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그럴 것이지만 오늘까지의 나의 삶을 생각해 보면 긴장의 연속으로서 평온한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종일 허심탄회하게 살아 본 날이 며칠 되지 않은 것 같다. 성인이 된 후에 살아가는 길에는 가야할 방향표시판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매일 고난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나 스스로가 찾아 나서야 했다.
우리는 잘못하여 실수로 고난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는 고의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가끔 있다. 고난은 나의 잘못으로 자업자득으로 내가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때로는 피치 못하여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이때 사람들은 `알면서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단체 기합적인 성격의 고난도 있다. 아버지가 죄를 지어서 생활이 곤궁하다면 그 잘못으로 가족들이 고생할 수 있다. 군대에서는 한 사람의 잘못으로 부대 전원이 기합을 받기도 한다.
때로는 내 잘못이 아니라도 이유 없이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 이웃에서 일어난 불이 나의 집을 덮치는 경우 등이다. 이때 우리는 이유도 모르게 아무 죄도 없는데 애매하게 당했다고 원망을 한다. 단지 이상할 따름이다.
대속적인 고난도 있다. 어미가 자식의 미래를 위해 키우는 과정에서 받는 고난이다. 이러한 고난을 우리는 `희생한다`라고 표현한다. 나의 잘못은 없지만 나를 위한 부모의 가없는 고생이다.
예수가 당한 고난도 일종의 희생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죽는 과정을 통해 전체 인류를 살리려는 것으로서 이런 고난은 일종의 신비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고난의 이유를 `사랑`때문이라 한다.
통제력을 벗어난 고난도 많다. 이것이 일어나면 우리는 위기를 경험한다. 이것들에는 질병, 실패, 자녀 문제, 부도, 배신, 가정문제 등이 있고, 이때 우리는 절망, 좌절, 비난, 분노, 부정, 원망 등을 한다. 이것은 인생의 독이 된다. 그러나 이때 내가 살아온 삶을 슬퍼하지 않고 수긍하여 받아들이면 놀라운 힘이 생기는 변화가 온다. 마음이 평정해 진다.
고난을 잘만 이용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단련시킬 수가 있다. 고난을 받아들이면 그 결과로 어떤 형태이든지 변화를 가져와서 인간을 깨우치게 한다. 키가 커지듯이 이로써 정신 수준을 높일 수 있다.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모두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정신력을 키워 왔다.
그러나 풍부나 출세 등으로 인생을 누리기만 하는 생활이 되면 고난은 그곳을 피해 버린다. 때문에 거기서는 깨우침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델라는 토호의 아들로서 변호사로 귀하게 살 수 있었지만 자기를 독립운동에 던져 버렸다. 풍부와는 정 반대의 위치로 이동했다. 그래서 그는 국가의 독립을 가져오는 장엄한 일을 해 내었다.
세상에서는 출세를 하거나 돈을 많이 벌었다면 그를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귀란 그냥 사회적 물질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일 뿐 성공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노화의 과정 또한 인생을 정리하는데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노화란 “너는 늙어서 이제는 죽음을 앞둔 연약한 존재임으로 정신 차려라”는 것을 신이 늙은이에게 가르치는 방법이다. 이 세상의 가치에 깊이 젖어버린 고령자를 흔들어 일깨우는 충격요법이다.
큰일을 하면 할수록 더 심한 고난을 당하지만 그에 따라 극복의 기쁨도 더 커진다. 극복한 수준만큼 자기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고난의 기회가 줄어들었다. 쉽게 배부르게 먹고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으며 여흥과 유희가 점점 발전했기 때문이다.