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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

등록일 2014-06-26 02:01 게재일 2014-06-2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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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락 수필가·경주청하요양병원장

수년전 친구부부들과 강원도로 단체여행을 떠났던 것은 매우 뜻깊은 여행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방 근처의 여행은 우리 일행에게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조국분단을 확인했고 현실에서는 아직도 이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나는 안내자의 설명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현실을 잠시 잊어버리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돌무더기가 있는 곳을 가리키면서 그림을 그리듯이 소상하게 설명을 해 줬다.

6·25 사변 당시 강원도 시골의 어느 마을에는 홀어머니와 나이가 18세 되는 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연탄은 물론 전기마저 없는 골짜기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고 호롱불로 밤을 겨우 넘기는 정도로 가난으로 찌든 집안이었다. 간혹 들리는 바람 소리나 까마귀 소리가 유일하게 고막을 울릴 뿐이었다.

이북의 공산 군대는 어김없이 첩첩산중에 있는 이 집을 찾아와서 숙식을 강요했다. 그 집에 머무는 동안 공산군인 한 사람은 이 순진한 처녀의 몸을 수차례나 짓밟았다. 그 후 남쪽으로 진격하던 그들은 수개월 후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공산군인은 퇴각 도중에 이 집에 이틀간 머물렀다.

그는 예쁜 처녀의 배가 볼록한 것을 보았다. 그녀가 귀엽고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그와 그 처녀 사이에는 영원이란 것이 있는 듯이 느껴졌다. 딱 꼬집어서 지적하기에는 명확치 않는 그리움이랄까? 뭔가가 보일 듯 했다.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꿈을 꾸듯이 시간이 흘러갔다. 처녀와의 미래를 이곳에 묶어 두면 좋으련만…. 잡히면 총살감이라서 아리아리한 마음을 가지고 흐느끼면서 이북으로 도망치듯 가 버렸다.

어머니가 조력해 산통 끝에 옥동자를 낳았다. 그러나 애기는 아버지가 있으면서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운명이다. 영원한 이별이란 게 이렇게 간단하게 만들어 지는가!

시간은 조금도 느리게도 빠르게도 흐르지 않는다. 매정할 정도로 차갑고도 냉정하게 초침은 정확히 돌아간다.

세월이 흘러 아들은 16세가 됐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녀는 자초지종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줬다. 물론 헤어진 이후에도 과거에 공산군이 적어 준 아버지의 주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북 측과 연락이 가능하면 간첩으로 총살 감이었다.

아버지의 한 이야기를 들어 본 그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매우 보고 싶었다. 늘 북쪽으로 아버지 얼굴을 멍하니 그려 보면서 그리움으로 가슴을 적셨다. 18세 때 어느 날 단단한 결심을 했다. 아버지를 만나보러 남모르게 휴전선을 넘어가려고 작전을 짰다.

요리조리 국군을 피해가면서 그는 이북으로 넘어갔다. 남모르게 아버지를 만나서 엉엉 울면서 품에 안겼다. 아버지 역시 언제나 남한의 애기가 얼마나 컸을까를 가슴에 묻어 두고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얼마나 그립던 아버지였던가! 밤새도록 뜬눈으로 이야기를 한 후 영원한 이별일지도 모르는 작별을 해야 했다. 그에게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모르고 오직 그리움만 가슴을 저미는 것이었다. 그에게 사상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38선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요리조리 숨을 죽이면서 남모르게 숨어서 내려오다가 그만 국군에게 들켜버렸다. `탕탕!` 하면서 불을 뿜는 총격에 그는 그 자리에서 영혼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아버지를 겨우 만났을 뿐 야속하게도 그리운 어머니와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됐다. 눈동자에만 어머니의 잔영이 깊이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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