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시간, 공간, 주위의 환경이라는 3차원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주어진 시간 안에서 주위를 밝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사랑이란 것이다. 그래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기회를 만나게 되는데, 이 `때`를 사랑으로 잘 보내면 그는 좋은 삶을 산 것이 된다.
사랑에는 아가페 사랑과 애정이란 것이 있다. 애정은 남녀 간의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꽃미남 청년이 비싸 보이고 좋은 옷을 입었으나 인물이 못난 여성과 선을 보면, 사람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재벌인 줄 알아요. 또 어느 늘씬한 미녀가 촌스런 청년과 선을 보면, 아마도 그 남자는 최고의 직업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결혼상담소 여직원의 말이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남녀끼리 만나면 사람들은 그제야 “저들 둘은 사랑하는가봐…”라고 한단다. 여건으로 보아 조건이 맞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하려는 사람은 좀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고르고 싶어 한다.
살아갈 때 우리는 많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가페 사랑, `참 사랑`을 모른다. 왜냐하면 종교에서 말하는 인류와 만물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나를 희생하는 참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랑은 흔해 빠졌고, 타락했고, 가짜도 많으며, 상품화 돼 버렸다.
그래서 현재의 사랑은 정상적인 사랑을 모르고 조건적인 사랑, 불구의 사랑, `내 말을 들어주면…`등 조건이 붙은 사랑, 수선이 필요한 사랑, 귀찮거나 조건이 맞지 않게 변하면 끝장내버리는 사랑 등 상처투성이의 사랑으로 변했다. 바로 이때야 말로 참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인간은 배워야 할 때이다. 그러나 부모에게서도 배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도 참 사랑을 배우는 기회를 놓쳐 버린 존재들이다. 시간은 흘러 지나가 버린다. 때를 놓치지 말라.
우리는 세상의 모순 속에서 말썽을 부리고 불완전하게 이기적으로 시간을 허비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참 사랑을 확대하는 운동을 시작하자. 시작이나 중간 부분은 잘 해 나가다가, 끝부분에는 엉망으로 마무리하는 우둔한 사람이 되지 말자. 과정에는 어려움과 갈등이 있어도 끝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
참 사랑의 크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의 넓이는 우주만큼 너르고, 길이는 과거부터 영원까지이다. 높이는 속세에서 천당까지이고, 깊이는 나에게 대적하고 배반한 자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기까지이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완벽하며 무제한 적인 크기이다. 사랑의 기간은 `끝까지, 마지막까지`이다.
세상에서 가장 `참 사랑`에 가까운 사랑은 종교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마음속에 있는 `나(我)`라는 자아가 이기심으로 `참 사랑`을 방해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아를 버리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무차별적인 사랑을 권한다.
세상에서 그래도 가장 `참 사랑`에 가까운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다. 옛날 일본 노래에서는 부모의 사랑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버지 사랑은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이 뜨거운 사람, 바위를 부수는 파도 같은 아버지 사랑`이라 했고, 또 어머니 사랑은 `겨울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 흰 눈을 녹이는 햇빛 같은 어머니 사랑`으로 노래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환경의 3요소의 압박을 견디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세월 속에서 나타나고, 시간을 따라 흘러 가다가 종국에는 사라진다. 이와 같이 내가 하고 싶은 사랑도 때가 지나면 끝이 난다. 우리는 시간을 요리할 수 없다.
그래서 노년이 된 나의 삶의 결과물은 `나에게 허락된 때에 좀 더 세상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