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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

등록일 2014-07-03 02:01 게재일 2014-07-0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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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초병은 그의 소지품을 조사해 보았다. 그의 인적사항을 발견하여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다. 헐레벌떡 도착해 보니 아들은“엄마!”라는 인사도 없이 꺼적대기에 덮혀서 차갑게 식어 있었다. 30대 중반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체 앞에서 고꾸라져 혼절하였다. 시계는 멈춘 듯하고 햇빛이 쨍쨍 내려 쪼이는 속에서도 컴컴하여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광야에서 외톨이가 된 듯이 세상은 아들과 자신을 내팽개 쳐 버린 것 같았다.

한참을 지난 후에 어머니는 겨우 일어나 아들의 시신을 말끔히 닦아서 깨끗한 무명포에 쌌다. 근처에 흙을 파고 아들을 묻었다. 괭이나 호미가 없어서 손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돌만 있는 곳이라서 그 무덤은 돌무덤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자기의 혼을 아들과 함께 합장해 묻고 난 후 허둥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통으로 가득한 암갈색 마음은 기약 없이 온 하늘을 방황하고 있었다.

그 근처 양지바른 곳에는 또 하나의 무덤이 있다. 그 무덤의 주인공은 진해 근처에서 수년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만을 모시고 살던 학생이었다. 군대에 입대하기 전 날, 담을 사이에 두고 애인과 만나 눈물을 훔치면서 이별을 했다. 그 당시에는 공개적으로 남녀가 만날 수가 없었다. 어떤 남녀가 웃으면서 자주 만나면 사람들은 연애한다고 수군대던 때였으니까.

전방 초소 배치를 받고서 근무하던 중에 그는 공산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게 됐다. 애인의 낭낭한 음성은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그 아들이 자기의 전부이다. 어머니가 아들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고 그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애인의 아름다움을 뒤에 남겨두고 엄마의 따뜻함도 멀리한 채 그는 어머니의 눈물을 베개 삼아 땅에 묻혔다. 영원을 향해 기러기마냥 훨훨 날아가 버렸다. 그 무덤은 이북에서 넘어오다 사살된 강원도 총각의 돌무덤 근처에 있다.

동료들은 무덤 앞에 십자가 표식의 나무를 꽂아 두었다. 귀가 찢어질 정도로 고요가 시끄럽다. 이것을 알고서, 시인은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이라는 `비목`가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곧 노래가 돼 우리의 마음을 애절함, 안타까움, 허무함, 방향 잃음, 끝없는 미로, 절벽 끝으로 몰아넣는다. 밀어 넣는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자원해 들어가려 한다.

일반 사회 상식으로는 진해에서 자란 청년의 죽음은 애통해하고, 강원도의 총각에 대해서는 범법자가 됨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사라져 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두 어머니는 모두 눈물을 흘린다. 한 사람은 남한의 남편을, 또 한 사람은 북한 남자의 자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임신 방법도 전혀 다른 형태로 이뤄졌다. 그런데도 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똑같이 무한대이다.

두 아버지는 모두 우리 동포이다. 그런데 국군은 공산군의 아들을, 공산군은 국군 측의 아들을 총살한 것이다. 사상적으로 이들은 다른 부류의 집단에 소속돼 있지만 모자지간이라는 기본적인 인간관계만은 갈라뜨리지 못한다.

두 어머니는 공산주의는 뭣이고 민주주의는 뭣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냥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도 두 가정의 아들은 반대편 사상의 군인으로부터 총살을 당했다. 사상이란 게 도대체 뭔지…. 이렇게도 철저히 인간을 편가를 수 있는가?

사상이란 역사의 흐름 중에서 이 시대의 특별한 산물인가? 사상은 생명을 초월하는가? 천년 후에도 이런 사상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을까? 사랑과 사상은 반대되는 개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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