를 이루고 거기에 생명이 붙으면 움직이는 생물체가 된다. 생명체는 모두 여러 각도로 굽혀진 부위로 먹이를 취하고 서로는 각을 세워서 서로 찌르듯이 일생을 살아간다.
모가 난 것을 사람들은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인생살이에서 각진 마음을 겉으로는 둥근 척 하며 숨기거나 호도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상대와 구분하기 위하여 불쑥 대립각을 세운다. 삶이란 살아가기 위해 모난 곳을 무기로 하여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과정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면서 가시로 만들어진 옷으로 무장해 서로 찌르려고 애를 쓴다.
원만한 성격이면 좋겠지만 누구나 성장한 환경 소산으로 인해 각이 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를 편견 또는 성격이라 한다. 이런 것으로 우리는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자기를 스스로 좀먹게 하는 일을 많이 할 때도 있다. 둥글고 향기 나는 과일을 맛보면서도 우리는 가시가 들어 있는 말을 던지면서 오늘도 모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길가에 버려질 열매마냥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할 뿐, 별 것 아니면서도 뿌리처럼 파고들거나, 가지처럼 하늘로 나를 과시하려 하면서 조화롭지 못하게 살아온 것을 늦게나마 반성한다. 어떻게 하면 향기 나는 열매로 재생할 수 있을까? 너무 늦은 후회인가?
그러나 때로는 모서리를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가 지(負)는 쪽을 택해 상대를 감동시키기도 한다. 예수는 사랑하는 나머지 지는 쪽을 과감하게 선택했고, 이태석 신부도 모서리 사용을 거부한 현대인이다. 스스로 밥이 돼 상대에게 먹혀주는 이들의 행동은 바보일까?
내 생각으로 이들은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가 넘쳐나서 어리석은 길로 자원해 기꺼이 들어간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감격해 동그란 눈물방울이 맺힌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오세영 시 `열매`의 일부)
가지는 뾰족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려 하고 뿌리는 물을 찾아 땅을 깊이 어둠을 헤집지만 스스로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왜 둥글고 부드러울까? 인간의 마음도 노력하면 우주처럼 온전히 둥글어 질 수는 없을까? 지금이라도 지나온 세월이 향기롭게 익어서 둥글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