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위한 노력이 필요치 않다. 그냥 하루하루를 보내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생각으로 정당한 일을 많이 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되려면 남다르게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미래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준비하는 자는 삶의 자세가 일반인과는 차이가 난다. 그는 의(義)의 편에 서기를 원한다. 성인(聖人)들은 이런 노력으로 자기를 완성한 분들이다. 그는 의를 알고 싶어서 굶주린 심정이고(餓), 실천하고 싶은 갈증(渴)으로 목말라 한다.
`굶주리다`라는 단어를 요즈음의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한다. 빈궁은 우리나라에서도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봄에 보리가 익을 때 양식이 떨어지는`보릿고개`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단어였다. 그때에는 거의 절반의 학생들은 점심밥을 먹지 못했다.
`갈증`에 허덕이는 암사슴의 이야기는 성경의 시편에 나온다. 바싹 마른 벌판에서 새끼를 밴 암사슴이 물을 찾지 못하고 허덕이다가, 드디어 긴 목을 마른 대지위에 눕히면서 죽어갔단다. 생명체에는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이 절체절명의 문제이다. 진리를 알고 싶은 자는 이렇게 갈증을 느끼는 형상이다.
1960년대 말에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교에서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해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자고 하여 해방신학을 제창하였다. 어느 신부가 성당 계단에서 피골이 상접한 여신도가 쓰러져 있는 옆에서, 말라서 엉크런 애기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신부는 “애기에게 젖을 먹이세요”라고 요청했다. 그 여인은 피가 맺힌 젖을 보이면서 처절하게“먹은 것이 없어서 젖이 안 나와요.”라고 겨우 대답했다고 한다.
그 신부는 과감히 총을 들었다. 그래서 돈이 한 곳으로 쏠리는 불균형된 사회를 향해 의의 총을 겨누었다고 한다. 한 번도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지만 굶주림에 대해 절망한 듯 했다. 의로운 자가 되려면 진리에 대해서는 목말라 하는 자의 심정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뒤엉킨 이 사회에서는 의롭게, 이른바`올바른 생활`을 하기가 어렵다. 올이란 실의 굵기이다. 옛날에는 섬유산업이란 것이 없어서 집에서 물레로 직물을 짰다. 그때는 실의 굵기를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실이 굵다가 가늘다가 또는 끊겨 버린다든지 하여, 올이 바르게 된 좋은 옷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올바른 삶이란 `의`를 중심으로 하는 정의의 생활을 말한다. 즉 올이 바른 생활을 하려면 배고파서 밥을 찾듯 목말라 물을 찾듯 진리를 향하여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형편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의를 의식 하면서 살아야 한다.
시대는 변한다. 그러면 그 올도 변하는가? 이 시대에 올바른 길은 어느 쪽인가? 가치관은 어디에 두어야 좋을까? 지금 청소년들의 생각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표준이 되는 올의 길이와 굵기가 있는가? 특히 서양 문화와 철학이 세계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현재는 나이가 든 사람들은 헷갈린다.
올바른 삶을 위한 노력을 우리는 `마음공부`라고 표현할 수 있다. 마음을 위한 공부를 소홀히 한 사람은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지푸라기 의(義)`라고 루터는 말했다. 반대로 공부를 많이 할수록, 자기는 아는 것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올바른 사람이 되는 입문 과정에 와 있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일지라도 더 노력하면 올이 바른,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때 그는 표정을 찡그리지 않고 웃으면서 인생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올이 바른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객관적 입장에 두고, 스스로 관찰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